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화
누가 누굴 찾은 건지 (10)
1.
문자 한 통.
최하안의 평안을 산산이 깨뜨린 건 사진 한 장과 문장 한 줄로 구성된 문자 한 통이었다.
“······.”
조금이지만 풀어졌던 얼굴은 다시 싸늘하게 굳었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손톱이 살갗을 찢고 상처를 내어도 최하안의 표정은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았다.
그저 멍한 듯이. 혹은 무언가 포기한 듯 죽은 눈으로 문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
“······후.”
그렇게 약 10분 간 조용히 문자를 바라보고 있던 최하안은 짧게 한숨을 내뱉고, 소파에서 일어나 빨래건조대로 향했다.
건조대에 걸려있는 건 오직 최하안의 얇은 옷뿐.
최하안은 낡은 코트자락을 매만지다가, 이내 이를 까득 깨물고 다시금 문자를 확인했다.
그녀의 죽은 눈에 비친 건 바른길엔터의 건물이 찍혀있는 사진과 ‘우리가 들어갈까. 아니면 네가 나올래?’라는 짧은 메시지.
“······.”
무언가를 결심한 최하안은 ‘내가 나가.’라는 짧은 답장을 보낸 뒤 부드럽고 편안한 이별의 파자마를 벗고 거칠고 불편한 자신의 옷을 입었다.
거친 옷감이 살결을 쓸자 최하안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래, 이게 나지.”
한 겨울 하루의 꿈.
수년 만에 느껴본 편안함은 꿈처럼 허무하게 사라졌고, 이제 최하안에게 남은 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하안은 내색 하나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절망은 이젠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또, 이기러 가보자.”
유일한 아군인 자기 자신의 용기를 북돋은 최하안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절망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
언제나처럼. 혼자서.
2.
“형님, 뭐해요.”
[뭐하긴 훈련하지. 원래 우리는 일없으면 훈련인 거 모르냐?]
“모르죠. 저는 그저께 나왔고, 형님이 회사에서 뭔 일을 하는지는 제대로 못 들었으니까.”
[그건 그렇네. 그럼 한 번 들어봐라. 지금 한창 훈련중이니까.]
형님의 말대로 스피커 너머에서 거친 남자들의 기합소리와 미트 때리는 소리, 샌드백 치는 소리 등이 들려왔다.
소리만 들어도 땀내가 풀풀 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땀내 나는 남자들 진짜 극혐이야. 깜빵 PTSD 올 것 같네.
으랴으랴!하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바쁜가보네요. 아니, 아니지? 일이 없어서 훈련하는 거면 안 바쁜 건가?”
[이 새끼가? 뭐, 그건 차치하고. 그래서 왜 전화했냐? 진혁이 네가 용건도 없이 농담따먹기 하자고 전화를 했을 리는 없잖아.]
척하면 척,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잡담은 우리 사이에 전혀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전혀 변하지 않은 형님의 태도에 나는 씨익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아 그거요? 그, 제가요 어제 길거리캐스팅을 하러 길거리에 나갔는데요.”
[엉.]
“거기서 되게 예쁘고 반짝이는 사람을 만났거든요?”
[······여자?]
“네. 여자요.”
[쓰으읍······. 여자랑 길거리에서 만나서 먼저 말을 걸었다고?]
“네. 당연하죠? 길거리캐스팅이니까.”
[끄응······.]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대답을 들은 형님은 침음을 흘렸다.
‘혹시 두통이라도 온 건가?’하는 걱정이 한 순간 뇌리를 스쳤지만, 그런 걱정은 곧바로 연기처럼 공중에 흩어져 사라졌다.
형님 건강 걱정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도 없으니까 말이지.
무튼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형님이 침음을 흘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아무튼 그 사람한테 캐스팅제의를 했는데. 그 사람이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제 있었던 일을 곧이곧대로 전부 설명하고 나서야 나는 형님에게 묻고 싶었던 것을 입에 담을 수 있었다.
“그랬는데. 그 사람이 행복하지 않아서 아이돌을 할 수가 없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형님?”
[······.]
축약을 했음에도 길고 길었던 하안 씨와 나의 이야기가 끝나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을 때, 예상과는 달리 형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니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형님도 대답을 못한다고? 역시 나만 어려운 게 아니었어!’하고 안심했는데.
[······자, 잠깐만 진혁아. 내가 지금 귀가 이상한 건지 뭔지 모르겠어서 다시 한 번 물어보는 건데.]
아쉽게도 형님의 말문이 막힌 이유는 내 질문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그, 그래서 너, 너 지금 그 집에 여, 여여여자를 들여놨다는 거냐? 그것도 스물 두 살짜리를?]
형님의 말문이 막힌 이유는 나와 하안 씨의 이야기가 형님에겐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겐 그리 충격적인 일도 아니고, 나는 그냥 도움이 필요한 사람(그것도 엄청 예쁨)을 도와줬을 뿐이었기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었다.
“네. 집에서 쉬고 있을 걸요?”
귀여운 파자마 입고 침대나 소파에 누워있겠지. 편안하게.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안 씨는 차가운 인상과는 달리 의외로 굉장히 귀여운 사람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짓게 만드니까 말이야. 어? 이거 완전 아이돌 아닌가? 역시 하안 씨는 아이돌을 해야 해. 하안 씨가 아이돌을 하지 않으면 인류의 손해라고.
그래서 히죽히죽 웃고 있는데, 스피커 너머에서 천둥 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미, 미친놈아!!!!!!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뭐, 뭔 처음 만난 여자를 집에 들여!!!!!!!!]
“깜짝야.”
진짜 급발진이 따로 없는 형님의 호통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귀에서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그, 그래. 처음 만난 여자 집에 들인 것까지는 뭐 그렇다고 쳐. 만약 문제가 생기더라도 네 선에서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별이는! 별이는 어쩌고 집에 다른 여자를 들여 임마!]
그럼에도 형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차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내가 지금 있는 곳은 사무실 밖 복도.
업무시간이었고, 워낙 조용하고 일이 없는 회사여서 복도엔 나뿐이었다.
형님의 우렁찬 목소리와 오해를 살 수 있는 내용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사람이 나타나 들을 수도 있었기에, 나는 형님에게 진지하게 주의를 줬다.
“조용히 좀 말하세요 형님. 사람들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창피하게.”
[이게 지금 창피하고 자시고 따질 문제냐? 네 집에 다른 여자가 들어갔는데?! 너, 너 그거 별이한테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임마!!!]
“아가씨한테 걸리면요? 그거야 뭐······.”
내 집에 하안 씨가 들어와 아가씨의 파자마를 입은 채 나와 마주앉아 하하호호 웃으며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아가씨가 본다면······.
“어우. 어후우!”
그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 상상이 끊기고 몸서리가 절로 쳐지며 전신에 식은땀이 좔좔 흘러내렸다.
“사,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군요.”
아마 칼부림으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당연히 나나 하안 씨 둘 중 하나는 죽을 텐데, 아가씨가 나를 죽일 리는 없고 죽일 수도 없으니 죽는 건 하안 씨가 되겠지.
“아니, 아니지? 하안 씨도 그런 면에 있어선 꽤 치는 편이니까······ 의외로 아가씨와 좋은 승부가 될지도?”
[뭔 헛소리를 하고 자빠졌냐!]
확실히 내가 방금 한 소리는 헛소리가 맞았다.
하지만 굳이 하안 씨를 집에 들인 게 지금 형님이 그러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었다.
“근데 아가씨 해외투어 중이잖아요. 시작한지 일주일도 안 됐고. 한국에 들어오려면 몇 달은 걸리지 않나?”
왜냐면 아가씨는 지금 이 나라에 없었으니까.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형님은 추하게 늙은 사람······ 그래 꼰대처럼 귀를 닫고 자기 할 말만 뱉었다.
[그런 건 됐고! 아무튼 그, 그 뭐야. 안 한다고 말했다면서. 그럼 내보내.]
“네? 싫어요. 하안 씨는 꼭 아이돌이 돼야 하는 사람이라고요.”
[아니 한다고 한 것도 아니고 아예 딱 잘라서 거절했다면서? 행복하지 않아서 아이돌을 하지 못한다고까지 말한 사람한테 어떻게 시키려고?]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형님한테 전화한 거잖아요.”
하지만 꼰대짓을 한다고 꺾일 내가 아니었고, 형님도 그런 나를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깊게 한숨을 내뱉고는 드디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꺼냈다.
[에이씨······. 네 성격에 포기하라고 해서 포기할 리도 없고. 그래, 사실 행복하지 않아서 아이돌 못 하겠다는 사람에게 아이돌을 하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
“오! 역시 형님! 이게 연륜의 힘인가?”
[하지만 쉬운 방법도 아니지. 전화로 하기엔 좀 길어질 것 같은데 나올래?]
“그럴까요?”
[엉. 이제 슬슬 점심시간이니까 밥 먹으면서 이야기해줄게]
“그래요. 좋아요.”
[오냐. 그러면 그 할매국밥집 알지? 거기로 와라. 나도 지금 나갈 테니까.]
“예 형님.”
나는 전화를 끊고 주머니에 넣은 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마침 내려오네. 운도 좋지.”
타이밍 좋게도 마침 위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 싱글벙글 웃으며 아래층 버튼을 눌렀고.
위이잉-.
문이 열리자, 그곳엔 하안 씨가 서있었다.
“?”
참고로, 내 집은 바른길엔터테인먼트 건물의 4층에 있었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은 3층이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집에서 몰래 나가기? 그런 건 바른길엔터에선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