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화
누가 누굴 찾은 건지 (12)
1.
나는 떠나는 하안 씨를 붙잡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회칼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사람을 어떻게 내버려둬. 무슨 일을 벌일 줄 알고.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미행.
형님과의 점심약속도 취소하고, 나는 그렇게 하안 씨의 뒤를 밟았다.
그 결과 이렇게 된 것이다.
“저건 또 뭔데.”
“야! 너 뭐하는 새끼야!”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폐공장 속 세 깡패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를 바라보는 세 쌍의 시선은 적의로 가득했고, 그들이 나를 호락호락 보내줄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음, 하안 씨만 데리고 튀는 건 역시 무리일까나.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 건 원치 않았고, 예상보다 빠르게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하안 씨가 곱창파티를 열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하안 씨 손에 피 안 묻히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상황이 예상대로 되진 않았지만. 조금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뭐.
깡패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책상 앞에 회칼을 든 채로 서있는 하안씨를 보니 그녀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려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갑작스런 내 등장에 아무래도 많이 놀란 것 같았다.
괜찮다고 안심시켜주고자 손을 드는데, 하안 씨의 입에서 처음 들어보는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왜 왔어요? 아니 매니저님이 여기가 어디라고 와요!”
“오.”
지금까지 담담하게만 말했어서 몰랐는데. 성량까지 좋다고? 게다가 아까 칼 빼드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았어. 내가 멈추지만 않았어도 저 대가리새끼는 담가졌을 테지. 체력도 좋고 몸도 잘 써. 진짜 보면 볼수록 대단한 인재라니까.
나는 시즌 15185번째로 하안 씨가 아이돌을 해야 하는 이유를 느끼며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 하안 씨가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좋겠어서 싱거운 농담을 던졌다.
“그 회칼 돌려받으러 왔죠. 꽤 비싼 거거든요.”
“네?”
“그리고 그건 요리할 때 쓰는 물건이지 사람 쑤시는 물건도 아니라. 내 칼을 흉기로 쓰려는데 당연히 막아야지.”
“······.”
“그러니까 돌려줘요. 그런 곳에 쓸 물건이 아니에요.”
농담 속에 서슬 퍼런 진심을 담는 것도 잊지 않았고.
하지만 하안 씨는 내 말을 듣고도 여전히 깡패대가리에게 칼끝을 겨눈 채,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치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새끼들이 매니저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단 말이에요!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전부 처분하는 놈들인데. 제가 사라진 걸 보고 매니저님이 신고할지도 모른다며 매니저님을 죽일 거라고요!”
“오······.”
이 새끼들이 그 정도였어? 하안 씨는 그런 극악무도한 놈들한테 몇 년 동안이나 도망쳐왔던 거야? 하안 씨 정말 대단하네.
원래도 어디다 던져놔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여기 있는 깡패들의 구체적인 스펙을 들으니 하안 씨의 생존력이 더욱 빛나보였다.
이런 놈들에게서 살아남으며 다져진 생존력까지. 정말 최고야.
그렇게 시즌 15186호 감탄을 하고 있던 그때, 하안 씨의 입에서 넘겨들을 수 없는 결론이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요. 저만 노리는 거라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냥 도망치면 되지만. 매니저님을 알게 됐으니까 이젠 끝을 볼 수밖에.”
“응? 아니,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요?”
“같이 도망쳐줄 것도 아니잖아요. 매니저님은 집도 좋고, 잃을 것도 많은데 그걸 다 포기할 수 있어요? 고작 어제 만난 여자 한 명 때문에?”
하안 씨의 질문에 대한 답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척수반사로 나올 정도로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나는 그냥 툭하고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포기 못하죠.”
아이돌 매니저하려고 교도소에 7년을 처박았는데 절대 포기 못하지.
기껏 열심히 쌓아올린 하안 씨의 호감을 단번에 깎을 법한 즉답이었지만 의외로 하안 씨는 그리 실망한 것 같지 않았다.
“······봐요. 역시 그렇잖아요. 끝이 안 보일 것 같던 매니저님의 다정함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빨리 도망가세요.”
되려 내 대답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안 씨는 깡패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기보다 두 배는 커다란 체구의 깡패들을 가로막는 그 뒷모습에선 자신이 죽더라도 놈들을 담구겠다는 의지가 엿보일 정도였다.
분명 하안 씨의 몸은 의외로 탄탄하고, 손에는 고깃덩이라면 뭐든지 벨 수 있는 날카로운 회칼이 들려있긴 하지만. 그게 다란 말이지.
수많은 깡패들, 그리고 흉악한 범죄자들을 보아왔기에 알 수 있다.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놈들은 날붙이에 익숙한 부류, 이른바 칼밥을 먹고 사는 이들이었다.
처음 기습 때 곧바로 쑤셨으면 모를까 이렇게 대비를 마친 지금 하안 씨 같은 아마추어의 칼이 통할 리는 없었다.
물론 하안 씨의 칼질을 멈춘 건 나니까 거기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사실 불만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하안 씨만 납치하듯 데리고 튄다는 계획을 망친 순간부터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으니까.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뱉고 하안 씨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가녀린 어깨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하안 씨, 제가 어떻게 하안 씨만 두고 혼자 날름 가버립니까. 사람이 할 짓이 있고 못할 짓이 있지.”
“아니 가라고요! 이게 장난인 것처럼 보여요?”
“장난······. 음, 장난은 아니겠죠. 아무래도.”
하안 씨를 중국갑부한테 팔아넘긴다는데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왜 안 도망치냐고요! 장난 아니라는 거 알면 빨리 도망이나······!”
“그건 좀 그렇다니까요. 애초에 저놈들이 도망치라고 말한다고 순순히 보내줄 놈들도 아니고.”
“저놈들은 제가 맡을 거니까······.”
“저놈들만 문제면 제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네?”
내 말에 하안 씨는 처음으로 놈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무표정이 아닌 진심으로 다급함을 느끼고 있는 듯한 표정에 나는 새로운 감상을 느낄 수 있었다.
이야, 살짝 일그러진 표정도 예술이네. 표정이 드러나면 못생겨지는 사람도 있는데, 하안 씨는 일그러진 표정도 매력이 넘쳐. 대체 어디까지 천재인 건데 이 사람은.
그런 감상을 느끼느라 하안 씨의 의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바로 앞에서 깡패놈들 중 대장 놈이 나 대신 그녀의 의문을 해소시켜줬다.
“그래, 그 새끼 말이 맞아. 최하안 너를 잡으려고 몇 년을 좆뺑일 쳤는데 당연히 우리 셋만 오지 않았지.”
대장놈의 말이 잠시 끊기고, 그 사이의 공백을 수십의 발걸음 소리가 채워나갔다.
등 뒤에서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고, 고개를 돌리니 검은 정장으로 깔 맞춤을 한 덩치 수십 명이 각각 쇠파이프 혹은 회칼을 든 채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설령 네가 도망치지 않더라도 네 미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 도적질을 해갈 다른 조직들까지 담굴 수 있는 전력이다. 이놈들 데리고 오는데 큰형님께 얼마나 사정을 했는지······ 들으면 깜짝 놀랄걸?”
“······.”
수십 명의 깡패들과 대장놈의 말에 하안 씨의 두 눈에 절망이 스쳐지나갔다.
지금껏 절대 꺾이지 않았고, 꺾이지 않을 것 같았던 하안 씨의 눈빛이 꺾이자 대장놈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비웃기 시작했다.
“큭······ 크흐흐흐흐! 그렇게나 목에 힘주고 지랄하던 년도 결국 저런 표정을 짓는 날이 오긴 하네. 내가 그 표정 보고 싶어서 씨발 얼마나 기대했는지!”
“·······.”
까드득!
하안 씨는 이를 까득 물고 분노와 무력감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감정적인 반응조차도 대장놈과 그 따까리들에겐 너무나 즐거운 유흥거리나 다름이 없었다.
“으하하하하하하!”
재수 없는 웃음소리로 가득 찬 폐공장 안에서 대장놈은 조롱하듯 하안 씨에게 제안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지금이라도 내게 무릎 꿇고 대가리를 박는다면, 그 새끼 한 명 정도는 무사히 보내주마. 어떠냐? 괜찮은 제안이지?”
대장놈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하안 씨는 그가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키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선 놈들이 혹시나 나를 살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당연히 할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나를 살릴 수만 있다면 하안 씨는 놈들에게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일 정도는 얼마든 할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왜냐면 하안 씨는 어제 처음 만난 나를 위해 이미 몇 번이나 목숨을 걸었으니까.
“······.”
예상대로 하안 씨는 말없이 자세를 낮췄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노 때문에 과하게 긴장되었던 전신은 이완되어 조금 풀어져있었고 그녀의 두 눈에선 절망이나 분노 대신 안심과 다행의 감정이 담겨있었다.
나를 살릴 수 있겠다는 희망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란 것을.
텁.
그래서 난 벌써 무릎을 반이나 굽힌 하안 씨의 양쪽 겨드랑이 밑을 잡고 그녀가 더 이상 무릎을 굽힐 수 없게 멈췄다.
“흐약?! 무, 무슨?”
겨드랑이 밑은 민감한 부위인지라 하안 씨의 입에선 자연스럽게 귀여운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한도를 초과하는 귀여움 기습강타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지만, 지금은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재빨리 표정을 바꿨다.
내가 하안 씨에게 향한 표정은 여유로 가득한, 보는 이로 하여금 안심감을 주는 표정.
나는 그런 표정을 한 채, 하안 씨의 놀라서 동그래진 두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어젯밤엔 하안 씨의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이번엔 제가 제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아, 아니 잠시만요!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꺄앗!?”
나는 하안 씨의 겨드랑이 밑을 잡고 휙 들어 그대로 옆으로 가 벽에 등을 지고 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뒤, 어느새 폐공장 안까지 들어와 우리를 에워싼 깡패들을 바라보며 하기로 했던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걸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야, 씨발롬아 니는 지금 이게 장난 같냐? 대체 세상살이를 얼마나 좆으로 보면 이런 상황에서도 지 좆대로 굴 수가 있지?”
용기를 내 과거사를 풀려고 하는데, 깡패들 중 대장놈 눈에 띄고 싶어 하는 놈 하나가 욕지거리와 함께 내 말을 끊으며 앞으로 나섰다.
쇠파이프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놈은 당장이라도 그 육중하고 단단한 둔기로 내 대가리를 깨버릴 듯 흉포한 기세를 뿜어댔다.
저 꼴을 보니 길게 이야기는 못하겠구만. 어쩔 수 없이 실전압축을 해야겠어.
“대가리 깨지고도 그딴 여유 부릴 수 있을지 보자 이 새끼야!”
후우웅!
예상한 그대로 두 손으로 꽉 쥔 쇠파이프가 내 머리를 향해 수직으로 떨어졌다.
“매, 매니저님!”
동시에 등 뒤에 있는 하안 씨에게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콰앙!
한 차례,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쿵!
쇠파이프를 휘두른 깡패 한 명이 붕 날아 머리부터 바닥에 처박혔다.
“······.”
시끄럽던 모든 게 조용해지고, 모두의 시선 속에서 자신이 목격한 것에 대한 불신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 순간.
나는 부끄러운 과거사 실전압축본을 입에 담았다.
“저는 깡패입니다.”
“으, 으에?”
“정확히 말하면······ 깡패였었죠.”
“그, 그게 무슨······.”
나는 혹시나 하안 씨가 하안 씨가 다칠 수도 있을까 앞으로 두 걸음을 나아가며 그렇게 말을 맺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다시 깡패일 거고.”
참 부끄럽게도 말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드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