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케프렌의 어둠 (1)>
루시아는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때, 그녀의 귀에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왈가닥인 건 여전하군요.”
루시아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마치 귀부인과도 같은 30대 초중반의 기품있는 여성이 나타나 있었다.
“……유모.”
“오랜만입니다, 루시엘라.”
레이벨 루 케프렌.
케프렌 검의 대공, 라이먼의 딸이자 일찍이 모친을 여읜 루시아를 사실상 키워낸 거나 마찬가지인 여인이었다.
“잘 돌아왔습니다. 그래, 여행 중에 얻은 건 좀 있습니까?”
“뭐, 그럭저럭.”
루시아는 정확한 대답을 회피했다.
상대가 아무리 자신의 가장 강력한 아군이라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대공의 딸.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입장이 뒤바뀔 수 있는 존재였다.
“하아.”
레이벨은 그런 루시아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실력은 몰라도 성격은 전혀 변한 게 없군요.”
유모인 그녀에겐 뻔히 보였다.
지금 그녀의 표정은, 과거에서부터 무수히 보아 왔던 사고를 치기 직전의 악동과도 같은 얼굴이라는 걸.
그녀의 행동력은 가문 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긴 그러니 가출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지.
“아렌의 성인식이 끝날 때까진 이곳을 벗어나지 마시길. 루시엘라, 지금 당신의 위치는 케프렌의 공녀가 아니라, 멋대로 가문을 뛰쳐나간 범죄자에 가깝습니다.”
루시아는 대답 대신 질문을 하나 던졌다.
“테바라는, 정말 죽은 거야?”
“…….”
레이벨의 표정이 굳어졌다.
한동안 말문을 잇지 못하던 그녀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만약 당신이 멋대로 행동했다간, 반대파들이 당신에게 어떤 죄를 뒤집어씌울지 몰라요. 그만큼, 지금 가문 내 분위기는 심각하답니다.”
뚱딴지같은 대답이었지만, 질문에 대한 답으로썬 충분했다.
“알았어, 유모. 한동안은 가만히 있을게.”
“그래요… 그게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이 될 거예요.”
레이벨은 신형을 돌렸다.
“원래라면, 재회의 자리를 축하하는 파티를 열어야 하지만, 그건 조금 나중의 일로 미루도록 하죠.”
그녀는 ‘이따가 다시 찾아올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된 루시아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유모도 변한 게 없네.”
혈통으로 따지면 엄청나지만, 검에 대한 재능이 없어 일찌감치 유모 같은 일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불운한 인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부의 평가일 뿐, 그녀는 자신이 맡은 일을 단 한시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루시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유모.’
그리고 그녀에게 조용히 사과했다.
‘이런 식으로 가만히 있을 거면, 애초에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어.’
물론 루시아는 자신이 말한 대로 ‘한동안’은 가만히 있을 생각이었다.
다만 그 한동안이 어느 정도의 시간일지는 루시아 본인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나저나, 이거 정말 찾아올 수 있는 거 맞아?’
루시아는 자신의 팔을 코에 대며 킁킁거렸다.
네르하는 자신이 가문에 복귀할 경우 애초부터 이런 상황이 될 것을 예측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마법적인 처치가 남아있는지 철저하게 검사당할 것 역시 예상했다.
그렇기에 네르하는 자신의 몸에 ‘마법’이 아닌 ‘기술’의 흔적을 남겨두었다.
그녀는 이미 속옷까지 모조리 새롭게 갈아 입혀지면서, 한차례 목욕까지 깔끔하게 끝마친 상황이었다.
어지간한 향수는 그 잔향조차도 남지 않지만, 네르하는 상당히 자신만만해했다.
‘천리추종향? 그게 대체 뭐길래 그리 자신하는 거지?’
* * *
라데우스 사절단이 도착한 바로 다음 날.
귀빈실을 호위… 라는 명복 하에 감시하던 케프렌의 기사들은 느닷없는 라데우스의 행패에 두통이 이는 걸 느꼈다.
“로엘 소드를, 관광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문제는 그 관광을 요구하는 당사자가, 바로 사절단의 우두머리인 지렌 라데우스였다는 점이었다.
지렌은 자신의 말에 반문하는 기사를 퉁명스럽게 쏘아보았다.
“전혀 무리한 요구가 아닐 텐데?”
“지금껏 라데우스에서 파견 나온 분들이 그런 요구를 한 적은 없었습니다만…….”
“당연히 지금까진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지렌이 눈을 부라렸다.
“지금까지는 그냥 담백하게 자기 용건만 밝히고 떠나거나, 항의할 게 있어서 온 거 아니겠나?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우린 어디까지나 ‘축하’ 사절단일세.”
“크, 크흠!”
“그만큼 나름 관광 기분으로 찾아왔고, 그 목적에 따라 관광을 좀 하겠다는데. 왜? 우리가 뭐 케프렌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첩자질이라고 할 것 같나?”
순간 담당 기사는 ‘당연히 그럴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참아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자신의 목이 달아나리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상부에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귀빈을 너무 오래 내버려 두는 건 실례라는 걸 알아두게. 내 심사가 뒤틀려 자네의 불성실함을 ‘그 상부’에 항의라도 하면 어떻게 하겠나?”
“……!”
순간 담당 기사의 목 위로 온갖 육두문자가 올라왔다.
하지만 과거 임무를 위해 7일 동안 똥오줌을 견뎌냈을 때와 맞먹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진짜 꼬장도 이런 꼬장이 없었다.
“최, 최대한 빠르게 알아보겠습니다.”
“음, 그래.”
사실 케프렌이 대외적으로 혼잡한 만큼, 정말 예의를 따지면 가만히 있어 주는 게 맞다.
처음 귀빈실로 안내했던 이들 역시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가능하면 조용히 지내달라 부탁했었으니까.
하지만 지렌은 절대로 그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약 30분 후. 사절단의 담당 기사가 돌아왔다.
“관광이, 허락되었습니다. 다만 안내자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라주셔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긴 한데… 나야말로 묻고 싶군. 자네야말로 괜찮은가?”
고작 그 30분 만에, 기사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다.
보고를 올린 뒤 대체 얼마나 갈굼을 당했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하, 하하하… 괘, 괜찮습니다.”
“뭐, 괜찮다니 더 묻지 않겠네.”
지렌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천년 도시 로엘 소드의 경치를 느낄 좋은 기회로군. 남을 놈들은 여기서 쉬고 관광에 나설 놈들은 날 따라와라.”
“저요!”
“저도 가고 싶습니다, 장로님!”
그렇게 관광에 나선 이들은 사절단의 약 절반 정도.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차출된 기사들은 무려 2백여 명에 달했다.
그들은 지렌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관광에 나섰는지 불안해하며 호위에 나섰다.
“곧 다른 곳에서 인원 보충이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르니 남은 인원들을 철저히 감시해라.”
“예! 단장!”
남은 기사들은 우렁차게 대답하며 눈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이 성과도 같은 거대한 장소에, 물경 백오십이 넘는 인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예상대로긴 한데…….’
원래라면 라데우스의 사절단이 이렇게 ‘땡깡’을 부리는 걸 가만히 둘 케프렌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대외적으로 혼잡한 데다, ‘축하 사절단’을 괜히 억눌렀다간 어떤 뒷말이 나올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저렇게 많은 호위를 빼서 물샐틈없이 감시하는 것이다.
‘저래서야 제대로 된 관광이 가능할지 모르겠군.’
쓴웃음을 내지은 네르하는 자신의 ‘작전’에 가담해준 지렌을 향해 깊숙이 감사의 마음을 내보였다.
‘그럼, 슬슬 움직여볼까?’
잠형술을 시전한 네르하의 신형이, 서서히 주변 환경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루시아에게 추종향을 발라 놨으니 함정만 조심하면 찾아가기 쉽지.’
루시아 역시 현재 뒤가 없는 상태다.
아무리 가주 마기우스의 허락이 있다고는 하나, 아무런 계책 없이 들이댔다간 주변 상황에 말려 아렌에게 닿기도 전에 자멸할 것이다.
‘부디 조급함에 넘어가지 않기를. 판은 제대로 깔아줄 테니 말이야.’
네르하의 신형이 그대로 사라졌다.
* * *
케프렌에 도착하기 며칠 전.
루시아는 네르하의 손가락에 발린 묘한 액체를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죠?”
“네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향료의 일종이지.”
“……설마 스토커로 전직하신 건가요?”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아직 여유가 있는 것 같군.”
한차례 루시아를 노려본 네르하가 말을 이었다.
“만약 우리가 케프렌에 들어간다면, 별다른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갈라질 가능성이 높다. 아마 넌 유폐까진 아니더라도 뭘 시도해볼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일 거다.”
“그, 건.”
루시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구요?”
“이건 만약을 대비한 거다. 너와 내가 갈라졌을 때, 내가 널 찾아가기 쉽게 하려는 방법이지.”
슥슥!
팔에 발린 천리추종향의 냄새를 살짝 맡은 루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엑, 별로 좋은 향은 아니네요?”
“일반적인 향수처럼 휘발성이 강한 재료를 쓴 게 아니니까. 어차피 향이야 한 번 씻으면 전부 날아가니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흐음, 신기하네.”
루시아는 천리추종향의 냄새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곧바로 나가서 팔을 씻고 돌아왔다.
“그래서, 뭔가 구체적인 계획이라도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네르하는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있을 거 같나?”
“…….”
루시아의 눈에 불이 붙으려던 순간.
네르하가 빠르게 수습을 시도했다.
“우린 지금 케프렌의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계획을 세워봤자 작은 변수 하나면 그대로 무너질 거야.”
“끄응. 그건 확실히, 그렇겠군요.”
루시아는 네르하의 말에 쉽게 수긍해주었다.
“그렇기에 우리의 계획은 상당히 즉흥적일 수밖에 없지. 절대적인 목적만을 설정하고 구체적인 계획은 케프렌 내부 사정을 파악한 뒤에 짜야만 해.”
한없이 불안한 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일단 서로의 목적부터 확실하게 공유하죠.”
루시아는 네르하가 순수한 의미로 도움을 주리라는 걸 믿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도우려는 건 맞지만, 그 와중에 본인의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루시아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알다시피, 내 목적은 ‘케프렌의 전복’이에요. 아렌 루 케프렌을 죽이고, 제가 후계자의 자리를 잇는 거죠.”
“그 과정에 혈육의 피가 얼마나 흘러도 상관하지 않나?”
네르하의 물음에, 그녀의 눈가가 살짝 어두워졌다.
“솔직히, 가능하면 아녜스만큼은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 외의 혈육들에겐… 솔직히 별다른 정은 없네요.”
네르하 역시 동생 네이하를 제외하면, 솔직히 다른 형제들이 죽든 말든 딱히 상관은 없었다.
다만 현 가족과 근본적으로 ‘타인’인 네르하와는 다르게, 루시아의 발언은 꽤나 냉혹한 면이 있긴 했다.
“뭐, 좋아. 그 녀석은 별다른 야심은 없는 듯하니 어지간하면 얽힐 일은 없을 거야.”
이번엔 네르하가 목적을 밝힐 차례였다.
“내 목적은 세 개다.”
무려 세 개라는 말에, 루시아는 살짝 질색했다.
“마, 많기도 하네요.”
따로 목적이 있을 거란 예측은 하긴 했는데, 한두 개도 아니고 무려 세 개나 돼?
네르하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나는 널 도와주는 것. 또 하나는 아그란바드의 의뢰인 케프렌 최심부에 봉인되었다는 마왕 예루리의 조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케프렌이 ‘어떤 한 인물’과 얽혀 있는지를 알아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