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라데우스 후계 전쟁 (10)>
“선거 유세라고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남은 시간 동안 제국을 돌면서 도시 시장이나 요새의 장군들에게 저에 대한 지지를 요청할 생각입니다.”
“지지… 요청?”
로젤리아는 왜 그런 게 필요한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상계의 잔혹함과 라데우스의 힘의 논리 속에서 살아 온 그녀에게, 애초부터 선거 유세라는 개념은 생소한 것이었다.
“돈을 풀 생각입니까?”
무력으로 굴복시킨다, 아니면 돈으로 매수한다. 이 둘 외의 선택지는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해야겠죠.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말로 해결할 생각입니다.”
그 많은 이들에게 돈을 먹이려면 아무리 네르하나 로젤리아가 돈이 많다고 해도 무리다.
거기다 한 도시의 시장이나 장군쯤 되면 어지간한 액수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네르하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네슬렉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세라. 과연, 해볼 가치는 있겠군.”
“네슬렉 장로님?”
“그들은 이번 계승전의 당사자이지만, 인식은 그냥 외부인이나 다름없지. 우리뿐만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어.”
“맞습니다.”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하나는, 바로 현재 전장이 너무 넓다는 거야. 무엇보다 한 번만 점령하면 끝이니 배신에 대한 리스크 역시 최소화될 수밖에 없지.”
“그들이, 정말 우리를 따라줄까요?”
“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네슬렉이 비릿하게 웃었다.
“바스텔이나 마하 측은 성주들이 배신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점이야.”
그들에게 있어 성주들은 자신들의 말에 절대복종하는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정치적으로 회유해야 할 대상’으로 보질 않는 것이다.
네르하가 여기에 설명을 덧붙였다.
“순수 무력으로 싸우면 죽도 밥도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게릴라전이라 해도 한계가 있을 겁니다.”
바스텔이나 장로 몇이 네르하를 붙잡아 둔다면, 7레벨 후반급 실력자가 적은 네르하쪽은 절대 바스텔이 동원하는 마법사들을 당해낼 수 없다.
무엇보다 성 공략전엔 장로들 본인들이 직접 참가할 것이다.
“그래. 유세고 뭐고 그건 그렇다고 치지.”
지렌이 팔짱을 낀 채로 핵심을 짚었다.
“하지만 결국 최후의 최후엔 무력으로 승부가 날 수밖에 없다. 땅따먹기라고는 해도 후계 본인이 쓰러지는 순간 탈락은 확정이야.”
설사 성 하나만 놔두고 모조리 점령당했다고 해도, 남은 후계가 모조리 쓰러진다면 그 순간 후계 전쟁은 종료된다.
“끝까지 도망 다니면서 승부를 낼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그에 대한 대처는 있느냐?”
“네, 있습니다.”
네르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 모든 행동이, 바스텔 형님과 일대일로 겨룰 상황을 만드는 포석에 불과하니까요.”
“호오?”
지렌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내지었고, 다른 이들은 이놈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건지 황당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지금 상태로 일대일을 제안해 봤자 바스텔 형님은 당연히 응하지 않겠죠.”
아무리 대놓고 져준다고 해도 개연성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지금 일대일 대결을 제안한다면 바스텔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장로들 선에서 헛소리 취급당하며 잘려 나갈 것이다.
“최고는 적 세력의 괴멸이지만 적어도 위기감을 줄 수 있는 상황까지 몰고 가면 성공입니다.”
“자신은 있느냐?”
“…….”
네르하는 즉답하지 않았다.
사실 스펙상으로 보면 네르하가 바스텔에게 질 이유는 없었다.
육체의 강도, 마나의 양, 전투기술 등… 모든 부분에서 네르하는 바스텔을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
마법에 대한 깨달음.
바스텔의 심상 각인 영역이 주는 변수만큼은 네르하조차 계산하기 힘들었다.
그 무엇보다.
‘날 압도적으로 패배시킨 아렌 놈에게서, 바스텔은 내 목숨을 구해냈다.’
적어도 바스텔은 ‘그놈’에게 입을 놀려 자신을 구하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그놈이 말 한마디로 자신을 놔줄 만큼 자비롭지 않다는 걸 안다.
분명 나름의 실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터.
“그에 대한 준비는 충분히 할 생각입니다.”
다시는 전과 같은 추태를 부릴 수는 없다.
네르하는 계획은 세워 놨지만, 지금까지 일정에 차여 미뤄두었던 걸 이번 기회에 실행해 볼 생각이었다.
“좋아,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상황이 정리되는 국면으로 흘렀다. 그런 와중 로젤리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르하. 그렇다면 호위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설마하니 혼자 움직인다는 말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름 든든해진 녀석들을 데리고 다닐 생각입니다.”
“든든해진?”
뭔가 미묘한 말이었다.
“네, 마침 학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모두가 시험을 통과했다더군요.”
“……?”
앞뒤 상황을 모르는 로젤리아로선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네르하는 자신의 방에서 바깥 경치를 구경하며 생각했다.
‘사실 이번 외유는 한 가지 목적이 더 있긴 해.’
바로 며칠 전에 잘 아는 누군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바깥에 함정이 준비되어 있으니 잘 대비하라고.
그리고 네르하는 그 함정에 정면으로 발을 내밀어 힘으로 깨버릴 생각이었다.
그 함정의 내용은 분명 ‘마법사 개인’의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는 종류였지만, 미리 사정을 알았다면 충분히 파훼할 수 있는 종류였다.
‘선을 넘었구나, 마하.’
조급함이 눈을 가린 것일까?
‘마침 시험해보고 싶은 것도 있으니까, 잘 됐어.’
뭐가 됐든 이번 외유에서 마하 라데우스는 확실하게 끝장날 것이다.
* * *
후계 전쟁의 공식적인 발표와 함께, 라데우스 내부에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는 그리 크지 않지만,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개편’이었다.
“삼마자(三魔子) 제도가 오현자(五賢者)로 개편되었다고?”
류레이아, 머르딘, 마기온. 이 세 명의 대마법사들이 맡아온 최고 외부 고문 삼마자.
그런 삼마자의 이름이 오현자라는 이름으로 뒤바뀐 것이었다.
“그래! 이제 라데우스는 공식적으로 8레벨의 마법사를 다섯이나 거느리게 된 거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누가 그 자리를 채우는 거야?”
라데우스의 정보국 소속인 그 마법사는 자신의 친구에게 막 들어온 따끈따끈한 정보를 귀띔해 주었다.
“일단 북방 전쟁을 끝으로 사실상 반 은퇴한 거나 다름없는 류레이아님이 공식적으로 완전히 물러나시네. 그리고 그 자리를 후계자인 셀로미엔님이 대신했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남은 두 자리는?”
“한 명은 대륙 최고의 전쟁 용병이라는 명왕(冥王) 시저 루드벡!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북방 서리 일족의 새로운 족장이라던데, 클로이아… 라고 했나?”
“허! 엘븐 포레스트도 그렇고 세대교체가 일어났군. 하지만 클로이아라면… 그, 인질 아닌가?”
“그렇지. 이건 나도 꽤 의외였어.”
“내가 알기로 아직 나이 30도 되지 않았을 텐데, 정말로 8레벨에 이르렀다는 건가?”
“그건 나도 모르지. 다만 사실이든 아니든 그에 근접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라데우스는 절대 실력이 없는 자에게 과분한 감투를 주지 않으니까.”
“흠, 그건 그렇지.”
상대 마법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런 부분에서 라데우스의 철칙은 절대적이었고, 또 세간에도 그렇게 인식되고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됐든, 후계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현자 제도의 개편은 각 후계 세력에 적지 않은 파동을 일으켰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바스텔?”
2구역 로열 에어리어에 존재하는 시엘 라데우스의 안가.
그녀는 자신이 낳은 장남, 바스텔과 때아닌 다도를 즐기고 있었다.
“네르하가 이득을 많이 보았군요. 마하도 나름 괜찮게 이득을 보았고. 우리 쪽은 많이 불리해졌다는 점일까요?”
호로록!
뜨끈한 찻물이 목구멍을 넘어갔다. 은은한 차의 향을 느끼고 있는 바스텔의 모습은, 이 상황에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시엘이 조금 답답하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클로이아와 셀로미엔 엘마이넨은 그리 큰 위협이 되진 않습니다. 잘 해줘 봐야 간신히 영역을 구사하는 8레벨의 초입이겠죠. 하지만, 명왕 시저 루드벡은 이야기가 달라요.”
“알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시점에서 저를 넘어서는 실력자. 어쩌면 그를 앞세워서 저를 압박할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하지만, 우리 쪽에서도 그를 막아 세울 삼마자가 있지 않습니까?”
“……!”
그 말에 시엘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퍼졌다.
삼마자, 마기온 트라시스.
천뢰(天雷)라는 이명을 지닌 8레벨의 마법사로서, 단순 공격력으로 따지면 모든 8레벨의 마법사들 중 최강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그래요. 마기온이 있다면 시저 루드벡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겠죠. 하지만 방심하면 안 됩니다. 8레벨의 대마법사란 어떤 변수를 만들어 내도 이상할 게 없는 존재들이니까요.”
“걱정마시지요, 어머님. 절대 방심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대로였다.
바스텔은 절대 방심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방심과는 별개로 네르하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앞에 설지에 대해선 딱히 방해할 생각도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시엘은 그런 바스텔의 생각을 꿈에도 모른 채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마하 그 아이가 뜻을 꺾었다면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리가 없는데. 정말…….”
마하는 시엘의 설득을 끝까지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하 역시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죠. 원래라면, 그 아이를 전력으로 지원하고 있었겠죠.”
그렇기에 궁금해진다. 어째서 바스텔이 마음을 바꿔 먹었는지.
하지만 시엘은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뭐가 됐든 바스텔은 고작 30대의 나이에 8레벨을 돌파하고 온전한 영역을 시전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으니까.
석년의 카이젤을 보는 듯한 이 천재를 넘어선 괴물이, 누군가에게 패배할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만약. 정말 만약에.’
바스텔이 네르하에게 패배한다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네르하를 죽여야겠지.’
후룩!
시엘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찻잔을 홀짝였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눈 안에 깃든 어두운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며칠 뒤.
“네르하 라데우스가 베리타스의 문턱을 넘어 밖으로 향했습니다.”
“…….”
잠시 침묵하던 마하가 물었다.
“동행인은?”
“네이하 라데우스를 포함해 6명입니다.”
“뭐? 6명?”
“사실입니다.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특이전력은 클로이아 블루벨벳 한 명. 나머지는 전부 네르하 라데우스가 아카데미 시절 사귀었던 애송이들입니다.”
네르하가 움직이는 건 후계 전쟁이 본격적으로 개막된 이후라고 봤다.
그 직전 엘븐 포레스트의 이름으로 초대장을 보내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고맙게도 네르하가 먼저 움직여준 것이다.
“하, 적어도 백여 명 정도는 데리고 움직일 줄 알았더니. 우리 동생님의 간이 참 비대하기 그지 없어.”
옆에서 바멜의 이죽거림이 들려왔다.
마하는 고민하지 않았다.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고는 하나 더 확실한 기회가 눈앞에 왔는데, 그걸 놓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놈들을 움직여라. 네르하를 죽인다.”
“네, 주인.”
스스슥!
마하의 뒤편에 시립해 있던 그림자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