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
총단에 돌아온 후에는 단조로운 일상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가 마교의 주력(主力)이 되는 5대 단체의 구성원들이 하는 일은 언제나 같다. 훈련, 훈련, 훈련……. 그것이 혼자만의 수련이든 그렇지 않으면 집단으로 모여 진을 펼쳐 적을 상대하는 것이든 연속되는 훈련이다. 마교에서 위로 올라가려면 남보다 강한 무공을 지녀야 하기에 모든 이들이 그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하루에 한 번씩 열 명이 펼치는 십절마검진(十絶魔劍陣), 일주일에 세 번씩 1백 명이 펼치는 백랑검진(百狼劍陣), 일주일에 한 번씩 1천 명이 모여 펼치는 천랑검진(千狼劍陣)을 연습한다.
언제나 혼자서 무공을 수련해 왔던 묵향은 처음에는 배울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자 그다음부터는 심드렁해졌다. 너무 시시했던 것이다. 아예 이따위 시시한 검진 연습할 시간에 혼자서 수련을 좀 더 하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유사시에 총력을 내기 위해서는 필요 없는 훈련이라 하더라도 꾸준히 받아 두어야 했다. 그리고 잘할 수 있다고 자신이 빠지고 나면 자신이 이끌어야 할 1백 명의 대원들은 천랑검진에서 누굴 지휘자로 움직여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부장(副長)을 불러 지시했다.
“다음부터는 자네가 본대를 이끌어 검진을 펼치도록 하게나. 그리고 평상시의 훈련도 자네가 이끌어 줬으면 좋겠어.”
그러자 그는 난색을 표하며 반대했다.
“하지만 대장, 그건 규칙에 어긋납니다. 제게 모든 지시를 받던 아이들이 실제 큰 전투가 벌어지면 대장과 손발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 그때도 자네가 지휘하고 나는 뒤로 빠지면 되니까.”
“하지만…….”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자네가 해. 나는 이번에 떠오른 몇 가지 생각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니까!”
“알겠습니다, 지시대로 이행하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얄팍한 수단은 바로 들통이 났다. 모두 같은 복장이기에 표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천리독행(千里獨行) 철극광(鐵極光)의 예리한 눈이 그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는 훈련이 끝나자마자 묵향을 호출했다. 묵향은 천리독행 근처에 가기도 전에 그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래서 묵향은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대주(隊主)를 뵈옵니다.”
대주는 주위에 있는 수하들을 의식해서인지 극도로 화를 억누르며 말문을 열었다.
“네 녀석은 뭘 하고 있었나?”
“예?”
“정해진 훈련 시간에 뭘 하고 있었냔 말이다.”
“수련하고 있었습니다.”
“검진의 훈련보다도 중요한 일인가?”
“…….”
“빨리 대답하라!”
“그렇습니다.”
“흥, 그렇다면 네놈의 그 알량한 수련이 어느 정도인지 노부가 심사해 주겠다. 따라오라.”
천리독행은 대천랑 검진이 펼쳐졌던 연무장으로 향했다. 묵향과 수하들도 그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저 영감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군. 어떻게 하지?’
연무장의 중간쯤에서 천리독행은 천천히 검을 뽑으며 싸늘하게 외쳤다.
“자, 빨리 검을 뽑아라.”
“삼가 묵향이 대주께 비무를 청합니다.”
“헛소리하지 말고 검이나 빨리 뽑아!”
천리독행은 독이 오를 대로 올랐는지 묵향의 의례적인 절차에 따른 인사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묵향은 천천히 묵혼을 뽑았다.
“자! 어디 네 녀석이 익히고 있는 검초가 어느 정도 위력이 있는 것인지 한번 노부에게 보여 봐라. 그런대로 위력이 있는 거라면 노부가 용서해 주지.”
용서해 준다는 말을 듣고 묵향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검이 용트림하듯 웅웅거리면서 주위에 푸르스름한 안개 같은 것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천리독행이 경악해서 외쳤다.
“맙소사, 검기인가? 아니 이것은 눈에 보일 정도의 유형(有形)의 것이니 검강! 검강이로구나.”
이미 검강은 1장(약 3미터) 밖으로까지 천천히 뻗어 나가고 있었고, 그 푸르스름한 안개에 가려져 묵향의 모습은 희미하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근처까지 그 강기가 다가오자 천리독행은 놀라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내친걸음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검을 들어 진기를 돋우어 뻗어 나오는 검강을 후려쳤다. 불꽃이 번쩍거리며 힘들게 검강의 일부를 잘라 내는 데 성공했지만 곧 그것들은 다시 합쳐졌고 계속 밖으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천리독행은 훌쩍 2장 뒤로 도약해서 물러선 다음 모진 기합성과 함께 검초를 펼쳤다.
“이얍!”
그가 펼친 검초는 천강혈룡검법의 일초인 유운혈룡(流雲血龍)! 그것도 10성의 공력으로 펼쳐지며 붉은 혈룡 10여 마리가 묵향이 만들어 낸 강기들과 부딪쳤다. 강기들이 부딪치며 엄청난 굉음이 울려 펴지고 강기의 회오리가 일어났지만 끝내 천리독행의 혈룡들은 두터운 푸른 강기의 막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독이 오른 천리독행은 더욱 진기를 끌어올려 강기를 발사했다. 이번에는 전번보다 더욱 큰 혈룡들이 날아갔다. 그러자 갑자기 푸른 강기의 막 속에서 묵향이 앞으로 달려 나오며 묵혼검으로 혈룡을 쳐 냈다. 이때 묵혼검은 푸른빛을 내고 있었는데, 그 검신은 두께가 5치(약 15센티미터) 정도 되는 푸른 기운이 이글거리며 뿜어 나오고 있었다. 뚫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붉은 강기들이 이글거리는 묵혼검과 부딪치자 폭음을 일으키며 튕겨나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천리독행은 눈을 더욱 크게 부릅떴다. 그러면서 힘 빠진 말이 새어 나왔다.
“어검술(御劍術)까지…….”
검강이란 검에서 유형의 강기를 응축시켜서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의 위력은 검기나 검풍에 비해 더욱 강력하다. 이 검강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같은 검강이나 아니면 어검술을 쓰는 것이다. 어검술이란 검을 완전히 다스릴 수 있는 사람만이 펼칠 수 있는 기술로 자신의 진기를 이용하여 검이 가진 모든 능력을 뽑아내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일반 철검을 가지고도 강철을 두부 자르듯 할 수 있다는 전설적인 무예다.
어검술보다는 약간 질이 떨어지지만 어기충검술(御氣充劍術)이 있다. 이것은 기를 다스려〔御氣〕 검〔劍〕에 기를 충만히〔充〕 채워 상대를 공격하는 기술〔術〕로 어검술과 같은 이글거리는 광택은 없지만 시술자의 경지에 따라 여러 광택이 나며 그 위력은 어검술보다 떨어진다. 어검술을 펼치면 그 무엇도 자르지 못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되는데, 이때 우수한 보검이나 신검이라면 어기충검술 정도로도 어검술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상대도 보검으로 어검술을 펼친다면 막기 힘들다. 그 이유는 어검술이 검이 가진 기운을 끌어내는 것이기에 보검일수록 위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어검술에 더욱 능숙해지면 진기를 사용해 어검술을 펼친 검을 어검술을 유지한 채 날려 1백 장 밖의 고수들도 마음대로 공격할 수 있는데, 이것을 이기어검술(以氣御劍術)이라 불렀고 검술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것은 심검(心劍)과 함께 검술의 최상승 경지였다. 일반 무림인들이 진기를 다스려〔御氣〕 검을 움직여〔動劍〕 사람을 해치는 어기동검술(御氣動劍術)과는 그 파괴력에서 차원이 다르다. 같은 어검술이나 검강이 아니면 이기어검으로 날아오는 검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검강은 상대의 검과 맞부딪칠 뿐, 지속적인 힘이 없기에 실질적으로는 어검술이 아니면 어검술을 막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만약 어검술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한 가지, 심검(心劍)뿐인데 이것은 전설에나 나오는 최고의 기술로 어검술보다 위 단계의 무공이다. 이것 또한 검강의 한 갈래이므로 막대한 내력이 필요하지만, 어검술은 검의 능력을 최대한 짜내는 것이므로 진기의 소모가 훨씬 적다.
묵향은 천리독행이 경악하건 말건 그대로 어검술로 천리독행을 향해 직선으로 찔러 들어갔다. 이제 천리독행이 할 수 있는 행위는 두 가지뿐이었다. 달려드는 검을 막든지 아니면 마주 찔러 들어가 상대와 동귀어진(同歸御盡)하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신검(神劍)이 아닌 다음에야 어검술로서 들어오는 검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천리독행은 이를 악물고 마주 찔러 들어갔다. 묵향은 천리독행의 검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급히 몸을 틀면서 순간적으로 몸의 탄력을 이용해 상대의 하체를 향해 베어 나갔다. 그러자 천리독행도 순간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어 묵향의 단전을 찔러 갔다.
근접전이 시작되자 일초 일초가 모두 동귀어진의 초식이었다. 천리독행이 묵향의 어검술을 상대로 이만큼이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무시무시한 경신법 덕분이었다. 만약 그의 신법(身法)이 조금이라도 느렸다면 그는 벌써 패배를 자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리독행은 입으로 말은 안 했어도 벌써 자신이 패했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호흡이 가쁜 자신에 비해 묵향은 담담하게 일초 일초 그를 향한 공격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접전이 시작되고 30초가 지나자 묵향은 뒤로 도약해서 4장여를 떨어져 나와 검을 아래로 내려가게 잡고 포권하며 말했다.
“대주의 검술은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소인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소인을 용서해 주실 수 없겠는지요?”
천리독행은 더 이상 근접전이 진행되면 둘 중 한 사람은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으리라는 것과 또 그 사람이 십중팔구는 자신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묵향의 몸은 어검술을 사용해서 검이 빛나는 와중에도 초식에 따른 예정된 움직임이 아닌 천리독행의 움직임에 따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연하면서도 재빠르게 움직이며 천리독행의 혼을 빼 놨던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이렇게 숙이고 나오자 천리독행은 자신의 체면을 살려 주면서 묵향이 물러났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그도 마지못해 검을 천천히 검집에 넣으며 그에 대해 답례를 했다.
“험험…, 자네의 검술이 이 정도로 진전을 봤는지는 노부가 몰랐군. 내 밑에 있을 정도의 실력이 아니라는 걸 노부가 미리 알아채지 못해 미안하구만. 이제부터는 모든 훈련에 참가할 필요가 없네.”
“대주, 신경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가자…….”
그 말과 함께 천리독행은 수하들을 이끌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천리독행은 이 비무의 결과가 오늘 중으로 교주에게 알려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교 내에는 수많은 교주의 눈과 귀가 숨어 있다. 이들의 보고가 교주의 귀로 들어간다면 묵향은 어쩌면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갈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써 양보했던 것이다. 사이가 안 좋은 상태에서 나중에 묵향이 그의 윗자리로 승진한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으니까…….
그 사건이 있고 2주일이 지나 묵향은 교주의 부름을 받았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오, 요즘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네. 이번에 자네를 부른 것은 한 가지 일을 맡기기 위해서야.”
“하명만 하십시오.”
“흠, 자네가 설명해 주게나.”
그러자 교주의 옆에 서 있던 적미살소(赤眉殺笑) 혁무상(赫武相)이 말을 시작했다. 혁무상 장로는 과거 적미염 왕자영이 은퇴한 후 등용된 인물이었다. 묘한 우연으로 이 둘 다 적혈수라마공을 연성했기에 눈썹 끝이 붉은색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상대를 어떻게 요리할까 하는 속마음을 드러내는 듯한 그의 살기 띤 미소 덕에 적미살소라는 명호를 얻은 혁무상은 마교가 낳은 최고의 두뇌라는 칭송을 받고 있었다.
“자네도 낙양에서 일을 해 봐서 잘 알고 있겠지만 본교에서는 요즘 들어 은밀하게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네. 쓸데없는 분타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업을 확장 중에 있어. 그중에서도 낙양을 시작으로 꽤 효과가 좋았기에 세 개의 표국을 더 열었네. 그리고 각종 사업체들도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있지. 그런데 아주 우연한 기회에 우리들이 하는 사업장과 제령문(諸令門)이 충돌했어. 제령문의 경우 2백여 명의 식솔을 거느리는 작은 방파지만 그 문주가 대단한 사람이지. 자네는 강호 사정에 어두워 잘 모르겠지만 3황5제에 들어가는 뇌전검황(雷電劍皇)이 이끄는 문파지. 아마 좀 더 시간이 지난다면 그 문파에서 그 부근에 뿌리를 내리려는 본교의 의도를 알아챌 가능성이 높아.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네.”
“뇌전검황을 없애란 말씀입니까?”
“그렇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자를 한 달 내로 없애 버려. 문주가 없어지면 그들의 세력이 꺾일 거야. 그 문파에는 스무 명 정도의 대단한 고수들이 있다고 하지만 문주가 없어지면 우두머리가 없으니 한풀 죽겠지.”
“하지만 그 정도의 고수를 암살하면 뒷감당을 하기가…….”
“자네는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정파의 초고수들 가운데 파악하기 쉬운 위치에 있는 사람은 몇 안 돼. 그렇기에 본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그자를 없앨 필요가 있다구. 실로 무림은 너무나도 넓은 곳, 3황5제에 필적하는 고수가 숨어 지내고 있다고 해도 알기는 어렵지. 그들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라도 이번의 임무는 꼭 성사되어야 해. 알겠나?”
“존명!”
“자네의 퇴로를 지원하기 위해서 본교의 고수 네 명을 붙여 주겠네. 그들을 데리고 가게나.”
“필요 없습니다. 속하 혼자 가도 충분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기이한 만남
그날 저녁 묵향은 조용히 총단을 떠났다.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었기에 그는 천천히 제령문이 있는 산서로 향했다. 검은색 일색의 옷차림에 테가 짧고 경사가 급해 눈 아래까지 내려오는 삿갓을 쓴 그는 약간 눈에 띄는 옷차림새였지만, 옷 자체가 과거 낙양에 있을 때 소연의 어머니가 만들어 준 것이라서 많이 낡은 데다가 묵혼도 아무런 치장이 없는 싸구려 검으로 보이는지라 주위 사람들은 그를 방랑하는 비렁뱅이 무사쯤으로 생각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거기에 묵향은 산과 들을 통과하며 야숙(野宿)을 하면서 거의 직선으로 나가고 있었기에 사람들과 만날 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량한 벌판에서 저녁거리로 토끼 두 마리를 잡아 불에 굽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오솔길을 따라 말 네 필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묵향에게 다가온 그들 중 한 사람이 말을 건넸다.
“안녕하시오?”
“안녕하시오?”
“혹시 이 근처에서 이런 사람을 못 봤소?”
그러면서 그는 품속에서 종이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 두루마리에는 그런대로 준수한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현상금 은화 40냥이라고 쓰여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오. 대체 그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이오?”
“뭐긴 범법자지. 이제 날도 저물어 가니 이곳에서 함께 야숙을 해도 상관없겠소?”
“좋을 대로 하시구려.”
“고맙소.”
그러자 일행이 모두 말에서 내렸는데, 그중 한 명은 상당히 덩치가 좋은 거한이었고 또 한 명은 여자였다. 묵향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인 모양이다. 그들은 서둘러 주변에 흩어져 사냥을 해 토끼 세 마리를 잡더니 불에 구우면서 말안장에서 만두와 빵, 술을 꺼냈다. 그리고는 놋쇠 주전자에 물을 붓고 불에 묻어 차를 끓이기 위해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먼저 묵향의 고기가 다 익었으므로 묵향은 그들에게 예의상 같이 먹기를 권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은 토끼 한 마리를 들고 가면서 제법 큰 만두 한 덩어리와 술을 권했다. 모두 식사를 시작하면서 그 나이 많은 사람의 얘기를 들었다.
“우리가 찾는 사람의 이름은 잘 모르오. 하지만 대단히 뛰어난 고수라고 그러더군요. 천일루에서 열네 명의 고수를 죽인 살인귀(殺人鬼)인데, 그때 죽은 사람 가운데 무산5웅(巫山五雄)이 끼어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때 죽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 강호초출인 태진문주의 아들이었던 게 화근이라……. 그 장문인이 무당파 장문인과 공동으로 현상금을 내걸었다고 들었소.”
묵향은 토끼 고기를 우물거리며 그의 말을 듣다가 다 씹은 고기를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그렇지만 너무 막연하지 않소? 당신들도 현상금 사냥을 하는 사람들인 모양인데, 그 정도 정보만 가지고 상대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그러자 그 사내는 싱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우리들도 그때 목격자들을 만나 자세하게 물어봤소. 상대의 이름은 모르지만 그자가 검은 옷을 즐겨 입고, 또 검은색 검을 차고…….”
그러다가 그 나이 많은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상대방의 인상착의가 지금 입으로 지껄이고 있는 현상범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사내가 말을 끊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치 침묵이란 것을 양손에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이 피부에 느껴지는 긴장감이 흘렀다. 묵향은 천천히 그들이 준 술을 마시고는 말문을 열었다.
“알려 줘서 고맙소.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깜빡 잊고 있었구려. 앞으로는 검은색 옷도 입지 못하게 생겼군. 꽤 정이 든 옷인데…….”
그러자 네 명은 튕기듯이 일어나 병기를 뽑은 다음 묵향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 모양을 보면서 묵향이 빙긋 웃었다.
“내가 그대들을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벌써 골백번도 더 죽였을 거요. 지금이라도 그대들을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니 이리 앉으시오. 나에게 무기를 겨눈 자를 살려 준 적은 없지만 그대들은 나에게 만두와 술을 권한 사람들이니 내 이번은 용서해 주고 싶소.”
가만히 앉아서 추호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말하는 묵향의 기도에 잠시 그들은 압도되었다. 하지만 그중 덩치 큰 사내가 큼직한 귀두도(鬼頭刀)를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때 나이 많은 사람이 사내를 손으로 제지하며 외쳤다.
“막내! 멈춰라. 도저히 우리가 손쓸 수 없는 상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대형(大兄), 저자가 그렇게 강하다는 거예요?”
나이 많은 사내는 그 물음에 답하는 대신 묵향에게 정중히 포권을 했다.
“목숨을 살려 주셔서 감사하오. 우리는 지금 물러서겠지만 당신도 그렇게 많은 현상금이 걸려 있으니 조심을 하셔야 할 거외다.”
“클클, 겨우 은화 40냥에 눈이 먼 자들이라면 그렇게 대단한 실력자는 없을 거요. 대신 그대들에게 한 가지 정보를 주지.”
“뭡니까?”
“나는 지금 뇌전검황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는 게 어떻겠소? 만약 내가 그자에게 패한다면 내 목을 들고 가 손쉽게 돈을 벌 수 있을 거요.”
그러자 네 명은 경악하며 외쳤다.
“뇌전검황! 그대는 뇌전검황이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 알고 찾아간다는 거요?”
“나는 무림에 거의 나오지 않기에 이번에 그 명호는 처음 들었소. 실례가 안 된다면 그대들이 안내를 해 주지 않겠소? 혼자서 찾아갈 수도 있지만 그대들의 안내를 받는 것보다는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 피차 밑지는 장사는 아닌 것 같은데?”
나이 많은 사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좋소, 같이 갑시다.”
그렇게 해서 묵향은 그들과 기묘한 여행을 시작했다. 그 나이 많은 사내의 이름은 정량(玎良)이라 했고, 나머지는 현상금 사냥을 하면서 만난 동지들로 서로 형제의 의리를 맺고는 여태까지 같이 지내 오고 있다고 했다. 그중에서 민옥(玟玉)이라는 젊은이는 입담이 좋아서 여행에서 동행들이 피곤하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얘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다 보면 어느새 다음 목적지까지 와 있었다. 서로 중요한 것들은 숨기고 있겠지만 같이 얘기를 나누다 보니 상당히 친해졌다.
여행을 시작한 지 25일이 지나 목적지에 도착했다. 묵향은 당당하게 문을 지키는 호위 무사에게 물었다.
“검황을 만나 뵙고 싶소. 안내를 하든지 아니면 연락을 해 주시겠소?”
“나으리께서는 지금 문의 일에서 은퇴를 하고 총관 나리에게 대소사를 일임하고 계십니다. 볼일이 있으시다면 총관님을 뵙는 게 낫지요.”
“이 일은 노가주(老家主)가 아니면 안 되오.”
“나으리께서는 저곳의 초가(草家)에서 지내십니다. 시중드는 몇 사람만을 거느리고 계시는데, 가시더라도 만나 뵙기는 어려울 겁니다.”
“알려 줘서 고맙소.”
묵향 일행은 말을 달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묵향은 산길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멈춰 서며 소리쳤다.
“모습을 나타내라!”
그러자 갑자기 네 명의 흑의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나타난 그들을 보고 동행들은 경악하며 출수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향은 흑의 복면인들에게 물었다.
“누가 보내서 왔느냐?”
그러자 그중 하나가 대답했다.
“혁무상 장로께서 보내셨습니다. 대장(隊長)을 지원하라는 분부셨습니다.”
“돌아가라.”
“그렇게 말씀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속하들은 돌아갈 수 없습니다.”
“흠…, 할 수 없군. 너희들은 나를 따라오되 결코 내 지시가 없이는 손을 써서는 안 된다. 약속할 수 있느냐?”
“명에 따르겠습니다.”
“좋다, 따라오라!”
묵향의 동행들은 따라오기 시작한 네 명의 복면인들이 극도로 훈련된 고수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담도 집어 치우고 묵묵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기척이 없이 따라오는 그들의 움직임으로 봤을 때 정상적인 무림인은 아님을 사냥개의 감각으로 알아챘던 것이다. 묵향이나 그 흑의 복면인들도 말이 없었으므로 초가에 도착할 때까지 모두 조용히 길을 재촉했다. 초가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때가 다 되어 시장기가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초가에는 이제 갓 서른을 넘어선 듯한 준수한 젊은이가 정원의 매화나무를 손질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청의 동자(靑依童子)가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던 젊은이는 반갑게 말을 걸었다.
“어서들 오시게나. 식사는 했나? 얘야, 빨리 가서 문향주 위로 모든 고수들을 불러오너라. 급한 일이라 일러라.”
“예.”
답을 하더니 동자는 쪼르르 경신술을 써서 달려 내려갔다. 순간 흑의인들이 꿈틀했지만 묵향의 말없는 제지를 받고 동자가 멀어지는 모습을 그냥 지켜봤다.
“령(鈴)아! 손님들이 오셨으니 차를 내오거라. 모두 이리 오시게나.”
검황은 손님들을 안내해서 마루 한쪽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흑의 복면인들은 그냥 마당에 서 있을 뿐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묵향이 젊은이에게 말했다.
“저들에게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럼 신경 쓰지 않기로 함세. 자네는 이리 와서 나하고 얘기 좀 하지 않겠나?”
“예, 그러죠.”
복면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령이라 불리는 홍의 소녀(紅依少女)가 가져오는 차와 간단한 음식을 먼저 들었다. 묵향이 차 마시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젊은이가 물었다.
“차 마시는 모양을 보니 완전한 야인(野人)이 분명하군. 예절 교육이라곤 받지 않은 모양이네 그려.”
“저는 태어나서 지금껏 그런 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마지막 사부를 만나 여러 가지를 배웠지만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다 보니 습관이 되어 고치기가 어렵군요.”
“고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고치지 않은 거겠지.”
“하하, 그거나 그거나 비슷한 거죠. 저는 세세한 사항에 얽매이기는 싫습니다.”
“자네는 보아하니 천하를 탐할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데, 어찌하여…….”
“의리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차 맛이 어떤가?”
“좋군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차 맛을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냥 입맛에 맞다 안 맞다만 느낄 뿐 그 외에는 모르겠습니다.”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군. 자네들은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나?”
“예.”
“그럼 령아, 음식과 술을 준비해라.”
“예.”
“산속이라 별로 찬은 없으니 이해해 주시게나.”
“별말씀을요.”
모두 젊은이와 묵향이 주고받는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뇌전검황이 아닌 웬 젊은이와 정겹게 대화를 나누는 묵향을 보고 의아해했지만 지금까지 엿들은 대화로 그 젊은이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정도무림을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 중 하나인 뇌전검황은 갓 서른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젊은이였다. 하기야 화경에 이르면 반로환동하여 젊어진다고 했으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은 묵묵히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엿듣기에 정신이 없었다.
어쨌든 그 젊은이가 이쪽에 호의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태도는 언제 달라질지 모르는 노릇이고, 묵향은 이 젊은이를 해치러 왔으니 앞으로 어떻게 사정이 바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뇌전검황으로 추측이 되는 젊은이의 환대에 의아해했지만 그냥 잠자코 있으면서 마음속으로 대비만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밑으로 연락을 하러 달려간 청의 동자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그 녀석이 많은 고수들을 거느리고 오면 일이 복잡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묵향이 잠자코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그들은 홍의 소녀가 가져오는 음식들을 들었다. 모두 술과 음식을 들면서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에도 흑의 복면인들은 그냥 한군데에 서 있을 뿐 자리에 끼어들지 않았다.
식사가 거의 끝날 즈음에 밑에서 열다섯 명 정도의 고수들이 최대한 빠른 속도로 경공을 펼쳐 올라왔다. 그들의 신법으로 보아 상당한 수련을 거친 자들임이 확실했다. 모두 우려하던 현실이 다가오자 바짝 긴장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정량의 패거리는 직접 싸우러 온 자들이 아닌 만큼 긴장이 덜하기는 했지만 불문곡직(不問曲直) 달려든다면 자신들도 위험하므로 싸늘한 긴장감이 흐르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이들이 달려 들어오는데도 묵향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달려오는 고수들을 보며 상대편 젊은이에게 말했다.
“상당히 잘 단련된 아이들이군요.”
“클클…, 다 허장성세(虛張聲勢)일 뿐 저들 중에서 쓸 만한 녀석은 몇 안 되네.”
달려온 제자들 중에 하나가 이 젊은이에게 공손하게 포권했다. 오히려 제자라고 인사를 건네는 쪽이 인사를 받는 젊은이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였기에 약간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그들은 모두 다 확신하게 되었다. 그 젊은이의 정체를.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오냐, 너희들은 거기 앉아 이 늙은이가 나누는 얘기를 듣고 있거라. 많은 도움이 될 듯하여 내 부른 것이다.”
“예.”
그러더니 그들은 그 젊은이 뒤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이 앉을 자리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홍의 소녀가 돗자리를 내와서 대부분은 마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에게도 차가 주어졌다.
“자네 무공 말고도 배운 것이 있나?”
“몇 가지 배웠죠. 모두 마지막 사부가 가르쳐 준 것인데, 음악과 수묵화를 좀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부가 정원을 가꾸는 것을 좋아하셨기에 그것도 어깨 너머로 배웠습니다. 원체 재주가 없어서 별로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했습니다.”
“음악을 한다구? 그럼 혹시 금(琴)을 탈 줄 아나?”
“조금.”
“령아, 금을 가져오너라.”
“예…….”
홍의 소녀가 금을 가져오자 뇌전검황은 금을 넘겨주었다.
“별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한 곡 들려주면 고맙겠군.”
“그럼…….”
묵향은 사양하지 않고 그에게서 금을 받아 들고는 줄을 고른 후 금을 타기 시작했다. 묵향은 금음에 약간의 내공을 불어넣어 운용했기에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부분이 있었다. 이것은 마교의 음공(音功)의 일부를 모방한 것으로, 이런 방식으로 내공을 더욱 많이 주입한다면 듣는 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 수도 있다. 묵향은 그걸 유백에게 배웠지만 음을 이용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조미료로 내공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청의 동자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고, 홍의 소녀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그걸 본 묵향은 연주를 멈췄다.
“미천한 곡을 계속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확실히 자네의 금을 타는 솜씨는 별 볼일이 없어. 하지만 그 오묘한 내공의 운용은 정말 대단한 경지로군. 령아가 눈물을 흘릴 지경이니……. 본격적으로 금을 배우면 음공만으로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겠군.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음악이란 소리를 이용해서 마음에 감동을 받으며 즐기기 위한 것이지 그걸로 사람을 죽이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많고 많은데, 무엇 때문에 그런 방법을 택하겠습니까?”
“특이한 친구군. 내공이 강한 경우 음악을 사용하는 것도 대단한 득이 되지. 만통음제(萬通音帝)의 경우 그 살인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나? 많은 사람을 별 수고도 없이 한 번에 죽이는 데는 그게 최고인 것 같더군.”
“저는 좀 힘들더라도 음을 살인에 사용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네는 검이란 뭣이라고 생각하나?”
“아니? 검을 아직도 모른단 말입니까?”
“…….”
“지금 저들이 차고 있는 게 검이 아닙니까? 양쪽에 날을 가진 아름다운 살인 도구죠. 보통 길이는 2척 8촌 정도…….”
“내가 그걸 묻는 게 아닌 줄은 자네도 잘 알 텐데…….”
“그게 그거죠. 무공이란 무공인 것이고, 검은 검, 도는 도입니다. 왜 무공과 검을 혼동하십니까?”
“대단하군. 그 정도 경지에 이르렀다니……. 하지만 아직도 많은 멍청이들이 그걸 혼동하고 있지. 저기 있는 내 아들 녀석도 그걸 혼동하지. 검이란 아무것도 아냐. 그냥 손이 좀 더 길어진 정도에 불과하다고 할까? 오랜만에 자네와는 밤새워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군. 자네는 어떤가?”
“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