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격변 (1)>
나이우스 엘 케프렌은 결국 케프렌 가문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검의 성지를 지키던 라이먼과 라실론, 두 원탁의 기사들은 분명 터무니없이 강했다.
하지만 그들은 세뇌된 직계들을 상대로 독하게 손을 쓰지 못했고, 결국 치명타에 가까운 중상을 입고 포획되고 말았다.
“찾았다.”
성지를 장악하자마자 나이우스는 가장 먼저 케프렌의 가주를 상징하는 성물, 성검 ‘라 케프렌’을 찾기 시작했다.
애초에 역대 가주들은 성검을 실제로 사용하지 않고 과시용으로 보관하다 보니 찾는 것 자체는 매우 쉬웠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치이이익!
“큭! 역시 사용할 수는 없겠군.”
나이우스는 다급히 성검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손잡이를 잠깐 쥐었을 뿐인데도 손바닥이 불에 지져진 듯 익어버린다.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이미 마족에 가깝게 변질된 만큼, 성속성의 성물은 이제 더 이상 나이우스에겐 인연이 없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흥, 어차피 필요한 건 인장뿐이니.”
마치 신 포도를 보는 듯한 여우의 시선으로 나이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근처에서 대기하던 아녜스가 성검을 집어 들었다.
마기에 잠식당하긴 했지만 정신이 세뇌되었을 뿐, 영혼 자체는 인간의 것이라 성검의 힘을 끌어내지만 않으면 화를 입을 일은 없었다.
“성검의 인장을 찍어 로엘 소드에 존재하는 기관 모두에게 보내라. 전대 가주이신 크라수스 엘 케프렌께서 다시 가주 직에 오르셨으니 복종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움직이진 않겠지.”
가주가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성지를 장악한다고 곧바로 케프렌을 얻을 수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이우스에겐 그 정도 정신머리는 있었다.
애초에 성지는 중심이 되는 건축물을 제외하면 사방이 뻥 뚫려있어 방어에 적합한 지형이 아니었다.
다만 그 와중 외성과 내성이 구분되어 있어 내성만큼은 확실하게 사수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성지 안쪽을 착실히 방어해라! 패배자들이 자신들의 병력을 이끌고 돌아올 것이다! 그것만 견디면 이번 혁명은 성공이니까!”
대답은 없었다.
자신을 따르는 반역자들 대부분은 자의식이 없었으니까.
“방어진을 발동시켜라!”
아무리 케프렌이 마법을 배척한다고 해도 마법이 구현되는 기본적인 이치마저 부정하진 않았다.
성지에는 마법 같은 복잡한 술식은 아니지만, 마나를 이치에 맞게 이용한 방어진이 존재했다.
그것도 오러 사용자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특별한 방어진.
안티 오러 쉘(Anti aura shell)이었다.
‘방어진이 활성화되면 놈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터.’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이 오로지 오러만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수단!
케프렌 역사상 반란이 일어나면 반란자 전원이 오러 능력자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방어진을 피하기 위해 나이우스 본인 역시 성지 내부에서 일을 벌이지 않았던가?
그때였다.
“도련님. 아니, 소가주님!”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 나이우스의 종복이 다급하게 그에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반역자들입니다! 반역자들이 성지 인근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나이우스는 다급하게 바깥 상황을 파악했다.
확실히 최소 수백에 이르는 병력이 일사불란하게 성지를 향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큭! 아렌인가?”
대공 라이먼과 총사범 라실론이 이쪽 손에 있는 이상, 이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권한을 가진 건 이제 아렌과 베하나스 뿐이었다.
나이우스가 느긋하게 명령을 내렸다.
“아렌에게 전령을 보내. 성물의 권위에 복종하라고.”
아무리 아렌이라고 해도 아직 정식 소가주 자리에 오른 게 아니다. 그런 만큼 성물의 권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이것을 거부하려면 원탁의 삼분지 이 이상이 동의하여 임시로 소가주 자리에 올라야 하는데, 현재 급박하게 돌아가는 케프렌의 상황으로는 절대 그런 빠른 의사 처리가 불가능했다.
“아, 아렌 대공자가 아닙니다!”
“뭐?”
“저 깃발은, 루, 루시엘라 공녀의 깃발입니다!”
“……!”
곳곳에서 들어 올린 금색의 깃발. 사나운 인상의 암사자가 검을 물고 있는 모습은 분명 1공녀 루시엘라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나이우스가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뭐야? 아렌은 어디 가고 왜 루시엘라가?”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치솟아 올랐다.
물론 괴물인 아렌보다는 루시엘라는 상대하는 게 훨씬 편하긴 하다.
하지만.
“그년은 분명 그분이 책임지고 죽이겠다고 하셨는데?”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루시엘라의 깃발은 대체 뭐란 말인가?
뿌득!
‘일이, 잘못된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그분’. 즉, 크라수스는 검제의 경지에 오른 검사이자 마왕의 힘을 직접적으로 얻은 사도.
지금의 크라수스는 가주인 마기우스가 와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럼 그자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대번에 크라수스에 대한 호칭이 ‘그분’에서 ‘그자’로 떨어졌다.
그때였다.
콰과과광!
“뭐, 뭐야?!”
천지를 강타하는 굉음과 함께 미약한 진동이 성지를 울렸다.
“뭐야? 왜 방어진이 흔들리지? 상황을 파악해라!”
나이우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성지를 감싸는 안티 오러 쉘은 무사히 발동되었다.
가장 순수한 자연기를 정제한 오러.
안티 오러 쉘은 그 자연기를 흡수해, 되려 방어벽의 강도를 올리는 엽기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만큼 오러에 직격 됐다면 이런 식의 굉음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반대쪽 방면에서 빠르게 보고가 올라왔다.
“오, 오러가 아닙니다!”
“오러가 아니라면 대체 뭔데!”
“마법입니다! 외부에서 마법이 쏘아지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순수한 자연기인 오러와는 다르게, 마법은 마나를 이리저리 가공하고 손질한 불순물의 결정체.
마법이 상대라면 안티 오러 쉘은 그저 조금 단단한 고위급 실드 마법에 지나지 않았다.
“대체 어떤 놈들이… 아!”
생각이 미친 나이우스가 불같이 화내며 고함을 내질렀다.
“라데우스!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놈들이 약속을 어겨?!”
* * *
“허허허, 잔뜩 퍼붓도록 해라. 어차피 책임져줄 놈들도 있으니까.”
검의 성지 바깥쪽. 지렌 라데우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 한 방 더 때려라 얘들아.”
“네, 장로님!”
라데우스 사절단들은 하나하나가 5레벨 이상의 고위 마법사.
그런 그들이 힘을 합치니, 못해도 7레벨의 마법 십여 개가 순식간에 완성되어 쏘아진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아케인 블래스터!”
“블리자드 허리케인!”
안전한 곳에서 충분히 마나를 모아 시전하니 그 위력이 나무랄 데가 없다.
이미 서른 발에 달하는 고위 마법이 발사되었다.
당연히 안티 오러 쉘의 강도가 눈에 띄게 약해진 것이 보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시아가 지렌에게 다가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협력에 감사합니다, 장로님.”
그 말에 지렌이 손을 내저었다.
“뭘, 내 인생에 케프렌의 성지에 이렇게 부담 없이 마법을 날려보는 건 처음이구먼.”
루시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이우스가 분명 성지의 방어진을 펼치고 농성에 들어가리란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방어진은 기사의 힘으로는 오히려 진의 힘을 강화시켜 주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루시아는 성 외곽에 배치된 공성 장비를 동원해, 시간이 좀 오래 걸리더라도 물리적인 방법으로 뚫어버리려고 했으나…….
“천운이로군요. 그 타이밍에 장로님과 사절단을 만난 건.”
루시아와 기사단들은 방어진이 형성되기 전, 네르하를 찾아 성지를 나선 라데우스의 사절단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루시아는 그 자리에서 미로 지하에서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뭐, 우리도 네르하 그 녀석의 위치를 쉽게 알아서 다행이지만 말이야.”
가벼운 말투였지만 지렌의 시선은 절대로 곱지 않았다.
“설마하니 일대일로 케프렌의 전대 가주와 싸움이 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
루시아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도움은커녕 자신은 네르하를 놔두고 전투지역을 이탈한 상황.
거기에 지금은 네르하를 놔두고 케프렌 내부의 항쟁을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지렌은 처음엔 루시아를 향해 살기까지 뿌리며 엄청나게 화를 냈다.
베하나스가 이러다가 전선이 더 늘어나는 게 아니냐고 진심으로 걱정했을 정도였다.
지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애초에 무모한 일을 벌인 셈이니 이렇게 된 건 그놈 자업자득이지.”
화를 가라앉힌 지렌은 네르하를 찾아나서기보단 처음 계획대로 루시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사태를 지켜보던 베하나스가 루시아에게 말했다.
“하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는 건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게 아닙니까? 전력을 쪼개 그쪽으로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그런데 그 말에 지렌과 루시아, 두 사람이 모두 반대를 표했다.
“쓸데없는 짓이야.”
“전력만 낭비하는 일입니다.”
“으으음!”
지렌이 한심한 눈으로 베하나스를 노려보았다.
“전대 가주 정도 되는 이의 전장이다. 너 정도 되는 고수가 아닌 이상 몇 명을 보내도 마찬가지야. 그렇다고 네놈을 보낼 수는 없지 않겠나?”
“크흠!”
“그리고, 이런 상황에선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전대 가주만 철석같이 믿고 있는 와중인데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지 않나? 그럼 우린 우리 할 일만 제대로 하면 돼.”
뭐가 됐든 크라수스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건, 네르하가 승리하지 못했다고 해도 크라수스의 발목을 잘 붙잡고 있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전대 가주가 상대라고 해도 그 괴물 놈이 질 거라는 생각은 되지 않으니까. 그 아렌이라는 놈이 변수이긴 하지만 말이야…….”
루시아의 얼굴에 수심이 찼다.
네르하의 무력을 믿긴 하지만, 아렌의 존재는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조커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판단이 되지 않는 존재.
그것이 바로 아렌이었다.
* * *
화악!
검붉은 강기가 화려하게 공간을 찢어발긴다.
‘패강(覇强)이군!’
형태는 조금 달라졌지만, 저 고유의 기세는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단 일격으로 수십에 달하는 맹의 절정고수들의 목숨을 앗아간 악마의 초식.
과거 무적권신이었던 본인조차 경지에 이르러 마지막 결전에 임하기 전까진 절대로 정면으로 받아치는 건 피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네르하는 그 패강을 정면으로 맞서며 주먹에 불꽃을 일으켰다.
“으아아아아!”
―융합기, 플레어 피스트!
이전 블레이즈 피스트의 개량형으로, 수마왕의 존재를 느낀 네르하가 그와의 정면 대결을 상정하고 개발한 새로운 융합기였다.
아렌이 휘두른 패검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는 불꽃의 날개와 부딪쳤다.
카가가가각!
기와 기가 충돌했음에도 금속이 갈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강렬하군요.”
플레어 피스트에서 튄 불꽃의 열기가 주변의 벽을 녹인다.
블레이즈 피스트를 수십 중첩으로 뭉쳐 날리는 기술인 만큼, 이 일격은 아렌의 패검기를 멋지게 상쇄해버렸다.
“멋지군, 위력만으론 8레벨에 근접하는 것 같은데?”
“별다른 수인과 캐스팅 없이 쏘아낸 걸 고려하면 그 효용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야.”
방금 전의 충돌을 지켜본 드래곤들은 네르하가 개발한 융합기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하지만 승부는 뻔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