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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가 깡패임-29화 (30/53)

제 29화

가족처럼 지내요 (4)

0.

정바로가 최하안에게 탈룰라를 저지른 다음날 아침, 강진혁을 두고 혼자 사장실에 올라온 최하안은 어제 시작조차 하지 못한 연습생 계약을 진행했다.

최하안은 애초에 아이돌 업계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었기에 당연하게도 계약서는 정바로가 준비했고 그 내용에 이상한 점은 없었다.

아니, 이 정도면 실력조차 검증되지 않은 연습생한텐 과할 정도로 좋은 조건이지. 계약금도 없고, 트레이너들이 1대1로 레슨을 담당할 테니까.

트레이너들이 1대1로 레슨을 해주는 건 그저 연습생이 최하안 한 명 뿐이기 때문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최하안에게 내민 계약서는 업계의 그 어떤 연습생도 받아보지 못할 계약서였다.

아무것도 안 하던 회사라 다른 기획사들에 비하면 해줄 수 있는 건 적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업계 탑급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좋은 조건이야.

그렇기에 정바로는 최하안이 이 계약서에 순순히 사인을 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최하안은 주머니에서 펜을 한 자루 꺼낸 후, 사인하는 대신 조항 하나를 더 추가했다.

계약서에 쓰여 있는 조항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곧바로 맨 아래 여백에 조항을 추가하는 최하안의 모습은 지금까지 수많은 연습생들과 계약을 해본 정바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뭐지? 이게 대체 무슨······.

“앞에 쓰여 있는 게 어떻든 상관없는데. 이 조항만 지켜주신다면 사인할게요.”

최하안은 당황한 정바로를 향해 계약서를 돌렸다.

자연스레 최하안이 추가한 마지막 조항에 눈이 갔고, 그 조항을 확인한 순간 정바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계약은 ‘강진혁’이 ‘을’의 담당매니저로서 남아있는 경우에만 그 효력을 발휘한다.]

“아니 이건······.”

연습생에겐 매니저가 붙지 않는다. 데뷔를 해야 붙는 게 바로 매니저지.

그런데 최하안은 아직 연습생조차 되지 않았음에도 매니저를 붙여달라는 걸 넘어서 자신의 매니저를 직접 지정하기까지 했다.

그 어떤 프로듀서라도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월권행위였으나, 정바로는 찌푸렸던 미간을 피고 밝게 웃었다.

“이 정도는 당연히 들어드릴 수 있죠! 하안 씨가 우리 회사 연습생으로 들어 와주는 거면!”

애초에 연예인이라고는 인기라곤 뭣도 없는 최철훈 한 명 뿐이며 소속 매니저 또한 강진혁 한 명 뿐인 이 바른길엔터는 일반적인 기획사와는 많이 달랐으니까.

월권행위라고 따지며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챙기는 것 따윈 이 기획사에선 끔찍한 사치였다.

어차피 담당매니저가 강진혁인 건 이미 확정된 사실나 다름이 없었고, 그의 의형제인 이성이 세운 회사이니 회사를 나갈 일도 없을 터.

정바로의 입장에선 자존심만 버리면 최하안이 추가한 조항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지금의 정바로는 고고하던 천재프로듀서가 아닌, 일면식도 없는 이에게 월급이나 받아쓰는 바지사장이었다.

그렇기에 최하안이 멋대로 조항을 추가했음에도 너무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하안 씨가 추가한 조항 지금 바로 넣을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혹시나 조항을 더 추가할까 정바로는 계약서를 손에 들고 프린터기가 있는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런 정바로의 뒤통수를 향해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최하안이 짧게 목소리를 냈다.

“최하안이요.”

“네?”

“하안 씨 말고 최하안이라고 부르라고요.”

“아····· 그럼 반말로 해도?”

“그건 뭐, 딱히 상관없어요.”

“네, 아니. 그래, 하안아!”

“최하안이라고.”

“으, 응 최하안.”

슬쩍 성까지 떼고 하안이라고 불러봤지만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건 엄동설한처럼 싸늘한 최하안의 목소리였다.

단번에 고개를 숙이고 최하안이 바라는 대로 성까지 붙여 풀네임을 부른 정바로는 수정된 계약서를 뽑기 위해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름만으로 부르는 건 실패했지만, 반말을 허용해준 건 굉장히 긍정적인 일이니까. 앞으로 차차 가까워지면 되는 거 아니겠어?

정바로에게 최하안은 반드시 가까워지고 싶은, 최고의 보석으로 세공하고 싶은 원석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최하안이 존칭을 빼고 존대를 빼라는 말을 듣고 그녀와 조금은 가까워졌다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하안 씨는 매니저님 전용 호칭이고, 하안이는 매니저님만 부를 수 있는 애칭이야. 뭔지도 모를 사람이 부르게 둘 수는 없지.

정바로에게 최하안이라는 호칭을 강제한 건 강진혁이 부르지 않을 법한 호칭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계약서에 사인을 완료한 최하안은 정식으로 바른길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습생이 되었다.

기념비적인 첫 번째 연습생이.

2.

하안 씨가 바른길엔터 소속이 된 날 저녁, 오늘 갑자기 연습생이 된 터라 딱히 다른 일은 하지 않은 하안 씨는 내 옆에만 졸졸 따라다니다 나와 함께 퇴근했다.

아니, 아니지. 졸졸 따라다니기만 한 건 아니지. 회사 내부를 돌아다니며 내게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을 들었으니까.

하안 씨는 성실하게 내 설명을 경청했고, 하루 만에 바른길엔터의 구조를 완전 정복했다.

어떻게 그렇게 지리를 금방금방 외우냐고 물어보니까 도망 잘 다니려면 길눈이 밝아야했다는 대답을 들었을 때는 어쩔 줄 몰랐었지.

무튼 그렇게 하안 씨와 퇴근한 나는 하안 씨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동안 정육점에 가서 몰래 사둔 특별한 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내들었다.

“하안 씨 고기 좋아하셨죠? 같은 회사 사람 된 기념으로 고기 준비해놨습니다.”

“와······ 소고기다······!”

일회용기에 담긴 붉은 고기의 등장에 하안 씨의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고기 진짜 좋아하나봐. 눈이 반짝반짝 빛나네. 어제 고기 먹을 때도 엄청 맛있게 먹어서 소고기 사봤는데. 소고기는 더 좋아하는구나. 소고기 사오길 잘했다. 역시 소야.

소고기를 바라보는 하안 씨의 눈빛이 나를 바라볼 때의 눈빛과 굉장히 닮아있는 건 기분 탓으로 넘기고, 하안 씨 반응도 봤겠다 요리를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그럼 조금만 기다리세요. 맛있게 구워서 대접해드릴 테니까.”

“아, 네.”

자, 그럼 기깔나게 한 번 구워볼······.

“······.”

“······.”

소고기를 기깔나게 구워보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하안 씨가 부엌까지 따라왔다.

뭐지. 혹시 나만 일하고 자기는 쉬는 게 눈치가 보이는 건가? 그런데 하안 씨는 이제부터 레슨 받고 연습하느라 힘들 테니까 쉴 수 있을 때 쉬는 게 좋을 텐데.

내가 집주인이면서도 집안일은 전부 도맡아하는 이유는 하안 씨는 집안일 따위보다 더 중요한 일들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곳에 체력을 소모할 여유 따윈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눈치가 보여서인지 쭈뼛대고 있는 하안 씨에게 그 사실을 전했다.

“······하안 씨, 소파에 가서 쉬고 계세요. 이건 제가 할 테니까. 이제부터 연습생 활동하느라 힘드실 텐데 쉴 수 있을 때 쉬어놓으셔야죠.”

내가 말했지만 굉장히 매니저스러운 말이었다.

매니저스러운 말을 해서 기분도 좋아진 김에 나는 조금 더 매니저다운 말을 입에 담았다.

“이제 연습생이 됐긴 해도 하안 씨는 제가 찾은 아이돌이고, 저는 하안 씨가 찾은 매니저예요. 그러니 서로의 역할을 존중해줘야 하기도 하죠. 지금은 매니저인 저를 존중해주셔야 할 시간이니, 가서 쉬고 계세요. 고기는 맛있게 구워 가겠습니다.”

와, 매니저가 찾은 아이돌과. 아이돌이 찾은 매니저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 관계란 말인가.

나와 하안 씨의 관계를 이렇게 한 번 더 정립하고 나니 왜인지 텐션이 오르기 시작했다.

강진혁 이 자식,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놈이었냐구 젠장!

그렇게 매니저다운 일을 한 것에 대한 매니저뽕에 취해 대견함을 느끼고 있던 그때, 하안 씨에게서 어색함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딱히 도와드리려고 그런 건 아닌데······. 그냥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요.”

“예?”

“저는 고기 못 굽거든요. 고기를 구워본 적이 없어서. 애초에 부엌에서 뭘 만들어본 적이 없어요.”

“아, 음. 예.”

그렇다는 건, 나는 지금 도와줄 생각도 없었던 사람한테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쉬라는 말을 거창하게 풀어서 있어 보이게 말했다는 것인가?

이런 세상에. 얼굴에 열이 올라 터져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다.

너무 쪽팔려서 머릿속 생각의 말투까지 이상하게 바뀌어버린 그때, 하안 씨에게서 수줍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그래서 제가 매니저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였냐면요.”

“그냥 바로 하시는구나.”

“네?”

“아뇨. 계속 하세요. 하실 말씀이 뭔데요?”

내가 쪽팔려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하안 씨는 자기 할 말을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배려를 해줬다면 오히려 수치심이 배가됐을 것이기에, 나는 하안 씨의 유아독존틱함에 감사를 느끼며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이제 정식으로 매니저님과 저는 매니저와 아이돌, 아니 연습생의 관계로 묶인 거잖아요?”

“네. 애초에 연습생한테 매니저가 붙지는 않지만, 하안 씨는 반드시 제 담당아이돌이 될 테니까 매니저와 아이돌 관계가 맞죠.”

“그러면······ 이제 말 놓으세요. 매니저님.”

“네?”

갑자기? 말을 놔? 이미 하안 씨라는 호칭이 입에 붙어버렸는데?

그런 속뜻을 담아 외마디 물음으로 되치니 하안 씨는 수줍음을 버리고 당당하게 내게 반말을 요구했다.

“매니저님은 나이도 저보다 많으시고, 아이돌이랑 매니저 관계는 가까울수록 좋은 법이니까요. 그러니까 매니저님은 저한테 말을 놔야 해요.”

“아니 하안 씨, 갑자기 그러셔도······.”

“하안 씨라고도 하면 안 돼요. 어떤 매니저가 자기보다 훨씬 어린 담당 아이돌한테 씨를 붙여요?”

아니 씨 정도는 붙일 수도 있지 않나? 그리고 훨씬까지도 아닌데. 다섯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네 살 차이인 아가씨도 오빠라고 해줬었는데.

속으로 툴툴대든 말든, 하안 씨는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 나를 담았다.

나를 향한 그 눈빛은 방금 전 마블링이 뒤지는 소고기를 향하던 눈빛과 굉장히 닮아있었다.

고기를 보는 눈과 나를 보는 눈이 닮았다는 게 착각이 아니라는 걸 안 순간, 등골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뭐, 뭔데. 왜 나를 소고기 보듯 보는 건데.

그 눈빛에 섬뜩한 공포를 느껴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등은 이미 싱크대에 붙어있었고, 내게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러니까 매니저님, 하안이라고 불러주세요. 아니, 하안아. 라고 불러요.”

하지만 하안 씨에겐 공간이동의 제약이 없었고, 그녀는 도랑에 빠진 토끼에게 다가가는 호랑이처럼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래, 가족처럼.”

“네, 네?!”

“가족처럼 지내요. 가족처럼 지내는 거예요. 매니저님과 저는 담당 매니저와 담당 아이돌이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아이돌스럽지 않은 하안 씨의 눈은 그 여느 때보다도 반짝이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가족처럼은 싫어요(실제로 했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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