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이라도 더 많은 고수를
“교주님! 예상 밖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적미염 왕자영이 방에서 쉬고 있던 교주에게 긴급 면담을 청했다.
“무슨 일인가?”
“아수혈교와 황궁이 격돌했습니다.”
“황궁이?”
“예! 찬황흑풍단이 대망산을 공격하여 모든 강시들과 그곳에 있던 고수들을 진멸(鎭滅)했다 합니다.”
“찬황흑풍단이라면 무림의 고수를 골라 뽑아, 거기에 황궁무고의 무공을 더 가르쳐 무공이 대단한 경지라 들었다. 그 강대한 힘은 태산을 무너뜨린다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그런데 그게…….”
“뭔가? 말해 보게.”
“찬황흑풍단도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고 합니다. 전사자가 2천 명 정도이고, 부상자가 6천 명을 넘어간다고 합니다.”
“그럴 수가! 찬황흑풍단은 무림인들과 달리 중갑주(重鉀주)를 입을 뿐더러 말에게까지 갑옷을 입힌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피해가 클 수가 있나?”
“정보로는 이미 만들어져 있던 강시 2천여 구, 50여 구의 신형 강시, 그리고 수비 무사들이 천여 명, 그중에도 대단한 고수들이 몇 있었는데 그들에게 입은 타격이라고 합니다.”
“하기야 황궁의 무리들은 내공보다는 외공에 치중하는 무리들! 그래도 찬황흑풍단은 일반 무사들과는 달리 내공을 쌓은 자들일 텐데.”
“무림인들을 상대로 했을 때는 그들도 그 정도의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겁니다. 무림인들은 칼을 맞으면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니까요. 문제는 웬만한 상승고수가 아니면 죽일 수 없는 강시들 때문이죠. 그나마도 피해가 그 정도에서 끝난 것은 두터운 갑주와 방패 덕분이라고 합니다.”
이제 중요한 대화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교주는 왕자영의 그 가느다란 허리를 살며시 잡고는 품속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하여튼 일이 재미있게 되어가는군. 어떻게 된 것이 붕어 미끼를 썼는데 잉어가 잡히나?”
“아이…, 교주님도. 아마 무림맹에서 아직 무림의 사정에 어두운 황궁에 올가미를 씌운 것 같습니다.”
“무림맹도 꽤 하는군, 클클클.”
“이번의 사건으로 생각한 것인데, 차후에 있을 충돌에 대비하여 고수들을 많이 확보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각종 무공에 뛰어난 성취를 보이는 녀석들만 골라서 특별히 교육시켜 다음 세대의 고수들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이번의 사건을 통해 고수들의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었습니다.”
교주는 느긋하게 왕자영의 옷을 벗기며 말했다. 왕자영도 그런 교주가 싫지는 않은지 교주가 편하도록 자세를 잡아 주고 있었다.
“좋아, 좋아. 그대가 알아서 하게나.”
“예, 지금 투입되어 있는 묵향에 관한 말씀인데…, 흐흠…, 일급 살수로서 스물세 명을 완벽하게 없앴지만 아직도 무공면에서는 미숙합니다. 그 녀석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은 무공보다는 머리를 잘 굴렸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임무가 없을 때는 무공을 익히고 있는데, 아이… 이러지 마세요. 말을 못 하겠잖아요……. 으으음…, 그는 검에 능하니 뽑아서 교육시켰으면 합니다.”
교주는 도저히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왕자영의 육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기야, 나이도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인데도 상층부에서도 녀석의 이름을 기억하는 자들이 많을 정도로 암살 실력과 검술이 뛰어나니……. 하지만 이미 본좌가 알아서 하라고 한 이상 그대 마음대로 하면 될 것 아닌가?”
“나머지는 수련생이라 상관없사오나 묵향의 경우 살수로서 내총관의 휘하에 있는지라 제가 그냥 데려가는 것보다는 교주님께서 말씀해 주시면 서로 간에 입장이 편할 것입니다.”
“알겠네. 내총관에게 말해 두지.”
“감사합니다, 교주님.”
이제 교주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완벽한 나신이 되어 버린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고 침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묵향이 일곱 번째로 만난 교관은 상당히 노련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혀 살수 같아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살수란 전혀 살수처럼 보이지 않는다. 누가 살수로 보이는 사람과 같이 있겠는가. 진정한 살수는 살인을 하는 그 순간에도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여태까지 그를 지도했던 교관들은 모두 다 전직 아니면 현직 살수들이었다. 살수들 중에서 나이가 많이 들어 현역으로 뛰기 어려운 사람들은 후배들을 가르치는 데 투입된다. 하지만 이번 교관만큼 완벽한 살수라고 생각해 본 사람은 없었다.
생강은 오래 묵은 것일수록 맵다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오랜 연륜과 경험에서 오는 숙련미(熟練美)라고 할까. 나이가 들수록 그 진수를 뿜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교관들은 현재의 실력 있는 살수보다는 오랜 살수 생활을 하고 은퇴한 고수들이다. 그럼으로써 그들 자신이 얻은 경험과 지식을 후배들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새로운 교관은 40대 초반으로 보였으며 그런대로 잘생긴 얼굴의 남자였다. 그의 얼굴에는 상흔이 깊지는 않아 눈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왼쪽 눈 위에서 코 쪽으로 난 긴 검상이 있었다.
“본인은 환사검(幻邪劍) 유백(柳伯)이라 한다. 이제부터 너를 가르칠 것이다.”
“유 선배께서는 살수십니까?”
“그건 왜 묻는가?”
“도저히 살수 같지 않아서 그럽니다.”
“클클클, 나도 예전에는 살수였던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검술 교관이지. 나는 이제부터 자네만을 가르칠 것이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자네도, 나도 몰라. 어느 정도 상부에서 원하는 정도까지 내가 지도할 것이야. 위에서도 많은 고심을 한 듯하지만 드디어 자네를 살수로서 소모시키기보다는 무사로 쓰기로 합의를 본 모양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살수란 상대를 죽이기는 쉽지만 상대를 죽이고 난 다음에 탈출하기가 정말 힘들거든…….”
“알겠습니다.”
“검술을 익히면서 끊임없이 내공의 수련은 계속해야 하네. 하지만 본인이 느낀 바로는 내공이 최고로 중요한 것은 아니야. 문제는 깨달음이지. 어떤 경지에 다다르면 내공은 자연적으로 얻어진다네. 거꾸로 얘기하면 어떤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일정한 내공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말도 성립이 되지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저는 선배님이 말씀하신 첫 번째 생각에 찬성합니다.”
“실지 명문 검파의 젊은이들이 보통 타파의 젊은이들보다 더욱 빠른 내공의 진보를 보이지. 자네도 무림에 나가 봐서 알겠지만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나이 많은 고수를 격패시키는 것을 왕왕 봤을 것이네. 그것은 깨달음이 빨랐다는 것이지 실지 내공수련을 그 젊은 녀석이 노인보다 더 많이 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내공의 경지를 1갑자, 2갑자 등으로 표시하는 것은 밀실에 박혀 60년 혹은 120년 동안 내공만 닦았다는 것이 아냐. 하나의 주기(週期)를 나타내는 것이지. 그 주기를 넘었느냐 못 넘었느냐에 따라 그의 실력이 결정되는 것. 그 한 주기를 넘음에 따라 최소한 열 배 이상의 힘이 생기지. 그리고 내공이란 음(陰)에도 양(陽)에도 치우치지 않게 익혀야 해. 한쪽으로 치우치게 익히면 단기간에 고수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 다 헛거야. 높은 경지로 올라갈수록 힘들어지지. 나중에는 생명까지 위험해져. 그러니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는 건 익히지 않는 게 몸에 좋지. 내공이 계속 쌓이다 보면 그렇게 무리하게 내공을 연마하지 않아도 극양, 극음의 무공을 할 수 있어. 물론 두 가지 다 할 수 있지. 구태여 모험을 하면서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내공을 쌓을 필요는 없는 거야. 참, 듣자하니 자네는 검을 잘 다룬다고 그러던데…….”
그러면서 유백은 자신의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그의 검은 검집 밖으로 나오자 투명한 옥빛을 띠는 것으로 보아 보검(寶劍)임이 확실했다. 그의 검은 일반 강호의 무리들이 사용하는 패검(覇劍 : 얇고 긴, 그러면서 앞부분의 날은 잘 발달되어 있지만 양쪽의 검날은 무뎌서 베기보다는 찌르기에 유리한 검)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양쪽의 날이 대단히 날카로워 베기도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검(劍)이란 원래 베기보다는 찌르는 것에 중점을 두는 무기지. 그렇다고 베기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찌르기를 더욱 중요시 하는 무기야. 강호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패검은 군인들이 사용하는 검과 달리 가볍고 가늘며 길다는 점이 다르지. 그 때문에 적의 베거나 찌르기를 막을 때 날카로운 날이 서 있다면 칼날만 상하고 어쩌면 상대방 무기의 압력 때문에 검이 부서질 수도 있기에 날을 날카롭게 세우지 않지. 하지만 보검의 경우 그 강도(强度)가 뛰어나므로 날을 날카롭게 세워도 무방하지. 그에 비해 도(刀)는 한쪽에만 날이 있고 날을 직선이 아닌 반월형으로 만들어 찌르기보다는 적을 베는 데 전문적으로 사용한다. 물론 찌르기를 못하는 것은 아냐. 도의 경우 날이 없는 두터운 부분 덕분에 적의 강력한 일격에도 부서질 염려가 없지. 어떤 이들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적을 공격하기 편하도록 아주 무거운 도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어. 심한 놈들은 60근(약 36킬로그램)에 가까운 걸 사용하지. 자네의 무기를 한번 볼까?”
묵향은 그의 검을 반 정도만 뽑아서 유백에게 보여 줬다. 예의상 윗사람에게 무기를 보일 때 검을 완전히 뽑으면 안 된다. 윗사람이 받아 들고 완전히 뽑는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3할에서 5할 정도만 뽑아야 한다.
묵향과 같은 살수는 1차 훈련이 끝나면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검을 제작한다. 나중에 취향이 바뀌면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바꾸기도 한다. 어떤 살수는 상대에게 더욱 큰 타격을 주기 위해서 검의 날을 완전히 톱니와 같이 만들어, 베기보다는 상대의 살을 찢어 내도록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검에 찔리면 검이 뽑힐 때 엄청난 고통을 준다. 그리고 내부의 장기(臟器)를 톱니가 끌고 나옴으로 인해 더욱 큰 타격을 준다. 물론 피부를 베었을 때도 이점이 있다. 피부를 베면 일직선으로 베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뜯고 지나가기 때문에 나중에 치료하기가 힘들고 출혈이 심하다.
살수가 각종 기형적인 무기들을 사용하는 이유는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상대를 확실히 저세상에 보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묵향의 애검 묵혼은 반월형의 검으로 검신의 길이는 2척 3촌(약 70센티미터), 손잡이 길이 1척으로 칼날받이도 없는 기형검이다. 검신의 손잡이 가까운 곳에 ‘墨魂(묵혼)’이란 글자가 음각이 되어 있었다. 검을 찬찬히 보던 유백이 입을 열었다.
“누가 살수 아니랄까 봐 자네도 상당히 특이한 검을 애용하는군. 묵혼검이라. 하지만 검신이 검지는 않군?”
“지금은 좀 더 좋은 오철(烏鐵 : 검은색이 나는 합금으로 정강보다는 강도가 뛰어남)같은 검은색이 나는 강한 금속으로 검을 만들어 주겠지만 이걸 만들 당시만 하더라도 제 직위가 낮아 백련정강(百鍊精剛 : 백 번이나 연마한 정순한 강철로 된 검, 대단히 튼튼함)으로 만들었으니 그렇죠.”
“왜 이런 검을 만들었나? 전체 길이는 보통 검과 마찬가지지만 손잡이가 너무 길어 들고 다니기에 불편할 것 같은데. 지금도 허리 뒷부분에 비스듬하게 걸리는 게 고작이잖아? 이래서는 너무 눈에 띄지.”
“하지만 그 이점도 많습니다. 손잡이의 뒷부분을 잡으면 이 검의 길이는 3척이 되고 짧게 잡으면 2척 3촌이죠. 저는 검을 사용하면서 계속 잡는 위치를 변화시키므로 상대방이 저와의 간격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유 선배님도 알다시피 짧은 검은 속도가 빠르고, 긴 검은 속도는 떨어지지만 장거리 공격이 가능하다는 각각의 상반된 장점을 가지고 있죠. 그리고 검의 날을 날카롭게 세운 것은 베기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죠. 여태까지 제 공격은 거의 모두 다 암습이었기에 적의 무기와 부딪친 적은 없습니다.”
“흠, 자네도 이 검을 만든다고 상당한 잔머리를 굴렸군. 하지만 절정의 검술은 겨우 간격을 헛갈리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냐. 적을 단 한 번에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일격필살(一擊必殺)의 각오가 없이 너는 죽고 나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지닌다면 도저히 절정의 경지로 들어서지 못한다네……. 살 구멍을 찾으면서 휘두르는 검은 도저히 그 날카로움이 나타나지 못하지. 정면 대결을 할 때,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적수는 최악의 경우 같이 죽겠다는 양패구상의 검법을 구사하는 녀석이지. 아예 실력이 떨어지는 놈이라면 몰라도 비슷하다면 이기기 어렵고, 설혹 실력이 약간 떨어지더라도 그 녀석을 해치우려면 부상은 각오하고 싸워야지, 안 그러면 오히려 자기 목숨을 날린다네. 병법에도 이르지 않았던가,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후배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정든 녀석이라 버리고 새 걸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건 자네 마음대로 하고, 여태까지 몇 가지 검법을 익혔나?”
“열두 가지를 익혔습니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한 번도 검술을 써 보지 못했습니다. 만약 검술을 사용하면 들통나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라 하더라도 검술을 사용하지 말고 그냥 죽으란 지시를 받았습니다.”
“흠, 원래 검법이란 것은 각종 공격과 방어의 초식을 모아 놓은 것. 일단 공격과 방어의 개념을 자세히 이해하면 초식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그렇다고 초식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닐세. 나는 자네한테 스무 가지 검법을 가르칠 예정이네. 하지만 이 검법 자체를 사용해선 안 돼. 초식의 일부분만을 이용해야 해. 이 검법들은 모두 여러 정파의 검법들이야. 초식 전체를 펼치지 않고 초식의 일부만을 이용하여 상대와 겨룬다면,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니라면 그 근원을 알아내기는 힘들지. 초식이 완전히 펼쳐지지 않고 일부만 사용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를 하기도 어려워. 자네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무적의 검법이란 존재하지 않아. 어떤 검법이라도 그 천적(天敵)인 검법이 있기 마련……. 그 때문에 명문 무가에서는 최후에 사용하는 한두 가지 검법은 꼭 숨겨 두지. 그것들은 생사의 갈림길이 아닌 한 사용되지 않아. 그 검법이 알려지면 그에 대한 대항 초식이 만들어진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렇게 초식을 잘라서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일반 초식을 익히는 것보다 잘라서 사용하는 것이 더욱 힘들다네. 본인도 이것을 깨닫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지. 그리고 이렇게 사용하면 살수에게는 또 한 가지 이점이 생기지. 여러 파의 검법을 조각내서 이용하면 상대는 흉수를 알아내기가 아주 힘들어. 그리고 전문가가 보더라도 시체의 상처를 보고 그 흉수를 알기는 힘들지. 혹시 알아낸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검법이 어우러져 있으니 확실히 알아낼 재간이 없지. 어떤 경우에는 이간질시키려고 일부러 초식 전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잘라서 사용하게나.
우선 자네는 감각이 더욱 예민해지도록 수련해야 하네. 시각이야 모든 이들이 타고난 것이고, 청각을 예민하게 다지는 것이 중요하지. 소리만으로 부근의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경지가 되어야 해. 나머지 감각들도 차례로 개발해 가자구. 살수이니만큼 감각은 꽤 잘 발달되어 있을 테니 자네에게는 그만큼 득이라는 점을 감사히 여기고. 검술을 수련하면서 명심해야 할 점은 검술을 잘한다는 것과 살인을 잘한다는 것은 완전히 별개라는 것을 이해해야 해. 수많은 고수들이 암습에 의해 저세상에 갔지……. 눈앞의 적보다는 등 뒤의 적이 무서운 거라네. 그러니 수련하는 도중에 나는 자네를 틈만 나면 암습할 생각이야. 그 점 잊지 말고 대비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참, 자네 여자를 아는가?”
“예?”
갑작스런 질문에 묵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는 다시 물었다.
“여자와 성합(性合)을 해 본 적이 있느냔 말이다.”
“아직 없습니다.”
묵향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답했다.
“그렇다면 너는 내공수련도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할 수 있구나. 여태까지 자네가 배운 것을 사용해도 상관없고, 또 하나는 그것을 약간 변형한 방법인데…, 일종의 동자공(童子功)을 혼합하는 방법이지. 후자의 방법이 훨씬 더 빠른 성취를 볼 수 있으나 단점이 있다면 여자와 한 번이라도 잠자리를 함께하면 동자공 자체가 파괴된다는 점이야. 선택은 자네한테 달려 있어.”
“선배님의 생각으로는 어느 쪽이 더 좋습니까?”
“약간의 문제는 있지만 빠른 성취를 원한다면 동자공이 좋아. 하지만 무림이란 곳이 원래 정면 대결보다는 암습과 술수가 난무하는 곳이라 잘못해서 미약 종류에 당한다면 모든 게 끝장이지. 선택은 자네가 해야 해.”
“그럼 여태까지 해 오던 방법을 쓰겠습니다. 괜히 동자공을 익히다가 적의 술수에 걸려 모든 걸 잃을 수는 없거든요.”
“그럼 이제 시작해 보세나…….”
유백의 교육은 지독했다. 면벽수련을 통해 아침저녁으로 청각을 단련했고, 또 내공을 닦았다. 그 외의 시간에는 검법과 암기술, 경신술을 익혔다. 가장 힘든 것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암습이었다. 서로 얘기를 잘 나누다가도 유백은 한 번씩 검을 뽑아 기습을 했고, 묵향은 아슬아슬하게 날아드는 그의 검과 표창을 막으면서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이것도 세월이 가면서 익숙해져 적당히 막아 낼 수 있게끔 되었다. 하지만 유백은 점점 더 공격에 쏟는 공력을 늘려 갔으므로 묵향으로서는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절정(絶頂)의 세계로
유백은 대단한 실력의 검사였으며 각종 검술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다. 그는 수련 도중 틈틈이 묵향에게 무림에서 사용되는 여러 가지 무공들에 대해 얘기해 줬고, 그 대처 방법도 일러 줬다. 그와 함께 한 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유백은 묵향에게 말했다.
“자네는 내 나이가 얼마나 되어 보이나?”
“40대 후반 정도가 아닌지요?”
“아닐세, 내 나이 벌써 일흔이 넘었지. 자네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나?”
‘맙소사……. 세상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것도 당연한 이치군.’
묵향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스물일곱입니다.”
“그런가…, 좋을 때군. 자네도 벌써 결혼하고 아이 몇은 거느리고 있을 나이인데 검술을 익힌답시고 세월을 보내고 있었군. 나도 참 오랜 시간 그놈의 검을 다룬다고 허송세월을 보냈지. 내 이미 은퇴를 했어야 하는데……. 아직도 무슨 미련이 있다고 여기에 매달려 있는지 모르겠군. 아마 자네를 가르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게 될 것 같아. 참! 자네는 내공을 수련한 사람의 육체가 완전히 삭아지는 나이가 얼마 정도라고 생각하나?”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60세야. 60세가 모든 것의 분수령이지. 60세가 되기 전에 극마, 그러니까 정파에서 말하는 화경에 들어 환골탈태하지 못한다면 그다음부터는 급속도로 근력이 떨어지지. 만약 극마에 들지 못하면 열을 익혀 넷 이상의 성취를 얻기도 힘들지. 거기에 약간이라도 수련을 게을리 하면 셋 정도씩 퇴보하는 거야. 때문에 60세가 넘어서 화경에 들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네.
나도 극마 근처에도 가 보지 못했어. 여태까지 극마에 들어간 사람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은 고작 네 명 정도……. 내공을 익히는 속도에서 본교를 따라갈 집단은 없지만 이상하게도 최고의 경지까지 도달하는 사람이 드문데, 아마 내가 생각하기에 수련 방법이 잘못된 것 같아. 나도 요 근래에야 그런 생각이 들었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내가 살수 생활을 오래해서 그럴 거야. 살수란 원래 본교의 초식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좀 진보가 있던가요?”
“별로…….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 예순이 넘으니까 내공은 상관없지만, 근골(筋骨)이 외관상으로 표시는 안 나지만 삭아 들어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더군. 외관이야 내공의 힘으로 노화를 막는다든지 아니면 주안술을 사용해서 젊음을 유지하는 자들도 있어. 하지만 근골의 쇠퇴는 어떻게 할 수가 없지.
내 친구 중에도 흡성대법을 익혀 엄청나게 내공을 쌓은 자도 있지만 끝내는 극마 근처에도 못 가더군. 오히려 흡수한 이종진기가 방해물이 되어 일찍 죽었어. 상대에게 흡수한 공력은 어떻게 해도 완벽한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어. 오죽하면 본교의 상층부에 들어가는 고수들은 흡성대법을 익히지 않았겠어? 그러니 이런 말 하기는 뭐 하지만, 자네도 무공의 정도(正道)를 걷게나. 속성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유 선배님은 다종(多種)의 무기를 사용하는 자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동료 중에서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무기를 바꾸는 녀석이 있거든요. 그 녀석은 권술(拳術), 장술(掌術), 검술(劍術), 창술(槍術), 봉술(棒術), 편술(鞭術) 등 못하는 게 없죠. 저도 부러울 정돕니다. 그러니 큰 문제만 없다면, 선배님께서 그것도 가르쳐 주십시오. 벌써 선배님께 검술 교육만 받은 지 5년이 지나서 약간 지겨운 면도…….”
“헛소리!”
유백은 큰 소리로 묵향을 꾸짖은 후 말을 이었다.
“무술은 모두 통하는 것이야. 모든 무술은 손이 기본이지. 검술이나 창술이나 모두 다 손의 길이가 약간 더 늘어난 것이라 생각하면 돼! 쓸데없이 이것저것 익히면 거기에 시간이 낭비되어 한 가지에 대성을 할 수 없어. 지금 정파무림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떨치는 문파가 어디냐? 소림이냐?”
“아닙니다. 소림이 예전에는 이름을 크게 떨쳤지만 요즘은 무당이 더 이름이 높죠.”
“소림은 72종 무예라 하여 수많은 무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고……. 각종 무기를 다루는 것을 초반부터 배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그에 비해 무당의 경우 오로지 검! 검이 아니냐? 무당의 고수들이 얼마나 검술에만 미쳐 있는가 하면, 손으로 바위도 깨지 못한다구. 아예 그런 무공 자체가 없어. 어떻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손으로 바위에 구멍을 낼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진 무당의 고인들도 많다구. 그렇지만 그들의 손에 검이 잡혔을 때 무당의 고수들을 만만히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너도 그들과 같이 한 우물을 파야 한다. 검을 이용해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뽑아낼 수 있어야 해.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선배님, 상당히 궁금한 점이 있는데…, 대답을 해 주실 수 있는지요?”
“뭔가?”
“선배님은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계신데, 그 얼굴의 상흔(傷痕)은 어떻게 생긴 겁니까?”
그러자 유백은 무심결에 상흔을 만지면서 말했다.
“이건… 내가 53번째 목표를 없앨 때 생긴 거지. 물론 그 목표는 저세상으로 보냈어. 그 뒤에 탈출하다가 생겼어. 상대는 자네가 알지 모르겠네만, 환상검수(幻像劍手)라고 들어 봤나?”
“예, 청성파가 배출한 대단한 검의 고수라고 들었습니다.”
“그 녀석이 53번째 목표물의 호위 무사였어. 암습하기 전에 딴 방향으로 유인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찌된 셈인지 돌아와서는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지. 몇 번 검을 섞어 보니 분하지만 나보다 고수더군. 본교의 초식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이길 수 없었어. 그래서 싸우는 도중에 암기를 기습적으로 발사했는데 그게 그 녀석의 허벅지에 맞았지. 서로 내공의 차이가 크지 않은 덕분에 내 암기는 녀석의 호신강기를 뚫고 박혔어. 하지만 내가 보니 전력으로 던졌는데도 반 치 정도도 못 뚫은 것 같더군. 암기 끝에 독물을 발라 뒀기에 녀석이 독물 때문에 동작이 둔화된 것을 이용해 도망치는 데는 성공했어. 너도 알지 모르지만 고수를 만났을 때는 무조건 한 개의 암기만을 쏴야 해. 여러 개를 쏘면 그중 하나가 맞더라도 호신강기를 뚫지는 못해. 한 개의 암기에 내력을 최대한 실어 쏘아야 운 좋으면 상대의 호신강기를 뚫을 수 있지. 쓸데없는 말을 주절주절 하고 있었군.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이런 식으로 매일 무공을 익히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유백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묵향에게 알려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유백으로서도 묵향이 자신이 최후로 키워 내는 제자이기 때문에 애착이 더 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알려 준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수련하고 또 수련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을 보고, 가르치는 보람을 더욱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묵향 또한 살수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의문점들을 유백의 답변을 통해서 이해하면서 점점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서고 있었다.
묵향이 서른 살이 된 지 두 달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유백은 묵향의 검술이 이제 완벽하게 초식을 잘라서 사용하는 데 무리가 없음을 보고 잠시 쉬는 시간에 말했다.
“네 녀석의 검술은 이제 거의 완성되어 가는구나.”
그 말을 듣고 묵향은 빙긋이 웃으면서 정중히 포권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멀었어. 검술의 완성은 무초식에 있다. 초식을 계속 자르고 잘라 가다 보면 나중에는 완전히 초식이 없는 지경까지 이르지. 쓸데없이 초식을 사용하는 것은 공력의 낭비야. 내가 한 가지 검법의 시범을 보일 테니 이것이 무슨 검법인지 맞춰 보거라.”
“예.”
유백은 검을 잡고 일어섰다. 그는 검을 잡고 약간 자세를 잡더니 개문식(開門式 : 어떤 무공을 행할 때 그 이름을 상대가 알 수 있도록 하는 독특한 자세. 모든 무공은 이것을 행한 후 시작함)도 하지 않고 초식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검 빛에 뒤덮이면서 사방으로 살벌한 검기가 뻗어 나왔다. 그때 문득 전방으로 붉은빛 반월형의 검강(劍剛) 수십 개가 튀어나가며 10장 밖의 담장에 부딪치며 굉음을 냈다.
콰쾅…….
먼지가 가라앉은 후 보니 흙과 돌로 다져서 쌓은 담장의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놀란 얼굴로 보고 있는 묵향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띠고 있던 유백이 물었다.
“어떤 검법이냐?”
“히히, 제가 속을 줄 아십니까? 그건 검법이 아닙니다. 본교가 자랑하는 수라월강도법(修羅月剛刀法)을 검으로 펼치신 게 아닙니까?”
“클클… 자식, 눈썰미는 제법이군. 이 도법을 익힌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이걸 배워 보자. 나도 아직 9성밖에 익히지 못해 제 위력은 나오지 못하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도법이지. 그 외에 천강혈룡검법(天降血龍劍法)도 가르쳐 주마. 둘 다 9성 이상 익히면 강기를 검에서 뿜어내어 적을 공격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력의 소모가 엄청나지. 너도 생각해 봐라. 이 두 무공을 조각내 사용하여 검강 한 가닥만 뿜어낼 수 있다면 대단한 것이 아니겠냐? 나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너는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알아내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
우선 알아 둬야 할 것은 검강의 모양이다. 도법에서 뿜어 나오는 강기는 대부분 반월형이지. 그리고 검법에서 뿜어 나오는 검기는 대부분 막대 모양이야. 천강혈룡검법에서 혈룡이란 명칭이 붙은 것도 붉은 용과 같은 모양의 둥글고 긴 강기가 뻗쳐 나오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알겠느냐?”
“혹시 도는 휘두르면서, 검은 찌르면서 강기가 뿜어지기 때문이 아닙니까?”
“크하하하, 맞아. 바로 그거야. 그 때문에 모양이 그렇게 되지. 너도 살수니까 잘 알겠지만 사람이란 동물은 별로 강하지 못하다. 단 하나! 단 하나의 치명상이면 된다. 두 개도 필요 없어. 적에게 단 하나의 치명상만 주면 돼. 뭣 때문에 그렇게 많은 상처를 입히려고 내력을 소모한단 말이냐. 그리고 내가 듣기로는 일단 강기를 뿜어내는 요령을 익히면 거의 무적에 가까운 경지에 들어선다고 했다. 꼭 내가 언급한 두 가지 무공을 거치지 않아도 강기를 뿜어낼 수 있지. 정파에는 현문(泫門)이라는 단체가 있다. 들어 봤느냐?”
“저, 무당 같은 도가 계통을 보고 현문이라 하지 않는지요?”
“맞아. 현문에서 최고로 치는 무공이 강기다. 강기를 뿜어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손(手), 검(劍), 도(刀), 막대기, 풀줄기 어디서든지 강기를 뽑아내어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검이나 도를 이용하는 것이 풀줄기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강기를 뿜어내기 쉬울 것이다. 검 자체가 가지는 예기(銳氣)가 있기에 아마 풀줄기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공력이 적게 들겠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지. 때문에 절정에 오른 고수일수록 검의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지 않겠냐? 현문에서는 강기 자체를 이해하여 그것을 뿜어내지만 본교의 무공은 그와 다르다. 일종의 초식을 만들어 강제로 강기를 뽑아내기 때문에 그 위력에 비해 내공의 소모가 너무 심해.
아무리 본교의 공력이 타 파에 비해 강하다고 하지만, 그런 초식을 몇 번 쓰고 나서 공력이 고갈될 정도라면 아예 안 쓰는 게 낫지. 그러니 네 녀석도 그따위 무공에 연연하지 말고 우선 강기에 대해 이해해 보거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강기를 뿜어내는 헛고생을 하는 것보다는 천강혈룡검법과 수라월강도법을 가르쳐 줄 테니 이 두 가지 무공에서 강기를 뿜어내는 데 따르는 차이점을 생각해 보고, 또 조각조각 잘라 보아라. 이 두 가지를 수련하다 보면 남들보다는 빨리 이해할 수 있겠지. 나도 원래 검만을 쓰지만 수라월강도법을 배운 이유는 두 가지를 비교해 볼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늙은 머리로는 도저히 더 이상 깊이 들어가기가 힘들구나. 너는 아직 젊으니 내가 꿈꾸었던 것을 이뤄 내기를 바란다.”
“알겠습니다.”
또다시 피와 살을 말리는 수행이 재개되었다. 어떤 목표가 생기고 또 그 목표를 이룰 구체적인 방법이 대강이라도 나왔기 때문에 묵향은 다른 생각 없이 그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갔다. 하지만 1년, 2년 세월은 흘러갔지만 강기에 대해서는 도저히 감을 잡기 힘들었다.
그는 어느덧 천강혈룡검법(天降血龍劍法)과 수라월강도법(修羅月剛刀法)을 9성까지 익혔지만 그나마 강기를 익히기 위한 자료로 익히고 있는 이 두 가지 무공도 10성까지 익히기 어려웠다. 9성까지는 그런대로 빨리 익혔지만 9성에서 10성으로 진입하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왜 자신이 본 최고의 고수인 유백이 두 가지 무공을 9성까지밖에 익히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밤낮으로 애쓰는 것을 본 유백이 보다 못해 옆에서 참견을 했다.
“9성에서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진정한 강기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검기가 약간 응축된 형태라고나 할까? 실지 강기란 부수지 못하는 것이 없는 순수한 파괴의 정점(頂點)이라 할 수 있지. 9성에서 벽을 향해 발사한 강기는 담벼락을 파괴하지만 아마 엄청난 힘을 가진 진짜 강기는 벽에 큰 구멍을 뚫는 대신 작은 구멍 수십 개를 뚫을 거야.
너도 알잖냐? 주먹으로 공력을 모아 벽을 칠 때 권풍에 밀려 큰 구멍이 뚫리지만 일정한 힘을 넘어서면 오히려 작은 구멍이 뚫리지. 대신 더욱 깊게 깊게 파고든다. 그걸 생각하면 이건 강기가 아냐. 그냥 검기의 발전형이라고 봐야지. 너무 조급해할 것 없다. 너는 아직 내공이 달려 10성의 경지로 들어서지 못하는 것뿐이야. 좀 더 시간을 두고 차분히 수련을 하고 명상을 해라. 그러면 다른 방법이 생길 거야.”
“알겠습니다. 가르치심 감사합니다. 그런데 유 선배님, 선배님께서는 제게 너무 잘해 주시는군요. 그 점 제가 죽는다 해도 잊지 못할 겁니다.”
“컬컬, 아마 나도 늙어서 그런가 봐. 옛날에는 엄하게 제자를 다스렸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게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 엄하게 할 놈이 있고 부드럽게 할 놈이 있어. 너는 후자에 속해서 그런 것뿐이야. 그리고 나 자신도 네가 마지막 제자라 생각하니 약간 더 감상적이 되어가는 것 같구나…….”
어느덧 묵향의 나이도 서른일곱이 되었다. 그는 아침에 명상을 하며 문득 유백을 만난 것은 자신이 얻은 최고의 행운이란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 깨어나도 얻을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지식의 소유자였다. 그는 무인이며 또한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점심과 저녁때 묵향과 대련하는 시간이나, 묵향을 암습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유백은 오전 중에 수련을 끝내고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지금 묵향과 유백이 거처하는 곳 부근에는 갖가지 나무들이 심어졌고, 유백은 그중에서 매화를 특히나 좋아했다. 그리고 틈틈이 꽃들도 가꿨고, 쉰이 넘어 시작했다는 수묵화(水墨畵)도 그렸다. 그리고 밤에는 퉁소나 금(琴)도 탔다. 그러면서 틈틈이 묵향에게 그것들을 가르쳤다. 그의 말에 따르면 무인이란 무식한 칼잡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서도 약간은 가르쳐 줬는데, 유백 자신의 지식이 짧아서 그런지 그렇게 깊이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 외에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 진법들도 틈틈이 교육을 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묵향은 의문을 가지고 유백에게 물었다.
“진법이란 것이 제가 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것 같은데, 이런 걸 배울 필요가 있나요?”
묵향의 질문에 유백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내가 이런 놈을 잡고 가르치고 있었다니……. 이 무식한 놈아! 모르면 잠자코 들어. 진법이란 원래 가장 간단한 천(天), 지(地), 인(人)을 뜻하는 삼재진(三才陣)으로 시작되어 더욱 복잡하게 발전되어 나가는 거다. 만약 한 사람을 공격하는 데 무턱대고 셋이서 공격하는 것보다 어떤 일정한 규칙을 정해 공격하면 같은 편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더욱 효과적으로 한 사람을 밀어붙일 수 있지. 이렇게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보기 위해 여러 가지로 발전된 것이 진법이야. 이 진법을 부수는 데도 방법이 있어. 하나는 생문(生門)을 찾아 뚫고 나가는 방법인데……. 이건 진법을 알고 있다면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진법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가르쳐 주려고 하는 거야. 하지만 너처럼 무식한 녀석은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지.”
“뭡니까?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 있나요?”
“아주 간단하지. 들어가서 죽는 거야. 진법을 깰 실력이 못 되면 죽어야지…, 암! 진법에 자신도 없는 놈이 진 안에 왜 들어가?”
“그럼 또 다른 방법은요?”
“무공이 극강(極剛)의 경지에 이르면 대부분의 진에서, 설령 사문(死門)에 들어가도 살아나올 수 있지. 눈에 보이는 놈은 모조리 죽이는 거야. 하지만 그 정도의 고수가 되기는 힘들지. 아마 웬만한 진법은 그냥 파괴하려면 무림에서 20대 고수 안에 들어가야 가능할 거다.”
“…….”
“극마의 경지에 들어서면 마의 극한에서 뿜어 나오는 힘에 의지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지. 진법을 이루고 있는 웬만한 녀석들은 모두 저세상에 보낼 수 있다는 말이야. 아무리 진법이 강하다 해도 그 진법 자체도 사람이 만든 것이지. 예를 들어 일곱 명이 소북두진(小北斗陣)을 구성할 수 있는데, 그 북두진은 일곱 명이 서로 도와 한 명 또는 다수의 적을 한 번에 공격하고 방어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만들어진 거야. 만약 상대가 공격하면 한 명이나 또는 세 명 정도가 방어하고 나머지는 모두 공격, 상대가 방어에 열중하면 모두가 다 공격. 뭐 이런 건데…, 이때 방어하는 사람과 공격하는 사람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동료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서로 도와 일종의 상승 효과까지 얻기 때문에 아주 강한 힘을 내지.
물론 상대가 이 일곱 명을 한 번에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일곱 명 다 죽을 수밖에……. 하지만 그 정도 실력이 안 된다고 해도 어떤 녀석이 공격하고 어떤 녀석이 방어할지 또 그들의 움직임이 어떨지 알고 있다면 그들을 공격해서 진법을 짜서 움직이는 걸 방해하거나 아니면 그 진법을 역이용해서 공격할 수도 있는 거야. 알겠냐? 이 무식한 놈아!”
“예…, 그런데 ‘무식한 놈’이란 건 좀 심한 말이 아닙니까?”
유백은 묵향의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말했다.
“갈(曷)! 말도 안 되는 푸념하지 말고 열심히 익혀.”
묵향의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 아침에 명상에 잠겨 있다가 어떤 생각이 번쩍 떠오름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피를 토했다. 이것을 옆에서 보고 있던 유백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외쳤다.
“대성을 축하하네! 이제 깨달았나?”
“예, 선배님. 조금 더 명상을 하고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명상은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보통 이런 식으로 깨달음을 얻고 그 엄청난 충격에 피를 토하는 일은 정파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마교에서는 거의 없다. 하지만 유백은 마도의 무공에 한계를 느끼고 정파 쪽 무공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에 대해 주워들은 것이 많았기에 그렇게 외쳤던 것이다. 묵향의 명상은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묵향은 명상을 끝낸 후 애검 묵혼을 가지고 언제나 유백과 비무를 하던 뜰에 섰다.
“제가 깨달은 것입니다. 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간단하게 유백에게 예를 취한 후 천천히 검을 뽑았다. 검을 뽑아 비스듬히 들고 있는데, 검에서 붉은빛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유백은 숨을 죽였다. 붉은 광채는 점점 커지면서 사방으로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 장(半丈) 정도 떨어진 거리까지 붉은 사슬 같기도 하고 뇌전(雷電) 같기도 한 것이 뻗어나갔다. 그때 나지막한 기합 소리가 들리며 검이 위에서 아래로 허공을 베고 나갔다. 그러자 검에서 반월형의 붉은색 강기가 순간적으로 앞으로 나가며 벽에 세로로 길게 구멍을 뚫었다. 다시 한 번 기합 소리가 들리며 이번에는 앞으로 찌르기를 하자 붉은색 끈 같은 것이 앞으로 뻗으며 벽에 작은 구멍을 하나 뚫었다. 그것을 본 유백은 외쳤다.
“정말 대단하군! 이것이 검강이란 것인가? 노부가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진짜 검강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야. 드디어 자네는 대단한 고수가 되었군.”
“글쎄요,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입니다. 그렇게도 검강이 되지 않더니……. 심지어는 초식으로도 만들기 어려웠는데, 어제 아침에 문득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더니 갑자기 강기가 뭔지 깨달아지더군요. 검강을 뿜어내는 방법은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지만 정말 그 순간은 대단히 평안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껄껄, 이제 자네는 나보다도 더 고수가 되었어. 이제 나도 자네를 두고 은퇴할 수 있겠어.”
“아직 선배님께 배울 게 많습니다. 은퇴는 좀 더 미루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럴까……. 무공에 대해서는 자네에게 가르칠 것이 없지만 다른 건 아직도 내가 낫지. 정도 많이 들었으니… 술 한잔 푸짐하게 내면 내 마음을 바꿀 수도 있지…….”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묵향은 최고로 속도를 내어 경공술을 펼쳐 술통을 들고 왔다. 묵향과 유백은 술잔을 나누며 여태까지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유백은 여태까지 묵향을 까마득한 후배로, 묵향이 도저히 넘지 못할 어떤 선을 긋고 그를 대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니, 무공을 보여 준 후에는 대접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묵향을 자신의 오랜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했다. 그만큼 묵향의 성취를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성취가 이토록 빠르니 언젠가는 자네가 본교의 오랜 숙원을 이룩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오랜 숙원이라뇨?”
“원래 무공이란 그 깊이가 끝이 없어서 익히면 익힐수록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만들지. 검술의 한계를 느끼고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자도 있을 정도로 어떤 한 가지에 깊게 파고든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야. 하지만 자네는 그래서는 안 돼. 왜 쓸데없이 자신의 육체를 학대하나? 지금 안 되면 나중에는 될 거야. 만약 자네가 안 되면 자네 제자는 해낼 거고……. 자신이 익힌 모든 것을 후대에 알려 주면 되지. 하기야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선배도 있군…….”
“그 사람이 누굽니까?”
“옛날, 오랜 옛날 발해라는 이민족이 건설한 국가가 있었다네. 자네 혹시 아나?”
“예,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배웠지요. 위대한 우리 한족도 아니고 겨우 변방의 오랑캐에게 멸망한 걸 보면 별 볼일 없는 국가였던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세워졌던 고구려 같은 경우 아주 대단했다고 얼핏 들었지만요.”
“아니야, 자네가 잘못 안 거야. 발해란 국가는 대단한 국가지. 다른 건 모르겠지만 무공에서는 대단한 나라야.”
“대단하다니요? 무공이 대단한 국가가 겨우 변방 오랑캐에게 무너진단 말입니까?”
“자네 혹시 신검대협 구휘란 사람을 아나?”
“예,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누구도 올라가지 못했던 현경까지 올라간 고수가 아닙니까?”
“맞아, 현경이라 함은 본교에서 말하는 탈마(脫魔)와 같은 경지. 그 누구도 올라가 보지 못한 곳이지. 탈마에 이르면 완전히 마(魔)에서 벗어난다고 전해지네. 누구도 올라가 보지 못했으니 잘 모르지만 극마에 이른 사람은 좀 있으니 그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어. 극마의 경지 가까이만 가도 자신이 밖으로 뿜어내는 마기의 양을 조절할 수가 있지. 자네도 우리끼리 있으니 잘 모르겠지만 진짜 마도의 인물들을 만나 보면 이해할 걸세. 우리야 살수니까 처음부터 마기를 밖으로 나타내지 않기 위해 특별한 교육을 받거나 아니면 아예 마공을 익히지 않지만 나머지는 그런 훈련을 받지 않거든. 참, 그런데 얘기가 잠시 샛길로 빠졌군……. 어디까지 얘기하다가 이리 왔지?”
“구휘에 대해…….”
“그래 구휘가 만년에 무공을 여러 가지로 연구하다가 옛 발해의 무공들을 긁어모았다네. 그것들을 모아서 북명신공(北冥神功)이라 이름 붙였지. 원래 북명(北冥)이란 것은 발해가 속해 있던 지방을 말하는 거야.”
“그 구휘가 신공이란 말을 붙일 정도로 대단한 무공입니까?”
“그렇지. 너무 대단해서 아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야.”
“무슨 말씀인지…….”
“원체 오래된 것이고, 또 국가까지 멸망해서 없어진 상태에서 여기저기서 닳아빠진 양피지 등에 기록한 것들을 모은 것이기에 상당히 많은 부분이 사라졌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신공은 대자연의 숨결을 흡수해 자신의 공력을 높이고 초상승의 무예 경지로 올라갈 수 있는 참고서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네. 초식보다는 무예를 익히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이나 조심할 점,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무예를 익히는 것이 가장 좋은지 기록되어 있다고 하더군. 많은 무림인이 북명신공을 익혔으나 너무나 난해하고, 초식조차 거의 없으며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인 데다 설상가상으로 완전한 내용이 아니라 상당 부분이 상실된 채였기 때문에 제대로 익힌 사람은 한 명도 없다네.”
“아무도 못 익힌다면 그건 휴지나 다름없잖습니까?”
“아니지. 이 북명신공에서 파생된 무공이 몇 개 있는데, 자네도 들어 봤을 거야. 흡성대법, 화염신공, 뇌전신공이 그것들이라네. 흡성대법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못 되지. 초기에 이게 개발되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익혔었는데, 뒤탈이 큰 탓에 요즘은 거의 안 익혀. 이 흡성대법은 화염신공에서 분화되어 나왔지. 화염신공 또한 대단한 무공이지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 이게 본교로 흘러든 후 흡성대법으로 발전했네. 하지만 발전형인데도 흡성대법은 화염신공보다 못해.
너무나도 진기의 흡수와 그 관리에만 매달리다 보니 본래의 공격력이 없어진 거야. 그 때문에 단순히 그냥 내공 흡수 쪽으로만 더욱 발전된 거야. 그리고 뇌전신공(雷電神功)이 있는데 그 파괴력은 엄청나다고 그러더군. 하지만 익히기가 대단히 힘든 무공이야. 이건 북명신공의 파괴력만을 발전시킨 무공인데, 엄청난 내공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익히기가 힘들고 또한 내력 소모가 심해서 거의 안 익히지. 이것도 본교에 있는데, 상층부 고수들은 익힌다는 소문이 들리더군.”
“상층부 고수들이 익힌다면 대단한 무공이겠군요.”
“아니야, 모두 북명신공의 발전형……. 말이 발전형이지 내가 보기에는 퇴보형이야. 그러니 자네는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발해의 문자를 익히게나. 내 그에 대한 서적을 구해 줄 테니 익히라구. 북명신공은 본교에 보관되어 있어. 아주 상층부 고수들만이 그 책을 볼 수 있다고 하더군.”
“그런데 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책 때문에 글을 새로 익힌다는 건 좀 우습군요.”
“헛소리하지 말고 익혀. 그리고 자네 다음에 무림에 나가면 여자를 조심하게나. 여자는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 천적이야. 시간을 좀먹지. 나중에 나처럼 나이가 들어서 여자를 탐해도 늦지 않는다구.”
“히히, 선배님의 나이가 여든이 넘으셨는데, 아직도 여자 생각을 하십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조심해. 그리고 혹시나 외부에 나갈 때 적이다 싶으면 무조건 뜸들이지 말고 해치우라구. 괜히 시간 끌다가 자네의 실력이 탄로 나면 상대도 조심하게 되니까, 처음부터 강공으로 나가는 게 최고지. 그리고 증거는 절대 남기지 말라구. 자네의 살인 장면을 본 사람은 모두 죽여 버려. 알겠나? 이건 네 스승으로서 내리는 명령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쓸데없이 손속에 인정을 두다가 죽은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어. 그러니 자네도 자네보다 고수에게 죽는다면 별문제지만 자네보다 하수에게 죽는다는 건 내 체면이 용서하지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