194화
<공간 마법(2)>
설마 이런 곳에서 카르안 라데우스의 이름을 다시금 발견할 줄이야!
네르하가 조금 다급해진 어조로 물었다.
“카르안 라데우스가 9레벨에 이르렀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였나?”
대마법사라 해도 세간에선 8레벨과 9레벨을 동시에 말하는 만큼, 구별은 확실히 해야 했다.
하지만 케레스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아니, 그는 라데우스의 긴 역사 속에서도 손에 꼽히는 괴짜였다. 공간 계열 마법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지.
“응? 그럼 내게 추천하는 마법이 뭐지?”
―카르안 라데우스가 자신의 육체를 단련하기 위해 사용했던 술식이다.
“……?”
네르하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마법사’가 육체를 단련하기 위한 술식을, 공간 계열의 수련이 필요한 자에게 추천한다고?
네르하는 화를 내기 전에 먼저 그 술식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따져보기로 했다.
케레스가 말을 이었다.
―카르안 라데우스는 약 800년 전의 인물로, 라데우스 혈족 중에서도 특이하게 마검사의 길을 추구했던 자다.
“……!”
―그가 일군 마법의 경지는 8레벨에 이르렀고, 검술의 경지 역시 당대에 소드 마스터라 불릴 정도로 고절했다고 하지.
“저, 정말이냐?”
카르안 라데우스에 대한 네르하의 흥미가 급격하게 치솟았다.
다만 이런 생각도 들었는데, 그가 남긴 논문을 보면 그는 분명 ‘융합기’의 경지에는 도달하진 못했었다.
‘아니, 모르지. 당시엔 실패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공했을지도.’
어쩌면 네르하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네르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물었다.
“그래서, 그 술식이 뭔데?”
―허수 공간의 개방 술식이다.
“……뭐라고?”
―말 그대로 허수 공간의 문을 안정적으로 여는 술식이라고 했다.
공간 계열에서 말하는 공간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다.
아공간과 허수 공간.
아공간이란 시전자 개인이 창조한 공간을 말한다. 보통은 장비를 수납하는 데 사용되지만, 그 수준이 높아지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허수 공간은 허수 차원이라는 말로도 불리며, 태초에 창조신이 세계를 창조하고 남은 찌꺼기들이 모여 있는 세계의 이면을 말한다.
그리고 네르하가 원하는 공간 이동 계열은, 허수 공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공간 계열의 공용 마법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좌표 지정, 허수 공간 개방, 육체 보호, 실제 이동의 네 가지 요소는 갖추고 있으리라 본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공간 이동 술식의 대표적인 4가지 요소였다.
―이중 공간 계열 마법을 단련한다고 친다면, 가장 중요한 건 직접적으로 공간을 다루는 허수 공간의 개방이다.
좌표의 지정이나 육체의 보호, 실제적 이동은 오로지 부가적인 요소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허수 공간의 개방만으로는 공간 계열 전체에 대한 단련이 힘들다만?”
―그러면 네 가지 요소를 전부 갖춘 공간 계열의 고유 계통 술식을 던져줄 테니 잘 익혀보든가.
“…….”
아니, 이 새끼가?
난이도도 난이도지만, 고유 계통 술식들의 단점은 하나같이 시전에는 시전자가 각성한 ‘고유성질’의 마나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고유 성질의 마나가 없어도 시전이 가능하지만, 하나같이 불안정하기 짝이 없어서 있으나 마나였다.
구겨진 네르하의 표정을 바라본 케레스가 말을 이었다.
―카르안 라데우스가 개발한 허수 공간 게이트는 나름 특별하다.
“뭐가 특별한데?”
―카르안 라데우스가 연결한 허수 공간은, 드물게도 허수 공간에서도 ‘안전함’이 입증된 장소다.
허수 공간의 다른 이름은 신의 쓰레기장.
이 세상 모든 차원과 공간과 시간이 얽혀 있는, 그야말로 무엇이 존재할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였다.
그런데 그 안에서 안전함을 입증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건…….
‘그게 뭐?’
네르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수 공간에서 안전하다고 뭐 쓸모가 있나?
물론 일시적인 도피처나 도망용으로 쓸 수는 있다고 해도, 애초에 허수 공간은 ‘시간 개념’마저 뒤섞인 곳이다.
그리고 썩어도 공간 마법인 만큼, 시전 자체에 시간이 걸려 도망용으로 쓰려고 해도 영 쓸모가 없다.
―카르안 라데우스는 그런 식으로 발견한 허수 공간을 현실과 연결해 시간을 고정한 다음, 허수 공간의 차원 압력을 이용해 자신의 육체를 강화했다.
“…….”
‘시간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쳐도, 지금 뭐라고?
그리고, 지금까지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이자카르가 나지막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미친놈이 따로 없군. 마족 중에서도 그런 또라이는 본 적이 없었는데.
마왕에게 또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면 대체 카르안 라데우스는 뭐하는 놈이었을까.
놀란 건 네르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생의 네르하라면 그러려니 하며 넘겼겠지만, 마법 물(?)을 한참 먹은 지금의 네르하라면 그야말로 경악이 절로 나올 소리였다.
―카르안 라데우스는 그런 의도로 술식을 개발했지만, 내가 보기엔 적어도 공간 계열의 기초 정도는 닦을 수 있을 거라 보는군.
이건 엄밀히 말하면 온전한 공간 계열의 마법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그렇기에 케레스 역시 임페리얼 아카이브가 아닌 실베리오 아카이브에서 술식을 꺼내든 것이었고.
“으음…….”
―이게 싫다면 직접 술식들을 검토할 수 있도록 배려해줄 수 있다.
네르하는 고민했다.
원래라면 그 말을 받아들여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지만, 문제는 녀석의 말에 의하면 하나를 제외하면 죄다 고유 계통이 필요한 술식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렇기에 네르하의 선택지는 지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걸로 하지.”
네르하는 결국 카르안 라데우스의 ‘허수 공간 게이트’ 술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 * *
허수 공간에 마왕조차도 뛰어넘는 불가해의 괴물들이 존재한다는 건 마법계에 알려진 괴담이지만, 라데우스의 기록을 살펴보면 사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허수 공간 내 안전지대를 확보했다는 건 충분히 업적이라 불릴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차원 압력을 이용해 육체를 단련해? 보통 미친놈이 아니야. 게이트를 열더라도 그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절대 하지 마라.
“차원 압력이 그렇게 위험한가?”
네르하의 반문에 이자카르는 당연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하지! 내가 너에게 건넨 공간 이동 술식에 종속된 ‘보호’에 관한 술식도, 인간들 기준에선 충분히 9레벨이라 불릴 수 있는 수준이다!
이자카르는 그야말로 불을 내뿜을 듯한 기세로 네르하를 다그쳤다.
―그 술식조차 허수 공간의 차원 압력을 버티는 덴 고작 10여 초가 한계야! 원초의 혼돈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걸맞을 정도로 위험한 게 바로 차원 압력이다!
그 말에 네르하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하지만 카르안 라데우스는 실제로 그걸 실현해서 육체를 단련했다고 하지.”
―그, 그건…….
“아, 물론 네 말대로, 차원 압력을 버티려면 네 본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에 딱히 반박할 생각은 없어.”
―그러면?
“내가 얻은 이 술식과는 별개로 카르안 라데우스는 차원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모종의 방법을 별개로 얻었다고 봐야겠지.”
현재 네르하가 얻은 술식은 어디까지나 공간 계열 마법의 단련이지.
카르안 라데우스처럼 그 안으로 뛰어들어 육체를 강화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방법이 뭔지 알기 전까진 나도 굳이 모험을 할 생각은 없어.”
그 말에 이자카르가 반색했다.
―잘 생각했다! 네놈이 허수 공간에서 뒈져버리면 나도 같이 죽는 거야! 그래선 저어어얼대로 안 되지! 암!
뭐,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간 반드시 시도해볼 일이긴 했다.
카르안 라데우스가 어떤 식으로 육체 강화를 시도했는지, 그리고 그 성공 여부에 대해선 무인으로서 궁금증이 머리끝까지 도질 정도였으니까.
기뻐하는 이자카르를 뒤로 하고, 네르하는 머릿속에 각인된 술식을 음미했다.
‘나쁘지 않아. 내가 원했던 부분은 대부분 있다.’
이자카르의 술식에선 이해할 수 없었던 고유명사와 고유개념 등이, 카르안 라데우스의 이론과 비교하자 어느 정도 풀이가 되고 있다.
물론 완전한 해석을 위해선 골방에 틀어박혀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가야 하겠지만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일.
적어도 이번 헤르메스에서 원했던 소기의 목적은 전부 달성했다고 볼 수 있었다.
네르하는 그란시스 마탑이 마련한 ‘탑주’의 집무실에서 기지개를 쭉 켰다.
“좋아, 이제 쳐낼 건 케프렌의 일 뿐인가?”
사실 그란시스 마탑과 루리엔 시를 손에 넣은 시점에서, 네르하는 이렇게 노닥거릴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도시를 손에 넣은 시점에서 자치법령을 손보거나 세금 및 재정 상태를 확인하고, 대대적인 세력 재편 과정을 도모해야만 했다.
도시 곳곳에 뻗은 마하의 잔재를 벗겨내기 위해선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일이었는데.
……네르하는 이 일을 축하를 위해 찾아온 세이라에게 그대로 떠넘겨버렸다!
가뜩이나 뱀파이어 특유의 성질 덕분에 창백했던 그녀의 피부가, 지금은 완전히 우유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주인님, 아무리 그래도 제게 너무 과한 짐을 지우시는 거 아닌가요?”
가뜩이나 정보 조직 미네르바의 관리는 물론 그렌 타운의 일까지 신경 써야 하는 세이라의 입장에선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주인님께서도 이참에 조직 운영에 대한 공부를 좀 해보시죠?”
감히 명령을 거부하는 부하를 향해, 네르하가 엄격하게 말했다.
“세이라. 잘 들어. 영웅은 공부 따윈 하지 않는다.”
“…….”
네르하는 그때 처음으로 사람이 눈빛으로 욕설을 내뱉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 * *
케프렌으로 가야 하는 네르하는 원래라면 루리엔 시에서 노닥거리면서 라데우스의 사절단을 기다리면 되었다.
지금 와서 또다시 리브라에 왔다 갔다 하는 건 시간이 촉박했고, 카이젤은 루리엔 시로 사절단을 보낼 테니 그들과 합류해서 케프렌으로 가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 사절단이 루리엔 시에 도착하기까지 앞으로 일주일.
그 시간 동안은 그야말로 꿀과 같은 휴일이 자신을 맞이하리라 생각한 네르하였지만.
“네, 네르하 공자님. 지원 요청이 왔습니다.”
“뭐? 지원 요청?”
“남부 전선에서 온 요청입니다. 그라이아나 산맥 부근에서 남부 방어군 사령관 셀로미엔 엘마이넨 님께서 마탑에 지원 요청을 하셨습니다.”
‘끄응, 하필 지금?’
원래라면 루리엔 시의 시장이나 마탑의 마스터들이 처리해야 할 문제였지만, 지금은 이 도시의 최고 명령권자인 네르하가 존재하는 만큼 여기까지 보고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셀로미엔 엘마이넨.
분명 들어본 기억이 있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아, 삼마자 후보인 그 엘프!’
류레이아가 특별히 자신에게 부탁한다고 한 엘븐 포레스트의 경비대장!
분명 삼마자의 자리에 오르기엔 아직 경험과 실력이 모자라 이런 식으로 바깥을 돌고 있다고 듣긴 했다.
이 시점에서 지원 요청이 온 이유는 하나뿐.
“대수림의 마수들 때문인가?”
“네, 바로 그렇습니다!”
네르하는 속으로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수마왕이란 놈은 케프렌의 영역으로 간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원래라면 굳이 지원까지 보낼 필요는 없는 문제였다.
적의 이동 경로를 알고 있는 이상, 그냥 적당히 방어선을 좁히고 굳히기에 들어가면 되는 문제였다.
문제는 지금 현장에서 뛰는 자들이 그 사실을 알 리가 만무하다는 점이었지만.
“그래서? 피해가 어느 정도이길래 여기까지 지원 요청이 들어온 거지?”
가볍게 물었지만, 그 답변은 아주 무겁게 돌아왔다.
“남부 방어군의 절반이 궤멸하고, 사령관 셀로미엔 님은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