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202화 (202/237)

202화

<케프렌의 어둠 (4)>

익숙한 청년의 목소리.

그 청년의 등장에 미궁 곳곳에 있던 직계들이 하나같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네놈이 여긴 무슨 일이냐?!”

“아렌의 개!”

“이 자식 나이우스!”

모든 직계들의 분노와 증오를 한 몸에 받는 자.

나이우스 엘 케프렌.

치렁치렁한 장발이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이 미청년은, 일찌감치 아렌 루 케프렌에게 빌붙어 유폐를 피한 유일한 직계였다.

“나이우스…….”

아녜스 역시 흐릿한 눈으로 나이우스가 나타난 쪽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가려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만큼은 그녀가 기억하던 나이우스가 맞았다.

“아직 건강한 것 같아 다행이야.”

“나이우스 형님. 우릴 조롱하러 오셨나?”

엘비스의 입에서 증오가 한껏 깃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롱이라니. 아렌의 위협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너희들을, 내가 어떻게 조롱하겠나?”

“이 개자식! 지금 그 말이 조롱이 아니라고?!”

밀레니아가 철창을 부여잡으며 고함을 내질렀다.

양팔을 구속한 마나 제어 수갑이 아니었다면, 대번에 달려들어 사생결단을 냈을 정도의 분노였다.

그런 밀레니아를 향해, 나이우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진정해라 밀레니아, 난 너희를 구하러 온 것이니까.”

“뭐, 뭐? 우릴, 구하러 왔다고?”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지금까지 다른 이들을 철저하게 외면하던 인간이 인제 와서?

나이우스는 자신이 마치 정의의 사자라도 되는 듯, 주먹을 불끈 쥐고 양팔을 벌렸다.

“내가 지금까지 아렌의 밑에 있던 건, 녀석을 넘을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아렌의 힘을 넘기 위해?”

“……?”

직계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나이우스의 말은 뭔가 어감이 이상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다.”

나이우스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한 가지 묻지. 너희들은 그 겁많고 멍청하던 아렌이 갑자기 라일론 큰형님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

직계들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아렌이 대공자 라일론을 죽였던 그 참극을 언급하는 건, 직계들 사이에선 사실상 불문율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게 뭔데?”

“당연히, 이 힘이지 않겠느냐!”

화악!

나이우스의 팔을 타고, 칠흑빛 마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파괴적이고, 패도적인 힘.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모독하는 듯한 끈적끈적한 불쾌감.

당연히 나이우스의 마기를 본 직계들은 경악했다.

“나, 나이우스 너! 지금 무슨 짓을?!”

“네가 미쳤구나!”

“뭐가 미쳤다는 거지?”

주변에서 몰려오는 비난에도, 나이우스는 당당했다.

“이 힘의 파편을 얻은 것만으로도, 테바라는 대공과 잠시 대등하게 싸울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난 파편이 아닌 원래의 온전한 힘을 얻었지.”

크흐흐흐!

음울한 미소가 공간을 울렸다.

“이거라면 대공을 완전히 꺾는 것도 가능해. 당연히, 아렌 정도는 간단하겠지.”

“서, 설마 테바라의 반란에, 오라버니가 연관되었다는 거야?”

나이우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난 그저 힘을 전해줬을 뿐, 멋대로 폭주한 건 테바라다.”

“그게 그 말이잖아!”

“난 분명 테바라에게 때를 기다리라 말했다. 하지만 테바라는 내 충고를 무시했지. 그건 자업자득이다.”

“케프렌의 기사로서의 긍지를 잃었구나!”

홱!

“긍지? 지금 긍지라고 했나?”

화악!

나이우스의 팔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거대한 팔처럼 변해 엘비스를 덮쳤다.

“커어억!”

대번에 목이 제압당한 엘비스가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패배자가 되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게 긍지인가? 아니면 놈의 개가 되어 뒷구멍이나 핥고 있는 게 긍지인가!?”

“나, 나이우스!”

“어차피 아렌은 우리 모두를 죽일 생각이다. 그러면 마기든 뭐든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서라도 발악이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

밀레니아가 우물쭈물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그래! 마기의 힘을 빌리고도 패배한다면, 가문의 역사에서 지워지거나 대대손손 멸시당하겠지.”

퍽!

마기의 손이 엘비스를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하지만 그게 두렵다고, 움직이지도 않을 셈이냐?”

나이우스의 초상같은 호령이 공간을 울렸다.

“나를 따라온다면, 적어도 성공확률이 높은 기회를 받을 수 있다.”

“……!”

“……!!”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원탁이라 할지라도 승산이 있다. 심처에 봉인된 마왕 예루리의 봉인을 완전히 풀 수 있다면, 설사 가주님이라 해도 우릴 어찌할 수 없을 거다.”

“마, 마왕이라고?!”

“그래, 그냥 마왕도 아니지. 과거 전성기의 케프렌 가문이 멸문을 각오하고 봉인했다던 최상위의 마왕이다. 나는 그 힘을 빌려 검제(劍帝)의 경지에 올랐지.”

“거, 검제?!”

모든 기사들이 꿈꾸고 동경하는 전설상의 경지이자, 이 거대한 케프렌에서도 그 경지에 오른 이가 한 시대에 다섯을 넘지 못하는 절대적인 힘의 상징.

“그걸, 어떻게 믿지?”

“테바라를 보면 모르나? 테바라는 나보다도 떨어지는 힘을 얻었음에도 왕(王)급을 훨씬 넘어섰다. 그리고 나는 테바라보다도 훨씬 강하지.”

직계들이 멍한 눈으로 나이우스를 바라보았다.

“선택해라! 여기서 개죽음 당할 날을 기다릴지, 아니면 내가 주는 기회를 붙잡을지!”

직계들은 모르고 있었다.

아까부터 ‘어떤 성질’을 지닌 음습한 마기가, 나이우스의 발끝에서 흘러나와 직계들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직계들은 마치 호객꾼에 홀린 손님처럼 나이우스의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나, 나는 갈래!”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어!”

“널 따르겠다, 나이우스!”

대부분의 직계가 나이우스의 말에 홀렸지만, 단 한 명.

지금껏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소녀만은 예외였다.

“아네시스, 넌 어떻지?”

“…….”

지금껏 조용히 있던 아녜스가 입을 열었다.

“난 참가하지 않아요. 오라버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명백한 거절의 말에 나이우스의 이마가 살짝 꿈틀거렸다.

“이건 좀 곤란한데.”

이번 일은 반드시 모두가 참여해줘야만 했다.

하나라도 빠지면 ‘제물’의 양이 부족해진다.

‘루시엘라가 돌아온 걸 알아차린 건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나이우스는 고개를 털었다.

‘아니, 그렇다면 저렇게 넋을 놓고 있을 리는 없겠지.’

생각을 정리한 나이우스가 아녜스에게 다가갔다.

“나를 봐라, 아네시스.”

“……?”

상대의 말에 고개를 돌리던 순간, 아녜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읏!”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 쌍의 붉은 눈동자.

그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아녜스의 심령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나를 따라와라. 나만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

“하, 하지만, 어, 언니가…….”

원래라면 이런 식의 정신장악은 통하지 않아야 정상이었지만, 마나가 제압되고 며칠에 걸쳐 심신이 피폐해진 아녜스에겐 놀라울 정도로 잘 통했다.

“루시엘라는 잊어라. 오로지 나만을 바라봐라.”

“…….”

별다른 언어적 설득이 없는 강제적인 명령에 굴복한 아녜스는, 결국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좋아, 모두들 따라와라.”

“네.”

“알았다.”

아녜스를 포함한 직계들이 마치 영혼이 없는 좀비마냥 나이우스를 따라나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십 분이 흐른 뒤.

“……한발 늦었군.”

“이, 이게 무슨?!”

그렇게 검의 미궁에 도착한 네르하와 루시아는, 주변이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 * *

루시아는 눈앞에 보인 광경이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유모!?”

유모 역시 전신을 부르르 떨며 답했다.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명령이 내려졌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어요!”

네르하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렇겠지. 입구에 그렇게 시체가 쌓여 있는데, 정상적인 일일 수가 있나?”

검의 미궁.

로엘 소드 외곽에 위치한, 일종의 죄인들을 가두는 수용소.

당연한 말이지만 검의 미궁에는 평상시에도 수십의 기사들과 수백에 달하는 병사들이 주둔 중이며, 유사시를 대비해 주변의 기사단이 몰려올 수 있게 시스템이 짜여 있었다.

그런데.

“기사들과 병사들은 전멸. 시스템 역시 꺼져 있지. 내부 동조자가 있는 건 물론이고.”

주변에 널린 시체를 바라본 네르하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상당한 실력자가 일을 벌였군.”

“자, 잠깐. 실력자? 이게 혼자 힘으로 벌인 일이라고요?”

주변에 널린 시체를 살펴보던 네르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참격의 균열이 일정하고 상처의 흔적이 비슷해. 일격에 수십 개 이상의 오러를 날려 즉사시킨 거다.”

단순한 힘의 편린만을 접한 것이지만, 절대로 만만치 않다.

“최소 원탁의 기사급이다. 아무래도, 우리처럼 혼란 속에서 일을 벌이려는 놈이 하나 더 존재하는 것 같군.”

“대체 누가…….”

범인을 찾자면 한도 끝도 없다. 하지만 그나마 현재 상황에서 유력한 범인을 찾자면 둘.

‘대공자는 아니야. 가만히 있어도 승리가 확정되는 만큼 굳이 일을 벌일 필요는 없지.’

그때, 유모가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나, 나이우스!”

“나이우스?”

“가능성이 있다면 그자뿐입니다. 지금은 아렌에게 굴복했다지만,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후계 자리를 가장 치열하게 다투던 자였죠.”

나이우스란 인물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들은 네르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와신상담인가?”

그때, 함께 주변을 살펴보던 루시아가 말했다.

“아직 끌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추적한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긴 한데…….”

네르하는 고민했다.

고민의 쟁점은 이 상황에서 일을 더 크게 벌여도 괜찮은가?

상대나 우리나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건 맞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둘 중 불리한 건 이쪽이다.

유모가 루시아에게 대안을 제시했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상부에 도움을 청하는 건 어떻습니까? 정말로 나이우스가 범인이라면 아네시스를 되찾아 올 수 있는 건 물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번에 네르하가 반대했다.

“안 돼. 그렇게 하면 나이우스를 압박할 수는 있겠지만, 이후에 우린 움직일 수가 없게 돼. 최종적인 목표가 대공자 아렌인 시점에서 이건 자충수가 돼.”

“그건 나도 동의해, 유모. 이건 우리 힘만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지금 당장으로선 답이 안 나오는 문제다.

아니, 선택지는 많지만 어떤 선택지가 최선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때였다.

‘어?’

저 밑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른다.

마기우스나 카이젤에게서나 느껴보았던 강렬한 의념.

네르하는 순간 팔뚝에 소름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루시아.”

“네, 말씀하세요.”

“이곳 검의 미궁이란 장소. 여기가 끝이 아니지?”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작 이 정도라면 ‘미궁’이라 불릴 수는 없겠죠.”

당장 네르하의 기감에 잡히는 이곳의 넓이는 직경 약 200미터 정도.

나름 넓긴 하지만 그렇다고 미궁이라 불릴만한 크기는 절대 아니었다.

“검의 미궁은 총 지하 5층까지 존재해요. 안에 갇힌 죄인들의 수만 수백이 넘어가니까요.”

“내려가 보자.”

“네!?”

나이우스를 추적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미궁을 내려간다고?

유모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자, 잠깐! 이제 곧 이곳의 이변을 파악한 본가에서 기사들이 몰려올 겁니다! 그런데 되려 아래로 내려가겠다니요? 그건 자살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유모.”

그런 그녀를 루시아가 말렸다.

“내려가자.”

“아가씨!”

“저 사람은 절대 헛된 일을 하지 않아. 뭔가를 발견했기에 확신했을 거야. 그렇지 않아요?”

“맞다.”

고개를 주억거린 네르하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쩌면, 이번 일… 아니, 케프렌의 일에 대한 전체적인 돌파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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