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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227화 (227/237)

227화

<라데우스 후계 전쟁 (6)>

과거의 뱀파이어들은 지금과는 달리 음지에 숨어 살지 않았다.

성유물들이 대거 제작되었던 고대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인간의 왕국은 성세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제국과 함께 영광을 함께한 마법은, 신비를 잃고 극단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드래곤들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기 전인 약 천오백 년 전까지만 해도, 마법사들은 지금처럼 높은 수준을 구가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기초적인 점성술이나 정령술 등을 기반으로 귀족의 조언자 역할에 그쳤을 정도.

그런 시대에서 현시대 마법사들의 위치를 대체했던 이들은, 바로 고대 엘프와 뱀파이어 같이 선천적으로 마나에 특화된 행성의 토착 생명체들이었다.

그들은 고대 제국이 몰락하면서 비전을 잃은 인간의 마법사들과는 달리, 종족의 순수성과 힘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게 라데우스의 초대 가주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들은 수백 년 동안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천에 달하는 권속을 거느리며 대륙의 밤을 지배해 왔다.

그런 뱀파이어 중에서도 특출난 존재.

한 국가의 왕조차 예의를 다해야 하며, 그 어떤 이들조차 범접하지 못했던 시대의 절대자라 부르는 존재들이 있었으니.

현대에 와선 거의 전멸한 것으로 알려진 밤의 왕, 진조(眞祖)들이었다.

* * *

“완전히 진조와도 같군요, 형님.”

네르하는 변한 루드빅의 모습에 솔직하게 놀랐다.

심상각인영역, 블라드 체페슈.

단순히 지배자를 넘어 한 국가의 왕이기까지 했다는, 진조 중에서도 전설적인 존재.

지금 루드빅은, 마치 그 진조를 재현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어깨를 건드리지도 않던 머리카락이 마치 클로이아처럼 허리까지 쭈욱 내려와 있다.

‘외모와 인상이 완전히 변했군.’

라데우스 특유의 은갈색 머리카락은 그대로였지만, 일족 특유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딱 봐도 시뻘겋게 변해버렸다.

거기다 마치 교황을 연상케 하는 흰색 법복 역시 영역의 마력으로 짜여진 기물일 것이다.

“어서와라, 이곳은 나의 성이다.”

네르하는 루드빅을 경계하며 완전히 변한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아까의 그 성인가?’

구조 자체는 처음 성에 진입했을 때 기억해 뒀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주변은 고대 시대의 작품으로 보이는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고즈넉한 분위기였던 성 자체가 지금은 새롭게 지은 것마냥 생명력과 활기를 띠고 있었다.

’마치 이 성 자체가 과거로 역행한 것 같군.’

뭐가 됐든, 타인의 영역에 정면으로 노출되었다면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다.

“음마력의 힘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벽을 넘었습니까?”

“그래, 마력의 ‘특질성’으로 따지면 마기를 제외하면 음마력을 뛰어넘는 힘은 없으니까.”

음마력이 현시대에 천대받고 있다지만, 실질적으론 다른 힘과 비교해 밀도로 따지자면 위력만큼은 최상위권에 속한다.

“그렇긴 하죠. 하나 천적이 너무 많아 사장된 힘이 아닙니까?”

과거 마법이 그리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서야 거의 무적에 가까운 힘이었지만, 마법이 발전하고 라데우스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음마력은 점차 허점 많은 구멍 투성이인 힘으로 취급되었다.

“사장이라. 그건 어디까지나 시대의 흐름일 뿐. 음마력 자체의 특징이 사라진 건 아니야.”

스윽!

루드빅이 살짝 손을 들었다. 그러자 주변의 벽이나 바닥을 뚫고 창백한 무표정의 뱀파이어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읏!”

본의 아니게 영역에 휩쓸린 세이라가 주변에 나타난 동족들의 모습에 어깨를 움츠렸다.

하나하나가 엄청난 힘을 품은 자들. 하지만 뭔가 생명체로서의 불안전함이 느껴진다.

네르하는 그들을 날카롭게 살폈다.

“뱀파이어들을 끌어보았다기보단… 부하들이군요.”

“그래. 내 대업을 위해 모든 것을 건 자들이다.

“과연, 형님이 어떤 식으로 영역을 구축했는지 알 것 같군요.”

네르하의 눈가가 차가워졌다.

“인신 공양입니까?”

천오백 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

뱀파이어가 밤을 지배하는 원시 마법계에선 이런 식의 인신 공양이 흔하게 이루어졌다.

음마력은 생명체의 생기와 사기를 무엇보다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 힘.

고위 마법사들의 힘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매개체로, 음마력은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저들은 타인의 의지로 자신의 몸을 바친 건 아니다.”

“그렇겠죠. 저들이 자신을 공양한 대상은 형님이니까.”

루드빅이 선택한 건 마계 영역과 심상 각인 영역의 특징을 융합한 것.

이곳 영역의 풍경은 온전한 심상이 아니다.

수많은 부하들이 자진해서 영역을 구성하는 동력과 톱니바퀴가 되었다.

‘저들은 모두 영역에 동화되어, 살아있는 아티펙트처럼 변했구나.’

네르하는 탄식했다.

저렇게 자신들을 희생해 영역의 일부가 된다면 특유의 일회용으로 끝날 수 있는 단점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 대가로써, 루드빅의 부하들은 영혼까지 저당 잡혀 소멸할 때까지 힘을 뽑히는 배터리 신세가 되겠지만 말이다.

무인으로선 용납할 수 없는 사법의 영역에 있지만, 마법사로선 나름 이해가 가는 방법이긴 했다.

지금까지 8레벨의 대마법사들이 영역을 전개하면서 겉모습이 변한 경우는 없었다.

사실 겉모습이 변한다는 건, 그만큼 영역의 마력에 휘둘리고 있다는 소리.

마법사로선 나름 불명예나 다름없는 현상이었다.

“그렇다 해도 후회는 없다. 닿을 수 없었던 영역에 손이 닿았으니까.”

“…….”

확실히 아무리 그 자격에 이르지 못했다 해도, 편법으로나마 이렇게 영역을 구현했다는 건 충분히 자랑해도 될 업적이었다.

…그게 본인의 힘으로 온전히 이루었다면 말이다.

네르하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바 형님도 그렇고, 형님도 그렇고. 왜 자기의 가능성을 깎아내면서 미래를 앞당기려고 하는지 모르겠군.”

“참으로, 오만한 말이구나.”

루드빅의 눈에 서늘한 분노가 맺혔다.

“네놈은 자신이 천상에서 내려보는 신이라고 생각하느냐?”

“…….”

“꾸준히 정진하여 가능성을 열어낸다. 그래, 정석 중의 정석이지. 그게 왕도라는 건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불확실한 미래를 눈앞에 두고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시작부터 고목처럼 굳건한 마음을 타고나지 않는 이상,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에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변한 건 나 자신의 선택이다. 감히 네놈이 어설프게 동정할 만큼 어설픈 각오가 아니란 말이다!”

루드빅의 이런 선택은 그런 감정을 눈앞에 두고 돌파구를 찾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루드빅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다. 네놈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형님에게 별 감정은 없었지만, 지금은 나도 형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

무인과 마법사, 중간의 정체성을 지닌 네르하로선 머리로는 이해는 하지만 감성으로는 그다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살기에 가까운 투기.

그런 모습을 바라본 루드빅이 실소를 흘렸다.

“원래 나를 설득하거나 굴복시킬 생각이 아니었나?”

“그렇게까지 결단을 한 사람에게 설득이 통할 리가 없지.”

패권을 위해 자기 자신의 종족까지 바꿔 버린 자에게, 어설픈 대가가 통할 리가 없다.

“레티안 누님은 내게 평화로운 교체를 바랐지만, 반나절도 안 돼서 약속을 어기게 되었군.”

“그 어설픈 레티안이라면 그럴 만하지. 상처를 입는 것도, 입히는 것도 두려워하는 겁쟁이니까.”

네르하가 코웃음을 쳤다.

네르하의 입에서 루드빅으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벽을 눈앞에 두고 도망간 자가 누구보고 겁쟁이라는 건지.”

“뭐라?”

“8레벨이라는 경지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지금도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의 영역으로 취급되는 곳에, 아무리 축복받은 혈통과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네르하의 입에서 존대가 사라졌다. 손등의 상처를 루드빅에게 들이밀었다.

“아직 6레벨에 지나지 않았지만, 레티안 누님은 내 전력을 상대로 이런 결과를 냈지. 마법사로서 다른 쪽에 한눈을 팔지 않고 일념으로 돌파하려는 자만이 결과를 낼 수 있는 법이야.”

루드빅의 표정이 와그락 일그러졌다.

그야말로 모욕 중의 모욕.

하지만 네르하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장담하건대, 지금부터 나는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을 거다.”

“그 오만함을 안고 죽어라, 네르하!”

루드빅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루드빅의 수하들이 일제히 자신의 심장을 터트리며 피를 토해내었다.

―영역 전개. 뱀피릭 블러드 필드.

마계 영역이 부하들을 소환해 힘을 뒷받침해주듯, 저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영역 안에서는 수천 년 전 밤의 귀족이라 불리던 때의 힘을 재현하는 게 가능했다.

하나하나가 5레벨의 힘을 넘어선 강자들.

네르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좋아, 나도 마침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잘 되었군.”

네르하가 구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세이라.”

“네, 네 주인님!”

“준비는 되었나?”

세이라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하시게요?”

“널 데려온 이유가 이건데 안 할 수는 없겠지?”

네르하가 굳이 다른 수하들 모두 내버려 두고 세이라 하나만을 대동한 이유가 있었다.

세이라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

“뒷감당 할 수 없는 일은 하기 싫은데…….”

“그 모든 뒷감당은 내가 해줄 테니까 걱정 말라고.”

만담에 가까운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본 루드빅이 인상을 썼다.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거냐?”

“뭐긴? 네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려는 거지.”

음마력과 부하들을 이용해 영역을 구현한 것 자체는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루드빅은 이미 약점이 많은 음마력을 정석도 아닌 편법으로 사용한 만큼, 수준이 높아질수록 되려 그 약점이 극대화된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음마력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 아마도 선조인 카르안 라데우스의 연구 결과물을 습득했겠지.”

흠칫!

정곡을 찔렸는지 루드빅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기사와 마법사의 마나 연공법 융합을 시도했던 카르안 라데우스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육체를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괴짜였다.

당연히 생체 마공학적 연구에 일가견이 있었고, 뱀파이어 같은 이종족으로의 우화 또한 연구했던 기록이 있었다.

과거 네르하는 마나 연공법의 단서를 찾기 위해 카르안 라데우스의 연구 결과를 찾아보던 중 이 사실을 알았고, 그에 대한 대응 방법 역시 대략적이나마 알게 되었다.

스윽!

세이라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회수.”

콰아아아!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을 에워싸던 수하들과 뱀피릭 블러드 필드라 불린 영역의 피가 모조리 세이라의 손끝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본 루드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르하는 그런 루드빅의 반응을 이해했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비웃었다.

“겉모습을 흉내 낼 뿐인 흡혈종이, 진짜 진조 앞에 서면 어떻게 되는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겠지.”

“진짜, 진조라고?”

“그래. 여기 있는 세이라는 고대 진조의 피를 진하게 이은 순혈 뱀파이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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