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반란 (2)>
“너희들이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좋았을 것을. 아깝구나.”
그 말에 루시아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할아버님.”
“아니다. 하지만 더 늦게 전에 그 아이들을 막아야 한다. 자칫 잘못하다간 케프렌은 두 쪽이 나버릴 것이다.”
케프렌 전대 가주, 크라수스 엘 케프렌.
38세란 나이에 대륙제일검이란 칭호와 함께 가주 자리에 오른 그는, 약 20여 년이란 시간 동안 케프렌이란 거대 가문을 문제없이 다스렸다.
거대 가문의 가주들이 으레 그러듯이 크라수스는 네 명의 처에게서 열셋의 자식들을 낳았고.
그중 가장 뛰어났던 마기우스 엘 케프렌이 다음 대 가주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크라수스란 인물에 대한 설명은 이게 끝이었다.
현시대처럼 마족들이 갑자기 들끓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아들 마기우스에게 가주 자리를 넘겨줄 때까지, 그는 너무나 평탄하게 케프렌 가문을 이끌었다.
전쟁에 나선 적도 없고, 그에 준하는 거대한 사건도 없다보니 크라수스란 인물에 대한 정보가 엄청나게 부족했다.
네르하가 처음 들은 의문은 이것이었다.
‘왜 날 견제하지 않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왜 정보를 이렇게 술술 불지?’
그가 라데우스의 전대 인물인 루트비히와 안면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케프렌과 라데우스의 관계다.
‘뭔가 이상해. 아니, 허술해.’
저자가 가짜는 아니다.
자신을 부른 거대한 의념은 분명 그 자체로 경지를 넘어선 강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크라수스가 수상한 것과는 별개다.
‘적대 가문의 직계가 치부를 알아버렸지. 원래라면 되려 죽여버리려고 손을 쓰려는 게 정상이야.’
네르하의 뒤에 드래곤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음에도, 그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네르하란 존재 자체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네르하는 눈을 굴려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크라수스는 루시아와 유모와 한창 떠들고 있어, 딱히 이쪽을 신경 쓰는 기색은 없다.
주변은 어둠에 먹혀있다. 하지만 별다른 방해가 되진 않았다.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이 차례대로 지나갔다.
‘곳곳에 파인 자국이 있다. 이건 분명, 마나 폭풍의 흔적이야.’
제자리에서 거대한 힘을 주변으로 발산하면 이런 식의 흔적이 남는다.
‘왜?’
크라수스는 왜 이런 식으로 흔적을 남겼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네르하가 결론을 내렸다.
‘전제가 잘못되었어.’
크라수스는 자신과 아렌이 힘을 합쳐 마왕 예루리와 싸웠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예루리의 저주를 받아,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얼핏 보면 앞뒤는 대충 들어맞는 타당한 말 같지만…….’
그럼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흔적들은 무엇인가?
본인은 자의로 갇혔다지만, 이건 마치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애쓴 흔적 같지 않은가?
그렇게 의심이 깊어지던 와중, 네르하의 귓가에 이런 말이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루시엘라야. 나는, 더 이상 너를 받쳐주지 못할 것 같구나.”
“하, 할아버님!”
“현재의 케프렌은 강한 리더를 필요로 한단다. 풀려난 마왕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이상, 아렌을 중심으로 가문의 힘을 모아야 한다.”
“그, 그런!”
루시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크라수스는 현재 가문에서 그녀에게 힘이 되어줄 몇 안 되는 이다.
그런 이가 등을 돌렸으니 당연히 루시아로선 천군만마를 잃은 셈일 거다.
저 말은 얼추 보면 가문을 위해서라면 옳은 판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르게 본다면, 크라수스는 아렌을 향한 루시아의 적대감을 교묘하게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가의 선대 가주께선 이미 돌아가셨소.’
원탁의 기사 1석, 라이먼 엘 케프렌이 한 말.
처음에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네르하는 마지막으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이자카르.’
―불렀냐, 애송이.
‘네가 보기엔 저자는 어떻지?’
네르하의 물음에 영체 상태로 소환된 이자카르가 크라수스를 스윽 바라보았다.
―사도(使徒)로군.
‘사도?’
―흑마법사와는 다른, 진정한 의미로 마왕이란 개체의 대리자를 칭한다. 놈의 심장에 새겨진 흔적은 얼핏 보면 저주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저주가 아닌 셈이지.
그러고 보면 이자카르가 자신의 비늘로 짠 갑옷을 자신의 사도들에게 입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놈은 상당히 약체화된 상태다. 노리고자 한다면 지금이 기회일 거다.
어째서 크라수스가 마왕과 손을 잡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상대가 적이라는 걸 확인한 이상, 더 이상 상대의 의도에 끌려갈 이유는 없었다.
“비켜, 루시아.”
“네? 꺄아악!”
마음을 먹자마자 네르하의 주먹에 가공할 속도로 마나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이런 식의 기습으로는 융합기 같은 큰 기술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의 타이밍 정도는 뺏을 수 있었다.
“흡!”
콰과과광!
순간 파괴력만큼은 금철유성에 버금가는 일격이 그대로 크라수스를 짓눌렀다.
회피나 흘리기조차 불가능하게 조절한 거대한 충격파.
상대는 검사. 그것도 검이 없는 검사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허허! 고얀 놈이로고.”
하지만 그런 거대한 충격파 속에서도 크라수스는 태연했다.
비록 손에 검이 들려있진 않아도, 크라수스 정도의 고수라면 오러로 칼날을 만들어 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기검(氣劍)!’
대번에 검은 오러를 발현해낸 크라수스가 네르하의 기탄을 잘라버렸다.
쿠구구궁!
두 동강 난 기탄이 주변 벽에 처박히면서, 대번에 지하에 지진과도 같은 거대한 진동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네르하 라데우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가!”
대번에 루시아와 유모가 반발했다.
특히 유모는 전에 없던 적대감마저 보이며 검을 뽑은 채로 네르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르하는 그런 두 사람을 향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정신 차려라, 멍청이들아.”
“뭐, 뭐?”
“너희들은 ‘저게’ 케프렌의 인간이 뽑아낼 수 있는 오러의 색상이라고 보나?”
네르하의 지적에 두 사람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그리고 얼굴이 굳었다.
유모가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고, 골든 글로리가, 아니야?”
라데우스의 상징이 스타 플래티넘이라 불리는 백금색의 마력이라면, 케프렌의 상징은 골든 글로리라 불리는 황금의 오러.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크라수스의 검은 황금색이 희미하게만 남아 있는 불길한 흑색이었다.
크라수스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겁이 없군.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는 막무가내일 줄이야.”
“나도 나름대로 계산을 하거든.”
“뒷감당을 할 수 있겠느냐? 케프렌의 자존심은 그 어떤 것을 우선한다.”
내가 마족과 손을 잡든 말았든, 넌 라데우스고 날 건드렸으니 가문은 무엇보다 먼저 널 족칠 것이다…… 라는 뜻이었다.
“여기에 내 편이 없다면 그렇겠지.”
네르하가 시선을 돌렸다.
“루시아.”
“네, 네.”
급격한 상황 변화에 그녀는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대상이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조부였기에 더더욱.
“날 믿어라.”
“……!”
“눈앞의 존재는 적이다.”
루시아의 어깨가 번개를 맞은 것처럼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후우우!”
크게 심호흡을 한 루시아가 칼을 빼내어 크라수스에게 겨누었다.
그 모습에 크라수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처구니가 없구나. 내가 아니라 적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냐?”
“할아버님과 싸운 적은, 아마도 아렌이겠지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크라수스의 동요를 본 것만으로도, 루시아는 확신했다.
“아렌이 어떤 생각으로 할아버님과 싸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나.”
그녀의 눈이 강하게 빛났다.
“가문의 일원으로서 긍지를 잃은 할아버님을,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군요.”
“……그것이 네 선택이냐?”
“저는 케프렌입니다. 그리고, 저는 가장 케프렌 다운 선택을 할 것입니다.”
“흐흐, 안타깝구나.”
번쩍!
한순간 크라수스의 검광이 번뜩였다.
명실공히 루시아의 목을 거두기 위한 살초.
“아가씨! 안 돼!”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유모가 눈치 빠르게 루시아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지만.
“유모!”
“캬악!”
이제 막 오러의 초입에 든 기사가 크라수스의 일격을 막는다는 건, 사마귀가 수레에 맞서는 꼴이었다.
대번에 그녀의 검이 부러지며 주변에 둘렀던 패시브 오러가 뭉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덜미에 긴 자상이 생기며 피보라가 튀어나왔다.
“흠, 라이먼의 딸. 단련을 게을리하진 않았구나.”
“유모! 유모!”
“내 일격을 받고 목숨을 건진 건 칭찬할 만 하다만, 두 번은 없다.”
다가오는 크라수스의 앞을 네르하가 가로막았다.
“원탁에서 당신이 죽었다고 말한 건, 오히려 명예를 지켜준 것이었군. 이렇게 변해버렸으니 그리 떳떳하게 알릴 수 있을 리가 없지.”
“흐흐흐, 원탁에서 그리 말하더냐? 이 가문의 진정한 주인도 모르는 괘씸한 것들 같으니.”
네르하는 헛웃음을 내지었다.
“그 말을 보아하니 겉으로는 단합을 외치면서도, 속으론 루시아를 이용해 아렌과 상잔을 시도하려고 했던 모양이군.”
“흐흐흐, 잘 아는군.”
크라수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왕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이고 일을 벌일 생각인 듯 했다.
“나이우스도 나쁘진 않지만, 루시엘라만큼은 아니지. 저 아이의 육신을 예루리님의 새로운 육체로 바치겠다.”
“…….”
네르하의 표정이 흐려졌다.
대체 저만한 무인이 어쩌다 저렇게 타락했단 말인가?
정신은 이미 변질될 대로 변질되어 이젠 마왕을 위하는 인공지능이나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좋아, 나도 최근 실전 상대를 찾고 있었는데, 차라리 잘 되었군.”
“시건방진 라데우스의 애송이 놈 같으니. 감히 네놈 따위가 케프렌의 지배자인 내 검을 받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네르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생각한다.”
“카이젤 놈이 자식놈을 잘못 가르쳤구나!”
화악!
방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 크라수스의 검에서 뻗어 나왔다.
유형화 된 오러의 칼날 위에 의념이 깃든다.
무인이 영역을 구축하는 것을 넘어, 그 영역을 극소단위로 좁혀 칼날에 부여하는 경지.
이전 케프렌의 기사단 검술 총사범, 라실론이 보였었던 ‘영역의 검’이었다.
“정신은 영락했어도, 무인의 경지는 그대로라는 건가?”
“죽여주마!”
저 영역의 검은 공간조차도 짓누르는 절대적인 파괴의 검.
8레벨에 이른 대마법사조차 영역을 전력으로 전개하지 않으면 순간 화력에서 밀려 목숨을 잃게 된다.
네르하가 날아오는 크라수스의 일격을 맞이하며 차갑게 뇌까렸다.
“그럼 나 역시, 영역으로 맞상대해주지.”
“뭣?!”
쿵!
네르하가 장갑을 낀 두 주먹을 마주치며 이렇게 외쳤다.
“영역 전개.”
네르하를 중심으로 거대한 영역이 현실에 구현된다.
기사들이 만드는 ‘무형’의 영역과는 다른, 세계에 색을 부여하는 마법사의 ‘유형’의 영역.
하지만 유형이든 무형이든, 마법사든 기사든, 영역과 영역의 충돌은 단순하다.
누구의 의념이 더 강렬한지에 대한, 원초적이고 순수한 화력의 싸움.
“헛소리! 아니, 설사 네놈이 영역을 구현할 수 있다 하더라도, 네놈의 영역은 그 빛을 내뿜기 전에 짓눌릴 것이다!”
저 말은 맞다.
극소단위로 위력을 응축한 의념의 검은, 마법사의 영역에 대해선 천적에 가까운 힘을 발휘한다.
먼저 영역을 펼쳐 대비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마법사는 기사를 이길 수 없었다.
하나.
“미안하지만, 내 영역은 조금 특별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