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새로운 질서 (1)>
나이우스의 목이 허공에 튀어 올랐다.
탁한 검은 피가 세상을 범하듯이 흩뿌려졌다.
“이, 놈. 루시엘, 라!”
목이 잘렸음에도 나이우스는 죽지 않았다.
목 부근에서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머리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움찔!
이런 괴사는 천하의 루시아라고 해도 잠깐 움찔할 정도로 징그러웠다. 머리카락은 아직 재생되지 않았는지, 대머리로 재생한 나이우스가 루시아에게 덤벼들었다.
“크아아악!”
숫제 괴물처럼 변한 나이우스였지만 루시아는 방금 전보다 훨씬 상대하기 편하다고 느꼈다.
이성을 잃은 검사는 기교를 잃은 것과 같았다.
아무리 힘이 강해도 루시아의 손끝도 건드릴 수가 없었다.
파파파팍!
루시아가 한 호흡에 여러 번의 참격을 날려 나이우스의 몸을 확실하게 조각내었다.
순식간에 육편이 된 나이우스였지만, 마왕 예루리의 상징은 ‘불사’. 정말 전설상의 불사조처럼 나이우스는 끝없이 재생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루시아는 질색했다.
“진짜 괴물이 되었구나, 나이우스.”
“끄, 끄어어어…….”
성대가 갈라진 탓에 제대로 발성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육체는 착실히 재생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몇 분 되지 않아 육체가 완벽하게 수복될 터였다.
그런데 그때.
팟!
나이우스의 등 뒤에서 끝없이 타오르던 흑염익이, 갑자기 이유 없이 꺼져 버렸다!
“어라?”
그리고 거의 재생이 끝나가던 나이우스의 몸 역시, 마치 실 빠진 인형처럼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뭐지?”
게다가 나이우스만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여전히 격렬하게 싸우던 흑기사들 역시 나이우스처럼 갑자기 행동을 멈추거나 쓰러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어, 어어?”
“뭐, 뭐야 이 녀석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상 현상에 루시아는 물론 기사들이 당황해하던 찰나.
놈들의 육체에서 마기가 빠져나오더니 허공에 뭉치기 시작했다!
“……!!”
그렇게 뭉쳐진 마기의 연기는 거대한 새의 형태로 변하더니 하늘을 향해 포효를 날렸다.
―캬아아아악! 본체가 사라졌다! 감히 되도 않는 수작질을 부리다니!
저놈이 무슨 말을 하건, 루시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바로 저놈이, 이번 케프렌의 혼란을 주도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경지에 이른 기사들을 한 단계 파워 업 시킬 만한 놈이었으니, 그 강대함은 분명 마왕급에 걸맞을 것이리라.
하지만 상황이야 어쨌든, 놈은 치명적인 악수를 두었다.
바로 이곳이, 기사들의 성지인 케프렌의 중추라는 점이었다.
“기사들! 전원 적을 포위하라!”
루시아의 추상같은 호령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재전을 준비했다.
게다가 소요가 얼추 진정된 외곽지역에서도 놈의 거대한 모습을 보자 증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공격!”
루시아가 가장 먼저 앞장서서 놈에게 돌격했다.
“우와아아아!”
“적을 분쇄하라!”
“공녀님을 따르라!”
그 용감한 모습을 본 다른 케프렌의 기사들도 감격해하며 루시아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놈들은?!
갑자기 깨어난 예루리의 파편은 주변에 널려 있는 적들을 보며 당황을 금치 못했다.
1차 계약자 크라수스가 소멸한 상황에서, 놈의 정신은 2차 계약자인 나이우스에게 옮겨가 있었다.
원래는 단순한 힘의 파편으로 잠들어 있었지만, 드래곤들이 봉인 자체를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자 본체의 위기를 감지하고 자아가 깨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놈은 깨어난 타이밍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루시아의 유성검이 그대로 놈의 머리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 * *
“난리 났군.”
검의 미로에서 나온 네르하는 저 멀리서 벌어진 전투를 바라보곤 헛웃음을 내지었다.
예루리와 쏙 닮은 거대한 새와, 수백이 넘는 기사들이 혈투를 벌이고 있는 광경.
그야말로 영웅담이나 무훈시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지 않는가?
물론 네르하 역시 북방에서 그 이상의 전투를 수도 없이 치르긴 했지만, 아무래도 마법사의 전장과 기사의 전장은 그 감흥의 방향이 제법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네르하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었구나.”
“아, 지렌 장로님.”
지렌을 비롯한 라데우스의 사절단들이 네르하를 알아보고는 다가왔다.
“어째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크흐흐흐, 내 인생에 흔치 않은 즐거운 경험을 해서 그렇지.”
지렌은 눈치껏 성지를 빠져나온 이후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네르하에게 말해주었다.
“케프렌 놈들의 성지에 마법도 날려보고, 한 몫 단단히 챙기고, 이게 바로 일석이조지.”
“그, 그러시군요.”
네르하는 성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루리의 파편은 어지간한 마계 백작급에 필적할 정도로 강했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좋지 않았다.
아마 곧 토벌될 것이고 사태는 진정 국면으로 들어갈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귀동냥으로 들어본 말로는 소가주가 바뀔 것 같다던데, 아무래도 예상보다 더 이곳에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겠어.”
“아무래도 그렇겠죠.”
반란이 일어난 혼란스러운 상황이니만큼, 뒷수습을 위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그리고 라데우스의 사절단들은 새롭게 임명되는 루시아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서라도 소가주 임명식이 벌어질 때까지 이곳에 있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그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네르하의 사정을 나름 쿨하게 잘라낸 지렌이었지만, 지렌도 당사자를 눈앞에 눈 상황에서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으음.’
솔직하게 얘기해야 할까?
이 안에서 일어난 일은 지렌의 예상보다도 훨씬 심각한 일이었다.
특히 마신 네르반의 존재는 물론 예루리의 존재까지 라데우스에 숨겨온 만큼, 이게 밝혀지면 케프렌은 엄청나게 난감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지렌이 네르하를 좋게 보아도 가문 전체의 이익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걸 밝히면 아그란바드와의 거래나 아렌과의 거래도 있으니 적당히 얼버무려야겠군.’
물론 라데우스의 인간이 케프렌을 배려하는 것도 웃기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네르하는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을 대략적으로 각색해서 지렌에게 알려주었다.
“으음! 이야기는 들었다만, 정말로 크라수스가 마족과 손을 잡았을 줄이야!”
예루리의 존재는 넣되, 네르반에 대한 이야기는 빼버렸다.
아직 네르하로서도 불확실한 존재이니만큼 섣불리 그 존재를 입에 담아서 좋을 건 없었다.
그리고 아렌과의 결투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솔직하게 말했다.
“……뭐? 네가 졌다고?”
지렌은 아연실색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전력을 다했나?”
“나름 전력을 다하긴 했습니다.”
원초의 혼돈을 다루는 태극도와 그 외 비장의 기술이 몇 개 남아 있었지만…….
솔직히 그걸 꺼냈어도 이겼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허! 믿기지가 않는구나.”
네르하의 진면목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지렌은 네르하의 패배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대공자가 무슨 전설상의 검성이나 검신도 아니고.”
‘아마 그것보다도 더 강할지도 모릅니다.’
네르하는 속으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됐든 고생했다. 루시엘라 공녀가 소가주 자리에 오르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게 되니 잘된 일이긴 한데…….”
지렌은 방금 전 네르하의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그만한 자가 무슨 목적으로 마족 측에 넘어간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구나.”
“…….”
네르반에 대한 정보가 의도적으로 누락된 탓에, 지렌의 머릿속에서 아렌은 단순한 인류의 배신자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마기우스 가주가 죽는다고? 허허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믿을 수가 없구나.”
아렌이 사라지기 전에 은근히 넘겼던 정보.
마기우스 엘 케프렌의 죽음.
솔직히 네르하는 물론 지렌조차도 그 말을 믿기 힘들어했다.
아무리 그래도 마기우스의 곁엔 수많은 굳건한 기사들이 존재하고, 본인 역시 자타공인 대륙 최강의 기사라는 명성이 있었으니까.
‘뭐, 지켜보면 알겠지.’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지금 이곳에서 뭘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아니, 이미 일은 벌어졌고 이곳까지 소식이 오고 있을 수도 있겠지.
어찌 되었든, 케프렌의 본성 로엘 소드에서 있었던 엉망진창 벌어진 사건이 마무리를 맺었다.
* * *
네르하의 예상대로 예루리의 파편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물론 날뛴 장소가 장소인지라 성지를 비롯해 도시 곳곳이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그런 존재가 날뛴 것 치고는 사상자가 수백 단위로 기적적으로 적었다고 한다.(사실 만 단위의 사망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렌의 이탈, 루시아의 새로운 등극, 폐허가 된 성지의 재건 등. 마족들과의 대외적인 전쟁에 더해 케프렌은 여러 복잡한 문제를 한꺼번에 직면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어이! 나무를 여기로 옮겨!”
“그건 여기가 아니라 안쪽으로 갖다 놔야지!”
수많은 인부가 건설 자재를 나르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예루리의 파편이 날뛴 탓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케프렌의 성지는, 재건이 아니라 거의 재창조에 가까운 공사가 벌어졌다.
평소엔 명예와 권위를 따지던 기사들도 이번만큼은 얄짤 없이 재건작업에 동원되어 칼과 근육을 휘둘렀다.
그렇게 도시의 모든 이들이 바쁘게 계승 작업과 복구 작업에 한창일 때.
네르하는 케프렌 가문의 비고에 들러 그들의 금지된 비전들을 탐독하고 있었다.
사각! 사각!
비고의 안에선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네르하의 주변에는 이미 십여 권에 달하는 두툼한 비급이 쌓여 있었다. 개중에는 이미 한 번 겪어 봤던 혈광패검이나 루시아를 상대했던 직계가 펼친 검술도 존재했다.
이미 아렌의 정체가 확정된 상황에서 불필요한 일이긴 했지만, 네르하는 나름대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꺼림칙한 일이 남아 있었기에 굳이 비고에 들려야 했다.
‘후우.’
네르하는 읽던 것의 마지막 장을 확인하고는 책을 덮었다.
‘혹시나 싶었지만 씁쓸하군.’
네르하의 근처에 있던 것들은 전부 마공서였다.
혈광패검(血狂敗劍), 수라혈기공(修羅血氣功), 만사검법(萬邪劍法) 등 유명 마교의 무공들이 번역되어 있었고, 심지어 소수마공같은 대놓고 마기를 내뿜는 무공들까지 비치되어 있었다.
‘역시 이것들은 놈이 과거에 들여놓은 게 분명하다.’
문제는 500년 전에 나타난 놈이, 대체 무슨 과정을 거쳤기에 아렌 루 케프렌이 되었는지.
아니, 정확히는 어쩌다가 ‘아렌 루 케프렌’의 업을 짊어지게 되었냐는 점이었다.
‘놈은 확실하게 검사였다. 검사로서 단련하고 검사로서 끝을 보기로 작정했지.’
과거의 천마를 생각하면 검을 든다는 건 오히려 약해지겠다는 소리였다.
‘아니, 어쩌면 지금보다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일보 후퇴일 수도 있겠지.’
중원보다 훨씬 다양한 법칙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 검을 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때였다.
“도련님 네르하 도련님!”
“무슨 일이지?”
사절단에 속한 마법사 하나가 비고 바깥에서 다급하게 급보를 전했다.
“크, 큰일입니다! 케프렌의, 케프렌 가주가, 마족들의 손에 전사(戰死)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