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930)

현경과 탈마

무공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면 정(正)과 사(邪)로 나눌 수 있다. 어느 사이엔가 무공의 원류는 이렇게 둘로 나뉘더니 서로가 피를 피로 씻는 복수와 반목을 거듭해, 서로 왜 싸웠는지 그 시초조차 아리송해졌다. 정파는 사파를, 사파는 정파를 원수 보듯 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죽였다.

정파는 달마가 중원에 보급한 역근(易筋)과 세수(洗髓)의 두 진경(眞經)을 기반으로 성장한 무공으로, 대부분이 불가(佛家)나 도가(道家) 계통의 무술들이 주종을 이뤘다. 이른바 5대세가의 경우도 원류를 따지면 9파1방(九派一幇)의 속가제자 중 뛰어난 자가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 문파에서 뛰어난 자들이 튀어나와 새로운 문파를 만들다 보니 근래에 이르러서는 그 갈래조차 희미해질 정도였다.

고대의 무술은 들짐승이나 날짐승의 행동을 흉내 내고 모방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유명한 소림오권(小林五拳)은 호랑이, 표범, 뱀, 원숭이, 학의 움직임을 따라 이루어졌으며, 도가(道家)로부터 전수된 검법(劍法)도 동물들을 흉내 내어 시작되었다. 이러한 검법(劍法), 도법(刀法), 창법(槍法), 봉법(棒法), 권법(拳法), 장법(掌法) 등의 무술을 통틀어 외가무공(外家武功)이라 한다.

반면에 내가무공(內家武功)은 단전호흡(丹田呼吸)이나 숨을 뱉고 쉬는 법을 일컫는 토납술(吐納術)에서 비롯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오랜 기간을 두고 토납을 반복하면 몸속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인 내공이 쌓이게 되는데, 그 내공을 권이나 장, 또는 검에 실어 내보내는 무술을 내가무공이라 한다. 내공이 어느 정도 쌓이면 몸 안을 일주천시키며 더욱 그 힘을 증폭시켜 내공이 쌓이는 속도를 증가시킨다. 이때 그 힘을 어떤 순서로 어떤 혈도에 보내느냐에 따라 다양한 운기조식의 기법들이 생겨났다.

정파는 내공을 익힐 때 그 공력이 천천히 쌓여 나간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진신내공(眞身內功)을 얻거나 영약을 복용하지 않고서는 통상의 경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련을 해도 40세가 넘어야 절정고수에 이를 수 있고, 초절정의 고수가 되려면 60세가 넘어야 했다. 물론 타고난 신력(神力)으로 외공(外功)을 사용하는 자들도 있지만, 내공이 받쳐 주지 않는다면 절정고수의 대열에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이렇듯 정파 내에서도 무공을 쌓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마교에서처럼 파격적인 방법을 써서 속성으로 내공을 쌓지는 않는다.

정파에는 명문(名門)이라 불리는 많은 방파가 있다. 그들은 대부분 도가나 불가 계통이며 뛰어난 고수들을 많이 배출했기에 명가의 칭호가 주어졌다. 그리고 명가의 제자들이 방문외도(傍門外道 : 명가가 아닌 다른 다수의 군소방파들을 낮추어 부르는 말)라 칭하며 깔보는 경향도 있지만 실질적인 정파의 저력은 소수의 명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숫자를 자랑하는 군소방파들에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군소방파들은 내가무공보다는 외가무공을 익히고 가르친다. 명가들과는 달리 그들에게는 우수한 내공 심법이 거의 없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외가무공을 익히고 가르치는 것이다.

명가(名家)에서는 후계자에게 진신내공(眞身內功)을 전수하거나 영약을 먹여 빠른 속도로 내공이 쌓이게 만든다. 그들에게는 각 문파의 정통 무공들이 교육되었고 그들은 적전제자(適傳弟子)라고 불린다. 적전이 아닌 제자들은 내공이 상당히 취약하기 때문에 같은 초식(招式)을 써도 그 위력은 최소 열 배 이상 차이가 난다고 한다.

상대에게 진신내공을 전수할 때는 내공을 전수하는 쪽이 엄청난 고통을 겪기 때문에 일가 피붙이라도 잘 전수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진신내공을 전수받는 데도 한 가지 위험이 따른다. 같은 수련을 한 사람의 진신내공이라면 성질이 같기에 전수받아도 상관없지만, 다른 종류의 수련을 하여 얻은 내공을 전수받으면 아예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진신내공과 새로 얻은 진신내공이 합쳐지지 않고 서로 충돌하여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치료나 공격 등의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내공을 불어넣기도 하는데, 그때의 내공은 진신내공이 아니기 때문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내공을 받은 사람의 내부에서 이종(異種)의 내력은 소멸되며, 또 내공을 집어넣은 사람도 곧 내력을 회복할 수 있다.

내공을 특출한 경지까지 연마한 정파의 고수들을 일컬어 사람들은 삼경(三境)의 고수라 한다. 초절정고수가 되면 내공의 정도와 무술 실력이 거의 비례하기 때문에 삼경의 고수에 들어가면 거의 적수를 찾기 어렵다.

제1경(第一境)은 조화경(造化境), 즉 화경(化境)이다. 이것은 천지인(天地人)의 삼화(三化)와 수목금화토(水木金火土)의 오기(五氣)를 고루 몸 안에 이루어 낸 삼화취정(三化聚頂) 오기조원(五氣造元)의 고수를 말한다. 이 수준에 이르면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통해 온몸이 무예를 시전하기에 최적의 상태로 바뀌는 반로환동(反老換童)을 경험한다.

이때는 능히 소리로 사람을 죽이고 손가락을 들어 작은 산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한다. 화경에 오른 현존하는 고수는 여덟 명인데 그들을 3황5제(三皇五帝)라고 불렀다. 거의 비슷한 무공 수준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을 3황과 5제로 구분하는 이유는 서로 간의 나이 차 때문이기도 하며, 5제보다는 3황의 무공이 좀 높았다. 또 정파의 고수들은 마교가 배출한 가장 뛰어난 네 명의 고수를 4천왕(四天王)이라고 했는데, 그 칭호에서 정파고수들의 은근한 자존심을 엿볼 수 있었다. 과거 현경의 고수가 한 명 있기는 했지만 그 이후 최강의 고수들인 이들은 모든 정도무림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제2경(第二境)은 신(神)으로의 입문이라 할 수 있는 현묘(玄妙)한 경지(境地), 즉 현경(玄境)이라 한다. 현경의 경지에 이르면 더욱 뛰어난 육체로 변하게 되고, 그 결과 몸에 만독이 침범하지 못하는 만독불침(萬毒不侵)이 되며 겉으로 전혀 정기가 드러나지 않는 반박귀진(返縛歸眞)의 상태가 된다. 또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이 경지를 이루면 머리가 다시 검어지고 치아(齒牙)까지 새로 나오기에, 그야말로 완벽한 젊음을 되찾는다고 한다. 그들은 능히 몸에서 뿜어 나오는 예기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데, 현경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수천 년 무림사에 과거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을 창설한 조사인 신검대협(神劍大俠) 구휘(區揮) 단 한 명뿐이었다. 무림에서 인간이 달성해 낸 최고의 경지가 이 현경이었다.

마지막 제3경(第三境)은 불노불사(不老不死)의 진정한 신의 경지, 즉 생사경(生死境)이다. 인간의 생과 사를 초월하고 우주만물의 법칙을 한눈에 꿰뚫어 내는 무예의 최고 경지로 추측되지만, 단 한 명도 그 근처까지 접근조차 하지 못했기에 생사경은 완전한 미지의 세계다. 수천 년 무림사에 단 한 명도 탄생하지 않았던 지고무상(至高無常)의 경지가 바로 생사경이다. 혹자는 이 생사경은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냈다고 질책할 정도다.

어쨌든 정파의 무공이 이상과 같다면 사파의 무공은 정파의 무공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사파는 달마가 전래한 무공과는 달리 중원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무술이다. 그렇기에 토납술에서 정파와는 다른 방법을 택한다. 사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녹림(綠林 : 산적이나 해적 등 남을 등쳐 먹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의 집단. 창부 등도 여기에 속함)이나 사파 무공을 익히는, 역사가 짧은 작은 군소방파들은 내공의 기술이 정파보다는 떨어지므로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상대 무공에 대한 파해식이나 기괴한 초식 등을 개발해 냈다. 따라서 사파에서는 기교에서 앞서가는 외가무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때문에 약간의 기술과 그에 대한 숙련도만 있으면 되므로 빠른 시일 안에 절정고수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상당한 고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파고수들이 미숙한 상태기 때문에 이들의 무공은 상당히 위협적이다. 사파에서는 검뿐 아니라 실리적인 싸움을 하기 위해 다양한 무기를 개발하여 사용하며, 각종 암기도 많이 애용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 사파들과는 또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방파가 있으니 바로 마교(魔敎)다. 마교에서는 오랜 역사와 전통에 따라 각종 체계적인 토납술이 개발되었고, 그들이 택한 것은 속성으로 내공을 쌓는 기술 중에서 가장 빠른 성취도를 이룰 수 있는 역혈기공(逆穴氣功)이었다. 운기조식을 할 때 일상적인 방향과는 반대로 내공을 몸에서 일주천시킨다면 대단히 빠른 속도로 내공을 쌓게 된다는 것을 알아낸 이후, 마교는 이 기공을 통해서 수많은 고수들을 배출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한 역혈기공의 기법들이 개발되었고, 또 그에 따른 패도적인 마공들이 많이 개발되어 정파인들의 숨통을 끊어 놨다.

속성으로 내공을 쌓는 것은 좋은 점도 많았지만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내공을 쌓는 속도가 빠른 기술일수록 그 확률은 더욱 올라간다. 그 때문에 마교에 처음 입문한 무사들은 가장 빠르게 내공을 쌓는 기술을 사용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가 되면 좀 더 안전한 방법으로 바꾸어 수련한다. 따라서 마교에는 각 단계별 고수들에게 맞는 체계적인 심법들이 있었다. 잘못하면 지금까지 고생해서 쌓은 내공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쳐야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생기는 이점은 주화입마의 위험도를 잊어버릴 만큼 대단하다. 마교에서는 20대에 절정고수가 될 수 있을뿐더러 30대에 초절정고수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래서 마교의 고수들은 외가의 무공보다는 장풍(掌風), 지풍(指風), 검풍(劍風), 검기(劍氣) 등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는 내가의 무공을 사용했고, 특히나 패도적인 장풍을 쏘아 내는 기법들이 발달해 있었다.

두 번째 문제점은 산공(散功)의 위험이다. 엄청난 고통과 함께 자신이 여태까지 쌓아 놓은 내공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그 고통의 시간은 내공을 얼마나 쌓았느냐에 따라 다르며 절정의 고수일수록 고통의 시간은 증가한다. 하지만 마교에서 그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산공은 늙거나 병들어서 죽기 일보 직전에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교의 고수들은 정파의 고수들처럼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기를 염원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일정 수준 이상 무공을 쌓고 나면 벽에 막힌 것처럼 더 이상 진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교의 고수들은 이것을 ‘보이지 않는 벽’이라고 불렀는데, 그 벽을 뚫으면 마(魔)의 정점(頂点)이라고 불리는 극마(極魔)의 경지로 들어설 수 있다.

정파에서 삼경의 고수가 있듯이 마교에서도 그들이 익히기를 염원하는 경지가 있다. 그 첫째가 마인(魔人)의 정점인 극마(極魔)의 경지다. 이 경우 역시 온몸이 무예를 시전하기에 최적의 상태로 바뀌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경험하며, 그를 통해 반로환동한다.

극마의 고수는 마기(魔氣)를 몸 안에 고루 갈무리하여 자연스럽게 뻗어 나오는 마기만으로 사람들을 전율시키는데, 내력이 약한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투지를 잃고, 보통 사람들은 생명을 잃기도 한다. 또 마음먹기에 따라 완벽하게 마기를 몸 안에 갈무리하여 밖에 드러나지 않게 할 수도 있었다.

뿜어낸 마기만으로 능히 주변의 사람들을 죽일 수 있고, 손가락을 들어 작은 산을 무너뜨릴 수 있는 극마의 경지는 정파의 화경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현존하는 극마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네 명이며 사람들은 이들을 4마제(四魔帝) 또는 4천왕(四天王)이라 부르며 두려워한다. 그들은 보통 때는 마기를 거의 밖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기분이 나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살인적인 마기를 밖으로 흘린다. 그렇기에 그것을 보는 수하들은 피가 얼어붙는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탈마(脫魔)의 경지로, 마인들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다. 탈마의 경지에 이르면 만독불침(萬毒不侵)의 상태가 된다. 아직 탈마에 이른 고수는 단 한 명도 배출되지 않았기에 극마의 경지가 화경과 비슷한 점에 착안하여 탈마의 경지를 현경과 비슷하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다. 이 경지가 탈마로 불리는 이유는 모든 마인이 두려워하는 산공을 겪지 않는 수준일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의 최고 경지라고 볼 수 있다.

그 윗단계는 없는데, 일부 마인들은 극마와 화경이 비슷함에 착안하여 만든 경지가 탈마인 만큼, 탈마의 위는 아마도 정파의 생사경과 같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그들은 무공의 시작은 다르지만 마지막은 같은 것으로 종결지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탈마의 경지에 이른 사람도 없는 형편이었으니 그 추측은 어디까지나 일부 마인들의 망상일 뿐이라고 정파에서는 일축하고 있다.

운명의 시작

마교의 교주는 장로급 이상이 모두 모이는 1년에 한 번뿐인 정기집회(定期集會)에서 갑자기 특이한 안건을 내놨다. 현 마교 교주인 흑마대제(黑魔大帝) 한중길(韓中吉)은 마의 극한이라 부를 수 있는 극마의 경지에 이른 고수였기에 설핏 보아서는 겨우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충분히 마기를 숨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기를 은은히 뿜어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익힌 자전마공(紫電魔功)은 온몸에 은은한 보라색을 띠게 만들었기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괴기함을 느끼게 했다.

“본교는 사파 최대의 방파로서 2만 명에 가까운 고수를 보유하고 있소. 하지만 각 지단에 파견되어 있는 하수들을 제외하고 그런대로 쓸 만한 고수들만 든다면 1만 명도 되지 않소. 그중에서도 정예를 가려 뽑는다면 5천 명이 될까 말까 하는 형편이니 현재 정파의 쓰레기들에 비했을 때 언제나 열세에 몰리는 것이오. 뭐 좋은 방법이 없겠소?”

그러자 삼면인마(三面人魔) 소무면(簫無面) 장로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마교 서열 15위의 노고수(老高手)로서 마교의 5대 무력 단체라 할 수 있는 자성만마대(紫星萬魔隊)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의 호가 말해 주듯 그는 세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정파와의 싸움에서는 미친 듯한 광소(狂笑)와 잔인한 손속, 그리고 피에 굶주린 광기(狂氣)를 보여 주며, 무림인이 아닌 일반 백성들에게는 활불(活佛)과 같은 인자함을, 교내(敎內)에서는 엄격하고 치밀하며 자상한 면모를 보여 줬기에 붙은 명호였다. 그는 교내 많은 수하들에게 인기 있는 노고수였다.

“정파의 잡것들을 물리치는 데는 현재의 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왜 고수가 없다고 탓하십니까?”

소 장로의 말에 대해 교주를 대신해 적미염(赤眉艶) 왕자영(王紫影) 장로가 답을 했다. 늘씬하고도 고혹적인 다리를 보라는 듯이 드러낸 선정적인 옷차림을 즐기는 그녀는 여자로서는 지극히 올라서기 힘든 위치인 장로 서열 3위, 마교 서열 6위에 올라선 여인이었다. 그녀는 오랜 시간 익혀 온 적혈수라마공(赤血修羅魔功) 탓에 긴 눈썹의 끝부분이 약간 붉은빛을 띠고 있다. 그녀는 치밀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무공도 뛰어났지만 그 심계(心界)가 깊어 교주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물론 침실에서도 말이다. 그 엄청난 내공을 이용한 주안술(珠顔術) 덕분에 20대 중반 정도의 요염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그녀는 현재 교내의 정보기관이라 할 수 있는 삼비대(三秘隊)의 수장(首長)이다.

“험, 그 이유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 미미한 단계이지만 아수혈교(阿修血敎)의 움직임이 포착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수혈교라는 말은 모두 처음 들어 보는지라 수석장로인 마천검귀(魔天劍鬼) 여절파(呂切破)가 물었다.

“아수혈교가 뭐요?”

왕자영 장로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혈교(血敎)의 후신입니다. 이름만 바꾼 거지요.”

80년 전 혈교와의 치열했던 전투를 생각하며 좌중은 조용히 신음을 흘렸다.

“음…….”

그러자 왕자영 장로가 말을 이었다.

“정파와의 대결이라면 큰 문제가 없지만 거기에 아수혈교가 끼어든다면 만만치 않습니다. 저 옛날 아수혈교의 전신인 혈교(血敎)와의 전투를 잊으셨습니까? 그때 혈교와 정면충돌하여 본교 전력(戰力)의 4할이 무너졌었습니다. 본교는 그 타격을 회복하는 데 자그마치 50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했습니다. 그리고 암흑마교의 움직임도 생각해야 합니다. 암흑마교의 움직임은 잡히는 것이 없지만 그래도 조심은 하는 것이 좋겠지요.”

혈교는 강시나 실혼인 등을 제작하여 상대에 비해 떨어지는 무공을 각종 사이(邪異)한 대법이나 기술로써 보완하는 무리들로서, 그 당시 먼저 이들의 움직임을 처음 포착한 것은 정파의 첩보 기관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막강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강시라든지 아니면 사이한 대법 등을 파해하려면 보통의 무사들로는 힘에 부쳤다. 최소한 1갑자 이상의 내공을 갖춘 내가고수(內家高手)가 아니라면 강시와 대결을 벌여 그들에게 타격을 입힌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적의 각종 대법에 걸리지 않으려면 웅후한 내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으므로 정파가 꾀를 부렸던 것이다.

혈교와의 정면충돌을 견딜 수 있는 대량의 절정고수들을 보유한 정도 문파가 없었기에 무림맹 회의에서 슬쩍 마교에게 그물을 씌워 그들과 먼저 충돌하게 만들었다. 그때 정파가 옆에서 인심 쓰는 척하며 도와줬지만 마교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아마 정파와 마교가 연합 전선을 펼친 것은 이때가 처음일 것이다. 이때 정파에서는 초절정고수들만을 파견해서 도왔다. 그 전투 후 정파에서는 참가자들에게 함구령(緘口令)을 내렸고, 마교에서도 그 일을 외부에 선전하지 않았으므로 마교와 정파의 연합 전선은 영원히 묻혀진 사건이었다. 만약 그때 정파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마교의 피해는 더욱 컸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마교의 사생아(私生兒)라고 볼 수 있는 암흑마교가 있는데, 이는 혈교와의 전투 후에 혈교에서 입수한 각종 서적들을 바탕으로 “우리도 이런 사이한 대법을 사용합시다”하고 외쳤던 집단이다. 그만큼 혈교가 사용했던 각종 기술들은 마교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줬던 것이다. 이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부교주 장인걸은 교주가 그들의 제안을 묵살하자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노획한 서적들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 후 그는 명호를 흑살마제(黑殺魔帝)로 바꾸고 암흑마교(暗黑魔敎)를 창단했다. 암흑마교는 마교의 무공과 혈교의 사이함이 합쳐진 특이한 단체가 되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아수검인(阿修劍忍) 이청(李淸) 장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마교 서열 14위로 염왕대(閻王隊)의 대장이었기에 발언권이 꽤 강한 인물이었다.

“새로운 정예 고수들을 좀 더 키운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교주가 약간의 흥미를 보였다.

“고수를 키우고는 싶지만, 어떤 방법이 좋겠소?”

“각 지단에 연락하여 열 살이 되지 않은 기재들을 대량으로 납치하여 교육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너무 많은 아이들이 없어지면 관(官)이나 정파에서 눈치를 챌지도 모르니 3천 명 정도만 납치하면 어떻겠습니까?”

이 장로의 말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삼면인마(三面人魔) 소무면(簫無面) 장로였다.

“여태까지 본교에서 태어나는 아이들 외에 보통 1년에 3백 명 정도를 납치해다가 전사로 만들어 쓰고 있는데, 갑자기 그 열 배인 3천 명이라니? 그 많은 수를 납치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들을 어디서 교육시킨단 말입니까?”

그러자 왕자영 장로가 곱게 미소 지으며 이청 장로 대신 답했다.

“그건 제가 대답을 하도록 하죠. 실상 3천 명을 데려왔다 하더라도 초고수로 키운다면 초기 단계 내공을 쌓는 과정에서 최소한 1천 명 정도는 잃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거기에 각종 무공을 수련시키다 보면 그중에서 잘해야 5백 명 정도 쓸 만한 인재를 뽑아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실상 3천 명이나 되는 식구를 가르칠 훈련장은 필요 없습니다. 어린애 3천 명이 주거할 허름한 숙소를 만들어 그들에게 내공 훈련을 시키고, 그사이에 2천 명 정도가 훈련할 수 있는 수련장을 만들면 됩니다. 거기서 키운 5백 명 정도는 현재 있는 수련장만으로도 상승무공의 교육이 충분할 겁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교주는 상당한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듣고 보니 그 말에도 일리는 있소. 그렇다면 외총관, 아이들은 언제까지 준비될 수 있겠소?”

“그래도 좀 괜찮은 애들을 뽑아 와야 하니까 다섯 달은 걸립니다. 통보하여 납치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리로 쥐도 새도 모르게 데리고 오는 것이 문젭니다.”

“그건 외총관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존명.”

“이번 훈련을 진행할 훈련장 건설의 총감독은 소무면 장로가 수고해 주시오.”

“존명.”

“훈련은 이청 장로가 책임지고 해 주시오. 이번에 키울 고수들의 능력에 따라 본교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힘써 주시오.”

“존명.”

“그리고…, 내 직속의 암살대는 있지만 이들로는 좀 모자란다는 생각이 드니까 새로운 암살자들을 추가로 50명 정도 만들었으면 좋겠소. 그들을 흑살대(黑殺隊)라고 이름 짓고, 누구의 휘하에 두는 것이 좋을까…….”

그러자 모든 장로들의 눈에 조금씩 갈망과 희망이 떠올랐다. 교주가 직접 지휘해서 만든 단체는 최정예일 것이 분명했고, 그들이 자신의 밑에 배속된다면 그만큼 자신의 입지도 넓어지기 때문이었다. 좌중을 한번 둘러본 후에 교주는 입을 열었다.

“그렇군, 내총관이 이들을 지휘하는 것이 좋겠어. 그리고 나머지는 능력이나 그때의 상황을 봐서 결정하기로 하지.”

회의가 끝난 후 교주는 회의실에서 떠나가는 고수들 중에서 삼비대의 수장 왕자영 장로를 따로 불렀다.

“아수혈교의 총단은 알아냈나?”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세력이 점차적으로 잡히고 있습니다. 그들도 현재 세력을 키워 나가는 형편이기 때문에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어서 정보 수집이 힘듭니다.”

“그들의 준동은 언제쯤이라고 생각하시오?”

“빨라도 10년 후 정도?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암흑마교는?”

“그들의 움직임도 쫓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아수혈교와 암흑마교가 연합할 가능성은 없나?”

“거의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그에 대비해서 연구 조사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큰 문제는 없다고? 참! 정파 녀석들은 그들의 움직임을 알고 있나?”

“아마 무림 최대의 정보 집단이라는 개방(쾬幇)이나 무영문(無影門)에서는 얼마간 알지도 모르지만, 글쎄요…, 저희도 아주 우연한 기회에 포착한 사실이라…….”

“전에 정파 녀석들에게 당한 만큼 돌려주는 방법은 어때?”

“돌려준다 하심은?”

“아수혈교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그들이 알게 해 주는 거야. 총단의 위치를 알려 주면 더욱 좋고.”

교주의 말에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흐음…,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취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본교가 혈교와의 싸움에서 얼마나 큰 타격을 받았나? 우리끼리 싸울 것이 아니라 정파 녀석들에게도 사파의 무서움을 알게 해 줘야 한다구.”

“하지만 아수혈교가 전처럼 사파의 통일을 우선시한다면, 그때는 전과 같은 전투를 각오해야 할 텐데요?”

“그러니까 아수혈교 녀석들에게도 그보다는 정파의 핵심 세력을 비밀리에 기습해서 선제공격을 하는 것이 더욱 이득이 클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만들어야지. 그들이 먼저 맞붙는다면 세력 회복에 최소한 10년, 아니 30년은 걸릴 거야. 그동안에 우리도 준비를 해야지. 고수 한 명을 키우는 데 1, 2년이면 되는 줄 알아?”

“숫자만 자랑하는 그 개방의 돌대가리들은 속이기가 쉽겠지만 그 여우같은 무영문의 옥화무제(玉花武帝) 할망구는 속이기가 어려울 텐데요? 그리고 그 수하들도 원체 교육이 잘된 녀석들이라…….”

“무영문에는 아주 조금만 알려 줘. 그럼 그 악착같은 할망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전처럼 그들이 공작을 한다면 우리가 역으로 당할 수도 있습니다.”

“9파1방과 5대세가의 세력이나 방어망 등 정보를 넌지시 아수혈교에 알려 주면 돼. 아수혈교 녀석들도 바보는 아닐 테니까 철옹성인 본교 총단보다는 허술한 정파의 본거지들을 기습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겠지. 일단 기습하고 나면 그다음은 정파와의 전면 전쟁이 되도록 유도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바쁠 텐데 이만 물러가도록. 참, 오늘 저녁에는 시간이 있나?”

교주의 약간 응큼한 시선을 받으며 그녀는 곱게 살짝 눈을 흘겼다.

“예, 저녁에 뵙도록 하죠.”

음모와 또 다른 음모……. 힘이 월등한 단체가 등장하지 못하는 무림이고 보니 각종 술수가 판치는 세상이었다. 모든 무림인들의 꿈이 무림일통(武林一統)이었지만 사실상 그것은 꿈에 불과했다. 서로가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는 무림에서 월등한 힘을 가진 집단이 생겨나기란 불가능했다. 어떤 한 집단에서만 초절정고수를 대량으로 키워 낸다는 것도 힘들었다. 만약 그것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상대방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필사적으로 방해하기 때문이다.

특이한 인물 2044호

그로부터 10년 후…….

“흑살대(黑殺隊)의 교육은 끝났나?”

“예, 성공리에 끝마쳤습니다. 그런데 안심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뭔가?”

“그러니까, 2044호가…….”

“2044호라면 들은 기억이 있군. 검에 특출 난 재능을 보인다는 녀석이지?”

“예, 쾌검이나 경신술, 은잠술(隱潛術)의 달인으로 천부적 암살자의 재질을 타고난 녀석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암살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

“글쎄, 암살보다는 정면 대결에 더 맞다고 해야 할까요? 이상하게도 완벽하게 암살을 행하고 있는데도 어둠의 살인자와는 거리가 먼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위의 지시를 잘 받아들이고 있는데, 문제는 언제 그가 성질을 부리기 시작하느냐입니다.”

“그렇다면 딴 녀석으로 교체하면 어때?”

“대단히 능력 있는 2급 살수라서……. 그리고 특급 살수로 성장할 가능성도 대단히 크고…, 또 대체할 만한 이렇다 할 녀석이 따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당히 써먹다가 나중에 다른 소속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군.”

“궁여지책으로 암살에 필요한 것 말고는 어떤 기술도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의 검술에 대한 집착이 너무 커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데도 스스로 터득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검수로서는 미래가 기대되는 녀석이군.”

“예, 지금은 살수가 필요하니 문제죠.”

그는 2044호로 불려졌다. 그가 이곳에 온 지 벌써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의 나이 17세, 그는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곳에 온 이후로 끊임없는 훈련의 연속이었다. 먼저 내공을 쌓았다. 그에게는 별로 힘든 일이 아니었는데 그의 동료들은 수련 중에 한 명씩 쓰러졌고, 그 후로 그들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틈틈이 격투 훈련을 받았다.

4년이 지난 후 흑의를 걸친 무사 열두 명이 오더니, 아이들 팔의 경맥 두께를 보고 두 패로 나누었다. 그리고 한 패를 데리고 떠났다. 그들은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는 팔의 경맥이 가늘어 장법보다는 검법이 맞다는 판정을 받고 검술 훈련을 했다. 그가 배운 것은 다섯 가지의 쾌검술과 경신술, 신법 등이었다.

다시 3년이 지나자 그중에서 2백 명이 차출되었다. 2044호도 그 무리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여태까지 배우던 무리에서 떨어져 그들만의 훈련을 새로이 받았다. 그것은 전문적인 살인술이었다. 이때 배운 검법은 여태까지 배운 검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쾌(快)…….

완전한 속도 위주의 검법으로 방어는 무시하고 적을 죽이는 방법만을 배웠다. 그리고 은잠술과 기척을 죽이고 이동하거나 매복하는 여러 가지 기법들을 배웠다. 이곳 마교에 와서 2044호가 정을 붙인 것은 검이었다. 친구로 사귄 아이들은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여러 친구들과 헤어지며 그들과 소식이 끊기자 그는 검에게로 애정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2044호는 살수로서의 훈련을 받게 되면서 검을 만들어 가졌다. 살수는 직업상 자신의 손에 맞는 검을 각자의 취향에 맞춰 주문 제작한다. 그는 가장 아끼는 자신의 검에 묵혼(墨魂)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백련정강(百鍊精剛 : 1백 번이나 연마한 강철로 대단히 튼튼하다)으로 만들어졌으며 약간 푸른빛이 도는 백색 광택의 반월형 검신에 2044호의 주문에 따라 ‘墨魂(묵혼)’이란 글씨가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묵혼은 2척 3촌(약 70센티미터) 길이의 짧은 검신과 1척 길이의 긴 손잡이를 가진 기형검으로 칼날받이 없이 검은색의 수수한 검집과 손잡이만을 가진 검이다.

2044호는 하루에 한 번씩 무인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검을 닦을 때 묵혼의 그 탄력 있는 아름다운 검신을 들여다보며 정신을 빼앗겼다.

그의 첫 번째 살인은 정파의 천수검귀 공손수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훈련의 마지막 과정으로 이제까지의 이론을 실습하는 기회였다. 이때 그에게 배정된 인물이 공손수였다. 교관은 그에게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성명 : 공손수

호 : 천수검귀

특기 : 독문검법 귀나천리도법

내공 수위 : 1갑자

특기 사항 : 대단히 뛰어난 검객. 여색을 많이 밝힘. 현재 일곱 명의 첩이 있으며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음. 대금을 갚지 못하면 딸이나 부인을 빼앗아 팔아 버리기도 함. 그는 여섯 명의 1급 무사와 서른세 명의 2급 무사를 비롯해 총 6백여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는 네 개의 도박장과 두 개의 전장(錢場 : 은행과 같으며 고리대금업을 한다), 일곱 개의 전당포를 가지고 있으며 고리대금업과 사기도박을 통해 거둬들이는 돈은 막대한 액수다. 그를 지키는 여섯 명 1급 무사들의 능력은 뛰어나다. 그들은 교대로 공손수를 경호하며 밖에 외출할 경우 그들 중 세 명만이 따라간다. …….

주의 사항 : 교를 떠난 후 50일 이내로 죽여야 하며,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말 것.

그가 아직 쪽지를 읽고 있는데 교관이 말했다.

“2044호, 이자를 해치우는 것은 너의 실력이면 충분하다. 살아 봤자 별 볼일 없는 쓰레기 같은 녀석이니 별로 마음 쓰지 마라.”

“알겠습니다.”

2044호는 목표물이 사는 곳까지 도착하는 데 35일을 소비했다. 그런 후 공손수의 저택 가까이에 접근해서 우선 10일을 기다렸다. 오랜 시간 목표물을 관찰할수록 암살의 성공률이 올라가기에 2044호는 10일을 투자하는 것이 별로 아깝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관찰해 본 결과 무사들을 죽이지 않고 저택에 숨어드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전장을 둘러보러 나간 공손수에게 표창을 던졌다. 공손수의 무공이나 호위 무사들의 능력을 실험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가장 큰 목적은 집에서 1급 무사들을 불러내는 것이었다.

다음 날 공손수는 기습 공격을 받고 조심성이 발동해서 여섯 명의 1급 무사들을 모두 거느리고 전장에 나타났다. 이제 기회가 온 것이다. 2급 무사 정도의 수준으로 그가 집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을 눈치 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공손수가 1급 무사들을 모두 거느리고 외출한 후에 살짝 집 안으로 숨어 들어와 끈기 있게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는 10일간의 감시를 통해 공손수가 그때의 기분에 따라 일곱 명의 첩이나 부인 중 아무의 방에나 들어가 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렇기만 하다면 야습을 하기에 아주 힘이 들겠지만 3, 4일에 하루는 새로 들어온 일곱 번째 첩에게 간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2044호는 일곱 번째 첩의 방에서 이틀 동안 초인적인 인내로 인기척을 감추고 숨어 있었다. 숨어 들어가기 전에 용변을 보고, 완전히 빈속으로 들어갔다. 빈속으로 최악의 경우 4일간을 버텨야 하는 것이다.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준비할 수는 없었다. 먹을 때는 좋겠지만 용변을 처리하는 것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는 침대 아래쪽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서 기다렸다.

운 좋게도 이틀째 저녁이 되자 공손수가 들어왔다. 2044호는 공손수와 계집이 부둥켜안고 헉헉거리는 신음 소리를 기준으로 공손수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에 천천히 검을 위쪽으로 올렸다. 검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숨어든 그 순간부터 검을 뽑아 놓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칼의 위치를 잡은 순간 최대한 빠른 속도로 공손수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찔렀다. 그는 가벼운 신음 소리와 낮은 비명 소리가 들린 후 잠시 기다렸다.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고 방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칼을 그대로 두고 침대 밑에서 조용히 빠져나와서 그가 본 것은 남녀의 머리를 관통해 올라온 묵혼의 검신이었다. 칼을 뽑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고, 그 덕에 피비린내는 나지 않고 여인의 체취와 정사(情事)의 냄새만이 방 안에 감돌고 있었다.

2044호는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떤 감시 체제든 새벽이 되면 느슨해진다. 또한 2044호가 새벽을 기다리는 더 큰 이유는 1급 고수들이 새벽 5시에 교대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약간의 빈틈이 있었다. 2044호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집 안에서 빠져나왔다. 나오기 직전에 묵혼을 뽑았기 때문에 혈흔도 거의 남지 않았다.

실습을 마치고 훈련장으로 돌아온 2044호는 곧 교관의 호출을 받았다.

“2044호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교관은 종이뭉치를 들여다보며 2044호에게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2044호! 자네는 지금까지 다섯 가지 검술을 익혔는데, 그중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왜 그냥 찌르기만으로 상대를 죽였지?”

“증거를 남기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검술을 사용하면 시체의 상흔(傷痕)을 통해서 죽인 자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호오……. 가르치지도 않은 것을 빨리도 깨닫는군. 자네는 그를 죽이는 데 세 가지 흔적을 남겼다.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고 있나?”

“예! 호위 무사들의 주의를 돌리려고 사용한 표창, 그리고 시체의 머리에 있는 검흔, 나머지 하나는 침대 밑의 구멍일 겁니다.”

“잘 아는군! 왜 표창을 사용했나? 돌같이 알아보기 힘든 것을 사지 않고?”

“그 표창은 무기점에서 많이 파는 것입니다. 본교에서 제작된 것이 아닙니다.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구입해서 사용했습니다.”

“생각은 좋지만 수소문하다 보면 누가 그걸 사갔는지 밝혀 낼 수도 있다. 앞으로는 표창보다는 동전이나 돌멩이를 이용해라!”

“예!”

“검을 그냥 찌르기만 한 것은 잘했다. 현재 밖으로 드러난 것으로는 살수가 죽였다는 것만 알 뿐 누가 죽였는지는 오리무중이지. 그런 식으로 하면 되는 거야. 앞으로도 열심히 해 보도록!”

“예.”

“이번에 성공한 자들을 위해 연회가 준비되어 있다. 내일부터는 마지막 훈련이 시작된다.”

“알겠습니다.”

그는 훈련 과정에서 다섯 번의 살인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훈련이 끝났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1급 살수라는 칭호와 묵향이라는 이름이 전부였다. 그는 언제나 검은색 무복을 입고 검은색 죽립이나 두건을 애용했으며, 검도 손잡이나 검집이 모두 검은색이었다. 그러다 보니 묵향이란 별칭이 붙었다.

묵향은 그를 지칭하는 일종의 별칭이었지만 일곱 살 때부터 이름이 없이 2044호로 불리다 보니 예전의 이름은 벌써 잊어버린 지 오래고, 결국은 이것이 정식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는 이번에 새로 조직된 흑살대에 배치되었다. 흑살대는 마교 내 서열 9위인 내총관의 휘하에 있었기에 상당히 좋은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묵향은 대부분의 동료들이 주색(酒色)을 탐닉하여 살인 후의 긴장감을 풀거나 쾌락을 즐기는 걸 보면서도 지속적으로 무공을 연마하는 데 힘을 쏟았다. 실상 살수의 경우 단 일초의 공격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데다가 빠른 경공과 믿을 수 있는 은신술만 지니고 있으면 되기 때문에 사냥물을 기다리는 인내와 끈기를 요하지만 그렇게 높은 무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재미있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무공의 높낮이가 필요한 때가 있다. 임무를 완수하고 탈출할 때가 바로 그런 때다. 죽기로 마음먹는다면 못 죽일 사람이 없지만 자신은 살고 상대를 죽이자니 힘이 드는 것이다.

묵향이 검술을 익히는 데 가장 중요시한 점은 속도였다. 여러 번 기습을 통해 많은 고수들을 죽이며 무공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 것이 바로 쾌(快)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경공과 신법이었다. 숨어 있다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적에게 다가가서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빠른 신법(身法)이 필요하다. 그리고 적을 해치우고 탈출하는 데 필요한 경공술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탈출하면서 추격하는 적과 전투를 벌여야 했지만 살수는 결코 검법을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검법을 사용하면 정체가 탄로 나기 때문이다.

살수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끈기와 인내였다. 기다림이야말로 기회를 만들어 주는 가장 큰 기술이었다. 그리고 적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여 분석할 수 있는 관찰력과 두뇌도 필요하다.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대의 습관이나 버릇이 그에게 득을 주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묵향이 검술에 미쳐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대주(隊主)는 그에게 새로운 검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경신술이나 은잠술 등 살수에게 필요한 각종 기술은 가르쳤지만 유독 검술만은 가르치지 않았다. 대주가 봤을 때 묵향의 검술 조예는 이미 살수의 경지를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대주가 보기에 묵향의 실력이라면, 정면 대결을 안 해 봐서 자신을 잘 모르고 있었지만, 정면 공격을 해도 충분히 모두 다 죽이고 탈출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의 검술이 강하다는 것을 모르는지 아니면 필요 없는 살생을 싫어하는 탓인지, 그는 언제나 전통적인 살수의 살인 기법들을 선택했고, 언제나 흔적도 없이 빠져나왔다.

아침 일찍 일어난 묵향은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과연 검술의 끝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말하는, 검에서 뿜어 나오는 검풍, 검기, 검강이란 것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질까? 현재 검에 공력을 주입한 상태에서 휘두르면 뒤로 무형의 기운이 뻗쳐 나무 따위를 자르는데, 이것이 검풍인가? 아니면 검기인가? 그리고 뛰어난 고수는 검기만으로 1백 장(약 3백 미터) 밖의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하던데, 이것은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 어검술(御劍術)을 펼치면 검에서 빛이 나와 눈이 멀 지경이라고 들었는데 이것은 어떤 조화일까……?’

묵향이 이렇게 검술에 대해 끊임없는 사색을 하게 된 원인은 대주에게 있었다. 우선 눈에 보이는 주어진 목표가 없으니 현재 알고 있는 자신의 지식으로 한 단계씩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마교의 무사는 전통적으로 많은 마공을 익힌다. 한 가지 마공을 익히면 또 다른 마공을 익히기 위해서 힘쓴다. 나중에 익히는 마공일수록 막강한 위력을 자랑했고 사용하는 데 상당한 내력이 소모되지만, 마교의 고수들은 정파의 고수들이 꿈도 못 꿀 정도로 빠른 속도의 내공증진을 보였기에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가 되려면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말이나 구결(口訣)로서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파에서는 내공이 매우 천천히 쌓이므로 자신의 검술을 익히는 데 한계가 있다. 어떤 검술을 익히다가 내공이 달려서 후반부를 익히지 못하기도 하고, 적과 전투를 벌이거나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연결하여 더욱 강한 검술의 경지를 이룩하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교의 고수는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할 필요도 없이 막강한 내공만으로도 상대 고수들을 공격할 수 있고, 또 내공이 모자라면 마교의 비전(秘傳)을 이용하여 순간적으로 자신의 공력을 최고 다섯 배까지도 증폭하여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 공력을 뿜어내면 목숨이 위태롭기 때문에 대부분 세 배 정도로 만족한다.

세 배 정도만 공력을 증폭시켜도 기본 공력이 약하다면 그것이 죽음으로 연결되지만 고수에게는 일순간 그 정도 내공을 뿜어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 때문에 마교의 고수들은 더욱 패도적인 마공을 원하면서도 통 익힐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윗부분까지 다가가다 보면 벽에 막힌 듯 더 이상의 진보가 없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여기서 깨달음을 얻은 소수만이 극마의 경지로 들어가게 된다.

묵향은 처음부터 무공에 대해 많은 사색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환경 속에서 무공을 익혔다. 대주야 묵향이 더 이상의 무공을 배우지 않기를 바랐기에 취한 조치였겠지만 묵향은 그 덕분에 마교 고수로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무공에 대한 사색을 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어 버렸다. 언젠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생각하는 습관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 바로 모든 마교인들이 넘어서기를 원하는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혔을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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