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저가 깡패임-15화 (16/53)

제 15화

누가 누굴 찾은 건지 (8)

1.

‘뭐든지 해도 좋다.’, ‘뒤탈은 없을 테니까.’라는 말은 ‘뭐든지 해도 괜찮다.’로 들릴 수 있었지만 그 속뜻은 겉에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만약 ‘저한테 무슨 짓을 하고 싶으면 뭐든 해도 좋아요. 뒤탈은 없을 테니까.’라는 말만 띡 던졌다면 ‘뭐든지 해도 괜찮다.’라고 해석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하안 씨가 그 말을 하기 전에 몇 문장의 말들을 더 꺼냈다는 것.

나를 믿지 않는다 말하고, 자기 인생엔 자신 혼자뿐이라고 말한 다음에 그 말을 꺼냈다는 건 분명 속내가 있다는 뜻이야.

아마 하안 씨의 그 속내는 내게 아주 치명적으로 작용할 터였다.

내가 들은 하안 씨의 과거사는 정말 끔찍했고 위험했으며 안도의 한숨을 뱉을 여유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각박했어.

그런 절망적인 삶을 수년이나 이겨내 왔던 사람이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한테 뭐든지 해도 좋다고 순순히 말할 리는 없지.

아마 뭐든지 해도 좋다는 말만 듣고, 뒤탈은 없을 것이라는 말을 일차원적으로만 해석한 뒤 음습한 욕망을 토해내려고 했다간 그 즉시 처리당할 것이다.

그 증거로 과거, 법보단 주먹이, 주먹보단 식칼이 가까운 뒷 세계에서만 볼 수 있었던 눈빛이 지금 하안 씨의 눈에서 번들거리고 있었으니까.

물론 처리한다고 처리될 내가 아니지만 적어도 하안 씨 본인은 날 처리하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여기서 정답은 ‘하긴 뭘 해요. 밤도 늦었고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서 주무세요.’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싸움을 걸어오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범죄자새끼밖에 없는 교도소에 있을 때도 이런 일은 흔치 않았는데. 깡패도 아니고 아이돌 연습생(아님)이 싸움을 걸어오다니.

더 이상 깡패는 아니고, 지켜야할 자존심도 없었지만 상대가 싸움을 걸어오는 것에 한해선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도 내게 이렇게나 중요한 사람이 걸어오는 싸움은.

그러니 나는 하안 씨가 대놓고 펼쳐낸 거미줄에 당당히 발을 들이밀었다.

“뭐든지······라고 하셨죠?”

“······네.”

그리 답하는 하안 씨의 얼굴엔 약간의 체념이, 그리고 적당량의 분노와 극한의 적의가 한 순간 일렁였다 사라졌다.

쩍 벌어진 범의 아가리에 얼굴을 들이미는 기분, 여기서 더 나아갔다간 분명 유혈사태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터.

하지만 나는 죽을 수도 있다는 걸 훤히 알면서도 하안 씨의 싸움에 당당히 머리를 들이밀었다.

“하안 씨. 하안 씨가 뭐든지 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정말 뭐든지 하겠습니다.”

“······.”

이번엔 대답하지 않은 하안 씨가 나란히 앉은 탓에 내 시야에선 잘 보이지 않는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쥐었다.

대체 뭘 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위험한 냄새가 풀풀 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오랜만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의 행동만을 주시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그러면 하안 씨.”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동시에 하안 씨의 얇지만 탄탄한 전완근에 확연할 정도의 힘이 들어갔다.

내가 추악한 욕망을 토해내는 순간 하안 씨는 손에 쥐고 있는 무언가로 나를 어떻게 해버릴 심산인 게 틀림없었다.

처음부터 함정인 걸 알아채고 있어서 망정이지. 만약 하안 씨에게 욕정을 품고 있는 놈이 이 상황에 처해있었다면 뭔지도 모르고 당했겠어.

움직이는 순간 하안 씨가 내게 무언가를 해올 것도 알고, 그 무언가가 위험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저 처음처럼 당당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싱긋 웃으며 하안 씨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이돌이 되어주세요.”

“!?······?”

입을 연 순간 하안 씨의 전신이 덜컥! 하고 굉장히 크게 움찔했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동그랗게 변해있었다.

진심으로 당황한, 이젠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가지조차 못하고 있는 하안 씨에게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제발요. 제 담당 아이돌 좀 돼주세요. 네?”

“······.”

“아 제발요! 저 이제 하안 씨 아니면 안 된단 말이에요! 아아아아아!! 해줘! 해달라고! 뭐든지 해도 좋다면서! 동의가 필요한 보호자도 없다면서! 그럼 하안 씨 혼자서 동의하고 다해도 태클 걸 사람도 없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해줘요! 해줘! 계약서에 사인 해줘엇!”

하안 씨와 처음 만났던 그때 그랬듯이 여전히 구차하고 찌질하게.

그러나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답은 거절이었다.

“······싫어요.”

“아.”

실망이 가득 담긴 외마디 목소리에 하안 씨는 결국 무표정을 깨뜨렸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어째서 아이돌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고 나발이고 싫어요. 아니, 싫지 않아도 못해요. 아이돌 같은 건.”

“왜, 왜죠?”

“내 인생이 절망이니까요.”

하안 씨의 대답에 나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도 하안 씨의 인생이 절망적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하안 씨에게 묻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인생이 절망적이라는 게 아이돌을 하지 못할 이유가 되진 못합니다.”

아이돌이 하기 싫어서 거절하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고 해도. 아이돌을 하지 못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어떻든 무슨 상관인데.

중요한 건 지금의 나고 지금의 내가 나아가야할 미래다.

나는 그 사실을 깡패시절과 7년간의 깜빵 생활을 통해 처절하게 깨달았다.

후회는 아무리 해봤자 후회에 불과하고, 오늘만 사는 사람은 머지않아 엎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는 자신의 인생이 절망적이라며 체념하고, 초면의 남자에게 재워달라는 부탁을 서슴없이 할 정도로 오늘만 사는 하안 씨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미래의 담당아이돌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려고 하면 올바른 방향으로 바꿔주는 것이 바로 매니저의 역할이니까.

하지만 내가 그런 깨달음을 설파하기 직전 창끝처럼 날아든 하안 씨의 말은.

“그런데 매니저님, 아이돌은 사람들을 행복하게해주기 위한 직업인데 저는 행복하지 않아요. 제가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사람들을 행복하게해줄 수 있겠어요?”

내가 하려고 했던 모든 말을 백지로 돌려버렸다.

“그럼 이제 대답도 제대로 했으니까. 아이돌 해달라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하안 씨는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들이 있는 복도로 걸어갔다.

나는 멀어지는 하안 씨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하지만 나는 전혀 아침처럼 밝을 수 없었다.

“행복하지 못해서 아이돌을 할 수 없다니. 그런 말을 들어버리면 아이돌 해달라고 떼도 못 쓰잖아.”

어젯밤 들었던 하안 씨의 대답은 그야말로 정론이었다.

자신조차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하안 씨 얼굴은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질 정도로 예쁜데. 그럼 그냥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하안 씨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거 아닌가?”

아니 내가 지금 뭔 개헛소리뻘소리를.

도저히 하안 씨를 포기할 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여버렸다.

이 집에 나 혼자 있었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었으니 헛소리는 자제해야했다.

“그래도 안 들렸겠지? 하안 씨가 계시는 방은 복도 끝에 있고, 그렇게 크게 중얼거린 것도 아니니까.”

“들렸어요.”

“앗. 조, 좋은 아침입니다.”

스스로 양반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하안 씨는 내 혼잣말에 답하며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귀도 밝네. 귀도 밝아. 무대에서 노래 부르면서도 팬들이 좋아 죽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겠다.

하안 씨가 아이돌을 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를 들어놓고도 나는 그녀가 가진 아이돌의 재능을 찾고 있었다.

물론 하안 씨는 내가 그러든 말든 아가씨의 파자마를 입은 채 터벅터벅 걸어 냉장고를 열고 냉수를 뚜껑만 따서 그대로 벌컥벌컥 마셨다.

웬만한 철면피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생수병 통째로 마시기.

입을 떼고 마시긴 했지만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분명 어제만 해도 이렇게까지 편하게 -물론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이지만- 있진 않았는데. 분명 거리낌이 없었다곤 해도 경계를 늦추진 않았는데 뭐지? 오늘은 왜 경계심이 안 느껴지지?

거기에 더해서 한 가지 더, 하안 씨에 대해 조금 의아하다고 생각할 게 하나 있었다.

그런데 어제 분명 느낌이 새벽에 나갈 느낌이었는데. 왜 계속 계시는 거지?

두 가지의 지나칠 수 없는 의문에 나는 물을 다 마시고 냉장고에 집어넣고 있는 하안 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하안 씨? 그······ 제가 진짜 다른 뜻은 없고 그냥 궁금해서 여쭙는 건데요.”

“네.”

“왜 안 나가셨어요?”

“······.”

내 질문에 하안 씨는 대답 대신 눈썹을 찌푸리고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고, 싸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내게 되물었다.

“불편하세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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