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케프렌 (3)>
진법과 마법진은 비슷하지만 여러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사람의 감각에 혼란을 준다는 목적성에선 동일하지만, 설치 방법, 구동 원리, 전개 방식 등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두 가지는 완벽하게 달랐다.
‘진법이라면 마법진이 애초에 존재할 리가 없지!’
마법진이 마력이란 촉매를 통해 인위적으로 법칙을 가공한다면, 진법은 세계 본연의 법칙을 약간 뒤트는 것에 그친다.
요리에 비유한다면, 마법진이 스튜를 끓이는 방법이라면 진법은 육수를 내는 방법이라고 할까?
그렇기에 물리적인 함정을 섞어 넣지 않는 이상 진법은 마법진에 비해 살상력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고, 위력 역시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제, 젠장! 핵을 찾을 수가 없어!”
“대체 케프렌 놈들이 무슨 짓을 한 거야?!”
네르하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반응에 확신했다.
‘역시, 이들도 진법은 처음 겪어보는 모양이야.’
이전에도 케프렌이 진법을 활용해왔다면,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네르하는 혹시나 싶어 옆에 있던 루시아에게 확인 사살을 해보았다.
“케프렌이 이런 식의 술수를 사용한 적이 있나?”
루시아 역시 이런 일은 처음인 듯,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저, 절대 아니에요. 이런 식의 환영 마법을 펼친 건 저도 생전 처음 봅니다.”
“그럼 예전엔 어떤 방식으로 사절들을 환영했지?”
“수하들끼리 가볍게 실력을 겨룬다거나, 수천 명의 기사가 도열해 압박을 주거나 하는 식이었죠.”
“그렇군.”
점점 더 천마, 정확히는 중원 무림과의 관계성이 의심되고 있다.
네르하는 점점 기묘하게 변해가는 주변의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살상진은 절대 아니야. 미로진의 일종에 가깝군.’
우리를 골탕 먹이려는 의도가 명백한 상황.
생각을 정리한 네르하는 그대로 지렌을 불렀다.
“장로님, 이건 마법이 아닙니다!”
“뭐, 뭐라고!?”
“이건 주변의 환경을 인위적으로 뒤튼 ‘정령진’의 일종입니다.”
“저, 정령진이라고!?”
정확한 표현은 아니었지만, 마법처럼 가공하는 것이 아닌 본래의 법칙을 약간만 뒤튼다는 점에서 오히려 정령진에 가까웠다.
그 말에 지렌이 불같이 분노했다.
“이것들이 단단히 미쳤군. 정령진이라면 힘으로 깨버리거나 술자를 죽여야만 풀리지 않나?”
네르하가 지렌의 착각을 정정했다.
“아, 말이 정령진이지 진짜 정령을 불러 설치한 게 아닙니다.”
“그럼?”
“팔괘(八卦)…… 아니, 자연계에 존재하는 순수한 엘리멘탈의 영역을 조합해 조금 복잡하게 꼬아 만든 겁니다.”
지렌 역시 7레벨 후반대의 마법사. 네르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번에 이해했다.
“순수한 엘리멘탈? 그렇군. 인위적인 신기루와 비슷한 것이군.”
“바로 보셨습니다.”
“확실히 그건 마법보단 기술의 영역에 가깝긴 하지. 하나 이런 식으로 고도의 작업을 벌일 놈이 케프렌에 존재했던가?”
그것까진 네르하가 답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하여튼 바뀌는 건 없군. 술자를 죽이거나, 힘으로 깨거나. 그도 아니면 올바른 길을 찾는 수밖에.”
지렌은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정확히 꿰뚫어냈다.
“사람들을 모아라! 흩어지게 두지 마라!”
“장로님의 지시다! 모두 뭉쳐!”
혼비백산하던 라데우스의 사절단들이 지렌의 외침에 호응해 일제히 모이기 시작했다.
다들 하나같이 정예 마법사들인지라, 모이는 것 자체는 쉬웠다.
“문제는 길을 찾는 건데.”
“화력으로 뚫지 않으실 겁니까?”
한 수행원이 그렇게 묻자 지렌이 불같이 화를 냈다.
“이건 살상용이 아니지 않나! 물리력을 가진 결계가 아닌데다, 여긴 도시 한가운데다! 그런데 마법을 난사하면 어떻게 될 것 같냐?!”
저레벨의 마법이라면 몰라도, 6레벨 이상의 광역기를 하나라도 퍼부었다간 100%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할 거다.
그렇게 되면 케프렌 측에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흥! 멍청한 놈.”
멍청한 부하를 면박 준 지렌이 네르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것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너다. 어떻게, 방법이 있을 것 같으냐?”
네르하의 능력에 대한 지렌의 신뢰는 엄청났다.
마하라는 거목이 버티고 있는 상황인데도, 굳이 후계 경쟁에서 네르하의 손을 들어줄 만큼.
“깨는 건 간단합니다.”
“오오? 그래?”
“문제는 상대의 의도가 시간 벌이인 것 같은데, 이걸 상대의 의도대로 해줄지가 문제로군요.”
“시간 벌이라고?”
“네, 애초에 이 진법 자체가 시간을 벌 생각으로 만들어진 거니까요.”
지렌이 말한 대로, 이것은 살상진이 아닌 지연진이다.
다만, 평소와는 다르게 왜 케프렌은 지금 시점에서 시간 벌이용 진법을 사용했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하루든 반나절이든, 우리의 발을 잠깐 묶어야 할 일이 케프렌 측에 생긴 것이죠.”
“그쪽에 뭔가 이상이 생겼다는 거냐?”
“설마하니 성인식 준비가 덜 된 건 아닐 테고, 그들 내부에서 무언가 사정이 생겼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죠.”
“사정이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바로 파훼해보겠습니다.”
꼭 진법을 설치했다고 이렇게 추측한 것은 아니다.
검백, 벨란 케프란 같은 존재가 일부러 이런 거대도시 외곽까지 나와 맞이한 순간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긴 했다.
그리고 마치 대놓고 시간을 끌려는 듯, 잡담을 이어나가며 느릿느릿하게 이동한 것 역시 의혹을 더했다.
“훗, 어떻게 하긴?”
처음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다는 듯 지렌이 코웃음을 쳤다.
“언제부터 우리 라데우스가 케프렌 놈들의 의도대로 놀아났더냐?”
“확실히 그렇군요.”
네르하 역시 지렌과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뭐, 대외적으로 복잡한 상황인 만큼 사정을 헤아려 줄 수도 있겠지만, 두 가문 사이에 그런 물렁한 태도는 되려 잡아먹히기 딱 좋을 뿐이었다.
“그럼, 절 따라오시지요.”
네르하는 말에서 내려 일행의 선두에 섰다.
‘진법 자체는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다. 진법에 대한 지식이나 정답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나 어렵지, 내게는… 그저 방향표가 달려 있는 미로일 뿐이야.’
네르하는 진법의 흐름을 계산해 팔괘에 그대로 대입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나아갔다.
‘확실히 단순해. 큰 변수 없이 후천팔괘가 신체의 흐름을 대신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구조로군.’
하늘과 머리를 뜻하는 건(乾)괘.
눈을 뜻하는 리(離).
입을 뜻하는 태(兌).
‘함정은 감괘와 손괘. 여길 잘못 들어가면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정공법으로 무식하게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이동했다간, 하루 정도는 가볍게 소모하는 지연진이었다.
하지만 정답을 아는 네르하로선 하루는커녕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길이었다.
그렇게 머리를 내려와.
‘마지막 진(震).’
뚝!
네르하가 진법의 출구에 발을 내딛자마자.
“허, 허억!”
저 앞에서 누군가가 숨을 크게 내뱉는 것과 동시에 진법이 풀렸다.
“이, 이럴 수가!”
“대, 대공자의 환영진을 벌써 파훼했다고!?”
웅성웅성!
진법이 풀리자, 저 앞엔 아까 전에 있었던 기사단 수백 명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검백 벨란 케프렌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네르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르하가 벨란을 향해 소리쳤다.
“장난은 슬슬 끝나신 듯한데, 이제 저희를 케프렌의 가주님께 데려다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 그러지.”
벨란 역시 한동안 침묵할 정도로 경악했지만, 수양이 깊은 자답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따라오시지요. 연회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벨란은 굳은 표정으로 신형을 돌렸다.
“잘했다.”
그런 벨란의 등을 바라보던 지렌이 입가에 웃음을 내걸며 네르하의 등을 툭 쳤다.
“크흐흣! 케프렌 놈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언제 봐도 즐겁구나.”
“감사합니다, 장로님.”
“하지만 여전히 궁금하군. 바로 연회장으로 안내한 걸 보면, 네 말마따나 분명 준비가 덜 끝난 건 아닐 터인데.”
“그건…….”
네르하가 차가운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말했다.
“이제 곧 알게 되겠지요.”
* * *
네르하는 로엘 소드의 중심부, 케프렌의 혈족들이 기거하는 검의 성지에 발을 내디뎠다.
‘검의 성지 아니랄까 봐, 주변에 온통 검이 꽂혀 있군.’
꽤나 특이한 광경이었다.
저 안쪽에 있는 신전과도 같은 거대한 건물 앞마당에, 일정한 규척도, 규격도 없는 무수한 검들이 이리저리 바닥에 박혀 있었던 것이었다.
네르하가 주변 검들에 관심을 가지자, 대번에 벨란이 엄중하게 경고해 왔다.
“그 검들은 과거 케프렌 혈족들의 위업을 상징하는 것. 만에 하나라도 건드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
“그저 처음 보는 풍경이 신기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사전에 듣기로는 케프렌을 위해 업적이라 불릴 만한 공을 세워야 이곳에 검을 꽂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 무인으로서 이해는 하지만 그렇게 좋게 보이진 않았다.
‘여긴, 무덤이다.’
감각에 예민한 네르하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꽂혀 있는 게 단순히 검만이 아니라는 걸.
‘상당히 을씨년스럽군. 망자를 기릴 생각이면 하다못해 꽃밭이라도 가꿔놨으면 더 괜찮을 텐데 말이야.’
사령술을 연마한 흑마법사들이 보면, 그야말로 군침을 흘렸을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검의 성지 앞마당에 대한 대략적인 감상을 뒤로하고, 네르하는 진정한 케프렌의 중추. 가주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라데우스의 사절단을 맞이한 건 가주인 마기우스가 아니었다.
“사전에 공지한 대로, 가주님께선 지금 자리를 비우셨소. 그렇기에 내가 그대들을 맞이하러 왔소이다.”
가주전의 상석에 모습을 내보인 건, 긴 백발을 휘날리는 노년의 기사였다.
그 모습은 너무나 왜소했고, 얼굴의 주름을 보면 나이 8~90은 가볍게 넘은 것 같았다.
하지만.
“라이먼 엘 케프렌.”
지렌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흥, 그래도 케프렌의 전설이 날 맞아주다니,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구려.”
“그리 여겨주니 고맙군.”
원탁의 기사, 제1석이자 문자 그대로 케프렌의 살아 있는 전설.
마기우스의 등장 이전, 대륙 최강의 기사라 불리던 존재였다.
네르하는 라이먼 엘 케프렌의 옆에 서 있는 자를 보았다.
‘저자도 있었군.’
루리엔 시에서 루시아를 습격한 괴인, 라실론 엘 케프렌.
케프렌 기사단의 총사범이라는 지위인 만큼, 저자가 이곳에 있어도 전혀 이상할 건 없을 거다.
다만 조금 이상한 건…….
‘그나저나, 이 피냄새는 뭐지?’
네르하는 코끝을 자극하는 비릿한 혈향에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이곳은 가주전.
케프렌 내에서도 가장 보안과 경계가 철저한 장소다.
그런 장소에 피냄새가 진동한다는 건, 이유는 오직 하나.
지렌 역시 그걸 인지하고 있는지, 중앙에 앉아 있는 라이먼을 향해 묘한 비웃음으로 이죽거렸다.
“꽤나 일을 치르신 듯하구려.”
대번에 라이먼 주변에 있는 케프렌 중역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면목이 없군. 불쾌한 경험을 하게 해서 사과드리오.”
라이먼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지금껏 라데우스 사절단 뒤에서 조용히 있던 루시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입니까?”
“…….”
“…….”
많은 이들이, 루시아의 존재를 알아차리곤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이먼을 노려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누가, 반란을 일으킨 겁니까?”
한동안 루시아를 노려본 라이먼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원래라면 이 자리에서 넌 입을 열 자격도, 대답을 들을 자격도 없다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특별히 대답해주마.”
“…….”
“삼공자 테바라 엘 케프렌.”
“……!”
“그리고, 칠공녀… 아네시스 엘 케프렌이 이번 일에 연루되어 있다.”
그 순간, 루시아의 입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