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221화 (221/237)

221화

<새로운 질서 (4)>

라데우스와 케프렌은 대륙 전역에 광범위할 정도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영역은 기본적으로 제국이란 거대한 틀 내에서 구성되었기에 정확한 국경이란 건 정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라데우스 영역에 존재하는 성주들은 제국의 작위를 받으면서도 라데우스의 명령을 듣는 기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누구지?”

“마하 라데우스.”

“……?!”

“…….”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대공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와는 무슨 관계지?”

“무슨 관계냐니? 그걸 대놓고 말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지.”

“…….”

대공의 표정이 더 기묘해졌다.

마하 라데우스가 뒷구멍으로 마족과 결탁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진 않았다.

마족들을 무조건적으로 혐오하는 케프렌과는 다르게, 라데우스 놈들은 필요에 따라 흑마법사나 마족들과 거래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마족이 모습을 드러낼 줄은 정말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남부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지? 내가 주는 정보라면 대번에 숨통을 틀 수 있을 텐데?”

아스타로스가 가볍게 손을 흔들자 대공의 눈앞에 두툼한 서류 더미가 하나 놓였다.

대공은 그 서류를 눈으로 곁눈질하며 살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정보가 사실임을 눈치챘다.

“원하는 게 뭐지?”

“귓구멍이 막혔나? 이미 말했을 텐데?”

“고작 그 정도 대가를 원한다고?”

성주들의 지지가 얼핏 가치가 높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냥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후계 전쟁이 벌어지면 성주들은 각자 원하는 후계들을 지지하곤 하지만, 마법사들을 데리고 온다면 제대로 된 공성전도 하지 않고 문을 열고 항복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사실상 거의 도움이 되지 않고 명목만 존재할 뿐인 지지였다.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굳이 그걸 따질 생각인가? 네, 아니오, 둘 중 하나만 대답해라.”

아스타로스의 무례한 태도에 수하들은 상황도 잊고 인상을 찌푸렸다.

대공은 아스타로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긍정이지.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좋아.”

후두두둑!

대공의 눈앞에 두어 개의 서류뭉치가 추가로 떨어졌다.

전부 그녀가 마천회에서 수집한, 대륙에 숨어 있는 거의 대다수의 마족 및 마왕들의 정보를 정리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현재 상황에선 범인류적인 가치를 가진 무상지보나 다름없는 정보였다.

“그럼.”

짧은 인사를 끝으로, 아스타로스는 그림자를 타고 사라졌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수하들이 대공에게 달려들었다.

“일단… 방 바깥에 있는 놈들부터 전부 물갈이해야겠군.”

대공을 근접에서 호위하는 기사들의 어깨가 한순간 움찔거렸다.

천만다행으로 그들은 해고 대상엔 포함되지 않았다.

대공은 바깥의 마법사들이 마하와 연관이 있을 거라 강하게 의심하고 있었다.

이건 그들이 부정한다고 사라질 의심이 아니었다.

“마하 라데우스가 마족과 손을 잡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설사 이런 정보를 거래 대상으로 올렸다 해도, 마족을 직접 보내는 무례라니요!”

“그래. 빌어먹을 년.”

대공은 이를 갈았다. 거래라고는 해도 이런 식의 접근은 선을 넘었다.

“아무리 라데우스의 공녀라도, 감히 제국의 대공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대공,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약속을 지키시겠습니까?”

“약속은 약속이니까. 하지만!”

대공은 분노를 토해내며 일갈했다.

“라데우스 놈들의 영향력에 있는 모든 성주들에게 내 이름으로 전령을 보내라. 계승 전쟁이 시작되면 마하 라데우스를 지지하되, 단 하나의 지원도 하지 말고 다른 후계가 쳐들어오면 곧바로 갈아타라고.”

“네! 대공!”

“감히, 내게 이런 굴욕을 줘?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마하 라데우스!”

그렇게.

마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적을 하나 만들게 되었다.

그것도 상당히 골치아프고 끈적거리는 노회한 적을.

* * *

라데우스의 주도. 베리타스.

케프렌이 가주의 사망과 교체라는 대혼란기를 맞은 그때.

라데우스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대혼돈의 사건이 터져 나왔다.

그건 바로 10여 년 가까이 침묵하고 있던 바스텔 로저 라데우스의 복귀 선언과, 그와 동시에 진행된 후계 전쟁 때문이었다.

“바스텔! 정말 잘 결심했습니다!”

가문의 중진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엘 대부인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외쳤다.

평소 조용하고 묵직하게 행동해왔던 그녀가 이렇게까지 반응한다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시엘, 잠시 나가 있게.”

기뻐하는 그녀를 내보낸 카이젤은, 이윽고 자신의 큰아들과 일대일로 대면했다.

“그래… 케프렌에서의 일은 잘 마무리 되었느냐?”

바스텔이 쓴웃음을 내지었다.

“나름 은밀하게 갔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가주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요.”

“내 눈을 속이려면 10년은 멀었다.”

그 말을 바꿔말하면, 앞으로 10년이면 충분히 카이젤의 눈을 속일 수 있다는 소리였다.

“너는 예전부터 가주의 자리엔 관심이 없다고 내게 말해왔었지.”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리 급하게 움직이는 것이냐?”

“라데우스의 미래를 위해. 그나마 여유가 있을 때 움직여야 합니다.”

“……네르하를 위해서냐?”

카이젤은 바스텔이 소가주의 자리를 다른 이에게 넘길 생각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네, 전 네르하라면 충분히 어둠 속에서 라데우스라는 빛을 밝히리라 믿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카이젤이 드물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너는, 그 아이를 진실로 동생이라 생각하느냐?”

“…….”

이전 아렌 루 케프렌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던 말.

그 말인즉, 카이젤 역시 네르하에 대한 비밀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다는 뜻이 된다.

바스텔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아이는 제 자랑스런 동생입니다.”

“그러냐…….”

카이젤은 옅은 웃음을 내지었다.

“너는 그 아이에게 가장 거대한 장벽이 되어줄 생각이구나.”

“저 정도는 가볍게 넘어야, 아버님의 아성을 넘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넘지 못하면 어쩌게?”

카이젤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의 이런 가벼운 모습을 부인들이나 다른 장로들이 봤다면 눈을 비볐을 게 분명했을 것이다.

“뭐, 별거 있겠습니까? 제가 끝까지 책임져야죠.”

“나로서는 네가 그대로 가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만. 나조차도 그 나이에 8레벨에 이르진 못했다.”

카이젤은 대번에 바스텔의 경지를 꿰뚫어 보았다.

8레벨.

그것이 보여주는 상징성은 너무나 대단했다.

바스텔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정치가 싫습니다. 제가 가문을 이어받는다면 10년 안에 가문을 말아먹을 겁니다.”

“흠, 그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만, 네 결정이라면 존중하마.”

카이젤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벽이 된다고 해도 그게 너무 커지면 네르하가 넘어서지 못할 텐데?”

“음.”

“마하 측에 섰던 장로들은 대부분 넘어왔고, 아르바에서 네르하에게 넘어갔던 두 놈도 다시 네게 빌붙기 시작했지?”

그렇게 바스텔의 곁에 모인 라데우스의 장로만 무려 8명이었다.

장로들의 숫자로만 따지면 남은 후계들이 전부 연합해야 싸움이 가능할 정도로, 힘의 균형은 바스텔 쪽으로 급격히 기운 상황이었다.

바스텔의 표정에 미미한 떫음이 나타났다.

“어, 음… 사실 저도 이 정도까지 사람들이 모일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

원래부터 중립을 지키던 장로들은 그렇다 쳐도, 다른 이들에게 넘어갔으면서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것들은 대체 뭐하는 놈들인가?

가문에 그 정도로 기회주의자가 많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결국엔, 녀석은 절 넘어설 겁니다. 그 녀석은 그만한 능력이 있어요.”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우냐에 따라 가능성이 생기겠지만, 과연 어떻게 되련지…….”

카이젤의 걱정에 바스텔은 살포시 웃었다.

“앞으로, 세상은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그래, 어쩌면… 정말로 멸망할지도 모르지.”

마신 네르반이란 존재는 정말 그걸 실현할 능력이 있었다.

“저는 그들이 마신의 봉인을 푸는 데 약 3년이 걸리리라 보고 있습니다.”

신화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봉인 결계다.

아무리 드래곤들이 다수 덤벼들었다고는 해도 봉인 해제 후의 후폭풍까지 고려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걸린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구나.”

“네, 그 안에, 우리… 아니 인류는 싸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바스텔의 입에서, 천여 년 전의 비밀이 흘러나왔다.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국가권력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 전력을 모을 수 있는 집단. 그것이 라데우스와 케프렌. 두 가문이 지금까지 국가에 소속되지 않고 남아있는 이유니까요.”

* * *

케프렌의 가주 계승식은 정말 화려하게 치루어졌다.

안팎으로 많은 우환이 있었지만, 그렇기에 시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고 흔들리는 가문의 위상을 확고히 하려면 되려 대대적으로 행사를 벌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장관이군.’

거대한 홀 안에서 만인의 축복을 받으며 성검을 수여 받는 루시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여제(女帝)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장엄함을 풍기고 있었다.

그녀가 가문의 성검을 치켜들자, 케프렌의 상징 골든 글로리의 오러가 하늘 높이 솟구쳐올랐다.

“우와아아아!!”

“루시엘라 가주님 만세!”

“케프렌이여, 영원하라!”

네르하는 루시아의 오러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힘을 느끼며 쓰게 웃었다.

‘그새 또 벽을 넘었군. 하여간 천재는 천재라니까?’

네르하의 시선이 루시아를 둘러싼 원탁의 기사들에게 향했다.

‘그나저나 의외인데? 루시아를 거스르는 자들이 한둘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렌의 경고도 있고 해서 네르하는 딴 마음을 품고 있을 원탁의 기사들을 조심하라고 루시아에게 충고했다.

그녀는 네르하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들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주시했는데, 의외로 반란이나 이반을 일으키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쩌면 루시아의 눈조차 속일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겠어.’

객석에서 중앙 홀을 바라보는 네르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하지만 식이 끝나고 하루가 지났음에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은 여전히 없었다.

그리고 날이 저문 늦은 밤.

루시아가 네르하를 조용히 찾아왔다.

“라이먼 대공이 아렌 측에 있었던 원탁의 기사 네 명을 데리고 절 조용히 찾아왔어요.”

“뭐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아렌이 계획한 일이라고 하더군요.”

“모든 일이라면?”

“아렌의 이탈, 그리고 제 즉위. 새로운 케프렌의 탄생까지요.”

라이먼 엘 케프렌과 다른 기사들은 그야말로 오체투지를 하며 루시아에게 사죄를 청했다.

“황당하군. 그렇다고 자기들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텐데.”

“실제로 그들은 원탁의 기사 자리에서 물러나고 제게 모든 권한을 양도한다고 맹세했어요.”

네르하는 소름이 돋았다.

대체 어떻게 그들을 설득했기에, 그들이 권력을 포기하게 만들었으며, 또 어떻게 해야 이렇게까지 자기 뜻대로 상황을 주무를 수 있단 말인가?

‘황당하군. 무슨 세뇌라도 하지 않은 이상에야.’

그나마 다행인 건 그들이 세력까지 고스란히 루시아에게 갖다 바쳤다는 점이었다.

이제 막 신임 가주 자리에 오른 그녀로선 그들의 세력은 천군만마보다 더욱 든든할 것이다.

네르하가 피식 웃었다.

“한동안 얼굴 보긴 힘들겠군.”

“그렇겠죠. 혼란을 수습하고 피해를 복구하려면 1~2년은 족히 걸릴 테니까요.”

어지간한 가문이라면 복구는커녕 그대로 몰락해버릴 피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