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236화 (236/237)

236화

<카르안 라데우스 (1)>

대수림의 어둠 속.

인간의 두 배 정도 되는 크기의 거대한 수인(獸人)이 죽은 것처럼 누워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처참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몸이 상해 있었다.

양팔이 죄다 잘려 나갔고, 꽤 길쭉할 거라 예상되는 꼬리 역시 반토막이 나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가 본다면 형벌을 받아 죽어 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군.

그런 수인의 근처에, 이 밀림지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쓴 자가 나타났다.

상대의 등장과 동시에 지금껏 죽은 듯이 있던 수인이 입을 열었다.

“베엘인가?”

―그래.

서쪽의 마왕 베엘. 그가 갑자기 대수림에 나타난 것이었다.

―레비아탄, 너만 한 자가 이리도 처참히 당했을 줄이야. 케프렌의 가주가 그렇게 강했나?

“……그는 나를 이렇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전사였다.”

―봐준 건 아닌가? 아무리 인간 하나가 강하다고 해도, 네놈은 우리 네 명 중 가장 많은 힘을 비축했던 존재였다.

“그 인간을 모욕하지 마라.”

수인, 레비아탄이 눈을 번뜩였다.

“바꿔 말하면, 그만 한 인간을 죽일 수 있었던 건 인간 측의 전력을 대폭 깎을 수 있었다는 뜻이니까.”

―흠, 여전히 믿기진 않는다만,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이곳에 온 목적이나 말해라. 네 제안은 거절했을 텐데?”

―초마인과 전쟁을 벌일 것이다.

레비아탄의 눈가가 살짝 씰룩거렸다.

“네놈 혼자서 그게 가능할 것 같은가? 그자의 곁에는 드래곤 로드들이 있다.”

현재 아렌과 협력하는 드래곤 로드들은 네르반의 봉인을 풀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겠지. 초마인 하나만 해도 내 목숨을 내놓아야 할 판이니까.

씨익!

어둠으로 물든 후드의 안쪽에서, 레비아탄은 베엘의 입가가 초승달처럼 구부러지는 걸 보았다.

―레비아탄. 너는 이이제이라는 말을 아는가?

“그건 무슨 뜻이지?”

―드래곤이 문제라면 드래곤으로 치워버리면 된다는 뜻이다.

“…….”

한동안 그 말을 곱씹던 레비아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처구니가 없군.”

―네놈이 초마인과 손을 잡았는데, 내가 드래곤과 손을 잡지 말라는 법도 있는가?

베엘의 직설적인 말에 레비아탄은 할 말을 잃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지금 상황에서 손을 잡을 만한 드래곤라면, 분명 그 빌어먹을 아그란바드겠군.’

마족들에게 있어선 통곡의 벽이자 반드시 없애야 할 존재.

레비아탄은 그런 존재와 손을 잡아야 할 만큼 현재 마족들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게 씁쓸했다.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뭐지? 중립인가?”

―맞아, 나와 초마인 놈이 승부를 볼 때까지 가만히 있어 줬으면 좋겠군.

“미안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스르륵!

레비아탄의 몸이 부유하는 것처럼 그대로 일어났다.

“초마인의 흉계가 무엇인지는 나도 잘 안다. 하나 난 네르반님께서 놈의 손에 당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결론이 난 문답이군. 난 그자의 이빨이 네르반님에게 충분히 닿으리라 본다. 예루리 역시 그걸 동의했기에 필사적으로 봉인의 해제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

두 사람 모두 네르반에 대한 충성심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 충성심을 표현하는 방법과 방향이 다르기에, 두 사람은 결국 반목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네놈을 막겠다, 베엘.”

―안타깝군. 그 상처 입은 몸으로 날 어찌할 수 있으리라 보나?

“크흐흐흐, 웃기지도 않는군. 애초에 사자를 보내면 되었을 일이거늘, 네놈이 직접 온 이유가 이것 아니더냐?”

―훗, 상처를 입었어도 본능은 여전하다는 건가?

베엘의 손에서 검은빛이 흘러나왔다.

스스슥!

그 검은빛이 닿은 자리에 베엘과 같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존재들이 튀어나왔다.

그 수는 못 해도 수백 개체 이상!

―초마인과 드래곤 로드들은 저 안쪽에서 봉인을 푸느라 정신이 없지. 너 역시 그들을 의식해 거리를 두었겠지만, 결과적으론 그건 네놈의 실수다.

“쉽게 죽어 주진 않겠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고 하고 싶군. 훗날 마계에서 보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베엘이 소환한 검은 괴인들이 레비아탄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콰과과광!

대수림 한복판에서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 같은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 * *

제국 북서부 군사 요새, 미투란.

미투란 성주와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후, 네르하와 일행은 바로 서쪽으로 빠지지 않고 미투란 요새에 머물렀다.

지금부터 갈 서부지역엔 바스텔의 영역이 밀집되어 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여유가 있을 때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윽, 스윽!

“후, 다 됐군.”

“이건, 대체 뭐죠?”

네르하의 수하들은 네르하가 갑자기 만들어 낸 마법진을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엄청나게 수준이 높은 마법진이군.”

“내가 아는 어떤 계통과 비교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이건 대체 뭐지?”

많은 이들이 정체불명의 마법진을 보고 흥미를 보이고 있을 때, 오로지 클로이아만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이고 있었다.

시약의 투여까지 모두 마친 네르하가 입을 열었다.

“허수 공간의 문을 여는 마법진이다.”

“허, 허수 공간?!”

대번에 일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 역시 마법사. 허수 공간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경지가 낮지 않았다.

경악하는 일행들을 향해 네르하가 선언했다.

“나는 이 허수 공간에 잠시 들어갔다 올 거다.”

“미, 미쳤어요, 오라버니?!”

네이하가 수하들의 마음을 대표하며 앞으로 나섰다.

“난 지극히 제정신이다.”

“잘 여행하다가 뜬금없이 허수 공간에 들어가겠다는데 뭔 제정신이야!”

네이하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수하들은 그 괴성에 되려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강해지기 위해서다. 만약을 대비한 일은 클로이아에게 맡해 두었으니 너희도 내가 돌아올 때까지 수련에 매진하고 있어.”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강해질 이유가 뭔데?!”

네이하의 눈에는 살짝 물기가 차 있었다.

네이하도 슬슬 깨닫고 있었다.

네르하의 말도 안 되는 초월적인 성장의 배경엔, 분명 저런 목숨을 내다 버리는 무모함을 몇 번이나 거쳤을 거라는 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잖냐.”

“뭐?”

“그 누구도 건들지 못할 정도로 강해져서, 다 함께 바닷가 절벽에 별장을 짓고 행복하게 살자고.”

“……!”

네이하가 입을 살짝 벌리며 네르하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잊고 있는 줄 알았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 네이하는 저 네르하가 네르하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네르하의 껍질만 뒤집어쓰고 네르하인척 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저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분명, 오빠가 분명해.’

네이하는 과거 조금이나마 네르하를 의심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저, 저기!”

네이하가 뭔가를 말하려고 할 때였다.

화악!

네르하가 마법진이 발동하며 정면에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공간 사이에, 원초의 혼돈이 드러났다.

오싹!

네이하를 비롯해, 클로이아나 다른 수하들까지.

저 원초의 혼돈을 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이성이든 본능이든, ‘나’라는 존재 자체가 저 너머의 공간에 접근하지도 말라고 경고를 날렸다.

그런 수하들의 반응을 보며, 네르하는 살짝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확실히 내가 느끼는 것과 녀석들이 느끼는 게 차이가 꽤 큰가 보네.’

이쯤 되면 단순히 경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본질적인 부분에서 무언가 큰 차이점이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럼, 잠깐 다녀오마.”

네르하는 그 말을 끝으로 허수 공간의 문으로 몸을 날렸다.

* * *

처음 네르하는 사실 굳이 허수 공간으로 몸을 내밀 생각이 없었다.

카르안 라데우스가 허수 공간에서 했던 일은 바로 육체의 단련.

하지만 성장기가 끝난 현재의 네르하는 넉넉하게 2~3년 정도면 육체가 전성기를 맞이하는 시기에 맞춰 신(身)을 완성의 경지까지 쌓아내는 게 가능했다.

그 생각이 뒤바뀌었던 건 아렌에게 패배한 직후, 정신을 차리고 바스텔과 마주하던 그 시점이었다.

아렌에게 당한 직후, 무적권신 ‘신무조’는 ‘네르하’의 기억을 모두 되찾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자(自)와 타(他)의 구분이 무의미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네르하든 신무조든 모두가 나 자신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자각하면서도 네르하가 허수 공간에 들어갈 것을 다짐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아무리 마족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시간을 벌었다 해도, 상황은 언제든 격변할 수 있을 만큼 불안정했고.

또 하나는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사용하게 된 융합기 태극도. 즉, ‘원초의 혼돈’에 대한 것을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융합기들을 어느 정도 따라 했던 다른 녀석들도, 도무지 태극도만큼은 감을 잡지 못했지.’

네르하 본인이 천재라고 인정한 루시아조차도, 금철유성이나 다른 융합기들을 흉내 낼 수 있어도 태극도만큼은 절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네르하는 손 위로 원초의 혼돈을 구현하며 생각했다.

‘이 힘의 정체는, 내 깨달음과 별개로 얻어낸 힘이라는 거다.’

그리고 그 과정은, 분명 두 번의 생을 거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일 가능성이 컸다.

아렌과 싸울 때 마지막 수단으로 태극도를 쓰지 않았던 것도, 이걸 써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챘던 것이었다.

‘윽! 생각은 했지만 압력이 상당하군.’

허수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뼈가 저릿저릿할 정도의 압력이 몸을 짓눌렀다.

‘그래도 버틸 만은 하다.’

카르안 라데우스는 처음 이 공간에 적응하기 위해 다중의 마법 장벽을 몸에 둘렀다던데,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육체의 단련이 덜 된 네이하나 클로이아가 왔다면 대번에 몸이 터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네르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상했던 회색의 공간이라기보단, 리브라에서 배웠던 우주인지 뭔지 하는 것과 닮았군.’

끝을 알 수 없는 시커먼 공간에, 그 사이사이 보석처럼 박혀 있는 천체들의 모습이 보인다.

‘허수 공간에선 괴물 같은 외신들과 그 수하들이 떼처럼 돌아다닌다던데, 확실히 지금 이곳이 안전지대는 맞는 것 같군.’

네르하는 지금 회색빛의 대지 위에 서 있었다.

지평선 너머 모든 것이 회색이었는데, 이 역시 리브라에서 가르쳐주었던 ‘달’의 대지와도 비슷했다.

‘연결도 안정적이고.’

시공간의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본래 차원과 연결한 마법진은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었다.

‘그럼 일단은 이 공간에 완전히 익숙해지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군.’

네르하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그대로 가부좌를 틀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중력 마법진을 통한 것보다도 훨씬 빠르게 육체를 단련할 수 있겠어.’

중력 마법진은 그 특성상 마나를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 건 물론, 계속해서 발동시켰다간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어 1시간 이상 작동시키는 게 불가능했다.

‘기록대로라면 운기 역시 제대로 될 것 같긴 한데…….’

네르하가 막 운기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낄! 낄! 낄! 낄!

철판을 칼로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영언이, 네르하의 귓가에 쑤시듯이 밀려 들어왔다.

―드. 디. 어. 왔. 구. 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