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저가 깡패임-25화 (26/53)

제 25화

누가 누굴 찾은 건지 (18)

1.

벌써 몇 번이나 입에 담은 건지 모를 아이돌 제안.

지금까지 일말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고, 마지막엔 자신이 아이돌을 할 수 없는 너무나 합당한 이유까지 들어가며 아이돌 제안을 거절했던 하안 씨인데.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 방금 그·······.”

“아이돌이요? 네, 할게요.”

두 번이나 확답을 들었음에도 귀가 의심될 정도로, 하안 씨는 너무나 가볍게 아이돌을 하겠다 말했다.

아이돌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없다고 말했던 하안 씨가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의 하안 씨는 어제의 하안 씨와 달랐다.

마치 10년 넘게 사귀고 속도위반까지 한 남자친구에게 프러포즈를 받은 여자친구처럼 망설임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내겐 너무 당황스러웠다.

“왜요?”

나도 모르게 왜냐고 되물을 만큼.

아니 진짜 왜? 왜 갑자기? 어떤 심정의 변화가 있었길래?

물론 하안 씨의 인생을 절망으로 뒤덮던 깡패새끼들을 전부 박살내고, 그 걸로도 모자라 6억이라는 어음을 받긴 했다.

하지만 그런 걸로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 리가, 행복해진 걸 넘어 콤플렉스였던 외모를 수단으로 사람들의 앞에 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작 그것만으로 행복해지기엔 하안 씨가 겪은 절망이 너무나 깊고 컸으니까.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왜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하안 씨는 별로 절망적이지 않았던 건가? 아니면 그냥 6억이 생겨서 세상 행복해진 거야?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그렇게 싫어하던 아이돌을 하겠다는 건 이해가 안 되는데.

나 혼자 고민해봤자 답을 내릴 수 있을 리 없는 의문이었다.

“왜 갑자기······?”

그래서 본인에게 다시 묻자, 하안 씨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매니저님, 일단 걸어요. 우리.”

“······손을 잡고요?”

“네, 손 잡고.”

손을 잡고 걷는다한들 의문이 풀릴 리는 없지만, 하안 씨와 손을 잡으면 행복해질 것이다.

그래, 하안 씨가 먼저 일단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니. 일단 손을 잡고 걸으면 차차 이야기를 해준다는 거겠지.

결국 조금만 참으면 하안 씨와 손을 잡고 산책하기 + 의문을 풀어줄 대답을 듣기 두 가지를 전부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마시멜로 테스트라면 자신이 있지. 딸기가 두 개 들어있는 그릇을 앞에 두고 15분을 참으면 3개를 더 준다니, 참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사실 하안 씨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고민은 더 이상 고민이 아니게 되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하안 씨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아까 폐공장에서 나올 때는 폭력에 고취되었던 탓에 느끼지 못했던 부드러움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한 손에 착 들어오는, 꽉 잡고 싶고 언제까지나 잡고 싶은 그런 작고 가녀린 손이었다.

이런 손으로 혼자서 그런 절망을 버텨낸 거구나.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역시 하안 씨는 대단해.

진심으로 감탄하며 손바닥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려했는데 하안 씨의 목소리에 집중이 깨졌다.

“단단하네요. 크고. 조금은 거친 느낌이기도 해요.”

“네?”

“빚을 갚기 위해서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관리할 시간도 없어서 제 손도 되게 거친 편인데. 매니저님 손에 비하면 제 손은 애기 손이에요.”

애기 손······. 하안 씨가 애기······. 응애 애기 하안?

“큭!”

“매니저님? 왜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으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애기 하안이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무리가 올 정도로 위험했다.

다음에 상상할 때는 만반의 준비를 거치고 하자고 굳게 다짐하던 그때, 내 말에 ‘그렇구나. 그래도 혹시 불편하시면 말하세요.’하고 배려 넘치는 대답을 건넨 하안 씨는 맞잡은 손을 놓치지 않은 채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방금 전 내가 한 질문에 대한 답도 같이 입에 담았다.

“왜 갑자기 아이돌을 하냐고 물어보셨죠? 그렇게 칼같이 거절했으면서. 갑자기 태세전환을 하는 게 이상하고 수상해서 물어보신 거죠?”

“수상하진 않습니다.”

“수상하지만 않은 거네요?”

여기선 도저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

그래도 맞다고 대답하긴 뭐해서 그냥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하안 씨는 흐.하고 귀여운 실소를 뱉었다.

“그래도 수상하진 않아서 다행이다. 매니저님한테 의심은 안 받는다는 거니까.”

뭐지. 왜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거지? 하안 씨 이런 거 잘 못하는 사람 아니었나?

원래도 절로 가슴이 두근거리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매력은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사람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짓은 하지 않았던 하안 씨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폐공장에서 내가 내민 손에 자신의 손을 얹은 순간부터 하안 씨가 내가 알던 하안 씨가 아니게 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알던 하안 씨가 아니게 된다기보다는, 내가 모르던 하안 씨가 점점 드러나는 느낌이랄까.

그리 생각하니 순수하게 기뻤다.

상대의 모르던 모습을 알아가는 것이 바로 인연이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니 말이다.

내가 하안 씨와 가까워진 것에 두근거리며 기뻐하는 동안, 하안 씨는 다시금 내 의문을 풀어줄 대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6년이나 됐어요. 행복이란 걸 느끼지 못한지.”

하안 씨의 이야기, 정확히는 하안 씨가 겪은 절망의 이야기였다.

“꽤 긴 시간이니까 그래도 조금은 행복할 법도 했는데 정말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6년 동안 단 한 번도요.”

“······.”

해가 짧은 겨울이지만, 해가 지기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점점 노르스름해지는 초저녁의 하늘 아래서 하안 씨는 자신의 불행을, 절망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행복하지 못하면 거기서 멈춰도 충분히 불행했을 텐데. 불행에는 끝이 없었어요. 하루가 지날수록 삶은 힘들어지고, 행복할 수 없다는 것보다 점점 더 불행해질 거라는 생각에 절망해버렸죠.”

그저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하안 씨를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행복해질 수 없다고 단념했어요. 그러면 적어도 행복에 대한 기대 때문에 절망하진 않을 테니까.”

그만큼 고되고 힘든 6년이라는 시간에 하안 씨는 결국 행복을 단념했다.

적어도 행복하지 못해 생기는 절망은 없어야 그나마 버틸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도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버텨서. 이 저주받은 인생한테 지지는 않겠다 결심했는데······ 결심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더라고요.”

그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고, 그저 살아갔을 뿐인데도 하안 씨를 좀먹는 절망은 날이 갈수록 그 크기를 키워갔다.

하안 씨의 말마따나 꺾이지 않겠다 결심하는 것만으로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결국 버틸 수 없어서 죽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죽으면 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든 가장 큰 원흉들을 다 죽이고······ 그러고 죽으면 최소한 무승부는 될 테니까.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듣는 것만으로 턱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듣기 힘든 이야기였다.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꺼내봤자 상처만 드러날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되풀이하는 건 하안 씨에게 좋은 영향을 줄 리가 만무했다.

“······하안 씨.”

그래서 하안 씨의 말을 끊고자 이름을 불렀지만, 하안 씨는 내 부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담담한 눈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

“······.”

여전히 담담하지만 더 이상 차갑지 않은, 노을에 젖은 구름처럼 따스한 눈빛이 닿았다.

하안 씨에게선 처음 보는 따스한 눈빛에 나는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하안 씨의 말을 멈추려던 것을 멈추고 입을 닫자 하안 씨는 다시금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매니저님이 나타났어요. 팔을 뻗기만 하면 다 끝나는 상황에. 마치 주인공처럼.”

나?

“그냥 좋은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6년 동안의 이 저주받을 삶 속에서 처음 만나는 좋은 사람이라 그래도 마지막엔 좋은 사람을 만나고 가는구나.’ 생각했었는데. 매니저님은 좋기 만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나를 입에 담는 하안 씨의 두 눈엔 미처 다 담지 못한 따스함이 넘실거렸다.

겨울인데도 따뜻하다 느낄 정도로 따스한, 절망이라곤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6년 동안 저를 절망케 했던 모든 문제가요. 매니저님을 만나고 단 하루 만에 전부 해결됐어요. 행복할 권리조차 포기할 정도로 절박했던 인생을 하루 만에 구원받았다고요.”

반박하고 싶었지만 하안 씨의 눈빛을 보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내 이야기를 하는 하안 씨는 지금······.

“그리고 제 절망을 전부 물리쳐주신 매니저님이 제게 손을 내밀어주셨을 때, 행복했어요.”

그래, 정말 행복해보였으니까.

“매니저님 덕분에 행복해졌어요. 고작 하루만에. 6년 동안이나 행복을 포기했던 제가요.”

“······하안 씨.”

“그러니까 이제는 저도 아이돌이 될 수 있어요. 아이돌이 돼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요.”

하안 씨는 이제는 행복하기에,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이야기하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조금의 신뢰조차 내비치지 않았던 그녀가 이렇게 먼저 내 손을 잡고 내 덕분에 행복해졌다 말하니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아이돌이 되면 매니저님이랑 떨어지지 않아도 되잖아요? 당연히 제 담당이 되실 거니까. 그렇죠?”

다른 사람이 하안 씨를 담당하는 건 내가 용납할 수 없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하안 씨 같은 사람을 담당한다는 건 분명 욕심이고 과욕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욕심을 부릴 거다.

이건 하안 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정해져있었다.

“네, 네. 무조건, 그 누가 뭐라고 해도 하안 씨는 제가 맡을 겁니다. 절대로요.”

그래서 당당하게 내가 맡겠다 답하자, 하안 씨는 나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면, 저 아이돌 할게요.”

“하안 씨······.”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매니저님만의 아이돌.”

“하안 씨······?”

어? 나만의 아이돌이 아니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만인의 아이돌이 돼야 하는데? 뭐지? 말실수라도 한 건가?

내가 들은 게 맞나 귀가 의심되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고 있던 그때, 하안 씨가 내 손을 더욱 꽉 잡고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깍지까지 끼었다.

그러면서 내 귀에 입을 가져다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매니저님······ 앞으로도 저 많이 행복하게 만들어주셔야 해요.”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속삭임이었다.

"하, 하하 ······."

정말, 누가 누굴 찾은 건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마참내!!!! 하안 씨를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워낙 특이케이스고 1호기 아이돌이라 에피소드도 굉장히 길었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길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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