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케프렌의 어둠 (2)>
“한 인물이라…….”
루시아가 살짝 침음을 흘렸다.
“예전에도 제게 비슷한 걸 물어본 적이 있었죠. 분명, 초마인이란 자와 가문의 연관성이었던가요?”
“맞아. 너희 가문의 금지된 검술이, 내가 알던 것과 거의 완벽히 똑같았지.”
다만 그 외에 루시아가 알고 있는 다른 금기 검술들은 마교와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 게 흠이었다.
“그렇기에 확인하고 싶다. 그 케프렌의 금역에 직접 들어가서 말이야.”
“어렵군요.”
세 목적 하나하나가 어렵지만, 이 건은 상당히 직관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그 금역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요. 하지만 그곳은 지위에 관계없이 무조건 가주의 허락이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죠.”
“뭔가 특별한 봉인진이나 결계가 있나?”
“있긴 하지만 그리 강력하진 않아요. 결계 자체는 강력한 오러 스킬 몇 번이면 뚫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니겠지?”
“그렇죠…….”
루시아는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마법적’인 것을 배척하는 케프렌은, 보안에 관해선 다른 방향으로 해결했다.
“당신이 원하는 그 금역은 문을 포함한 공간 전체가 거대한 합금으로 형성되어 있어요.”
그 문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적어도 루시아의 생각으론 그랬다.
그 금역을 형성하는 ‘합금의 공간’ 자체가 현시대의 기술로는 재현이 불가능한 성유물의 영역이었으니까.
“아무리 단단해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
“9레벨의 공간계열 마법사나 검신(劍神)의 경지에 이르러 공간단절의 힘을 발휘해야만 문을 뚫을 수 있다고 들었어요.”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군.”
공간참(空間斬)은 중원에서도 검선 여동빈이나 사용했다던 전설로만 여겨지는 경지였다.
네르하의 신속한 태세 변환에 루시아는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정석으로 그 문을 통과하려면 금역의 정문에 ‘특정한 검술’을 새겨야만 해요.”
“검술?”
“네, 그리고 그 검술은 대대로 금역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원탁의 기사’에게만 전해지죠.”
“…….”
“그리고 그 주변을 항상 백여 명에 달하는 가문의 최정예들이 지키고 있어요.”
“미치겠군.”
몰려오는 막막한 느낌에 네르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빈틈을 파고들어 숨어드는 거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겠는데, 이렇게 물리적으로 완전히 막아버리면 판 자체를 뒤집어버리지 않는 이상 답이 없다.
‘이건 나중에 다시 생각해봐야겠군.’
그렇다면 마왕 예루리에 관한 것을 파고들어야 하는데, 이 부분은 반드시 루시아의 협력이 필요했다.
“잘 들어라, 루시아.”
“네.”
“우리에게 기회는 단 한 번이야. 소란을 벌이는 동시에 한 번의 기회에 모든 목적을 이뤄야만 한다. 그러니 너는 케프렌에 돌아간다면 일단은 주변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전력을 다해라.”
“알겠어요.”
“그리고 가능한 빨리 찾아갈 테니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대기하고 있어. 첫 단추는 거기서부터 끼는 것으로 하지.”
* * *
그렇게 현재 시점.
“와, 정말로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요?”
한밤중도 아닌 대낮에.
그것도 주변의 호위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이곳까지 도달했다는 점에서, 네르하의 잠입 역량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뭐, 내가 밤손님으로 영업을 시작했다면 시대의 대도(大盜)가 되었겠지.”
“인정하죠. 여기까지 들키지 않고 온 시점에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요.”
네르하는 루시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일단, 대충 케프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꼴은 알겠군.”
“네, 솔직히 일을 벌이기엔… 쉬워진 걸 부정할 순 없죠.”
“하지만 별개로 다른 쪽으로 변수가 생기긴 했어. 그, 테베라라고 했나?”
“…….”
루시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렌 루 케프렌과 마왕 예루리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왔는데, 하필이면 전혀 관계없는 놈이 얽혀들었어.”
테바라 엘 케프렌.
케프렌 가문의 삼공자이자 바로 얼마 전 자신의 휘하 세력을 이끌고 쿠데타를 시도한 장본인이었다.
루시아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이 때문에 케프렌이 입은 피해가 정말 크다고 했다.
반란의 수괴인 테바라는 물론, 그를 떠받치던 원탁의 기사 하나가 목이 날아갔고, 정예 기사들 수백이 떼로 몰살당했다고 한다.
루시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공이 직접 테바라를 상대하지 않았더라면 더 큰 피해가 났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나마 우리에겐 다행이지. 한바탕 일이 벌어진 탓에, 그 빈틈을 찔러 ‘한 번 더’ 일을 벌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으니까.”
끄덕!
루시아는 그 말 자체에는 동의했다.
“일단 현재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나도 당장 해야 할 일이 뭔지 생각났는데, 어디 맞춰볼까?”
네르하와 루시아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녜스의 신병 확보.”
네르하가 씨익 웃었다.
“역시.”
아녜스, 아네시스 엘 케프렌은 테바라와 함께 반란의 주모자로 낙인이 찍힌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테바라와는 다르게 죽지는 않고 현재 어딘가에 유폐되어 있다고 한다.
“아녜스는 직접적으로 반란에 연루되지 않았어요. 정확히는 그 아이의 휘하 세력이 멋대로 테바라에게 붙은 탓에 상황이 꼬여버린 거예요.”
“흐음.”
네르하는 턱을 쓰다듬었다.
아녜스의 휘하 세력. 그들과는 이전 그렌 타운에서 크루갈을 처치할 때 협력했던 적이 있었다.
아녜스에 대한 충성심도 충성심이거니와, 나름 무인으로서의 기개가 있어 좋게 보던 이들이었는데.
‘그런 이들이 멋대로 폭주했다고? 뭔가 이상한데?’
뭐가 됐든, 일단은 아녜스를 찾고 나서 볼 일이었다.
네르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생전 처음 보는 꽃단장을 한 루시아를 향해 피식 웃었다.
“꽤나 치렁치렁하게 꾸며졌군. 보기 좋은데?”
“……시끄러워요.”
살짝 부끄럽다는 투로 루시아가 마주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부욱 찢어버렸다.
“이러면 움직이는 데 방해는 되지 않겠죠.”
“터프하군.”
확실히 의복 따위로 루시아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제부터 움직이는 건 좋은데, 들키지 않을 자신은 있나? 그리고 아녜스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네르하의 물음에, 루시아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몰라요.”
“……야.”
“하지만 알고 있는 사람은 가까이에 있죠.”
루시아가 문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죠? 유모.”
“…….”
순간, 네르하의 시선이 루시아를 따라갔다.
‘뭐야, 잠입은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딸깍!
문이 열리고, 루시아의 유모 레이벨이 나타났다.
그녀의 수준을 대번에 알아본 네르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기사들보다 딱히 특출나지 않아 보이는데, 날 발견했다고?’
만약 정말 그렇다면 원인은 둘 중 하나다.
저 유모란 자가 무력 외에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 공간 자체가 처음부터 계속해서 감시를 당하고 있었거나.
네르하의 복잡한 속내야 어쨌든, 유모 레이벨은 네르하와 루시아를 번갈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녀의 심정은 상당히 복잡했다.
사고를 칠 거라 예상은 되었지만, 하루도 되지 않아 일을 벌일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르지 않은가?
“루시엘라.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싸늘한 유모의 추궁에 루시아는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무슨 짓이긴?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지.”
“발버둥? 발버둥이라고?!”
유모의 눈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가주님께선 당신을 무척 아끼십니다. 현재 가문 내 권력투쟁의 결과에도 상관없이 기꺼이 중역의 자리를 맡기려 하실 정도로!”
“알고 있었구나.”
“테바라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 가주님께선 루리엔 시에서 돌아오시자마자 네 이름을 직접 지명하며 천명하셨으니까. 너를 향해 ‘유일한 예외’라는 말까지 사용하셨으니까!”
어쩌면, 테바라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그 일과 무관하진 않을 거다.
루시아만이 유일한 예외라면, 달리 말하면 다른 직계들은 예외가 아니라는 소리니까.
유모는 진정으로 화가 났다는 듯, 양팔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넌 가만히 있어도 살아남을 수 있어! 다음 세대의 주역이 될 수 있다고! 그런데, 적대 가문인 라데우스의 직계까지 끌어들여 반역을 저지르려 하다니, 네가 진정 제정신인 것이냐?!”
“…….”
루시아와 네르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말에서, 그녀가 루시아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절절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유모.”
루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가까스로 감정을 추슬렀다.
이대로 그녀의 말에 동조하기엔 루시아의 결심은 너무나도 확고했다.
“유모 말대로 이대로 가만히만 있어도 난 살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왜!”
“하지만 아녜스는 아니잖아?”
움찔!
아녜스의 이름이 나오자, 유모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테바라가 반란을 일으킨 건 단순히 후계 경쟁에서 탈락할 거란 위기감을 느껴서가 아니야. 패배한다면, 아렌이 자신을 반드시 죽일 거란 확신이 있었기에 일을 벌인 거지.”
“루시엘라.”
“이대로라면 나는 몰라도, 아녜스는 반드시 죽을 거야. 아렌의 손에. 그렇지?”
이번엔 유모의 말문이 막힐 차례였다.
“다른 놈들은 알 바 아니야. 하지만 아녜스만큼은 죽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어.”
“아무리 네가 그 아이를 아낀다고 해도, 보장된 지위와 안전을 버리고 뛰쳐나오겠다고? 거기다, 고작 너희 둘이서 뭘 할 수 있겠다고!?”
“그러니 유모의 도움이 필요해.”
“……!”
루시아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았다.
“부탁해. 아녜스가 있는 곳이 어딘지 알려줘.”
“루시엘라!”
“부탁해, 유모.”
애원에 가까운 루시아의 부탁에, 유모의 표정에 고뇌가 깃들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루시아를 돕는다는 건, 자신의 아버지 라이먼의 의지를 배신하는 꼴.
라이먼은 더 이상 케프렌 내부에 혼란이 찾아오는 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유모, 이건 반역죄가 아니야.”
“…….”
“가주님의 보증이 있는 이상, 이건 가문 내의 권력투쟁일 뿐이야.”
“끄응!”
“그러니 유모는 아렌이 아닌, 날 선택해줄 거잖아. 그렇지?”
사실 루시아의 말은 허점이 매우 많았다.
당장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네르하의 존재만으로도, 루시아의 말은 대번에 논파 될 수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실리가 아닌 감정에 호소하는 건, 설득에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방법이었다.
네르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유모를 제압하기 위해 몰래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때였다.
“하나만, 약속해주렴.”
무언가를 체념한 어조로, 유모가 말했다.
“아녜스의 신변을 확보하게 된다면, 더 이상 무모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유모!”
“그것만 약속한다면, 네게 협력해주마.”
루시아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유모.”
그런 둘의 모습을 본 네르하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착잡하군.’
루시아의 저 말은 단순한 기만이다.
당장 눈으로만 봐도, 지금 루시아는 유모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유모 역시, 이를 악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두고 있었고.
아마 저 유모란 여자는 루시아의 다짐이 헛된 다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싸움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싸움이야.’
아렌과 루시아의 악연. 그리고 예상치 못한 마족의 개입.
이 많은 것들이 얽혀있는 이상, 피를 보지 않고 이 상황을 해결하는 건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반드시 이겨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