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225화 (225/237)

225화

<라데우스 후계 전쟁 (4)>

레티안 라데우스.

바로 밑의 세티안 라데우스와는 쌍둥이 자매로, 가주 카이젤의 차녀이지만 실질적인 서열은 6번째에 속했다.

장녀인 마하와는 10살에 가까운 나이 차이가 나다 보니 제대로 된 차녀 대접을 받지는 못하는 인물.

하지만 레티안 라데우스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녀가 후계 경쟁에 관심이 없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그녀는 동생인 세티안을 지원할 뿐, 후계자가 되기 위한 대외적인 활동은 일체 하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였다.

“북방에서 이후로 처음 뵙는 것 같군요, 누님.”

“그래.”

어딘지 멍해 보이는 레티안은 네르하가 건넨 차를 망설임 없이 입술에 대었다.

호로록!

무언가가 목구멍에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 걸 보니 별다른 의심 없이 들이킨 모양이었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도 더 멍해 보이네.’

전에는 그래도 좀 인간미가 있던 것 같았는데, 북방에선 전시라 그런거고 사실 이게 그녀의 본모습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한동안 차만 홀짝거리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의할 게 있어서 왔어.”

“말씀하시죠.”

별다른 공치사나 인사치레 없이 화끈하게 본론부터 말하는 건 마음에 들었다.

“나와 세티안은 네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 있어.”

“……!”

“바멜은 끝까지 거부했지만, 솔직히 우리와 방계쪽 파벌이 빠진 이상 바멜 혼자 뭘 할 수 있는 건 없겠지.”

콕 집어 방계쪽 파벌을 얘기하는 걸 보니, 저들도 어느 정도 눈치챈 게 있는 모양이다.

“알고 계셨군요.”

“배커가 아직도 네 밑에 있으니까. 잘 대하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끝까지 똘마니 취급을 하니 오늘날 이런 꼴을 당하지.”

레티안의 말엔 바멜을 향한 약간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일단, 몇 가지 질문을 드리죠. 먼저 두 분의 행동엔 2부인의 동의가 있었습니까?”

2부인 유리아. 수여식 당시 흑마법사를 불러들여 수작을 부렸던 만큼, 그녀에겐 그리 좋은 감정은 없었다.

레티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머님까지 동의했다면 바멜 역시 꿈을 꺾었겠지.”

“확실히 그렇겠군요.”

현재 장로들의 수는 모두 14명이다.

실질적으로 2부인 유리아 소생인 3명의 직계들을 뒷받침하는 장로는 고작 두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비율을 따져 보면 무려 8명이 바스텔의 편에 있었고, 아직 지지를 철회하지 않은 지렌을 포함해 네르하 편을 든 장로가 2명, 정보에 의하면 마하 역시 아마 2명을 붙잡고 있을 거다.

바스텔이 복귀한 것만으로도 세력들이 일거에 절반이 깎여 버린 셈이었다.

“미안하지만 장로분들 역시 우리의 뜻을 따라 주지 않았어. 그분들은 입장상 뒤가 없어. 밀려나면 아예 모든 걸 손에서 놓아야 하니까.”

“흠, 좀 아쉽지만 이해는 갑니다.”

그들은 2부인 유리아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장로직을 거머쥔 자들. 유리아가 밀려나면 함께 밀려 나갈 이들이었다.

“그럼 두 번째. 왜 마하나 바스텔이 아닌 저에게 오셨죠?”

“네가 좀 더 확실하게 우리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으니까.”

“흐음?”

“우린 장로직을 원해. 허수아비가 아닌 확실하게 실권이 있는 쪽으로.”

“장로라…….”

실질적으로 라데우스의 실권을 쥐고 흔드는 자들. 케프렌의 원탁의 기사들처럼 사실상 선제후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나 다름없었다.

“너도 알다시피, 현 장로들은 전부 직계 태생들이지만 과거에서부터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이 계파를 창설하여 힘을 쌓은 자들뿐이지. 사실상 방계나 마찬가지야.”

“그렇죠.”

“전대 소생의 직계는 오로지 네슬렉 장로, 단 한 분뿐이지. 그것도 상당한 예외로 취급받는 경우고.”

네르하는 레티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이해했다.

“라데우스의 직계들은 피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존재. 솔직히, 마하 언니나 바스텔 오라버니가 가주가 된다면, 우리가 맞이할 결말은 뻔해.”

죽거나, 죽는 거나 다름없는 삶을 살거나.

운이 좋아 목숨을 건진다 해도 그녀들이 당대에 권력이나 힘을 손에 넣을 일은 없을 것이다.

네르하는 짐짓 차가운 어조를 연기하며 말했다.

“저는 아니라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너는 뭔가 좀 다르니까. 북방에서부터 그렇게 느꼈어.”

레티안의 태도는 확고했다.

“어째서 그걸 확신하시죠?”

“넌, 네 밑에 있는 이들을 장기말처럼 보지 않으니까. 다른 직계들과는 다르게.”

“그거랑 이거랑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만.”

“아니, 다르지 않아. 넓게 보면 한 사람의 성향이 어떠한지 알 수 있으니까.”

“…….”

결과적으로 말하면 레티안은 네르하라는 인간을 제대로 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장로 자리를 주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장로, 장로라.’

다른 이들이라면 이런 아쉬운 상황에선 공수표 정도는 얼마든지 내밀 것이다.

하지만 네르하는 진지하게 승리 이후의 상황을 재었다.

현직으로 재직 중인 장로들도 후계자를 키우고 있고, 그들 중 일부가 몰락한다고 해도 그 자리를 채울 명분과 실력을 모두 갖춘 인재는 얼마든지 있다.

무엇보다 같은 세대의 직계들을 모두 장로 직위에 올리는 건 네르하로서도 반란에 대한 염려 같은 차후 정치적인 부담을 지는 일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네르하가 말했다.

“두 분 모두는 안 됩니다. 두 분 중 한 분만 장로 지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좋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레티안은 애초에 조건을 조율할 생각이었다는 듯, 네르하의 이 제안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는 듯했는데.

“하지만, 그 전에.”

“……?”

“네 실력을 직접 보고 싶어.”

레티안 치고는 꽤 의외의 제안이었다.

“북방에서 마왕을 잡은 네 모습은 참 인상 깊었지. 류레이아 님조차도 그때의 너보다는 밑이었을 거야. 하지만, 그건 네 힘만으로 보인 위력이 아니었지.”

“인정합니다.”

“하지만 바스텔 오라버니는, 온전한 8레벨에 도달했어.”

그 말에 네르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 년, 내게 오기 전에 바스텔을 먼저 보고 왔군.’

마하까지 찾아갔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바스텔에게 가서 의견을 타진한 후 거절을 당해 차선으로 네르하에게 찾아온 건 확실했다.

바스텔의 8레벨이 아직 공표된 게 아닌 만큼, 직접 보지 않는 이상은 알아챌 수 없었으니까.

‘어벙한 모습에 비해 상당히 계산적이군.’

섣불리 장로 자리를 두 개 다 줬다면 속이 꽤나 쓰렸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판은 벌어진 일.

네르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한 판 붙어보죠.”

* * *

그날 밤.

“이곳이라고?”

“네, 주인님.”

네르하는 저 정면에 보이는 을씨년스러운 건축물을 보며 혀를 찼다.

흉가, 아니 폐가? 사실 폐가라기엔 너무 크고 고풍스러우니 차라리 고성이라고 부르는 게 나을 것 같다.

“저곳에 루드빅이 숨어 있는 건가? 아니, 그 전에 도시 안에 저런 게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어?”

네르하는 살짝 감탄했다.

첨단 도시의 선두를 달리는 베리타스에선 정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성이라고 하기엔 좀 많이 작군. 귀족의 별장보다 조금 더 큰 수준 아닌가?”

네르하가 턱을 쓰다듬었다.

“아니, 그전에 베리타스 땅값이 장난이 아닌데, 몇백 년 전에나 볼 수 있는 성이 아직도 남아 있어?”

성벽에 별다른 마법적 처치도 없고, 양식 역시 현시대에선 볼 수 없는 고루한 방식이다.

이곳은 베리타스의 13구역, ‘플래티넘 에어리어.’

로열 에어리어나 프라임 에어리어까진 아니더라도, 그 다음가는 황금부지였으며 당연히 그 땅값은 무지무지하게 비싸다.

“알아보니 여기가 몇 안 되는 개발제한구역 중 하나라고 하더군요. 그, 그린벨트? 라고 하던데요.”

“개발을 제한해? 무엇 때문에?”

“그것까진 저도 잘… 명목상으로는 문화재나 환경의 보존 때문이라고는 하는데요.”

“쯧, 그럴 리가 없지.”

뭐가 됐든 분명 라데우스 혈족 중 누군가가 개입한 결과일 것이다.

이곳 베리타스에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자는 오직 라데우스의 혈족뿐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네?”

네르하가 저 을씨년스러운 고성을 가리키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루드빅이 숨어 있다는 저 성에서 너와 비슷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는 거냐?”

“네에?!”

“그림자 술식을 다룰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진짜 선을 넘어버린 건가?”

낮에선 느낄 수 없었던 진한 음마력(陰魔力). 멀쩡한 인간은 절대로 다룰 수 없는 힘이었다. 대번에 체내의 조화가 깨져 자멸할 테니까.

네르하처럼 속성 통합 같은 사기적인 고유 계통을 각성한 게 아닌 이상, 저런 음마력을 다루려면 음차원의 존재로 신체를 개조할 수밖에 없다.

“일단, 들어가 보지.”

겉모습과는 달리, 안쪽은 온갖 기계장치와 의학 장치들이 즐비했다. 세이라는 마치 스팀펑크 같은 걸, 이라고 중얼거렸지만, 네르하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의외로 성 내에 별다른 함정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성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크르르륵! 왔구나, 네르하.”

마치 옥좌 같은 거대한 의자에 앉은 루드빅이 전신에 링거를 꽂은 채로 네르하를 맞이했다.

“형님, 이게 무슨 꼴입니까?”

“보는 그대로지.”

낮에까지만 해도 나름 핏기가 있었던 그의 피부는, 이제 우유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창백해져 있다.

거기에 붉어진 눈동자에 라데우스 특유의 은발이 합쳐지자, 그야말로 고대에 나올 법한 흡혈종, 진조(眞祖)와도 같은 모습처럼 보였다.

루드빅이 자조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크, 크흐흐흐, 날 환멸하느냐?”

“음, 그다지?”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루드빅에게 끔찍한 비난을 퍼부었을 것이다.

음마력을 다루는 이종족으로서의 전직은, 사실상 흑마법사가 되는 것 바로 이전 단계나 다름없는 짓거리였으니까.

“도의적으로는 문제가 되지만 그렇다고 금지된 건 아니지. 비난을 좀 받긴 하겠지만.”

“흐, 역시 네놈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넌 마법사가 아니라 기사와도 같은 사고방식을 보였으니까.”

“그렇다고 딱히 보기 좋은 것도 아니오.”

중원식으로 따지면 외공의 한계를 넘기 위해 육체를 강시로 개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그렇겠지.”

루드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뚜둑! 뚜둑!

몸 곳곳에 박혀 있던 주삿바늘들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갔다.

“손등에 상처가 있군.”

“아, 이거?”

네르하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손등을 보였다.

“레티안 누님의 손속이 제법 매섭더군. 나름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강자였어.”

역량의 차이를 알았음에도 끝까지 집요하게 네르하를 몰아치던 그 모습은 네르하에게 제법 괜찮은 인상을 주었다.

“레티안을 꺾었나? 그럼 세티안 역시 세트로 네 밑으로 들어갔겠군.”

“역시 눈치가 빨라, 형님은.”

어떻게 반나절 만에 육체를 저렇게 바꾸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하루 이틀 준비한다고 저렇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묻지, 형님.”

그렇기에, 네르하는 별다른 기대 없이 루드빅에게 권했다.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나?”

“나야말로 묻고 싶군.”

루드빅이 실소하며 되물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네 밑으로 들어가리라 보느냐?”

“확실히, 내가 형님의 야심을 조금 저평가했어.”

네르하가 마력을 일으켰다.

“그럼 힘으로 꺾어버릴 수밖에.”

루드빅 역시 네르하와 마주하며 마력을 폭발시켰다.

“어디, 한 번 해보거라!”

“……!”

시야가 암전된다. 루드빅을 중심으로 낮에 보았던 거대한 그림자 덩어리가 공간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걸 마하나 바스텔이 아닌 네놈에게 사용할 줄은 몰랐는데…….”

씁쓸한 루드빅의 자조가 들려옴과 함께.

심상각인영역

천년성(天年城), 블라드 체페슈

낮과는 확연히 다른 거대한 그림자가, 어느새 성 전체를 집어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