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격변(4)>
자기를 꺾고 소가주가 되라고?
아니 그 전에, 무슨 의도로 이런 소리를 하는 건가?
“형님께선 가주의 자리에 미련이 없으십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
저 말투, 저 표정에 거짓은 없었다.
바스텔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많은 이들이 내 재능을 칭찬하며 가주의 자리에 오르길 원하고 있지만, 솔직히 난 누군가의 위에 있는 걸 싫어해. 차라리 조용한 곳에서 아무런 방해 없이 마법 연구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예전 누군가가 그랬다.
바스텔은 구도자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누구보다 마법사로서의 적성이 뛰어난 그는, 그렇기에 가주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내 운명에서 무작정 도망칠 수는 없지. 적어도 주변에 납득이 가는 형태로 승계의 과정 정도는 거칠 거다.”
“그 대상이 저라는 겁니까?”
“그래. 처음엔 마하를 점찍었다. 녀석은 야망도 있고 능력도 있어서 여자지만 훌륭히 라데우스 가문을 이끌어줄 거라 생각했지. 아르바는… 솔직히 속이 너무 검어서 좀 그랬어.”
“마하 누님보다 절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네가 전생을 각성하고 북방에서 성과를 거두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다.”
“……!”
바스텔은 어찌 된 일인지 네르하의 전생도 알고 있었다.
가주인 카이젤조차 몰랐던 사실을, 다른 누구도 아닌 외부와 연락을 끊고 은거했다던 바스텔이 말이다.
“형님, 저는…….”
“정체성에 대한 문제라면,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무엇이었든 지금의 넌 내 동생 네르하 라데우스니까.”
바스텔은 딱 잘라 말했다.
그 말의 이면에 기만의 의도는 없었다. 네르하의 ‘속’이 다른 이로 바뀐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바스텔은 무언가 확신을 가지고 네르하를 자신의 동생이자 혈족이라 인정했다.
그 내면에 기만이나 이용할 의도가 없다는 것이 느껴져, 네르하의 마음속은 진정으로 혼란스러웠다.
“내가 너나 아렌 루 케프렌에 대해, 가주님이나 남들보다 좀 더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걸 부정하진 않으마. 하지만.”
바스텔이 네르하의 양 어깨를 움켜쥐었다.
“적어도, 네가 라데우스의 가주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진심이다.”
“그렇, 습니까?”
“하나 그렇다 해도, 소가주의 자리를 네게 순순히 넘길 생각은 없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굳이 후계자 전쟁을 일으키려는 바스텔의 의도는 간단했다.
“왕의 자질을 가진 자만이, 이 난세에서 가문을 지켜낼 수 있다. 그리고 라데우스의 왕은 누구보다도 강인해야 하지.”
단순히 무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제국과 왕국, 그리고 케프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할 정치적 감각도 있어야 하고, 가문이 미래에 그려 나갈 비전을 제시해야 할 의무도 있었다.
바스텔이 손가락을 튕겼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나와 내 세력을 꺾어라. 네르하.”
“……!”
사막.
눈을 한번 껌뻑였을 뿐인데, 황량한 사막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작열하는 열기와 피부를 짓누르는 마법사의 의념.
이것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뿐.
“이 업을 이겨낼 수 있다면, 너는 진정으로 아렌과 대등한 시선에서 수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8레벨의 상징, 심상각인 영역.
바스텔은 당연하게도 이 영역에 들어서 있었다.
‘강하다. 무엇보다, 이게 저 사람의 끝이 아니야.’
무언가를 더 숨기고 있다. 그 숨기는 걸 온전히 끌어내는 건 네르하의 실력에 달려있을 것이다.
“도전하겠느냐?”
바스텔의 눈에는 진심으로 네르하가 자신을 넘어서 주길 바라는 열망이 느껴졌다.
게다가 바스텔은 자신만이 아니라 ‘세력’까지도 언급했다.
진정으로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지, 그 자격을 시험하겠다는 뜻.
그 정도는 되어야만 앞으로 다가올 미중유의 사태에 맞설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얻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겠습니다.”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주변을 압박하던 영역의 기운이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바스텔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다. 그렇다면 가문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으마.”
* * *
콰과과광!
약 한 시간에 가까운 일방적인 포격.
요격할 마법사 전력이 없는 나이우스 측은, 그야말로 일방적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을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해제됐다!”
오러를 방어할 목적이면서도 한 시간이나 시간을 번 안티 오러 쉘의 방어력은 분명 대단했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한 방어벽이라 해도 일방적인 공격엔 언젠가 구멍이 뚫리는 법.
영원할 것만 같았던 방어벽은 라데우스 마법사들의 꾸준한 공략에 기어코 무너지고 말았다.
“자, 우리가 할 일은 여기까지군.”
“감사합니다, 지렌 장로.”
“뭘, 다 대가 받고 하는 일인데.”
그 말마따나 차후 케프렌은 이번 협력에 대한 대가를 꽤 비싸게 지불해야만 했다.
“어차피 이제 땀내 나는 기사들의 힘 싸움이 벌어질 텐데, 우리가 할 일은 그리 없긴 하지. 뭐, 기껏해야 강화 마법이 고작이려나?”
지렌이 베하나스를 향해 익살스럽게 말했다.
“뭐, 적아를 가리지 않고 광역 폭격을 날려주길 원한다면 기꺼이 그리하겠네만.”
“……마음만 감사히 받죠.”
“그런가? 아깝구먼, 쩝.”
지렌은 진심으로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살짝 식은땀을 흘리던 베하나스가, 고개를 털며 루시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군. 전력은 충분히 모였습니다. 이 정도면 역도들과 정면으로 부딪쳐도 승산이 있을 겁니다.”
한 시간이란 시간은 루시아 측에선 황금과도 같았고, 나이우스에겐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는 게, 반역도 측에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고 있습니다.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아닐지.”
“아뇨, 그들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루시아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어,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시는지요?”
“승리를 확신했다면 오히려 치고 나왔을 테니까요. 우리와 달리 그들에게 시간은 독입니다.”
크라수스의 합류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터인 나이우스는,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그 말인즉, 어떤 식으로든 크라수스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정말로, 이긴 건가요?’
루시아는 감격스러운 눈으로 네르하를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불안 요소는 하나.
‘부디 아렌과의 만남에서 아무런 일도 없기를.’
루시아가 자신의 검, 그란디아를 뽑아 들며 외쳤다.
“합격진을 펼친 채로 돌입합니다. 상대는 전원 오러를 사용할 줄 아는 기사들. 개중엔 분명 로드 급에 근접한 실력자가 다수 있을 것입니다. 절대로, 긴장을 놓지 마십시오!”
“예! 주군!”
케프렌의 기사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루시아의 외침에 응답했다.
“전원, 돌입!”
추리고 추린 정예, 일천여 명에 달하는 기사들이 마나 소드와 오러 블레이드를 펼치며 성지를 향해 나아갔다.
안티 오러 쉘이 펼쳐졌던 경계를 넘어,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지에 진입했다.
“적이다!”
“차분하게 응전한다! 상대는 이지를 상실한 괴물들! 숫적 우위를 확실하게 이용해!”
성지에 진입하자마자 나타난 삼백여 명의 흑기사들.
이전 기습으로 성지에 주둔하던 정예 기사들을 거침없이 참살하던 그들이 다시금 나타났다.
“크르르륵!”
“크어어어어!”
그들의 검에 하나같이 검은색의 오러가 피어오른다.
그때, 뒤편에서 몰래 준비하던 베하나스가 기사들에게 외쳤다.
“던져라!”
그 말과 동시에, 후방에서 검 대신에 다른 것을 쥐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손에 든 걸 상대에게 던졌다.
“드래곤 킬러! 어디 맛 좀 봐라!”
루시아의 제안으로 준비해 온 것은 바로 대형 몬스터를 사냥할 때 사용하는 미스릴 실로 만든 그물망의 일종이었다.
그 강도가 드래곤 조차도 묶을 수 있다기에 붙여진 별명이 바로 드래곤 킬러.
시야 전체를 가리며 날아오는 그물망을 향해 흑기사들은 주저 없이 오러를 휘둘렀지만.
“크, 크륵?”
“커헉!”
그들의 오러는 드래곤 킬러의 망을 뚫지 못했고, 그대로 상대의 신형을 구속하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준비한 수가 통하자 베하나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러 블레이드라 해도 쉽게 끊을 수 없는 게 바로 드래곤 킬러의 내구성. 역시 주군의 말씀대로 전투 본능은 살아있어도, 전투 경험 자체는 완전히 사라졌군.”
그들에게 이지와 이성이 온전히 살아 있었다면 드래곤 킬러를 본 즉시 발을 빼버렸을 거다.
하지만 베하나스에게 지배당한 흑기사들은 전투 명령만을 주입받은 탓에 이런 식으로 변칙적인 대응엔 상당히 취약했다.
“확실하게 제압해라! 제압할 수 없다면 죽여라! 적들에게 넘어간 자들 때문에 아군의 희생을 늘릴 순 없다!”
루시아는 냉정하게 명령을 내렸다.
저들의 정체는 대충 짐작이 간다.
나이우스 혹은 다른 직계들을 따르던 세력들.
그들 하나하나를 따로 빼돌려 마기를 이용해 세뇌했겠지.
그들도 하나의 당당한 케프렌 무사들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비를 베풀 수는 없었다.
푹! 푸욱!
“컥!”
“크극!”
드래곤 킬러에 포획된 흑기사들은 하나씩 제압되어 정신을 잃거나 반항하다 목이 잘려 나갔다.
다만 300여 명에 달하는 숫자가 모두 포획되진 못했기에, 그 범위 바깥에 있던 흑기사들은 진압군과 무자비한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전황은 우리에게 훨씬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군요.”
“아직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저들의 진짜 전력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으니까요.”
“으음, 확실히!”
반역자들의 수괴, 나이우스와 세뇌된 직계들은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루시아는 상황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쉽사리 남은 전력을 투입할 순 없다. 나이우스가 원하는 건 한순간의 기세. 전력을 잘못 분산시켰다간 한 번의 기세에 전황은 뒤집어질 수 있어.’
지금 이 상황은 인내의 싸움.
나이우스가 참지 못하고 나서는 걸 받아쳐야 하는 싸움이었다.
그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던 때.
“저, 저길 보십시오!”
성지 저 안쪽에서 검을 든 한 인영이 전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 저분은?!”
상대의 정체를 알아본 기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루시아와 비슷한 긴 금발. 하지만 상대적으로 조금 앳된 얼굴의 소녀.
그 눈은 흐리멍덩하게 흐트러져 있지만, 기세만큼은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었다.
루시아가 이를 악물었다.
‘아, 아녜스!’
“크으! 아네시스 공녀!”
베하나스 역시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에서 굳이 아녜스 혼자 등장한 이유? 당연히 루시아의 멘탈을 흔들기 위해서일 것이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루시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케프렌의 이름 아래 살아가는 그들에게, 루시아와 아녜스의 돈독한 관계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휘부가 잠깐 당황하는 사이, 아녜스가 시커먼 오러를 내뿜으며 전장에 난입하기 시작했다.
그 기세는, 분명 왕(王)급에 근접해 있었다.
“죽여야 합니다.”
베하나스가 루시아에게 강하게 진언했다.
“정에 휘둘려선 안 됩니다.”
“…….”
베하나스는 다시 한번 강조하며 결단을 촉구했다.
이미 왕급 실력의 합류로 유리했던 전방의 싸움터는 점차 난장판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루시아의 머릿속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네르하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요?’
그는 북방에서 모든 것을 지켜냈다. 수만이 넘는 마물 군세와 공포와도 같은 마왕을 상대로 단 한 명도 잃지 않고 모든 것을 지키고 또 얻어내었다.
그 기적같은 그 모습을 보며, 루시아는 자신도 네르하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분명 난 당신처럼은 되지 못할 거라 했지.’
그때, 네르하가 뭐라고 했더라?
당시의 답은 제대로 기억이 나진 않지만, 네르하가 그 이후로 입버릇처럼 말하던 건 기억이 난다.
―너라면 할 수 있다, 루시아.
그 말이 떠오르는 순간, 루시아가 한 발자국 크게 앞으로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주군!”
베하나스가 기겁하며 루시아를 말렸다.
“나이우스가 노리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분명 싸움이 시작되면 나이우스는 전력을 동원해 주군을 죽이려 들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저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루시아의 눈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전 모든 걸 지켜내고, 모든 걸 얻어낼 겁니다.”
그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