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930)

3일 후 묵향이 한영영을 만나 보니 과연 소문대로 예쁜 아가씨이기는 했다. 하지만 교활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묵향을 훑어보는 걸 보고 묵향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묵향은 난과 죽에게 마차를 몰고 매와 국은 말을 타고 뒤따르며 호위하라고 명한 후 한영영과 그 시비 한 명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한영영도 이번이 처음 하는 세상구경이라 새로운 풍물과 경치에 정신이 팔려 묵향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묵향이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그녀는 암암리에 공력을 끌어모아 묵향의 혈도를 가격했다. 그런데 펑하는 소리가 나고 비명을 지른 건 묵향이 아니라 한영영 쪽이었다.

“아악!”

묵향은 비명을 지르며 아픈 손을 주무르고 있는 그녀를 쓱 쳐다보더니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제법 손속이 악랄하군. 그냥 얌전히 있으면 나도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시작은 네가 먼저 했으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묵향은 비쾌하게 그녀와 시비의 혈도를 점하고 신경질을 냈다.

“남을 기습해 골탕을 먹이는 건 내 방법이야. 너 같은 계집애가 쓰는 게 아니라구. 자…, 이제 어떻게 한다?”

묵향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 경악한 한영영이 소리쳤다.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았냐? 날 풀어라.”

한영영이 악을 쓰든지 말든지 묵향은 잠시 생각하더니 과장되게 손뼉을 쳤다.

“꼭 해야 할 여행이면 편한 게 좋지. 네년들이 마차를 차지하고 있으니 이거 자리가 불편해서 안 되겠다. 이봐, 난! 마을은 멀었냐?”

“2각 후면 도착할 겁니다.”

“그럼 계집애 둘이 들어갈 만한 큰 상자 하나를 사 와라.”

“예.”

다음 마을에서 상자 하나를 구입한 묵향은 충분히 숨을 쉴 수 있게 구멍을 여기저기 숭숭 뚫어 놓고는 고래고래 악을 쓰는 한영영과 시비를 그 속에 집어넣었다. 아혈까지 봉해 버려 조용하게 만들어서 상자를 마차 뒤에 묶어 버렸다. 그리고 다음 목적지까지 콧노래를 부르며 편안하게 갔다.

저녁때가 되어 마을에 도착한 묵향은 상자에서 두 계집을 꺼냈다. 혈도를 풀어 주자 바로 한영영의 손바닥이 날아왔다. 한영영은 묵향의 뺨을 철썩 치면서 외쳤다.

“나쁜 자식!”

하지만 묵향의 뺨은 색깔 하나 안 변했고 오히려 깨질 듯이 아픈 건 한영영의 손바닥. 묵향은 싱긋 웃더니 바로 한영영의 뺨을 네 대나 때렸다. 짜자작 하는 비쾌한 타격음이 들리고 휘청거리는 한영영을 묵향은 모질게 잡아끌고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은 후 점소이를 불렀다.

“이봐, 만두 일곱 접시하고 고량주 네 병! 그리고 신선한 채소 있으면 가져다주게.”

“예.”

그러자 한영영이 씨근덕거리면서 외쳤다.

“만두라구? 난 그딴 것 안 먹어. 이봐, 여기 잘하는 음식이 뭐냐?”

묵향은 그녀의 혈도를 바로 짚어서 더 이상 떠들지 못하게 만든 후 점소이를 쳐다봤다.

“이 소저가 하는 말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음식이나 가져와.”

“예.”

묵향은 혈도를 짚여 꼼짝 못하고 앉아 있는 한영영을 그냥 놔둔 채 음식을 들었다. 옆에 앉았던 시비가 한영영의 혈도를 풀어 주려 하자 묵향이 눈을 부라리며 나직이 말했다.

“네년도 혈도가 짚이고 싶냐?”

묵향의 말에 그녀는 고양이 앞의 쥐 신세가 되어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묵향은 수하들과 기분 좋게 술과 음식을 먹은 후 한영영의 허리를 짐짝처럼 잡아들고 여관으로 갔다. 방 두 개를 잡아 한 방에는 한영영과 시비의 혈도를 짚어 침대에 던져 놓고 난에게 지키게 했고, 자신은 나머지 수하들과 다른 방에 들어가 쉬었다. 묵향은 거의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방을 잡는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묵향은 그 둘의 혈도를 풀어 줬다. 한영영은 묵향에게 으르렁거렸지만 말로 협박할 뿐 더 이상 어쩌지는 못했다. 한참 잔소리를 듣던 묵향이 더 이상 못 듣겠다는 듯이 짜증스런 표정을 짓자 그녀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다음 행동은 말을 안 해도 뻔했기 때문이다.

식당으로 내려간 묵향은 점소이를 불러 어제와 똑같은 주문을 했다. 이번에는 한영영도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제 점심과 저녁을 굶었기에 배가 몹시 고팠던 것이다. 출발할 때가 되자 묵향은 상자를 마차에서 내리게 한 후 한영영에게 말했다.

“나는 혼자서 조용히 여행하는 걸 좋아해. 내가 상자 속에 들어가기는 싫으니 너희들이 양보해 줘야겠어. 그냥 들어갈래, 아니면 혈도를 짚인 후 들어갈래?”

“그냥 들어가죠.”

묵향은 그녀들이 들어가자 또다시 상자를 마차 뒤에 묶고는 출발했다. 한참 마차가 달려가고 있을 때 한영영은 상자를 부수고는 탈출을 시도했다. 한영영은 마차에서 뛰어내려 시비와 함께 경공술을 전개하여 도망쳤다.

“본교에 돌아가서 두고 보자! 못된 자식!”

하지만 뒤돌아보며 욕을 하던 그녀가 앞을 보자 어느새 나타났는지 묵향이 거기 서 있었다. 그녀는 멈추려 했지만 앞으로 나가던 속도가 있어서 둘 다 묵향의 품속으로 뛰어든 꼴이 되었다. 묵향은 두 계집을 양손에 잡은 후 말했다.

“전에도 말 안 듣고 도망치는 계집이 있었는데…, 그때 어떻게 했더라? 맞아! 분근착골을 몇 번 해 주니까 조용해졌지.”

묵향의 말을 들은 두 여자는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묵향은 곧바로 두 여자의 혈도를 쳤다. 두 여자는 얼굴빛이 더욱 창백해져 몸을 뒤틀었고, 온몸에서는 뚜둑거리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묵향은 그녀들의 비명을 들으면서 반 각의 시간을 기다렸다가 둘의 고문을 풀어 주고는 싱글거렸다.

“어때? 즐거우셨나? 이번은 처음이니까 반 각이지만 다음에는 1각, 그다음에는 2각이지. 즐거운 비명 소리를 나도 다시 듣고 싶으니 또 도망쳐 보시도록.”

한영영은 이빨을 갈았지만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묵향에게 끌려갔다. 묵향은 다음 마을에서 식사를 한 후 다시 상자를 하나 구입했고 환기 구멍을 여러 개 뚫으면서 말했다.

“어때? 내 취향은 알고 있겠지. 그냥 들어갈래? 아니면 묶여…….”

묵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여자는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다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감히 도망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저녁때가 되어 마을에 도착하자 죽은 곧 상자를 꺼내어 열어 줬다. 한영영은 상자 안에서 나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가을의 시원한 공기를 즐겼다. 아무리 가을이라도 상자 안에 두 명의 여자가 들어 있으니 엄청나게 더운 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주루에서 또다시 묵향이 만두와 고량주를 시키자 한영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매일 만두만 먹으면 질리지 않아요? 우리 다른 것도 좀 먹자구요.”

“흐음, 그래도 만두가 맛있는데?”

“만두 말고도 맛있는 게 많다구요. 사군자한테 물어보시면 알 거예요.”

묵향이 인상을 잔뜩 쓰고 노려보며 사군자에게 으르렁거렸다.

“만두 말고도 맛있는 게 있다니 정말이야?”

법은 멀고 눈앞의 주먹은 살벌하기 그지없으니 사군자는 할 수 없이 말했다. 그들도 매일 만두만 먹기에 질렸지만 할 수 없었다.

“아니오. 헤헤…, 만두가 제일 낫죠.”

묵향은 거보라는 듯이 으스대며 점소이에게 말했다.

“빨리 가져와.”

식사 후 웬일인지 한영영이 조용했기에 묵향은 그녀의 혈도를 짚지 않고 잠자게 해 줬다. 삼경이 되어 묵향은 왼쪽 방에서 기(氣)가 움직이는 걸 알아챘다. 슬쩍 따라가 보니 한영영이 시비를 데리고 살며시 눈치를 보며 도망쳐 나와 마구간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구간으로 들어가기 직전 온몸이 마비되며 쓰러졌다. 곧이어 지독한 통증이 온몸을 타고 흘렀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몸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 들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때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화장실에라도 가나 해서 놔뒀더니 겁도 없이 도망가려고 하는군. 말했지, 이번에는 1각이라고…….”

1각 후 묵향은 거의 탈진한 두 여자의 혈도를 봉해 버리고 한 팔에 한 명씩 들고 가서는 방에 던져 넣었다. 그들을 지키던 난은 혈도가 짚인 채 뻗어 있었다. 묵향은 빙긋이 웃으며 난의 혈도를 풀어 줬다. 난은 얼굴을 붉히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괜찮아. 내가 너를 이 안에 놔 둔 건 저 여자들을 감시하라는 게 아니라 외부의 침입을 방지하는 데 있으니까.”

묵향은 다시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명상에 잠겼다.

다음 날 아침 두 여자의 혈도를 풀어 주고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두 여자는 어제저녁 엄청난 고생을 해서 그런지 만두를 꾸역꾸역 입속에 넣었다. 아무리 만두가 질렸어도 체력이 떨어지면 도망도 못 치기 때문이다. 한영영은 만두를 억지로 씹어서 삼키며 말했다.

“당신은 잠도 안 자요?”

“사군자한테 물어보면 알겠지만 나는 밖에 나오면 잠을 안 자. 교내에 있을 때도 거의 하루에 한 시진 정도밖에 자지 않지.”

“그럼 잠을 안 자고 뭐 하는 거예요?”

“운기조식도 하고 명상도 하고……. 뭐 그런 거지.”

그러자 한영영은 도망치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데 당신 이런 식으로 나를 대접하면 나중에 본교에 돌아가서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봤어요?”

“어떻게 되는데?”

“아빠한테 말해서 당신을 혼내 줄 거예요.”

“네 아빠면 한영성(韓永省) 소교주를 말하는 거냐?”

“예.”

“혼내 준다면, 네 아빠가 나를 몇 초 만에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당신은 아빠한테 이십초지적(二十招之敵)도 안 돼요.”

그러자 묵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천진난만한 아가씨야, 사실은 그 반대지. 네 할애비조차 나한테 이십초지적이 될까 말까 한데, 그따위 소릴 하다니…….”

그러자 한영영이 경악해서 말까지 더듬거리며 위협조로 말했다.

“교주님을 보고 할애비라니 당신, 당신…, 그러다가 제 명에 못 죽을 거예요.”

“상관없어. 할애비보고 할애비라고 부르는 거지. 그리고 그 할애비는 본좌를 절대적으로 신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인데, 나를 어떤 방식으로 혼내 주겠다는 건지 물어보고 싶군.”

“할아버지가 왜 당신 같은 망나니를 신임한다는 거죠?”

“그건 간단히 설명해 줄 수 있지. 교주 옆에 2장 안으로 검을 차고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이건 아주 절대적인 신뢰의 표시가 아니겠어?”

잠시 생각하더니 한영영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당신이 그 부교주군요. 할아버지가 교주 자리를 권했는데도 차 버렸다는…….”

“어쭈? 제법 소식이 빠르군. 그분이 바로 이분이시지. 그리고 네가 알아 둬야 할 사항은 내가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태상교주도 아니고 소교주도 아닌 바로 교주야. 그렇기에 나한테 명령을, 아니지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도 교주밖에 없다구. 교주는 나한테 너를 무림맹까지 데려다 주라고 부탁했고, 그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았어. 너를 꽁꽁 묶어서 상자 속에 넣어 가건 마차에 매달고 끌고 가건 그건 내 마음이란 말이야. 생각 같아서는 마차에 묶어서 끌고 가고 싶지만 예쁜 얼굴에 상처가 나면 나도 곤란하단 말씀이지. 하지만 교주는 나한테 절대 상처를 내지 말라는 지시도 안 했으니 나중에는 그 방법도 한번 써 볼까 하고 생각 중이야.”

한영영은 묵향의 말을 듣고는 기도 안 찬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구석에 앉아 있던 죽이 묵향 모르게 어기전성을 보내왔다.

《부교주가 하시는 말은 거의 대부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음먹으면 꼭 하고야 마는 성격이죠. 그러니 더 이상 자극하시면 곤란합니다. 진짜 매달고 갈지 몰라요.》

한마디 쏘아 주려고 했지만 죽의 말을 듣고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가 버렸다. 교활한 한영영 소저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더 이상 상자 속에 들어가기는 싫었던 것이다.

“저…, 마차를 타고 가면 안 될까요? 떠들지 않고 조용히 조용히 있을게요, 예?”

잠시 생각하던 묵향이 무자비하게 말했다.

“안 돼. 나는 조용히 혼자 가는 게 더 좋다고 했잖아. 밥도 먹었으니 출발하자.”

묵향이 뭐라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시비와 한영영은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들도 여러 번 겪다 보니 출발의 순서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죽은 그 상자를 마차에 묶고 출발했다. 한영영은 점심때도 만두를 먹으면서 묵향에게 계속 부드럽게 부탁했다.

“상자 속은 덥다구요. 조용히 있을 테니 좀 태워 줘요. 구석에 쥐죽은 듯 앉아 있겠다니까요.”

계속 부탁하자 묵향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는 움찔했지만 의외로 묵향에게서 나온 말은 부드러웠다.

“좋아.”

묵향은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었고 그 앞에 앉은 두 여자는 감히 숨소리도 크게 못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반 시진 정도 흐르자 점점 간이 커지기 시작한 한영영은 주변 경치를 바라보며 옆의 시비와 쏙닥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묵향이 가만히 있자 점점 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더니 저녁때가 되어 마을에 도착할 때쯤에는 마음 푹 놓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한영영은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자 이번에는 음식을 바꾸려고 들었다. 마을에 도착하기 전부터 제발 만두는 그만 먹자는 말로 시작해서 식탁에 앉을 때까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묵향을 설득했고, 시비까지 그 옆에서 거들었다. 사람이 똑같은 소리를 듣는 데도 한도가 있다. 그걸 한영영도 알기에 묵향이 인상을 쓰면 딴 소리를 하다가도 조금만 지나면 다시 화제를 만두로 돌렸다.

식당 안으로 들어올 때쯤에는 묵향도 지쳐 될 대로 되라는 상태까지 와 있었다. 발광을 한다면 혈도를 제압해서 처박아 두면 되는데, 그게 아니었기에 묵향으로서는 그 말을 그냥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또 이 버릇없는 말괄량이를 길들인다고 계속 만두를 먹고 있지만, 자신도 만두에 질려 입에서 밀가루 냄새가 날 정도였던 것이다. 두 여자가 입이 아프게 묵향을 향해 설득 작전을 벌인 효과는 식당에 들어가서 나타났다. 묵향은 난을 보고 말했다.

“네가 음식을 시켜라.”

이 후로는 제법 그럴듯한 여행이 되어갔다. 한영영이 묵향의 성질을 적당히 파악한 후엔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았고 비교적 조용하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며칠이 더 지나자 그녀는 묵향이 잔소리를 심하게 해도 웬만큼은 듣고 있을 수 있을 만큼 신경이 굵다는 것과 못 먹는 게 없을 정도로 잡식성이라는 점, 거기에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좋아하지만 슬슬 꼬드기면 말도 곧잘 하고 농담도 잘 한다는 점을 알아냈다. 그리고 칭찬까지 곁들여서 약간 아부를 하면 금도 들려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묵향의 금을 타는 실력은 근래에 들어 눈부신 발전을 이뤄, 그에게 금을 가르친 사부라고 할 수 있는 음희 설약벽을 탄복하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죽이 어기전성으로 슬며시 묵향이 금을 잘 타니 졸라 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다. 밑져 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살며시 구슬려 봤더니 묵향은 마지못해 금을 타 줬다. 묵향의 실력은 한영영을 놀라게 했고 그다음부터는 줄곧 금을 타 달라고 졸라댈 정도였다.

묵향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냥 졸듯이 가만히 눈 감고 앉아 명상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말괄량이가 동석하게 된 다음부터 그는 그런 편안한 시간을 즐길 틈이 거의 없었다.

무림맹에 도착한 묵향 일행은 무림맹의 규모가 생각보다 작다는 것을 알았다. 마교의 총타가 거의 1만 명에 가까운 인구 밀집 지대라고 한다면 이곳은 5천여 명이 모여 사는 시골 정도라고 보아야 했다. 이렇게 정파의 기둥이라 불리는 무림맹의 규모가 작은 이유는 마교와는 달리 맹주에게 집중된 힘이 적었기 때문이다.

보통 5대세가나 9파1방 등 거대 명문 중에서 맹주가 나왔는데, 한 번 맹주가 되면 죽을 때까지 그가 맹주지만 그 직위는 대물림되지 않고 무림대회를 펼쳐 새로운 맹주가 선임되었다. 거기에 그의 호위 무사는 각 문파들에서 일부 고수들을 파견하는 식으로 보내 주기에 그 질(質)에서 떨어졌다. 무림맹주란 일종의 명예직으로, 각 문파에서는 맹주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수많은 방법으로 막고 있었으므로 자연 마교에 비해 그 위세가 떨어졌다. 하지만 맹주의 지시로 움직이는 고수의 수는 마교보다 몇 배나 많았으니 그 이유는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사파보다는 정파 계열이었기 때문이다.

매(梅)가 달려가 수문 무사에게 마교에서 인사차 사람이 왔다는 걸 알려 주자 그중 두 명이 나와 숙소로 안내해 주었다. 묵향은 방을 배정해 주고는 한영영에게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여기서 어떤 말썽이라도 부린다면 돌아갈 때 꽁꽁 묶어서 마차에 매달고 갈 거야. 인사는 끝난 다음일 테니 상처가 좀 생겨도 교주가 아무 말 못 할걸.”

묵향의 협박에 한영영은 혀를 쑥 내밀며 응수하고는 시비와 함께 무림맹을 구경하기 위해 나갔다. 죽과 국이 멀찍이서 그녀를 뒤따르며 호위했다.

이번 맹주의 생일잔치는 3일간 거행되었는데 그 안에는 무예대결까지 포함되어 생일잔치가 아니라 거의 축제 같은 분위기까지 풍겼다. 낮에는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행사에 참석한 후 저녁 식사 때가 되면 모두 모여 만찬을 즐겼다. 이때 각 파의 장문인급들은 큰 건물에 모여 맹주와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 전에 당일 도착한 각 문파의 축하객들이 선물을 바친 후 곧바로 약간의 볼거리가 제공되며 만찬이 시작된다.

「滿博殿(만박전)」이라는 현판이 붙은, 만찬이 시작되는 이 커다란 건물에 묵향 일행이 다가가자 주위를 지키던 호위 무사들이 다가왔다. 그중에서 검은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무사가 한영영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무장을 하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검을 저희들에게 맡기시지요.”

한영영이 손잡이와 검집에 보석이 박힌 호화로운 보검을 풀자 묵향은 그것을 받아 죽에게 건네줬다. 그리고 자신도 묵혼검과 비수를 그에게 주며 말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묵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영영을 따라 들어가자 짐꾼 네 명이 마교에서 준비한 예물을 가지고 그들을 뒤따랐다. 그들이 만박전에 들어서자 정문에서부터 큰 탁자까지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그 탁자 주위에는 여러 가지 선물이 쌓여 있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한 무사가 종이에 적힌 것을 보고 소리쳤다.

“천마신교에서 맹주님의 생신을 축하드리기 위해 축하객을 보냈습니다.”

천마신교라는 말이 나오자 중인들이 술렁거리며 한영영 일행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한영영은 큰 탁자에 앉아 있는 20대 후반의 부드러운 눈빛을 가지고 있는 사내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시옵니까? 소녀(小女)는 한영영이라 하옵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먼 길을 오느라고 수고하셨소. 그래 교주께서는 안녕하시오?”

“예, 덕분에 평안하십니다.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이것은 저의 할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맹주는 그녀를 환대했다.

“이리 와서 앉으시오. 현재 무림 최대의 방파인 천마신교의 교주를 대신하는 신분을 가지신 분이니 본좌의 옆에 앉아도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할 거외다.”

무림맹주가 한영영을 따뜻하게 맞이해 자신의 옆 자리에 앉게 하고는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 주며 말을 건네자 한영영은 더욱 간덩이가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영영을 맹주 옆에 앉게 하고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묵향의 싸늘한 눈초리와 마주치자 커지던 간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도저히 저자와는 어떻게 할 수가 없군…….’

‘후’하고 한숨을 쉬고는 한영영은 맹주와 다소곳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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