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담소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다가 모두 천지문으로 갔다. 묵향 일행이 도착하자 천지문의 위병들은 경계의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봤다. 매는 가볍게 말에서 뛰어내려 바짝 긴장하고 있는 위사(衛士)에게 다가가 말했다.
“우리는 천마신교(天魔神敎)에서 왔소. 문주를 뵙고 상의할 일이 있소. 안에 기별해 주시오.”
그러자 위사 중 한 명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1각 정도 지나자 그 위사는 또 다른 중년인을 데리고 나왔다. 그 중년인은 묵향 일행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문주께서는 귀교와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매가 말했다.
“그러면 뇌옥에 갇혀 있는 귀 문하 3백여 명의 목이 떨어져 나가도 상관없소?”
“그대들은 우리에게 협박을 하러 찾아온 겁니까?”
“아니오. 몇 가지 협상을 할 게 있어서 찾아왔소. 먼저 문주를 만나게 해 주시오.”
“기다리십시오.”
2각 정도를 기다리자 그 중년인이 다시 나왔다.
“들어오십시오.”
묵향이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자 나머지도 하는 수 없이 말에서 내렸다. 묵향의 뒤에서 지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은 이곳에 남아 말을 돌보고 있어라.”
묵향 일행은 문 앞에 열 명의 무사들을 남겨 두고 중년인을 따라 들어갔다. 묵향 일행이 기다리는 중에 준비했는지 넓은 마당에는 널찍한 탁자 두 개와 의자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탁자의 너비로 봤을 때 충분히 열 개 이상의 의자를 놓을 수도 있는데도 한쪽에 세 명씩 앉을 수 있도록 의자의 수를 제한해 놓은 것은 상대의 우두머리가 누군지 알아보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저쪽의 의자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고 1백여 명의 고수가 검을 허리에 찬 채로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문주는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묵향은 이쪽에 할당된 세 개의 의자 중에 가운데 의자에 털썩 앉아 문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1각 정도 더 기다리자 문주가 나왔고, 그 뒤에는 크고 두꺼운 도(刀)를 가진 젊은이가 뒤따랐다. 과연 보고대로 6척이 넘는 큰 키에 다부진 근육을 가지고 있는 부리부리한 눈매의 소유자였다. 그는 중간의 의자에 어떻게 보면 문약한 서생같이 그다지 근육이 발달하지도 않은 새파랗게 젊은 인물이 느긋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란 듯했다.
자리에 앉기 전에 묵향 일행을 둘러본 진 문주는 대부분 위사들이 40대 정도의 용모며 상당히 젊어 보이는 사람들이 많고 또 왼편에 앉은 깡마른 곱추의 손이 검푸른 광택을 내는 것을 보고 점점 더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묵향의 뒤쪽에 서 있는 여자의 손이 투명할 정도로 새하얗고도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을 보고 내색은 안 했지만 경악했다.
‘이들은 마교의 최고 정예다. 저 검푸른 광택의 말라비틀어진 손에 말라깽이 곱추라면 마교 서열 13위 외총관 고루혈마 옥관패가 틀림없어. 그리고 저 서생 같은 자 뒤의 사이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계집은 소수마공을 극성까지 익혔고 금음(琴音)으로 사람을 웃으며 죽게 만든다는 음희 설약벽 우외총관이다. 대부분 평생가도 저들 중 한 명의 얼굴 보기가 힘들다고 들었는데, 이 둘이 한꺼번에 나타나다니……. 소문대로라면 저 둘만으로도 본문을 멸문시킬 수 있을 거야.’
이때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가 나왔다. 아주 깨끗한 고급 옷을 입은 걸로 보아 제법 신분이 높은 것 같았다. 허리에 찬 패검은 그가 천지문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자는 문주의 오른쪽 비어 있는 의자에 앉더니 거만하게 말했다.
“천마신교에서 여기 무슨 일이오?”
그러자 곱추인 옥관패가 비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여기서 입을 열 위치가 못 돼. 우리는 네 녀석이 아니라 문주하고 얘기하기 위해서 총타에서 이곳까지 왔단 말이다.”
거들먹거리던 그 젊은이는 곱추를 째려봤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곱추의 손에 닿자 일순간 말을 잊을 정도였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가 말했다.
“귀하는 고루혈마 옥관패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알면서 왜 묻나?”
“이런 구석진 곳에 어떻게 천마신교 서열 13위의 나으리가 오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그러자 곱추는 느긋한 어조로 대답했다.
“본좌보다 더 높은 분도 와 계신데 내가 못 올 것도 없지.”
그 말을 들은 그 젊은이는 이제 정신을 차려 마교측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마교의 인물들 중에서 외부에 드러난 고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여태까지 고작해야 고루혈마 옥관패 외총관과 그 수하인 좌외총관 천진악과 우외총관 설약벽이 밖으로 드러난 최고의 고수들이다. 그런데 그중 두 명이 이곳에 있고 그나마도 음희 설약벽은 앉지도 못하고 서 있는 걸 보고 그는 도무지 지금 돌아가는 사태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 정도 고수들이 이 구석진 곳에 왜 왔지? 솔직히 저 뒤쪽에 서 있는 인물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마기로 보아 모두 보통 고수들이 아니야. 앞의 세 명은 빼고 저기 서 있는 자들의 반만 동원해도 이따위 시골 문파쯤 잿더미로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겠군. 맹에서 파견된 우리들까지 포함해서……. 그런데 이해할 수가 없는 건 중간에 앉은 젊은 녀석이군. 도무지 마기를 느낄 수가 없어. 무림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겠어. 어쩌면 마교의 핵심 인물인 혁무상인가? 혁무상이 마교의 두뇌라고 들었는데…….’
그가 잠시 할 말을 잊은 사이에 설약벽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대력도패 진양 문주님, 이번에 저희들은 귀 문파와 협상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본교는 귀 문파와 조건부 불가침 협정을 맺고자 합니다.”
그러자 오른편에 앉은 젊은이가 말했다.
“문주님 속아서는 안 됩니다. 저들은 계략을 통해 이 문파를 통째로 먹으려고 하는 겁니다.”
설약벽은 그 젊은이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이 협정은 천지문과 본교의 일입니다. 협정을 맺을 것인지는 천지문의 문주님이 결정하실 일이지 무림맹의 용천익 당주 따위가 끼어들 일이 아니에요. 문주님, 이 협정이 맺어지면 물론 귀 문파의 잡혀 있는 3백여 명의 포로들을 돌려드릴 겁니다. 이것이 그 협정서입니다.”
밑져 봐야 본전이므로 진양은 그 협정서를 읽기 시작했다.
“일(一), 이 협정서는 상대방이 해제를 원하거나 상대 문파의 수장이 바뀌기 전까지 유효하다. 만약 한쪽의 수장이 바뀌면 다시 협정서를 작성, 협의해야 한다.
이(二), 천마신교와 천지문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야 하고, 설혹 실수로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면 무력보다는 상호 토의를 통해 원만히 처리함을 원칙으로 한다. 아울러 천마신교는 천지문 문파를 기준으로 20리 안에는 절대로 침범할 수 없다.
삼(三), 만약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 협정서를 위반해야 할 일이 발생하면, 협정을 해제하기 한 달 전 상대방에게 통보해야 한다. 예외로 천지문은 정파의 모든 문파가 서로 합동하여 천마신교를 침입할 때 통지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 예외의 경우 타 문파들의 압력에 의한 행동이 되므로 아직 협정서는 유효하게 된다. 따라서 천마신교는 공격해 들어오는 천지문의 제자들은 공격할 수 있으나 절대 천지문을 공격할 수는 없다.
사(四), 만약 천지문에서 2백 리 내에서 천마신교가 정파 계열의 문파와 충돌했을 때 천지문에서 중재를 요청하면 최대한 무력행사를 자제해야 하며, 중재 요청과 동시에 한 달간 천마신교는 절대로 무력행사를 하지 않는다.
오(五), 천마신교를 위협하는 세력이 천지문 20리 내에 존재할 때, 천마신교는 그들을 임의로 공격할 수 없고 반드시 천지문의 허락을 얻어야 공격이 가능하다.
육(六), 천지문은 꼭 천마신교가 타 문파와 충돌을 일으켰을 때 도와 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천마신교는 천지문에서 지원을 요청하면 도와주어야 하고 만약 돕지 못한다면 천마신교에 서신 도착 후 한 달 이내에 돕지 못하는 사유를 적어 천지문에 통보해 주어야 한다.
칠(七), 위의 여섯 가지 내용은 협정서가 유효한 한 지켜져야 한다.”
협정서를 찬찬히 읽은 진양은 왼쪽에 앉은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인에게 그 협정서를 넘겨주었다.
“제가 읽어 보니 일방적으로 천마신교에게 불리한 조항들이 많소. 귀하들의 진심을 알고 싶소.”
“우리들의 진심은 그것입니다. 첫째항을 둔 이유는 본교에서 진양 문주님을 믿을 수 있지만 문주님의 후계자까지 믿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귀 문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희 교주님께서도 20년 안에 소교주님께 모든 권한을 넘기실 겁니다. 귀 문파도 소교주님을 못 믿기는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렇소.”
“이번에 생긴 일도 서로가 잘 상의해서 넘길 수 있는 일인데도 귀 문파는 수상한 점이 있다고 무턱대고 본교의 비밀 분타를 공격해 왔습니다.”
“그건…, 원체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우리들은 그걸 산적들의 소굴로 판단하고 공격을 했소. 공격해 들어간 제자들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일주일 전에서야 그중 세 명이 돌아왔소. 그 아이들의 말을 듣고는 귀교와 충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이번 일은 교주님의 허락 하에 진행되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본교는 귀 문파와 충돌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약 이걸 거절하신다면 저희들은 지금 귀 문파를 멸문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점을 충분히 고려해 주십시오.”
진양은 힐끗 무림맹에서 파견 나온 용천익 당주를 보더니 말했다.
“본인은 이 협정서의 일곱 가지 내용을 수락하오.”
여태까지 말이 없던 묵향이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협정서에 서명하고 인장을 찍었다.
“그렇다면 본교와 천지문은 조건부 불가침 협정을 맺은 것이오. 그 협정서에 인장을 찍어 이리 주시오.”
진양이 서명하고 인장을 찍은 후 그 협정서를 묵향에게 넘겨주자 묵향도 자신이 서명하고 인장을 찍은 협정서를 넘겨줬다. 옆에서 협정서 교환이 끝나자 설약벽이 말했다.
“건네받으신 협정서에 다시 자신의 서명과 인장을 찍어 주십시오. 협정서는 각 문파에 따로 보관되며 협정이 유효한 한은 무한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진양 등은 넘겨받은 협정서에 써 있는 서명을 보고 경악했다. 용천익 당주는 서명을 보더니 얼굴을 들어 묵향을 멍청히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서명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천마신교 교주 대리, 천마신교 부교주 묵향」
‘겨우 이런 문파에 2만의 정예 고수를 가지고 있고, 또 10만 사파를 영도한다는 마교의 부교주가 오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진양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용천익 당주는 약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교에 새로운 부교주가 임명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정보다. 만약 저자가 진짜 부교주라면 최소한 극마의 경지를 넘어선 자야. 빨리 본맹에 연락을 해야겠군.’
서로가 각기 머리를 굴리는 사이 묵향은 벌써 자신이 보관할 협정서에 서명하고 인장을 찍은 후 그 협정서를 설약벽에게 건넸다. 그러고 나서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묵향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묵향이 갑자기 일어서자 모두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이때 묵향이 건물의 오른쪽 얕은 토담을 향해서 외쳤다.
“이봐, 이리 나와. 맛있는 거 사 줄게.”
그러자 토담 안에서 한 개구쟁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젠 안 속아, 이 비열한 녀석아.”
그러자 갑자기 진양과 진양의 왼편에 앉은 40대 초반 사내의 얼굴이 동시에 홍당무가 되었고, 주변에 있던 천지문의 고수들은 웃음을 참느라고 곤욕스런 표정이었다.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묵향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어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다고 해 놓고는…….”
“헛소리하지 마! 우리 할아버지한테 일러서 네 녀석을 죽여 버릴 거야.”
“어제는 두고 보자고 하더니, 고작 한다는 짓이 할아버지를 찾는 거냐, 꼬맹아?”
“난 꼬맹이가 아니야. 그럼, 그럼… 나중에 내가 직접 너를 죽여 버릴 거야.”
그 말을 듣고 묵향은 비웃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흥! 나중에? 나중에 언제?”
아이는 한참 망설이는 것 같았다.
“10년 후에 두고 보자.”
“하! 10년 후라.”
그와 동시에 약간 묵향의 신형이 움직이는 것 같더니 그 순간 묵향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소년을 잡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주변의 인물들은 묵향의 신법이 빠름에 경악했다. 거의 찰나의 시간에 5장 거리에 있는 아이를 잡고는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묵향은 아이한테 짐짓 화났다는 태도로 말했다.
“할아버지 잘못 했어요 하고 빌어라.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그렇게는 못 해! 놔, 이 자식아.”
그러자 묵향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묵향의 말투는 상대를 한껏 깔보는 게 확연했다.
“흥! 그럼 내가 말을 하도록 만들어 주마! 좋게 말할 때 빌어!”
아이는 고집스런 얼굴로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안 해! 못 해! 놔, 이 자식아!”
“못된 녀석! 네 녀석이 비명을 지르고 잘못했다고 벌벌 떨게 만들어 주지.”
“흥! 내가 그럴 줄 알고.”
아이가 고집스레 입을 다물자 묵향은 짐짓 화가 났다는 듯 순간적으로 아이의 혈도 64곳을 점했다. 그리고 아이의 몸 곳곳을 만지자 뼈가 부서지는지 우두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애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모두 재미있어 했지만 사태가 진전될수록 진양과 그 왼쪽에 앉은 사내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급기야 제지하고 나섰다.
“이럴 수가 있소?”
그런데 언제 다가왔는지 설약벽이 진양의 손을 잡고 말렸다. 진양은 그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이 터지도록 입을 꽉 다물고 신음하고 있는 손자를 보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의 괴성은 나오지 못했고 몸은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는 이 순간 요사스런 아름다움을 풍기는 미녀가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하기조차 힘든 경지에까지 올라선 고수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협정을 맺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린애를 저렇게 괴롭히다니……. 세상에, 어린애한테 분근착골(粉筋鑿骨)의 고문을 행하다니 저 자식은 사람도 아니다.’
그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쏟아졌다.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수하들도 문주와 부문주 그리고 부문주의 아들이 사로잡혀 있기에 칼을 빼들고 달려들지 못하고 숨을 죽여 사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림맹에서 파견된 용천익 당주도 자신의 1장 앞에서 노려보고 있는 고루혈마 옥관패의 위세에 질려 식은땀을 흘리며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수하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빨리 비명을 질러 이 자식아.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이번에는 뼈다귀를 부숴 버릴 거야.”
묵향은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그 아이를 위협했고, 그 아이는 그에 질 수 없다는 듯이 입 한 번 열지 않고 묵향의 고문을 견뎠다. 2각이 지나자 아이는 차츰 혈색이 돌아왔다. 아이의 몸속에서 들려오던 우드득거리는 소리는 멈춘 지 오래였다. 또다시 1각 여가 지나자 아이는 정신을 차렸다. 이제 모든 고통이 끝난 것이다. 그러자 묵향이 이번에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직이 말했다.
“내가 진기를 유도할 테니 운기조식을 해라.”
묵향은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운기조식을 도왔다. 좌중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방식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이상하군. 운기조식을 돕는다면 등에 장심을 붙이고 진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인데 저 녀석은 왜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있는 거지.’
시간이 지나자 아이의 얼굴은 더욱 평안해졌다. 운기조식을 시작한 지 2각 정도가 지나자 묵향은 손을 떼고는 아이를 일으켜 주었다.
“정말 용감하게 견뎠다. 내가 협정서가 조인된 기념으로 너에게 준 선물이다. 방금 네가 익힌 심법은 현문의 태허무령심법이다. 이미 정파에서는 실전된 무공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며, 모든 사마(邪魔)가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준다. 너는 매일 한 시진씩 이 심법을 행해야 하고 그 어떤 다른 심법도 익히면 안 돼. 진기가 정순하지 못하면 태허무령심법으로 쌓은 내력은 별로 힘을 쓰지 못해. 이것은 내력이 쌓이는 속도는 느리지만 일단 경지에 이르면 대단한 진전을 보이는 것이 장점이지. 내가 임의로 너의 근골의 형태를 바꿔 환골탈태한 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하면 더욱 빨리 무공을 익힐 수 있지.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진짜를 맛볼 거다. 이 방법은 대단한 효과가 있지만 그 고통이 너무나 지독해 도저히 인간으로서 참을 수가 없지. 단 한 번이라도 비명을 지르면 기가 흩어져 그때까지의 고생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거기다 다시는 이 방법을 쓸 수가 없다. 네가 참아 낸 것이 대견하구나.”
그러면서 묵향은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리고 아직도 어벙벙한 상태에 있는 좌중을 훑어 보고 진양에게 포권했다.
“그럼 안녕히……. 저 아이는 나중에 천지문을 이끌어 나갈 최고의 고수가 될 것입니다. 잘 키우시기 바랍니다.”
그는 아이에게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꼬마야! 다음에 만났을 때는 그따위 엉터리 도법이 아닌 좀 더 좋은 솜씨를 보여 주기 바란다.”
그런 다음 외쳤다.
“돌아가자.”
모두들 묵향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하는데, 미소를 머금은 설약벽이 진양에게 인사를 했다.
“손자 분의 성취에 축하드립니다. 저 무공은 진골축근마공(珍骨縮筋魔功)으로 극마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시전이 가능한 대단히 높은 경지의 무공입니다. 본교의 모든 젊은이들이 저 수법을 받아 보기를 원하지만 실지로 받은 사람은 거의 없어요. 부교주님께서 손자 분이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저 수법을 받는 도중에 아이에게 충격을 주면 안 되기에 다급한 상황이라 손을 썼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뇌옥에 갇힌 천지문의 제자들은 본교의 제자들이 호위해서 안전하게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럼.”
설약벽은 경신술을 사용해 순간적으로 말이 기다리고 있는 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천지문의 중인들은 그녀의 그 비쾌한 경신술을 보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신법이군.”
“음희는 냉혹하고 지독한 손속에 음란한 계집이라고 들었는데 소문이란 게 얼마나 믿을 게 못 되는지 오늘에야 알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