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화
깡패가 학교폭력에 대처하는 방법 (7)
1.
할 말이 없으면서도 할 말이 많은 상황이었지만, 무슨 말이든 지금 이 자리에서 할 건 아니었다.
“으흐으······.”
하리라 학생······ 아니 말 놓으라고 했지. 리라가 너무 추워 보였으니까.
볼과 코끝이 빨개지고 손이 발갛게 곱은 걸 보면 더 이상 이 추운 밖에 둘 수는 없었다.
“일단, 어디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오, 바로 말 놓네요? 시원시원하고 좋은데요?”
“여기서 더 시원했다간 얼어 죽을지도 모르니까. 빨리 가자고. 그 가방은 이리 주고.”
“이건 괜찮은데.”
“가출한답시고 다 가지고 나왔을 텐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리 줘.”
탁.
나는 리라가 메고 있는 가방을 반강제로 들쳐 멘 후, 공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
“하아아······ 녹는다아. 이 라떼인가 뭔가하는 이거 되게 맛있네요?”
카페에 들어와 따뜻한 초코라떼를 시킨 리라는 두 손으로 머그컵을 꼬옥 쥔 채 그 온기를 즐겼다.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놓고 뜨거운 음료를 마셨음에도 아직 롱코트를 벗지 않은 걸 보면 정말 춥기는 엄청 추웠던 것 같았다.
추위에 벌벌 떨다가 라떼 한 잔에 녹아내리는 듯한 그 행복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흔들리던 마음을 단단히 굳힐 수 있었다.
나는 호로롭 라떼를 마시고 있는 리라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은 첫 번째까지만. 두 번째는 안 돼.”
“푸읍!”
너무 갑자기 본론으로 들어가서 놀랐는지 리라는 입에 머금었던 초코라떼를 나를 향해 뿜었지만, 그 정도 기습은 내겐 너무나 느리고 정직했다.
나는 음료를 가지고 올 때 같이 가져온 쟁반을 들어 뿜어진 초코라떼를 막았다.
촤악!
“콜록! 콜록콜록콜록!”
하지만 피를 토할 것처럼 사레가 들려버리는 건 예상치 못했다.
음, 너무 갑자기 본론박치기를 해버린 건가. 다 들어줄 것처럼 굴어놓고 갑자기 안 된다고 하니까 놀라버린 거겠지.
“케흐윽! 흐엑! 켈록! 크힉!”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담담하고 굳은 자세로 임해야겠다 다짐했지만 이렇게까지 괴로하는 걸 보고 있자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으, 으으. 이, 이거라도 마셔. 안 뜨거우니까 꿀꺽꿀꺽 마셔도 괜찮아. 사레가 그렇게 심하게 들릴 줄은 몰랐네 이거.”
결국 나는 굳은 표정을 풀고 리라에게 내가 주문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콜로록! 콜록! 하읍.”
쪼로로로로롭! 꿀꺽!
어, 어어? 그걸 빨대로 마셔? 내가 입 댄 건데?
유리컵에 빨대가 들어가 있으니 컵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마실 줄 알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리라는 빨대로 음료를 마셨다.
얼마나 전력으로 마신 건지 한 번의 흡입만으로 아메리카노의 반이 사라졌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반을 해치우고 나서야 리라는 숨을 가다듬고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후아아······· 주, 주글뻔해따. 감샤합니다.”
“아, 아니야. 나 때문에 그런 건데 뭘.”
그나저나 빨대로 마시다니. 상상도 못했네.
리라가 털털한 성격인 건 대화 조금만 해도 알 수 있지만, 이렇게까지 털털했을 줄은 몰랐다.
나는 리라가 마시고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입을 댄 빨대를 바라보다가, 리라의 호기로운 드링킹을 떠올리고 이런 거 하나하나에 신경 쓰는 건 좀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두기로 했다.
그래, 초딩도 아니고 빨대 좀 같이 썼다고 유난 떠는 건 아니지. 그리고 여기서 빨대를 바꿔오면 리라한테 상처가 될지도 몰라.
리라를 연습생으로 들여 최고의 아이돌을 향해 나아가야하는 나로선 그녀에게 상처를 줄법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빨대는 두고, 남은 반 컵 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컵으로 마실까 빨대로 마실까 고민하고 있던 그때 앞에서 불만이 가득 섞인 항의가 들어왔다.
“그런데 오빠, 들어줄 수 있는 건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다고 했잖아요.”
“응.”
“그런데 왜 안 돼요? 그냥 재워주기만 하면 된다니까요? 밥이랑 목욕 같은 것도 부탁드리긴 하지만······. 혹시 잘 곳이 없어서 그러는 거라면 괜찮아요!”
리라는 테이블 옆에 놓아둔 가방을 열어, 열자마자 바로 보이는 베개와 이불을 내게 보여줬다.
“저 바닥에서도 잘 자고. 이렇게 이불이랑 베개도 가져와서 침구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냥 잠만 잘 수 있게 해주면 된다구요.”
리라의 걱정과는 달리 내 집에 빈방은 많고, 침구류도 충분히 있었다. 재워주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저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너무 집안일을 못해서 제가 다 도맡아 했거든요? 그래서 집안일도 진짜 잘해요! 오빠 혼자 사는 집 정도는 가볍게, 그리고 완벽하게 청소할 수 있다구요!”
나는 하안이랑 같이 살고 있었고, 내 집은 바른길엔터 건물의 한 층을 전부 쓰고 있는 만큼 굉장히 넓었다.
아무리 집안일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가볍게 청소를 할 수는 없을 테지.
하지만 집안일을 잘하든 못하든 내겐 리라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오빠가 저한테 그랬잖아요. 제가 바로 오빠가 찾던 원석이라고. 아이돌 하지 않겠냐고. 이건 사실 비밀인데, 저 아이돌이 꿈이거든요! 그러니까 오빠네 기획사 연습생으로 들어갈게요! 재워줘요!”
“······.”
“솔직히 제가 봐도 저 되게 예쁘거든요? 몸매랑 비율도 이 정도면 완벽하고. 몸도 되게 잘 써요. 티비에 나오는 앵간한 아이돌은 저한테 안 된다고 생각해요. 길거리 캐스팅도 많이 받아봤고! 오빠도 저한테 길거리 캐스팅 했잖아요! 이미 오빠 본인이 인증한 아이돌의 재목인데 받아주시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요?”
확실히 리라의 말대로 리라가 가진 포텐셜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혼자서 열댓 명이나 되는 양아치를 상대로 당당히 맞서는 깡과 실력, 두 말하면 잔소리인 청순하고 수려한 외모, 고등학생다운 통통 튀는 매력까지.
그 재능의 방향은 다를지 몰라도 리라가 가지고 있는 반짝임의 총량은 내가 인정하는 최고의 인재 하안이와도 맞먹을 정도였다.
리라가 연습생으로 들어와 준다면 최고의 아이돌 그룹을 키워보겠다는 내 꿈은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겠지.
아니 솔직히 말해서 하안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러했듯, 이렇게나 반짝이는 리라를 만난 이상 리라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리라의 자리를 대신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리라를 받아내고, 얼굴을 본 순간부터 나는 리라가 내뿜는 반짝임에 홀려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변치 않았다.
“그래도 안 돼.”
“아 왜요!”
왜냐니.
“너, 지금 가출한 미성년자잖아.”
리라는 자기 자신을 책임질 수 없는, 올해 고3이 되는 미성년자였으니까.
“읏······.”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그렇게 날 회유하고 압박하고 설득하던 리라의 입이 꾹 닫혔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불만으로 그득했기에, 나는 리라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말을 이어나갔다.
“갈 곳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집도 있고 보호자도 있고 다닐 학교도 있는데 갑자기 전화해서 가출했으니까 재워 달라. 연습생으로 받아달라고 말하면 당연히 못 들어주지.”
“그, 그치만 들어줄 수 있는 건 뭐든 들어준다고······.”
“그래. 들어줄 수 있는 건 다 들어줄 수 있어.”
“그러면 왜요!”
나는 억울한 듯 나를 바라보는 리라와 눈을 마주하며, 담담하고 딱딱한 목소리로 답했다.
“들어줄 수 있는 건 들어줄 수 있다고. 그런데 지금 네가 하는 부탁은 내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야.”
미성년자가 부모님의 동의도 없이 연습생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것도, 가출한 미성년자를 집에 들여 재워주는 것도 전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할 수 있나 없나가 문제가 아닌, 해선 안 되는 일.
“너를 책임질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네 아빠. 하혁수 씨야. 그리고 그 책임을 마음대로 넘겨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까 두 번째 부탁은 못 들어줘.”
그렇기에 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잡고 늘어지는 리라를 보고도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다.
“······.”
물론 이렇게 리라와 나 사이의 인연의 끈을 정론만을 들먹이며 허무하게 끊어낼 생각은 없다.
나는 실망이 컸는지 공허해진 리라의 눈동자를 계속해서 마주보며 그녀가 바라던 일을 전부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나열했다.
“짐 들어줄 테니까 다시 집에 가자. 그 다음 하혁수 씨 설득하고, 아이돌 해도 된다는 허락 맡은 다음 학교에 가서 선생님한테 이야기하고 아빠 손 잡고 명함에 적혀있는 우리 기획사로 찾아와. 그러면 재워주든 계약을 하든 전부 다 해줄······.”
하지만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안 돼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명확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리라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내 말을 끊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리라였지만, 열댓 명의 양아치를 상대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던 그녀가 이렇게까지 힘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건 내겐 너무나 낯설었다.
“······어?”
그래서 어벙하게 되묻자, 리라는 가슴 깊숙한 곳에 쌓여있던 감정의 일부분을 입 밖으로 꺼내 답했다.
“설득이고 뭐고 다 안 된다구요. 학교도 집도 아빠도 선생님도 애들도 전부 다! 내 말 같은 건 안 들어 처먹는다고요!”
리라가 입 밖으로 꺼낸 감정은 그 일부만으로도 내 주먹이 절로 쥐어질 정도로 어둡고 무거웠다.
결코 고작 열아홉 짜리 여고생이 내보일만한 색깔의 감정이 아니었다.
“······.”
너무나 갑작스런, 분노와 짜증으로 점철된 그 감정에 말을 잃은 내게 리라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작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러니까 그냥 저 좀. 여기서 꺼내주면 안 돼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 녀석도 심상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