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반란 (4)>
검의 성지의 지하.
이곳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언을 몸소 실천한, 나이우스 엘 케프렌의 은신처였다.
이곳의 존재를 아는 이는 어릴 적부터 나이우스를 모셔왔던 종복 하나뿐.
“허억! 허억!”
아녜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체력은 바닥났고 정신력도 고갈되기 직전.
이것은 딱히 고문이나 심문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주, 죽여 버리겠어, 나이우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힘없는 인형 같던 아녜스의 얼굴엔 어느새 짙은 독기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한쪽 눈은 이미 시커멓게 물든 상태였다.
육체에 스며든 마기가, 골수를 넘어 머리까지 잠식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대단하구나, 아네시스.”
나이우스는 아녜스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네 녀석은 어찌 이리 오래도 버틸 수 있는 거지?”
그의 시선이 힐끗 뒤쪽으로 향했다.
“다른 녀석들은 이미 굴복한 지 오래거늘.”
그 말마따나, 나이우스를 따라온 직계들은 전부 마기에 물들어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다.
확실히 나이우스는 약속을 지켰다.
아직 귀급에 불과하던 후계들이, 예루리의 마기를 받아들이자마자 대번에 벽을 넘었다.
하지만 그 반동으로 전원이 자의식을 잃고 나이우스의 노예나 다름없어졌다.
아녜스가 힘없이 말했다.
“정말, 이런 걸로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이 힘이라면 못할 게 없지.”
직계들을 대번에 홀린 막대한 마기가 흘러넘친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녜스는 작게 실소했다.
“가문의 힘이 어떠한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당신이 그런 소리를?”
라데우스와 마찬가지로 케프렌 역시 초월적인 개인의 힘으로는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특히 개개인의 대인전 무력이 강한 케프렌은 더더욱 그렇다.
“후후, 나도 아무런 생각 없이 일을 벌인 건 아니다.”
딱!
나이우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벽처럼 보였던 공간 한쪽이 문처럼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한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떻게 성지 지하에 저런 큰 장소가 있을 수 있지?”
되려 자신들이 잡혀온 곳이 별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문제는 공동이 아니었다.
“저, 저들은 누구야?”
저 멀리, 공동의 중앙에 검은 갑주를 입은 300여 명의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서 있다.
문제는 그들 하나하나가, 귀급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게 길을 열어주신 분께서 준비해 주신 것이다. 이 정도면 원탁의 휘하 기사단과 정면으로 붙어도 승산이 있지.”
귀왕제성신으로 이루어진 기사의 경지 5단계.
귀급, 즉 소드 스피릿의 경지는 얼핏 보면 무시당하기 십상이지만, 실제로는 본가 기사단 중에서도 귀급의 실력자는 각 기사단마다 2~3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완벽히 같지는 않지만, 숙련된 귀급의 기사는 마법사로 따지면 7레벨의 초입과 비교된다.
그런 자가 무려 300.
여기에 왕급의 벽을 뚫은 직계들이 가세했다.
‘가, 가능성이 있어!’
여전히 정면으로 붙는다면 승산은 없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쿠데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기습공격이다.
만약 제대로 전력이 응집되지 못한 상태로 검의 성지가 점령당하고 원탁이 몰살당한다면?
“후후, 표정이 볼만해졌구나, 아녜시스.”
“나이, 우스!”
“미안하지만 이제 잘 시간이다. 네 재능은 내가 유용하게 써주마.”
지금껏 아녜스를 괴롭히던 마기가, 마치 지금까진 장난이었다는 듯 폭렬적으로 전신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 자식!”
“아, 그래. 널 루시엘라와 붙여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군. 자신이 동경하던 년을 꺾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겠지?”
“뭐, 뭐?!”
설마 루시엘라 언니가 돌아온 건가?
아녜스는 필사적으로 그걸 묻고 싶었지만.
마치 병에서 잉크가 쏟아지듯, 항거할 수 없는 어둠이 그녀의 정신을 일거에 잠식해 버렸다.
그렇게 직계 중 유일하게 버티고 있던 아녜스가 떨어졌다.
하지만 나이우스는 그리 만족스런 얼굴이 아니었다.
“자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편이 더 강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대로 진행할 수밖에.”
자의식이 있는 상태가 더 강하고 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있을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크흐흐, 기다려라 아렌. 네놈의 목을 잘라 그 피를 맛있게 먹어줄 테니.”
케프렌의 직계이자 2공자, 나이우스 엘 케프렌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 * *
‘짜릿하군, 이 감각.’
네르하는 전율을 느꼈다.
전방에 존재하는 거대한 존재감이, 뻗어나가는 의념을 잡아채며 수 싸움을 방해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마왕이니 마족이니 하는 것들과 많이 싸워왔지만, 이렇게 세련되게 마나와 의념을 운용하는 실력자와의 싸움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선공은 융합기로 시작했다.
“블레이즈 피스트.”
네르하의 첫 번째 융합기, 나선의 염권(炎拳)이 크라수스를 향해 날아갔다.
싸우기 전만 해도 힘으로 짓누를 것 같았던 크라수스는, 어느새 아주 차분한 기색으로 네르하의 공격에 대응했다.
“경파(輕波).”
오러도 필요 없다.
가볍게 검의 궤적만으로, 크라수스는 네르하가 날린 블레이즈 피스트를 가볍게 걷어내었다.
‘유검(流劍)의 극치로군! 무당파 말코들이 생각나는걸?’
크라수스가 코웃음을 치며 네르하에게 달려들었다.
“위력은 상당하지만 고작 그걸로 뭘 하겠다는 것이냐!”
“알지. 이건 인사 대신이다.”
“그럼 이제 내가 인사할 차례겠구나.”
쿠웅!
그 말이 끝나자마자, 네르하의 신형이 그대로 튕겨나가 벽에 처박혔다.
상식을 넘어서는 돌진속도에 상황을 지켜보던 루시아가 눈을 부릅떴다.
‘보, 보지 못했어!’
한순간 크라수스의 등에 검은 날개가 크게 펼쳐짐과 동시에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깐 눈을 깜빡이자 무언가 검광이 번뜩이며 네르하가 튕겨나갔다.
‘하, 할아버님이 무슨 짓을 한 거지?’
어느새 네르하가 서 있던 자리에 두발을 내딘 크라수스가 음침하게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무슨 검술을 익혔든, 무슨 마법을 익혔든, ‘속도’는 모든 것을 압도하지.”
푸드득!
동굴의 잔해를 털어내며 네르하가 천천히 일어났다.
솔직히 패시브로 따라오는 영역의 자동 방어가 아니었다면 네르하 조차도 일격에 목을 내주었을 정도였다.
“그렇군. 확실히 그 일격에 골에 갈 뻔했어. 유검 다음은 쾌검인가?”
“용케 목숨은 건진 듯하다만, 다음 일격으로 확실히 죽여주마.”
피식!
“글쎄, 과연 그렇게 될지?”
“끝까지 시건방지구나!”
번쩍!
또다시 크라수스의 신형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루시아는 또다시 네르하의 신형이 벽에 처박히리라는 걸 예감하곤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콰아아아앙!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나옴과 함께, 이번엔 크라수스의 일격이 네르하의 글러브에 가로막혔다.
“뭣?”
“역시 그렇군. 혹시나 싶었지만 말이야.”
네르하의 입가에 미약한 웃음이 걸렸다.
“확실히 빠르긴 하지만, 본인조차도 속도를 통제할 수 없나 보군.”
“이놈!”
크라수스는 분노했지만 반박하지는 못했다. 저 말은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초인의 경지에 오를수록 검사들의 궤적은 더 치명적이고 은밀해진다.
소위 디셉션(Deception)이라고 해서, 초식의 변초와는 조금 개념이 다른 실전적인 기교의 영역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방금 크라수스의 일격은 어마어마하게 빠를지언정 참격의 궤적 자체는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그말인 즉, 상대가 자신의 속도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
“검에 기교를 담을 수 없다면 그건 그저 공격지점이 보이는 삼류 참격일 뿐이지.”
하지만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고 실제로 막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검제의 경지에 오른 검사가 속도를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방금 전의 일격은 생명체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아무리 마나로 강화했다 한들, 인간의 육체로 방금의 일격을 구현하려 했다간 몸이 조각조각 파열해 자멸했을 것이다.
‘이놈! 생각보다 훨씬 까다롭다!’
크라수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이렇게 된 이상 처음처럼 순수하게 기량 싸움으로 돌입할 수밖에 없다!
크라수스가 소리쳤다.
“놈! 그 영역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확실히 그렇긴 하지.”
네르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와 무인의 영역을 통일시켜 만들어 낸 네르하만의 고유 영역.
기사와 마법사의 영역이 가지는 장점만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로 절대무적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세상은 만만치가 않았다.
“재주는 꽤나 좋았다만 약점 역시 확실하군. 제대로 두들겨주마!”
크라수스의 주변으로 수십 자루의 기검이 생겨났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빠른 궤적을 그리며 네르하의 전신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저건, 이기어검!’
확실히 경지를 넘어선 검사답게, 크라수스는 수십 자루의 어검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다.
‘내 마나를 착실히 소모해 영역을 해제시킬 셈이군.’
네르하는 보법으로 요리조리 피하며 혀를 찼다.
네르하의 영역은 기사와 마법사, 두 영역이 가지는 장점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단점 역시 동시에 안아버린 불안전한 술식이었다.
즉, 영역이 파훼된다면 네르하는 한동안 제대로 마나를 끌어모을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하게 변하고 만다!
크라수스는 대번에 그 사실을 알아채고 약점을 찔러온 것이었다.
―쯧! 저만한 인간을 상대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기술을 꺼내다니. 자업자득이다.
사태를 지켜보던 이자카르가 살짝 혀를 찼다.
그 말에 네르하가 투덜거렸다.
‘어느 정도 실전성을 입증했으니 됐어. 모자란 건 시간이 채워줄 수 있으니까.’
―뭐, 그렇긴 하지.
이자카르 역시 네르하의 영역이 지닌 잠재력 자체는 인정하는 편이었다.
―애송이, 흥을 깨트려서 미안하지만 결투는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거다.
‘……알고 있어, 계속 날뛰었다간 사이좋게 매몰당할 거 같으니까.’
이미 두어 차례 격돌의 여파만으로 이 지하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만약 본격적으로 날뛰게 된다면 서로가 제 역량을 다 꺼내기도 전에 지반이 붕괴할 거다.
크라수스 역시 그걸 알기에 ‘타격’보다는 ‘참격’으로 승부를 봤던 것이다.
한순간, 네르하의 눈빛이 바뀌었다.
크라수스 역시 그 변화를 알아차리곤 기검을 회수했다.
“기세가 바뀌었군. 끝장을 볼 생각이더냐?”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좋아, 나 역시 이 밑에 있는 주인의 봉인이 상하는 걸 원치 않는다.”
‘응?’
순간, 네르하의 귀가 쫑긋했다.
예루리의 봉인이, 이 밑에 있다고?
* * *
“조금만 참아, 유모. 금방 치료사에게 데려다줄 테니까.”
치명타를 입은 유모에게 다급히 응급처치를 가한 루시아는, 두 사람의 승부를 뒤로 하고 그녀를 업고 미로를 빠져나갔다.
원래라면 네르하를 도와 조부와 승부를 내야 하지만, 네르하가 그녀에게 먼저 빠져나갈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그녀가 막 1층에 도달했을 때였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십니까, 누님?”
“아, 아렌!”
루시아의 마음속에 순간 절망감이 차올랐다.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아렌을 만날 줄이야!
아렌은 루시아의 등에 업힌 여인을 알아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에일렌 누님이시군요. 조부님께 당한 겁니까?”
“……비켜.”
“후후, 상처 입은 야수와 같은 기세로군요. 실제로 상처를 입은 건 오히려 저분인데.”
“비키지 않으면, 베어 버리겠어!”
루시아의 검에 찬란한 유성의 빛이 맺혔다.
“전보다 더 강해지셨군요. 이젠 마나를 끌어모으는 기색도 없이 그런 위력의 검을 발산하시다니.”
“닥쳐!”
아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좋습니다. 지금 누님과 굳이 싸울 이유는 없으니까요. 누님이 아니더라도 지금은 제 목을 노리는 이가 많으니.”
스윽!
아렌이 살짝 옆으로 서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들을 모두 치워 버린 뒤에, 누님과 진지하게 검을 맞대도록 하죠.”
루시아는 그런 아렌의 태도를 경계했지만, 곧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느꼈다.
끝까지 아렌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루시아가 천천히 복도를 지나쳤다.
막 지나치던 그때, 아렌이 이런 말을 날렸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 밑에서 싸우는 두 사람 중에, 누가 승리할지를.”
루시아는 그 말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난, 그 사람을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