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격변 (5)>
루시아가 검을 들고 나섰다.
베하나스는 루시아를 수행하면서도 조급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그 역시 나이우스의 군세를 직접 보았던 몸.
지금 상황이 너무나 무모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루시엘라 공녀님이시다!”
“우오오오! 공녀님께서 나오셨다! 모두 힘내라!”
하지만 전면에서 싸우는 부하들에게 있어, 우두머리의 합류는 그 자체만으로 사기를 드높이기 마련이었다.
무표정으로 오러를 뿌리던 아녜스가 심상치 않은 기세를 내뿜는 루시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녜스.”
“…….”
아녜스는 대답 대신 검을 겨누는 것으로 화답했다.
쾅!
이윽고 검에서 강렬한 기운이 흘러나와 루시아를 덮쳤다.
“큭!”
묵직한 일격을 받아낸 루시아의 신형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적어도 파워만큼은 지금까지 그녀가 알던 아녜스가 아니었다.
아녜스가 사나운 기세를 풍기며 루시아에게 돌진한다.
하지만 루시아는 그 돌진을 가볍게 흘리며 그대로 아녜스의 옆구리를 걷어차 버렸다.
이번엔 아녜스가 비음을 토하며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아무리 현재의 아녜스가 강해졌다고 해도, 루시아가 전력을 다하면 죽이지 못할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제압해야 해.’
루시아는 어디까지나 아녜스를 죽일 마음이 절대로 없었다.
하지만 저런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건 엄청나게 어려웠다.
팔다리가 끊어져도 달려올 게 분명했다.
북방에서 수많은 마물의 군세와 싸울 때도.
마왕와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도, 이 정도로 긴장한 적은 없었다.
‘미안해요. 당신의 힘을 빌리겠습니다.’
철컥! 철컥!
북방에서 딱 한 번 꺼냈을 때 이후론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갑주가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베하나스는 순간 갈등했다.
‘흐, 흑기사?’
같은 검은색이지만, 디테일에서 차이가 확연히 났다.
마계의 흑룡 이자카르의 비늘로 만들어진 갑주는, 투박한 흑기사들에 비해 용기사라는 이미지가 확연히 다가왔다.
저 안쪽에서 분노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놈, 루시엘라! 네놈도 마족에게 영혼을 팔았느냐?!”
그 말과 동시에 안쪽에서 다른 흑기사들이 튀어나왔다.
전부 케프렌의 직계들이자, 그녀의 형제자매들이었다.
“빌린 힘이긴 해도, 너처럼 추잡하게 영혼을 팔진 않았어.”
루시아가 냉소를 흘리고는 역날로 아녜스를 후려쳤다.
“컥!”
마치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낀 아녜스가 비틀거리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
검에 담긴 힘 그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아녜스는 어째서인지 별다른 반항도 못 하고 나가떨어졌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네가 알 필요는 없어.”
방금 루시아가 한 짓은 참격이 아닌 충격.
진동 계열 마법을 조합한 융합기의 일종이었다.
강철도 썰어버리는 오러의 파괴력이라면 그 충격량도 만만치 않았지만, 루시아는 그것조차 넘어 충격을 극대화해 제압용으로 개조해 버린 것이었다.
“으으… 쿨럭!”
그걸 직격으로 맞아버린 아녜스는 코피를 줄줄 흘리며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세뇌되었다 해도 적어도 한동안 일어서진 못할 것이다.
“죽여!”
쌔액!
대번에 루시아의 관자놀이로 쾌검이 날아들어 왔다.
5공녀, 밀레니아의 고속검이었다.
루시아는 아녜스 때와 같이 밀레니아를 제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세뇌상태라고 해도 학습 능력이 제로는 아니었다.
밀레니아는 교묘하게 루시아의 충격검을 피하며 급소를 노렸다.
관자놀이를 노리는 게 실패로 들어가자, 오러를 머금은 찌르기가 그대로 가드가 비어 있는 루시아의 심장을 향해 들어갔다.
까앙!
“어?”
밀레니아는 손아귀를 타고 돌아오는 반발력에 멍하니 한마디를 내뱉었다.
“어째, 서?”
손바닥의 근육이 찢어지며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검을 놓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밀렌. 그 정도의 오러로는 이 갑옷을 뚫을 수 없어.”
퍼억!
그 말을 끝으로, 밀레니아가 루시아의 검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
이자카르의 갑옷은 마왕 비슈나르의 공격에서도 루시아의 생명을 지켜줄 정도로 단단했다.
급수를 따지자면 능히 성유물의 레벨이 근접할 수 있을 정도. 어지간한 오러나 고레벨의 마법은 그 비늘의 방어력을 뚫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남은 직계들은 4공자인 엘비스를 필두로, 로비나, 데일런 이 세 명뿐.
그들은 아녜스와 밀레니아가 순식간에 당한 걸 보았는지, 바로 덤비지 않고 진을 치며 삼면으로 루시아를 포위했다.
‘쉽지 않겠어.’
저렇게 경계를 하면 피를 보지 않고선 제압하기 힘들다.
셋 모두 마기를 받아들여 잠재력을 폭발시킨 왕급의 기사들.
제압은커녕 자신의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인 것이다.
‘어쩌지?’
충격검의 단점이 있다면 장거리로 쏘아내기 힘들다는 점이다.
한 명에게 근접해서 검을 휘두르는 순간, 다른 두 명이 갑옷의 빈틈을 찔러올 것이다.
이럴 때 베하나스가 도와주면 좋겠지만, 그는 지금 저 너머에 있는 나이우스를 견제하느라 모든 신경이 가 있었다.
결국, 루시아 본인의 힘으로 이 사태를 해결해야 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검.
그건 충격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되려 검술의 극에 이르러 경지를 넘어서면 인간의 육체가 낼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해 법칙조차 넘어서는 검술을 구사하는 게 가능하다.
초속을 넘어서는 휘두르기로 싸리나무 잎을 아무런 피해 없이 훑을 수도 있고, 별다른 힘도 주지 않은 칼질로 강철을 깎아내 조각상을 만드는 게 가능했다.
의념의 검.
기사가 추구할 수 있는 검의 길에서도 정점에 이른 기술.
이것을 다룰 수 있다면 눈앞의 세 명을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루시아는 검의 미로에서 빠져나오기 전, 아렌에게 다음 단계에 대한 단초를 받았다.
다만 그렇다고 그걸 곧바로 재현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안 돼도 해야 돼.’
루시아는 자신의 재능을 믿었다.
천재의 영역을 초월한 괴물들조차도 자신의 재능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말인 즉, 자신 역시, 그 ‘괴물’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
스윽!
루시아의 눈앞에, 두 가지의 영역이 나타난다.
하나는 유형의 마력장이었고, 또 하나는 무형의 제공권이었다.
이 두 권역은 서로 겹치지 않고 따로따로 놀았다. 그렇기에 취사선택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두 가지를 모두 다루려면 오히려 하나를 다루는 것만도 못할 정도로 혼동이 왔다.
‘할 수 있어!’
그야말로 찰나가 영원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서, 루시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두 영역을 맞춰나갔다.
검과 마법의 영역은 서로가 힘을 합치기 싫다는 듯 서로 반발을 일으키며 오히려 멀어지려고 애쓰고 있었다.
쿨럭!
그렇게 반발이 일어날수록, 루시아의 내장이 진탕하며 입가에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이제 중간에 그만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자멸하느냐, 완벽하게 제어하느냐.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 남았을 뿐.
‘온다!’
루시아의 사정을 기다려주지 않고, 세 사람이 자리를 박찼다.
―파산검(破山劍), 철괴(鐵壞)
―라이트닝 스플래시
―혈광패검(血狂敗劍), 광무(狂舞)
각자가 자신의 비전, 혹은 금지된 검술을 펼치며 루시아를 죽이기 위해 날아들어 왔다.
그런 상황에서도, 루시아는 전신의 오러와 마력을 돌리며 필사적으로 영역을 제어해나갔다.
‘절, 대, 로! 포기 안 해!’
그렇게 세 자루의 검은 오러가 각자의 춤을 추며 루시아의 목덜미까지 다가왔을 때.
그 순간.
마력과 오러가 미친 듯이 폭주하는 그 가운데에서.
보이지 않는 제3의 영역이 마치 봉우리에서 깨어나듯 개화하기 시작했다.
‘복속시킨다!’
루시아의 손에 의해 깨어난 그 3의 영역은, 대번에 마력장과 제공권을 집어삼키며 하나의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루시아가 그 영역을 자각하자마자, 몸이 머리가 명령도 내리기 전에 자연스레 움직였다.
“……!”
“……!!”
사방을 모두 점유해 피하기엔 이미 늦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루시아는 마치 물 흐르듯이 그들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루시아의 신형이 번개같이 그들의 급소를 가격했다.
퍼퍼퍼퍽!
찰나의 순간 이루어진 교전. 그 모습을 바라본 베하나스가 경악을 내질렀다.
‘저, 정말 대단하다!’
방금 전의 움직임은 검왕이라 불리는 자신조차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그 말인 즉, 루시아의 경지가 자신을 확실하게 넘어섰다는 뜻.
하지만 정작 세 명을 제압한 루시아는 그다지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 낸 건 좋았는데, 이걸 압축시키기가 영 힘드네.’
분명 원래 자신이 있던 경지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는 건 확실히 자각했지만, 위의 위가 더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는 만큼 여전히 그녀는 배가 고팠다.
“루시엘라아아아!”
케프렌의 직계들이 허망하게 당하자, 결국 나이우스가 튀어나왔다.
등에 검은 화염의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는 그의 모습은, 흡사 경전에서 묘사되는 악마와도 같았다.
그러나 루시아는 그런 나이우스의 모습에 냉소를 지었다.
“겁쟁이 나이우스. 처음부터 모두와 함께 덤볐으면 승산이 있었을 텐데, 끝까지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는구나.”
“닥쳐라!”
크라수스를 제외하면 마왕 예루리의 권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만큼, 나이우스는 슬슬 인간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있었다.
크라수스가 지하에서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죽어! 죽으란 말이다, 루시엘라!”
나이우스가 미친놈처럼 검을 휘둘렀다.
확실히 앞의 직계들과는 달리, 나이우스의 오러는 끔찍할 정도로 강력하고 거대했다.
“이, 이런 미친!”
시야 전체를 가릴 정도로 내려찍어대는 수많은 오러의 소나기.
검왕의 경지로는 절대로 펼칠 수 없는 위력이었다.
“그래, 확실히 힘만큼은 제왕이라 부를 수 있겠네.”
군왕(君王)을 넘어선 제왕(帝王).
하지만 저건 온전한 제왕의 경지가 아니다.
의념의 검을 사용할 줄 모르는 제왕의 경지는 반쪽짜리일 뿐.
루시아는 실소했다.
‘나도 사용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뭐.’
그래도 지진 않을 자신감은 있었다.
루시아가 바닥을 차며 나이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이 미친년! 이런 공세에 스스로 뛰어든다고?!’
나이우스는 놀랐다.
촘촘하고 정교한 오러의 폭풍.
거기에 케프렌의 비고에서 몰래 익힌 금지된 검술로 펼친 것이기에 그 악랄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살을 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죽어라!”
나이우스는 이 일격에 루시아의 몸이 고깃덩이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 믿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져버렸다.
슥! 스윽!
“뭐, 뭐냐?”
대체 어떻게 빈틈을 찾았는지, 자신도 공략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 폭풍을 거스르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저, 저리 가!”
강제적이라곤 해도 검제의 경지를 맛본 나이우스는, 야매로나마 기사의 영역을 사용할 줄 알았다.
그 영역을 넓게 펼쳐 루시아를 밀어내려 했지만.
루시아는 되려 자신의 영역으로 나이우스의 영역을 상쇄하며 돌진의 가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거리가 일 미터 남짓 가까워졌을 때.
루시아가 서슬퍼런 미소를 지으며 나이우스를 향해 이죽거렸다.
“드디어 이렇게 만났구나, 나이우스.”
“으, 으아아아악!”
나이우스는 등의 칼은 물론이고 등에 펼친 날개까지 휘두르며 루시아를 노렸다.
하지만 공포의 질린 나이우스의 공격은 그저 발악에 불과했고.
서걱!
그대로, 루시아의 일격에 목이 잘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