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케프렌 (4)>
네르하는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가문의 가주가 거주하는 곳을 살피는 건, 그 가문의 위상을 알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원래라면 가주 마기우스를 중심으로 대륙 전역에 명성을 떨치는 기사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기사들의 수가 터무니없이 적군.’
네르하의 시야에 들어온 기사들의 수는 고작해야 오십 남짓.
당장 라데우스만 해도 카이젤이 옥좌에 앉으면 항상 못해도 수백에 이르는 가신들이 자리를 잡곤 했다.
설사 대부인 시엘이 가주 대행을 맡을 때도, 가주전의 자리를 메우는 인원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이 대륙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는 가문의 격이란, 바로 그 정도인 것이다.
물론 지금 있는 이들 하나하나가, 이 대가문의 중역에 어울리는 실력자들이라는 건 분명하다.
‘문제는 저들의 밑에 있어야 할 실무진들이 전부 자리를 비웠다는 건데…….’
그 의문은 이어진 루시아가 본격적으로 나섬에 따라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아, 아녜스가…… 반란을 일으켰다고요?”
“그렇다.”
“말도 안 됩니다!”
루시아는 그럴 리가 없다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네르하 역시 내심으론 그녀가 뭔가 억울한 누명을 썼을 거라 짐작했다.
“그 아이는 계승 서열 7위입니다! 더군다나 그 아이가 권좌에 관심이 없다는 건 여러분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라이먼은 단호했다.
“네가 억지를 부려도 이미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루시엘라가 뭐라 항변하기도 전에, 라이먼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루시엘라 엘 케프렌. 이제 방황은 그만두고 가문으로 복귀해 케프렌의 혈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라.”
“……!”
“이번 사건으로 단장을 잃은 기사단이 있지. 그걸 네게 붙여줄 테니 천천히 복귀 절차를 밟도록.”
케프렌에서 기사단장의 자리란 지극히 영광스러우며, 적어도 검왕의 경지에 근접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기사단장의 자리를 맡을 수가 없었다.
그런 루시아에게 단장의 자리를 냉큼 내놓은 라이먼의 안목은 감탄스러웠지만.
“까드득!”
그와는 별개로 루시아의 분노를 제대로 지폈다는 점에서 융통성이 참 없는 노인네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자, 잠깐? 케프렌의 혈족이라고?”
“루, 루시엘라 엘 케프렌? 설마 그 유명한 케프렌의 1공녀?!”
“분명 네르하 공자 휘하에 있지 않았던가?”
난데없이 루시아의 정체가 까발려지자,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하던 아군 측에서 경악이 흘러나왔다.
사실 루시아의 정체를 아는 이는 지렌을 비롯해 사절단 전체를 통틀어서도 다섯 명을 넘지 못했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뜬금없는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자 지렌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허허허…….”
그의 표정은 아무리 포장해도 썩 좋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지렌이 불쾌감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원탁 제1석의 기사라 해도, 귀 가문의 전대 가주와 본가의 전대 원로가 맺은 협정을 멋대로 깨는 건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구려.”
본가의 전대 원로란 리브라의 학장 루트비히 라데우스를 뜻하는 말이었다.
지렌이 라이먼을 노려보았다.
“루시엘라. 아니, 루시아 스플릿하트는 본가 직속 교육기관 리브라의 생도.”
“본가의 선대 가주께선 이미 돌아가셨소.”
“엄연히 우리의 관리하에 있어야 할…… 뭐, 뭣이?!”
“……?!”
지렌은 물론이고, 네르하나 루시아조차도 라이먼이 가볍게 내뱉은 한마디에 입을 쩍 벌렸다.
가벼운 발언에 비해, 너무나도 무거운 내용이었다.
“지, 지, 지금…… 뭐라고 하셨소?”
“선대 가주께선 이미 돌아가셨다고 했소.”
“그, 그걸, 지금 말이라고?”
선대 가주 정도 되는 인물이 죽었는데, 타 가문에 아무런 통보도, 안내도 없이 이런 타이밍에 뜬금없이 말을 내뱉는다는 건 절대로 예의가 아니었다.
사절단 모두가 말을 잊고 있을 때, 라이먼이 심드렁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선대 가주께서 돌아가셨으니 협정의 당사자와 책임이행자는 본가의 현 가주로 이양되었지. 그리고 현 가주가 루시엘라의 복귀를 명했으니, 라데우스는 그걸 막을 권한이 없소.”
“…….”
지렌은 뭐라도 말을 하려 했다. 여기서 루시아를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내준다는 건 큰 손해라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아무리 계책을 짜내려고 해도, 적진에서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건덕지가 나오질 않았다.
“루시엘라를 데려가라.”
그렇게 결국, 루시아는 사절단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분노에 가득 차 치를 떠는 지렌을 향해, 라이먼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대공자의 성인식은 3일 후에 열리오. 그리고 대공자의 소가주 임명식도 성인식과 함께 진행될 것이니, 부디 그때가 올 때까지 이곳에서 편히 지내주셨으면 좋겠소.”
“……오늘의 폭거는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오.”
“폭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감이구려.”
홱!
지렌이 난폭하게 신형을 돌림으로써 라데우스와 케프렌 간의 첫 대면이 끝났다.
* * *
그렇게 라데우스의 사절단이 귀빈실로 향한 뒤.
지금까지 느긋함을 고수하던 라이먼의 표정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후우, 빌어먹을. 그나마 라데우스 놈들이 오기 전에 상황을 수습해서 다행이군.”
라이먼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옆에서 검백 벨란 케프렌이 그를 다독였다.
“대공(大公)의 대처는 완벽하셨습니다. 설마하니 그 환영진을 30분 만에 파훼할 줄은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우리가 처음 도전했을 땐 30분은커녕 한나절을 전부 소모했는데 말이죠.”
라이먼 역시 주변의 말에 공감했다.
“대공자의 말로는 분명 계통이 달라 오래 걸릴 것이라던데, 그 말이 빗나갔군.”
“뭐가 됐든 다행입니다. 가문의 거대한 오점을 라데우스 놈들에게 보이는 치욕은 막아냈으니까요.”
삼공자, 테바라 엘 케프렌의 급격한 반란은 케프렌 수뇌부를 혼란에 빠트리기엔 충분한 대사건이었다.
라데우스의 사절단이 이곳에 오고 있는 와중, 가주는 물론 대공자까지 잠시 자리를 비운 공백의 때.
그때를 정확하게 노린 테바라의 쿠데타는 분명 시의적절하고 치명적이었다 평가할 수 있었지만.
대륙 최강의 검가 케프렌의 저력은, 그들의 직계 구성원들이 예측한 것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분위기가 가라앉을 무렵, 누군가가 다른 부분에서 우려를 보냈다.
“그나저나, 괜찮을까요? 선대 가주님의 일을 이런 식으로 터트리는 건.”
그 말에 대번에 다른 이들이 동의했다.
“맞습니다. 분명 크나큰 외교적 결례이고, 라데우스는 반드시 이 일을 물고 늘어질 겁니다.”
주변에서 우려가 많았지만, 라이먼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 일은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 대공자가 차후 가주가 되면 그가 책임질 문제일 뿐.”
“…….”
“그러니 선대의 일은 더 이상 입에 담지 마라.”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예, 대공!”
“테바라의 반란이 끝난 지금, 가주와 대공자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문제는…… 루시엘라다.”
“으음!”
주변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가문을 뛰쳐나갔다고는 해도, 그들에게 있어 루시엘라는 특별했다.
“대공.”
그때, 라실론이 나지막하게 라이먼을 불렀다.
“대공께선 루시엘라가 라데우스의 힘을 빌렸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 아이가 그럴 아이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한 것뿐이다. 라실론 너는 테바라가 반란을 일으킬지 예상이나 해보았느냐?”
라이먼의 반문에 라실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독하게 마음을 먹은 라이먼이 주변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그 아이의 옷과 장비를 철저히 압수해! 라데우스와 연관이 될 만한 모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해라! 마법적 처치가 있는지, 추적 마법이 걸려있는지 무조건적으로 확인하도록!”
“네! 대공!”
“가주와 대공자가 돌아오기까지 3일! 그때까진 이제 앞으로 그 어떤 사고도 없어야 한다!”
* * *
숙소를 배정받은 네르하는 시종들이 짐을 풀고 정리는 모습을 멍하니 구경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럴지언정 속마음은 내심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아녜스가 뜬금없이 반란에 연루된 것도 그렇고, 케프렌의 전대 가주가 급사한 것도 그렇고. 그러면서도 라데우스나 다른 가문에 부고 소식을 전하지도 않았다?’
뭔가 냄새가 났다.
그것도 아주 구린 냄새가.
그렇게 네르하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네르하의 방으로 지렌이 찾아왔다.
“네르하야.”
“아, 장로님. 어째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당연히 볼일이 있으니 왔지.”
“부르셨으면 제가 달려갔을 텐데요.”
“큭큭, 마음에도 없는 소릴.”
가볍게 웃은 지렌의 얼굴엔, 아까 전 굴욕에 떨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맞은편 쇼파에 거칠게 등을 기댄 지렌이 네르하에게 물었다.
“아까 전의 일, 너는 어떻게 보느냐?”
그 일이란 라이먼을 비롯한 케프렌 수뇌부들과의 만남을 의미했다.
그 물음에 네르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너무 엉성해서 뭐라 말을 드리기가 힘들군요.”
“크흐흐, 그렇지?”
지렌은 염동력을 이용해 가볍게 술병의 마개를 땄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 내용물을 채워 넣으며 말했다.
“그 케프렌이 이런 식으로 일을 허술하게 처리하는 건 생전 처음 본다. 차라리 우리를 향한 함정이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일 정도야.”
“갑작스런 사건에 대한 대응이야 허술할 수 있지만, 자기들 가문의 선대까지 언급한 건 분명히 다른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문제는 대체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으니 답답한 것일 뿐.”
“…….”
“너도 짐작가는 게 없다면 어쩔 수 없지. 가주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야겠군.”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지렌을 향해, 네르하가 아주 자그맣게 목소리를 내었다.
“저는, 남은 3일 동안 케프렌의 내부 사정을 한번 조사해보려고 합니다.”
“뭐?!”
지렌의 표정이 크게 굳어졌다.
“무모하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케프렌 본가를 파고드는 건 자살행위야.”
“음, 자신은 있습니다만.”
“또한, 발각될 경우 너 하나의 피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금 상황에서 굳이 케프렌을 파야 하느냐?”
“죄송합니다, 장로님.”
네르하는 지렌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싸늘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전 ‘내 것’을 빼앗기고 그냥 참아야 하는 성격이 되지 못해서요.”
* * *
“자, 잠깐! 그 칼만은 안 돼!”
루시아의 외침에, 시녀가 황송하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공녀님. 죄송합니다만, 다른 건 몰라도 이 칼만큼은 반드시 회수하라는 대공 전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으아아악!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내 파트너를 돌려줘!”
자신의 애검, 그란디아를 시녀에게 빼앗긴 루시아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검을 회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행동은, 말 그대로 ‘헛짓거리’로 끝나고 말았다.
“아, 아아…….”
어느새 널찍한 드레스로 ‘갈아 입혀진’ 그녀는, 허망한 눈으로 고개를 떨궜다.
입고 있던 옷, 걸치고 있던 장비. 사소한 장신구 하나까지.
케프렌은 그야말로 루시아의 몸에 붙은 모든 것을 떼어버렸다.
거기다 그것도 모자라 추적 마법이나 탐색 마법이 걸려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가문의 마법사를 불러 샅샅이 살펴보기도 했다.
‘이 빌어먹을 놈들!’
몇 년 만에 나타난 제1공녀의 귀환인데도, 그야말로 죄인 취급이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