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930)

북명신공의 위력

묵향이 술을 한잔하고 있는데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당신은 이곳에 오고도 나를 찾아보지 않는군요.”

묵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의 빈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시오.”

여인이 자신의 옆 자리에 앉자 묵향은 그제서야 그녀를 쳐다보고 옥령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하! 누군가 했더니……. 내가 멍청했군.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어.”

“일부러 할아버지한테 부탁해서 당신을 불렀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예요?”

“일부러라니?”

옥령인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며 말했다.

“할아버지 생신에 묵향 부교주를 초대한다고 정중하게 써 보냈단 말이에요.”

그제서야 묵향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 수 있었다. 교주는 묵향이 가지 않을 것을 뻔히 알고 자신의 말썽꾸러기 손녀를 미끼로 묵향을 보낸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묵향의 욕을 듣고 옥령인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지자 묵향은 곧바로 사과했다.

“아…, 그게 아니고 지금 엄청난 혹을 달고 와서 그렇소. 교주는 내가 당신처럼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망나니 손녀를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나를 붙였지. 저 말썽꾸러기는 장 부교주나 내가 아니면 감당할 수가 없다나? 실지 수석장로의 수염을 불사른 악녀니까 누구도 어찌할 수 없지.”

“미안해요, 괜한 부탁을 해서…….”

“그래, 무공은 정진이 있었나?”

묵향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묻자 옥령인은 얼굴이 뻘개지며 항의했다.

“당신 때문에 망신당한 걸 생각하면…….”

“왜?”

“당신이 했던 얘기를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렸더니 할아버지가 빙긋이 웃으시며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뭐라고 했는데?”

“나보고 순진하게도 완전히 속았다고 그러시더군요.”

“정말이야?”

“예.”

“이상하군.”

“뭐가 이상하다는 거예요?”

“내 딴에는 꽤 잘 만든 무공인데……. 실지 구결을 들려줬다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할 텐데, 네가 어떻게 시범을 보였는데 그런 거야?”

그녀가 침중한 안색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 할아버지 말씀이 맞군요. 할아버지는 제가 사형과 비무하면서 적하마령검법을 사용하는 걸 보시고 진전이 대단히 빠르다고 칭찬해 주셨죠. 제 다섯째 사형은 저보다 실력이 좋았었는데 요즘은 제가 그 사형보다 조금 더 낫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사연을 얘기했어요. 당신이 할아버지를 욕하며 사문의 무공을 훔쳤다고 욕하더라고 했죠.”

묵향은 속이 찜찜해짐을 느끼며 물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당신이 가르쳐 준 초식을 펼쳐 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그대로 했죠. 그러자 할아버지는 확실히 적하마령검법이 적하무류검법보다 더욱 뛰어나며 무서운 검법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저에게 구결을 알려 달라고 하셨죠. 제가 그건 안 된다고 하니까 다시 한 번 힘껏 초식을 펼쳐 보라고 한 다음 그 둘의 차이를 꼼꼼히 비교해 보시더니 그러셨죠. 적하무류검법은 상승검법인 백류매화검법(白流梅花劍法)을 익히는 중간 단계에나 어울리는 검법이지만, 이 적하마령검법은 진기의 소통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사용자의 힘을 있는 대로 끌어내니 극성까지 익히면 오히려 백류매화검법보다 무서운 검법이라고요.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적하무류검법은 분명히 직접 만드신 거니 이 둘이 비슷한 것은 우연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당신이 내 무공을 보고 순간적으로 만들어 낸 거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나중에 넌지시 돌려서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 하셨죠.”

묵향은 무안해서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찔리는 게 있으니까 제풀에 불고 말았군. 끝까지 우기는 건데……. 그래 할아범이 그렇게 칭찬한 나의 독문무공은 좀 진척이 있나?”

“그런데 그게 잘 안 돼요. 세 번째 초식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는 몰라. 초식을 직접 보여 줘야지. 적하마령검법 따위 몽땅 잊어버린 지 오래라구.”

묵향의 말에 옥령인은 경악했다.

“그때 당신은 극성으로 그 검법을 펼쳤다구요. 그리고 할아버지도 그렇게 높게 평가했던 검법인데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지요?”

“나는 원래 잘 잊어버려. 본교의 마공도 거의 대부분 다 잊어먹은 지 오래라구. 그따위 거 기억해서 어디다 써? 말로는 잘 안 되니까 나중에 비무하면서 가르쳐 주지. 자, 너도 한잔하라구.”

묵향이 따라 주자 옥령인은 미소 지으며 술을 약간 마시다가 다급히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언니가 와요. 어서 피해요. 당신을 보면 찢어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단 말이에요.”

하지만 정작 묵향은 태연했다.

“그 실력으로 찢어 죽여? 내가 그렇게 상대한테 당했으면 슬슬 피해 가겠다.”

이죽거리며 묵향이 술을 마시는데, 챙 하는 경쾌한 소리가 들리고 순간 묵향의 목에 칼이 닿아 있었다. 그리고 분노를 억누른 나지막한 소리.

“너, 잘아알 만났다…….”

하지만 그녀의 복수극은 벌어지지도 못하고 끝나야 했으니, 그녀가 칼을 뽑자 놀란 근처의 사람들이 벌 떼 같이 웅성거렸고 그걸 눈치 챈 맹주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맹주도 대강의 사정을 옥매화에게서 들었지만 놀린 것뿐이지 어떤 해악을 가한 것도 아니었기에 묵향에게 따질 필요를 못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묵향이 옥령인에게 대단히 잘 대해 주며 매우 강력한 검법까지 가르쳐 줬으니 묵향이 처음부터 악의로 그녀에게 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옥매화는 신경질적으로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는 씨근대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묵향이 싱글거렸다.

“아직 혼이 덜 난 모양이군.”

그런 그를 보고 옥령인이 난처한 듯 말했다.

“저한테는 그렇게 잘해 주시면서 왜 언니는 그렇게 못살게 굴죠? 좀 잘해 주실 수 없어요?”

“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상대하는 사람이야. 상대가 잘해 주면 나도 잘해 주지만 상대가 나를 못살게 굴면 나는 그보다 더 상대를 못살게 굴지. 이건 천성이니까 네가 옆에서 이러쿵저러쿵할 거 없어.”

묵향은 술을 쭉 들이켰다.

“이제 그만 일어서야겠군.”

그와 동시에 밖에서 매와 국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저 말괄량이 감시 잘해. 잘못해서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이만 가 보겠다.”

묵향이 밖으로 나가자 옥령인이 따라 나왔다.

“언제 돌아가실 거예요?”

“잔치가 끝나는 대로 곧.”

“이번에 검술제가 있는데, 참석해 보지 않으시겠어요? 푸짐한 상품도 주는데…….”

“그따위 대결 시시해. 죽! 검을 다오.”

묵향은 묵혼검을 차면서 말했다.

“맹주 정도 나온다면 몰라도 내가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일초지적(一招之敵)도 안 되는 애송이들을 잡고 놀겠어?”

“사흘 만에 가신다면 저하고 같이 술 마시면서 얘기라도 해요. 저쪽에 작은 정자가 있는데 그리로 안주하고 술을 가져오게 할게요.”

“그렇다면 좋지. 자네들도 같이 가세.”

옥령인은 주위의 시녀에게 뭐라고 지시하고는 그들을 만박전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정자로 안내했다. 그들이 정자에 자리 잡자 곧 시녀들이 간단한 안주와 술을 가져왔다. 시녀들이 물러가고 나서 옥령인은 묵향이 무의식적으로 묵혼검을 만지고 있는 걸 보고 말했다.

“당신은 무예가 그토록 강한데 왜 언제나 검을 가지고 있죠? 그때도 심검을 쓰는 걸 보고 모두 경악했잖아요.”

“심검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아. 심검은 엄청나게 내력을 소모시킨다구. 그 위력은 겨우 어검술 정도밖에 안 되는데 말이야. 그래서 나는 언제나 이걸 가지고 있지. 나는 마음만 먹으면 상대의 검을 빼앗아 사용할 수 있어. 하지만 이 녀석은 내가 직접 주문해서 만든 거고 또 손에 익어서 다른 걸 만지고 싶지 않아.”

“좀 보여 주세요. 당신 검은 한 번도 자세히 본 적이 없잖아요. 겉은 수수하게 생겼는데…….”

묵향이 검집 채로 넘겨주자 옥령인은 그걸 받으면서 말했다.

“길이는 짧은데도 굉장히 무겁군요.”

검을 반쯤 뽑아 바라보면서 탄성을 질렀다.

“그때 기억이 맞군요. 검은색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건 현철(玄鐵)로 만든 건가요?”

“응.”

“그래서 무겁군요. 겉은 수수하면서 속은 이렇게 호화롭다니…….”

옥령인의 입에서는 하마터면 ‘당신과 같이…’라는 말이 나올 뻔 했다. 하지만 그 말을 씹어 삼키고 말을 이었다.

“이렇게 좋은 보검을 이런 검집에 넣어서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여기에 글자가 쓰여 있네……. 「墨魂(묵혼)」, 이게 이 검 이름인가요?”

“응.”

“아주 좋은 이름이군요. 생긴 것과 딱 맞는 것 같아요. 잘 봤어요.”

묵향은 검을 다시 허리에 차고 수하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대화는 거의가 옥령인과 묵향이 했고 수하들은 그들의 대화에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옥령인은 검법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질문을 하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이번 생일에 좋은 금(琴)을 선물 받았거든요.”

그러면서 시비를 불러 자신의 방에서 금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묵향에게 말했다.

“아주 좋은 건데 한번 타 주세요, 예?”

옥령인이 계속 사정하자 묵향은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네가 먼저 하면 나도 하지.”

시녀가 금을 가져오자 옥령인은 금줄을 몇 번 튕겨 보더니 이윽고 금을 타기 시작했다. 금 소리가 아련히 울려 퍼지자 주변에 있던 호위 무사들이 정자 쪽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고, 주변에서 술을 마시던 취객들도 정자 쪽을 바라봤다. 작은 정자였고 그 안에 네 명이 들어가서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흥취를 방해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마교의 인물들인 것을 알기에 그런 것인지, 아무도 근접하지는 않았다. 옥령인은 금을 타면서 흥취가 동했는지 노래까지 부르더니 나중에 금을 내려놓으면서 얼굴이 빨개져서 사과했다.

“미숙한 실력에…….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묵향과 그 수하들은 박수를 치며 치하했다.

“아주 잘 탔어. 전번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묵향의 칭찬을 받자 옥령인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연습을 많이 했죠. 이제는 당신도 타 보세요.”

묵향은 금을 무릎 위에 올리고 금줄을 몇 번 튕기며 조율을 한 후 금을 뜯기 시작했다. 과거부터 절묘한 내공의 조화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는데 거기에 음희의 지도까지 받아 본교에서 금을 잘 탄다는 말까지 들은 그였기에, 묵향이 금을 타자 삽시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밤하늘을 타고 금음이 멀리 퍼져 나가자 만박전에서 떠들어 대던 소리까지 조용해졌다. 묵향의 금음에 보태어 옥령인이 시를 읊으며 더욱 흥취를 돋우었다.

청산은은수초초(靑山隱隱水怊怊)

추진강남초목조(秋盡江南草木凋)

이십사교명월야(二十四橋明月夜)

옥인하처교취소(玉人何處敎吹蕭)

청산은 아득하며 물길은 머나멀고,

강남 늦가을 초목은 조락(凋落)했는데.

이십사 교(橋) 회영청 달 밝은 밤,

님은 어디서 쉬며 피리를 불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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