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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209화 (209/237)

209화

<드러나는 정체 (1)>

오러와 오러가 맞붙자 무지막지한 굉음이 인다.

빠르고 날카롭게 빈틈을 찔러오는 크라수스의 검술에, 네르하가 흥에 겨워 소리쳤다.

“진작 이렇게 나올 것이지!”

“그건 내가 할 말이구나!”

변질된 골든 글로리, 이젠 블랙 글로리라 불러야 할 시커먼 오러가 네르하에게 쏟아졌다.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는군. 하나 결국 도망칠 곳은 한정되어 있는 걸 모르느냐!”

이곳은 지하 5층에 달하는 공동. 아무리 넓더라도 그 면적은 잘 봐줘야 일반적인 연무장 수준이다.

대번에 네르하의 위치가 수세에 몰렸다.

“하아아압!”

우렁찬 기합과 함께 크라수스가 또다시 의념의 검을 날렸다.

오러조차도 찢어발기는 절대적인 일격.

수십 자루의 어검들이 퇴로를 막고, 그 가운데 크라수스의 진짜 일격이 날아온다.

저렇게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정교함을 잃지 않으니, 그 솜씨는 네르하조차도 존경을 표할 정도였다.

네르하는 어떻게든 오러의 폭풍을 피하기 위해 발을 놀렸다.

“본격적으로 해보려던 것 치고는 아까와 바뀐 게 없구나!”

“흥.”

네르하는 살짝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지금까지 쥐새끼처럼 피해 다닌 건, 이 한 방을 위해 힘을 모아두기 위함이었다.

―융합기, 태극도!

회색빛으로 빛나는 원초의 혼돈이 발산된다.

그 원형의 구체는 사납게 날뛰던 크라수스의 공세를 문자 그대로 갈아버리며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뭐, 뭐냐 저건?!’

코앞까지 다가오는 회색빛을 본 순간, 크라수스의 뇌리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위기감이 솟구쳤다.

범위도 좁고 속도도 그다지 빠르진 않지만 직격당하면 분명 즉사한다!

“이놈, 인간의 기술이 아니구나!”

크라수스가 재빨리 발을 놀려 태극도의 궤적에서 벗어났다.

그 자리를 지나친 태극도의 구체는, 그대로 벽을 뚫고 일직선으로 끝없이 날아갔다.

‘쳇!’

멀어지는 태극도의 감각을 느끼며 네르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피나는 노력 끝에 태극도를 제어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반동으로 날아가는 속도가 너무나도 떨어진다.

절대적인 파괴력이고 나발이고 일단은 맞춰야 뭘 할 것 아닌가?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 사람 잡을 때 쓸만한 기술은 아니야.’

남자답게 정면 승부를 걸어주는 크루갈 같은 놈이 아닌 이상 태극도의 사용처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게 아니면 북방에서 싸웠던 그 거대한 식물 같은 대물을 잡을 때 정도?

“믿을 수 없군.”

태극도의 잠재력을 알아본 크라수스가, 떨리는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설마, 카이젤도 아닌 일개 후손 따위가 9레벨의 힘을 재현할 줄이야.”

“응?”

전혀 생각지도 못한 뜬금없는 말에 네르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9레벨이라. 같지는 않지만 딱히 틀린 것도 아니긴 한데.’

마법의 레벨을 구현의 수준으로 따진다면, 원초의 혼돈은 분명 9레벨의 영역에 속하긴 했다.

9레벨의 3요소인 창조 간섭 소멸 중, 원초의 혼돈은 ‘소멸’ 계열에 해당할 테니까.

크라수스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뭔가 중얼중얼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마법이 아닌 기술의 영역이긴 하지만, 과거에 나는 딱 한 번 이와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다.”

“뭐?”

“카오스 오브 오리진(Chaos of origin). 카이젤 놈이 과거에 펼쳤던 9레벨의 마법과 닮았구나.”

허?

네르하는 꽤나 놀랐다.

설마하니, 가주도 원초의 혼돈을 다룰 수 있었던 건가?

확실히 대륙 유일 9레벨에 이른 마법사라면 확실히 가능할 것 같긴 하다.

이전 보았던 ‘신의 휘광(God's glare)’ 같은 걸 고려하면 확실히 가능성은 있었으니까.

“그걸 마법이 아닌 기술의 영역에서 펼칠 수 있다는 건…….”

크라수스가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네르하에게 말했다.

“너는, 경계를 넘었구나.”

“경계?”

그 말에 무언가 짚이는 게 있긴 했다.

“그래, 의념의 다음 단계. 그 경지를 엿보지 않고서는 이런 재주는 절대로 불가능하지.”

까드득!

분노가, 그의 표정을 잠식한다.

”나는 지금까지 그것을 끝없이 찾아 헤맸다.”

심즉검, 검즉심이라.

자신의 의지와 의념대로 자유롭게 검을 다룰 수 있게 된 이후, 크라수스의 앞엔 적수가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애초부터 연약한 생명체였고, 발전에는 한계가 있는 법.

초월적인 존재들이 넘쳐나는 이 세계에서 의념만으로는 절대적인 강자가 될 수 없었다.

당장, 이 세계의 정점인 생명체, 드래곤만 해도 그랬다.

“나는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케프렌의 과거 기록을 끝없이 뒤졌다. 그러다가 육체와 정신이 모두 경계를 넘어서면 상위 차원의 존재로 진화할 수 있을 거란 기록을 보았지.”

네르하는 속으로 그 말에 공감했다. 자신 역시 한 번 겪어본 적이 있었기에.

그의 감정이 점차 격해져 갔다.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그 경계가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더 앞으로 나아가야 닿을 수가 있는지!”

결국, 크라수스는 광인처럼 절규했다.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가문의 일은 원탁에 위임한 채, 십 년을, 이십 년을 검을 휘두르며 살았다.”

크라수스에 대한 정보가 적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애초에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경계라는 것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마치 하늘이 내게 허락해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꾸욱!

네르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벽에 막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건, 무림의 세계에선 너무나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물며 상대는 십대 고수급의 강자.

하수(下手)라면 위에 있는 자가 조언이나 화두라도 던져줄 텐데, 정점에 이른 이는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칠흑같은 앞을 더듬어야 했다.

비록 적이지만 저 울분은 너무나도 공감되는 말이었다.

“결국 나는 결심했지. 그 경계를 찾을 수 없다면, 초월적인 존재의 힘을 빌려서라도 넘어보겠다고.”

“그래서 마왕 예루리의 봉인을 풀었나?”

“맞다. 위대한 존재의 힘을 얻고 나서야, 나는 그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크라수스의 눈에 절망감이 깃들었다.

“그리고 깨달았지. 내 재능으로는, 결코 그것에 닿을 수 없다는 걸.”

벽을 넘지 못하고, 외도의 손을 빌려도 그 결과는 절망적이다.

“조금 황당하군. 그렇게 구도자적인 모습을 보여놓고, 추하게 아들에게 넘어간 권력을 탐하나?”

나름 비꼬겠다고 말한 것이었지만, 어째서인지 크라수스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권력? 그게 무슨 소리냐?”

“…….”

뭐지?

“나는 오로지 다음 단계만을 위해 모든 생을 바쳤다. 아들놈이 수명까지 깎아 경지를 넘었을 땐 가슴이 아팠지만, 그래도 기꺼운 마음으로 가주의 자리를 넘겨주었지.”

아까까지만 해도, 부정한 방법으로 자리를 강탈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마왕에게 영혼을 강탈당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해진 모양이군.’

그나마 다행이었다.

루시아를 믿고 도와주었던 자신의 조부가, 그나마 완전히 타락하진 않았었다는 사실이.

“흐, 크흐, 크흐흐흐…….”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등에 달려있던 흑염익의 불이 강해지면서 크라수스가 음침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네르하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인으로서의 긍지가 잠깐이나마 정신을 깨웠던 건가? 나 역시 다행이군. 그렇게 쓰레기와 싸운 건 아니었으니.”

“싸우다 말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너는 알 것 없다.”

예루리의 존재를 언급할 때 위대한 어쩌고 지껄인 걸 보면, 그의 봉인을 자의로 푼 것도 아니지 싶었다.

뭐, 그래도 그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도저히 용납되진 않았지만.

“무인도 아닌 놈과 계속 싸울 이유도 없군. 이제 끝내자.”

“이노오오옴! 나를 어디까지 무시할 셈이냐!”

화악!

회까닥 돈 크라수스의 흑염익이 더욱 커진다.

그뿐만이 아니라, 육체 역시 영향을 받으며 딱딱하고 시뻘건 피부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족화의 상징이었다.

―죽, 여, 버리겠다!

이빨이 뾰족하게 자라나고 턱관절이 변형된다.

대번에 인간의 형상을 벗어던진 부작용인지 성대로 발음하지 못할 정도였다.

“죽, 어, 라!”

오러로 형상화한 거대한 흑색 거검이 세상을 반으로 쪼갤 기세로 다가온다.

크라수스가 아까 전 보였던 초속의 참격.

콰과과광!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달려든 것만으로 주변에 충격파가 터져 나온다.

‘이성이 완전히 사라졌군. 의념으로 최소한의 반동 제어도 하지 못하고 있다니.’

그래도 위력만큼은 아까와 동일… 아니, 그보다 더했다.

참격이 아니라 그냥 몸통 박치기만 당해도 전신의 뼈가 모조리 으스러질 테니까.

‘영역 전개.’

네르하는 아까와 같이 영역을 마법사의 것으로 돌려 심상 각인 영역으로 변화했다.

츠츠츠츠!

대번에 공간 장벽이 생겨나 아까처럼 크라수스의 신형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간 장벽을 그대로 밀고 들어온다고?!’

완전히 막았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장벽이 서서히 밀리고 있다?

네르하의 영역은 크라수스의 신체를 약간 둔화시키는 것에 그치고 있었다.

‘쳇!’

네르하는 메모리 스택으로 준비해 두었던 방어마법들을 시전하며 그대로 발을 뺐다.

사도화한 크라수스의 육체가 이 세계의 물리적 법칙을 무시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의미였다.

콰아아아앙!

공간 장벽이 사라지자 크라수스의 신형이 그대로 벽에 들이박혔다.

“크윽! 크르륵!”

“이젠 완전히 괴물이 되었군.”

크라수스가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금 기검을 잡았다.

기색을 보아하니, 아마 방금 전의 기술을 다시 한번 쓸 거다.

‘조금 더 무인으로서 역량을 겨루고 싶었는데, 아쉽군.’

네르하의 주먹에 회색의 기운이 깃든다.

그와 동시에 크라수스가 다시금 자리를 박찼고.

―태극도!

뻗어나간 원초의 혼돈이, 그대로 달려오는 크라수스의 전신을 삼켜버렸다.

* * *

정점에 도달한 무인들의 싸움이라기엔 너무나 시시하게 끝나버렸다.

그렇게 크라수스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비참하게 소멸했다.

네르하는 살짝 허탈함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쯤이면 루시아가 기사들과 만났겠지.’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든다.

분명 계산상 이곳까지 내려올 시간은 충분할 텐데, 주변엔 기사들의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다.

‘바깥에 뭔가 일이 생긴 건가?’

네르하가 상황을 추측하려고 머리를 굴리려던 찰나.

―이놈. 감히, 나의 사도를!

금속을 긁어대는 듯한 불쾌한 목소리와 함께, 땅 밑에서 아지랑이처럼 검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아지랑이는 이윽고 자그마한 새의 형태를 띄우며 나르하와 마주했다.

“네가 마왕 예루리로군.”

―그래, 비슈나르를 봉인한 인간이여.

예루리는 네르하의 생각보다도 더욱 분노하며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인간. 저주받아 마땅한 생명체여!

뭐가 그리 억울한지, 예루리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네르하에게 분노를 토해냈다.

―네놈도 ‘그자’와 손을 잡고 네르반 님의 목을 노리는가!

‘……그자?’

―내 절대 네놈을 네르반 님에게 보내지 않겠다!

“이봐, 그자라니, 대체 누굴 말하는 거냐?”

―나를 끝까지 기만하느냐, 혼천의 문을 통과한 이방인이여! 네놈의 뒤에 있는 저놈을 말하는 것이지 않느냐!

“……?!”

홱!

네르하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서, 허리춤에 칼을 맨 금발의 청년 하나가 멋쩍게 웃고 있었다.

“아, 들켰네.”

‘어, 어떻게?’

네르하는 경악했다.

분명 기감을 펼쳐 주변을 훑었다. 분명 생명체라고는 크라수스를 제외하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청년이 네르하에게 가까이 오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원탁의 기사에서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아렌 루 케프렌입니다. 뭐, 지금은 ‘엘’ 케프렌이지만, 저는 루 라는 미들네임이 마음에 들어서요. 하하하.”

실없는 기색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대공자, 아렌이 네르하의 눈앞에 나타났다.

“뭐, 이런 경우엔 ‘오랜만’, 이라고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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