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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215화 (215/237)

215화

<격변 (3)>

세월의 풍파가 살짝 느껴지는 30대 초반의 남성.

전체적인 선은 굵은 편이었지만, 잔잔한 눈매에 부드러운 인상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느낌이 있었다.

바스텔 로저 라데우스.

라데우스 가문 당대의 적자(嫡子).

갑작스러운 은거 전까지만 해도 라데우스의 후계 구도는 경쟁이라는 말이 불필요하다 여길 정도였다.

그냥 바스텔이 혼자 모든 이들을 압도했으니까.

마하가 대두하고 아르바가 헛된 야망을 품는 와중에도, 바스텔의 입지는 그야말로 철벽과도 같았다.

그 은거의 시간이 근 10년에 가깝게 지나고서야 간신히 흔들릴 정도로 말이다.

“바스텔 로저 라데우스?”

“아, 카이젤이 그렇게 자랑하던 그 첫째 아들?”

“초마인 놈에게 패배하고 폐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드래곤들은 감탄의 눈으로 바스텔을 바라보았다.

“헛소문이었군.”

“그러게. 당장 우리와 싸워도 지진 않을 거 같은데?”

“카이젤도 아니고 고작 수십 년 산 인간이 말이지.”

그들이 냉큼 그런 평가를 내릴 정도로, 은연중 바스텔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어마어마했다.

저벅!

아렌이 한 발자국 나섰다.

“바스텔 로저 라데우스. 은거를 깨고 동생을 구하러 오셨습니까?”

“…….”

“물론 정말로 그를 동생으로 여긴다면 말이죠.”

상당히 묘한 뜻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렌의 도발에도 바스텔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딸깍!

그는 오히려 품속에서 주먹만 한 유리병의 병을 따 그 내용물을 네르하에게 부었다.

아렌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힐링 포션입니까? 꽤나 귀한 걸 쓰는군요.”

“동생이니까.”

“그를 동생으로 인정한다는 건가요?”

“이상한 말을 하는군.”

바스텔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육체를 빼앗아 겉모습을 조종할 순 있어도 영혼에 각인된 기억까지 빼앗을 방법은 없다. 그건 당신 역시 잘 아는 사실일 텐데?”

“…….”

바스텔이 여기에 못을 박듯 한 마디를 더했다.

“당신이 오백 년 전과는 다른 사람이듯 말이야.”

아렌은 대답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마치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 같은 기색이었다.

“그렇다 해도, 원래 다른 이에게 갔을 인연을 우리가 강탈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죠.”

바스텔은 거침이 없었다.

“인과(因果)란,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다는 세상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 그렇기에 세상엔 만약이란 가정 따위는 없다.”

“하하하하!”

아렌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폭소했다.

그 표정엔 상대에 대한 나름의 경의와 칭찬이 담겨 있었다.

“거기까지 깨달았다면 더 이상의 말장난은 의미가 없군요. 바스텔 로저 라데우스, 역시 당신은 내가 인정한 몇 안 되는 천재입니다.”

“별로 기쁘진 않군.”

“아니. 지금이라면 예전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겠어요.”

후우욱!

아렌의 전신에서 삼색의 빛을 발하는 천마신공의 힘이 뿜어져 나왔다.

네르하와 싸울 땐 전력이 아니었다는 듯, 기세만으로도 지진을 일으킬 정도였다.

“어디, 싸워 볼까요?”

“괜찮겠나?”

바스텔을 냉담하게 대꾸했다.

“봉인에 영향이 갈 텐데?”

흠칫!

순간 허를 찔린 듯 아렌의 기세가 불안정하게 일렁거렸다.

“정당한 방법으로 봉인을 해제하지 않으면 빼앗긴 당신의 업은 돌려받을 수 없을 텐데도?”

“정말, 못 말리겠군요. 폐관하는 동안 정보는 착실히 모으고 있었다 이겁니까?”

아렌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급격하게 부풀었던 적의와 기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대번에 수그러들었다.

“뭐, 좋습니다. 여기서 무리하면서까지 당신을 죽여봤자 얻는 것도 별로 없으니까요.”

고개를 돌린 아렌이 드래곤들을 향해 ‘자, 철수합시다!’라고 외쳤다.

“흥, 싱겁군.”

키라네이드가 코웃음을 치며 수인을 맺었다.

로드급에 달하는 드래곤들이 제대로 힘을 썼는지, 저 거대한 석상이 통째로 들어갈 만한 거대한 공간 게이트가 열렸다.

그 모습을 본 바스텔이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네르하의 죽음을 막긴 했지만, 아무리 바스텔이라도 혼자서는 이 상황을 뒤집을 수단이 없었다.

“……라데우스와 케프렌이 너를 막을 거다.”

“후후, 과연 그게 가능할까요?”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이 세계의 기둥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라데우스와 케프렌, 이들의 힘은 분명 강하죠. ‘원래 세계’에 있던 내 종복들보다도 더.”

마법과 기술이 발달한 이 세계의 전력은 분명 중원의 힘을 훌쩍 웃돌고 있다.

특히나 수틀리면 대륙마저 지워버릴 대이적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라데우스의 힘은 아렌으로서도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마족들이 왜 케프렌을 먼저 노렸다고 생각하십니까?”

“뭐?”

“카이젤 아우구스트 라데우스. 그는 확실히 강하죠. 드래곤 로드조차 넘어서는 그 강함은 분명 제게 큰 위협이 될 겁니다.”

전성기를 넘어 역사상으로도 손에 꼽히는 강자. 그가 바로 카이젤이다.

그런데, 아렌은 왜 굳이 이런 말을 꺼냈을까?

잠깐의 고민 끝에 말뜻을 이해한 바스텔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네놈, 마기우스 가주를……!”

“이번 사건으로 대부분의 직계를 잃은 케프렌은 큰 혼란에 빠지겠죠. 방계와 분가들은 기회다 여기고 본가를 물어뜯기 위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겁니다.”

특히 지방의 제후처럼 군림하고 있는 원탁의 기사 중에선 아직 야망을 놓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누님에겐 좀 미안한 일이겠지만, 비 온 뒤 땅이 굳는다고 군주로서의 자질을 단련할 좋은 기회가 되겠죠.”

케프렌이 혼란에 빠지면 라데우스가 남는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봉기하는 마족들이 라데우스에게 창끝을 돌린다면, 천하의 라데우스라고 해도 아렌에게 눈을 돌릴 여력은 없어질 것이다.

분노한 바스텔이 소리쳤다.

“대체 어디까지 이 세계를 능욕할 셈이냐?!”

아렌은 짧게 대답했다.

“내 목적을 이룰 때까지.”

번쩍!

그 말을 끝으로 공동에 거대한 빛무리가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지자, 남은 건 황야를 생각하게 만드는 휑하고 넓은 대지뿐이었다.

* * *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정신이 들자마자 네르하가 한 생각이 이것이었다.

“윽! 끄으윽!”

마지막 순간, 영역이 깨지자 방어벽을 뚫고 날아오는 강기의 세례.

정신을 잃기 직전 단전과 심장에서 무지막지한 마나가 빠져나가던 것까진 기억이 난다.

‘내가, 살아 있었나?’

네르하는 팔다리에 힘이 제법 남아 있다는 걸 느끼며 의아해했다.

‘뭐지? 그 공격을 맞고 사지가 멀쩡할 리는 없는데?’

손가락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면 단순히 기절한 정도에 그친 수준이다.

아렌이 손대중을 했나 싶었지만 마지막에 봤던 힘은 절대 봐주거나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약하구나.’

아렌의 말마따나 영역을 펼치지 않고 싸웠다면 확실히 조금이라도 더 분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확실히 놈에게 미완성의 기술을 꺼내 들었다는 건, 그냥 자길 죽여달라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까.

‘영역도 영역이지만, 놈을 상대하려면 단순히 기술만 단련한다고 가능한 문제가 아니야.’

역량. 기본적인 역량!

힘, 속도, 기술의 정묘함.

그 모든 것에서 압도당했다.

설사 그때 영역의 심상을 완전하게 구현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놈은 그 모든 걸 비집고 들어와 일격을 날렸을 것이다.

‘좌절하지 말자.’

애초에 전생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그 격차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지금은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며 다음 복수전을 준비해야 할 때다.

“깨어났나?”

“으응?”

네르하는 귓가에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소리가 들렸다는 것.

그 말은 즉, 상대가 어마어마한 강자라는 뜻이다.

“어?”

상체를 일으킨 네르하는 앞에 앉아 있는 상대의 모습이 생각보다 익숙하다는 거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얼굴 자체는 낯익은 건 아니지만 특유의 은갈색 머리카락은 세상에서 오로지 한 혈족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누구지?’

젊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같은 세대는 아니다.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 형제인 아르바나 루드빅과 비교해봐도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인상이다.

그러고 보니, 딱 한 번이지만 이와 비슷한 인상의 존재를 만났던 기억이 있다.

네르하 자신이 아닌 ‘네르하’의 기억이었지만 말이다.

“바스텔 형님?”

“그래, 기억하고 있구나.”

“형님이, 어떻게 여기에?”

그 말을 내뱉자마자 후각이 돌아왔는지, 대번에 시큼하고 비릿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비릿함이야 흘린 피 때문이라고 해도 이 시큼함은 분명…….

대번에 사태를 파악한 네르하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이, 절 살리셨군요.”

“눈치가 빠르구나.”

바스텔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정체를 인증했다.

‘이건, 말로만 듣던 힐링 포션인가?’

치명상에 준하는 상처까지도 살아만 있다면 되살릴 수 있다는 기물.

가격은 둘째치고, 제조된 수량 자체가 아티펙트보다 희귀해 특별한 사정 없이는 입수하기가 매우 힘든 물건이었다.

먼 과거엔 이런 기물이 동네 잡화점에서도 아무렇게나 팔았다고는 하는데, 솔직히 믿기진 않는다.

‘진짜 이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지?’

바스텔의 은거. 즉 폐관 수련은 가문에서도 유명하다.

그가 최근까지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는 건 라데우스 가문에선 절대적인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그럼 지금 눈앞에 있는 바스텔은 대체?

“묻고 싶은 게 많겠지. 하지만 지금은 답해줄 수가 없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바스텔이 네르하에게 말했다.

“지금 내게 말해줄 수 있는 건, 그자를 막지 못하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점이다. 그자는 승산이 적은 도박에 이 세계를 판돈으로 걸려 하고 있어.”

“그건, 저도 동감합니다.”

“드래곤들은 아마도 일이 수틀리면 자기들이 개입할 생각으로 협력했겠지. 마신 네르반의 본체도 아닌 파편이라면 가능성이 있으리라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오산이자 만용이다.”

바스텔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게 깨어나는 순간 설사 없애는 게 가능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중간계의 모든 생명체는 치명타를 입을 것이다.”

그리고 아렌과 드래곤들은 그 피해를 너무 무감각하게 여기고 있었다.

“파편이란 건 단순히 힘이 나눠진 조각이 아니야. 마신의 의지 그 자체가 이 세상에 현신한 증거물이지. 파편이 크든 작든 상관없어.”

네르하는 의외라 생각하며 바스텔을 바라보았다.

이건 분명 세계의 비사 중에서도 최고봉에 속하는 기밀 중의 기밀.

대외적으로 은거한 바스텔이 이걸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실은 은거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었다.

“네르하, 이런 상황에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네게 제안할 것이 있다.”

“무엇입니까, 형님?”

목숨을 구명받은 만큼, 어지간한 제안이라면 전부 받아들일 생각이 있었다.

“이번 사태가 진정되면 나는 바로 가문으로 돌아가 대외적인 활동을 개시할 것이다.”

“어, 음…….”

이건 네르하에게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어떻게 마하의 기세를 좀 죽여놨더니만 후계 경쟁에서 최종 보스나 다름없는 존재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셈이었으니까.

‘어머니가 슬퍼하시겠군.’

현재 네르하를 지원하기 위해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로젤리아였지만, 바스텔이 나서는 순간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게 뻔하게 보였다.

그런데, 바스텔이 의외의 제안을 꺼냈다.

“그리고 가주님께 아뢰어 후계자 전쟁을 공식적으로 개최할 생각이다.”

네르하가 눈을 껌뻑였다.

후계자 전쟁?

사실 바스텔에게 있어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당장 모습을 드러내기만 해도, 장담컨대 지렌을 포함한 대부분의 장로가 바스텔 편으로 돌아설 것이다.

물론 카이젤이 네르하에게 한 약조가 변수가 되겠지만, 애초에 싸움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을 정도로 뱌스텔의 입지는 탄탄했다.

“너는 그 전쟁에서, 나를 꺾고 소가주가 되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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