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간의 비무
맹주는 묵향을 본채의 널찍한 거실로 안내했다. 묵향은 사군자와 한영영을 데리고 맹주를 따라갔다. 한영영도 묵향이 귀한 후아주 맛을 보게 해 준다고 꼬드겼으므로 과연 그 맛이 어떤지 보기 위해 두말 않고 따라나섰다. 묵향 일행이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맹주는 다섯 명을 함께 데리고 왔다. 그의 아들, 손자, 손녀 등 일가족들이었는데, 그중 옥매화는 묵향이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 눈에 쌍심지를 돋웠지만 지엄한 할아버지 앞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맹주는 각자의 자리를 정해 주고 말했다.
“오랜만에 지기(知己)를 만났으니 오늘 노부가 한턱내겠다. 너희들도 사양 말고 많이 들거라.”
그러면서도 주위에 있는 그의 혈육들에게 어기전성으로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대화를 새겨듣거라. 주옥(珠玉)과도 같은 논검이 될 테니까…….》
묵향의 앞에 자리를 잡은 맹주는 후아주를 한잔 가득히 부어 주고 자신의 잔에도 부으면서 말했다.
“뇌전 영감과는 어떤 대화를 나눴나? 듣자하니 밤새도록 얘기를 나눴다고 그러던데…….”
“그건 제령문의 제자들에게 물어보시죠. 꽤 재미있는 대화였습니다.”
“뇌전 영감도 나와 비슷한 경지던가?”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직접 겨뤄 봐야 완전히 알 수 있죠. 두 분 다 정파의 최고로 꼽히는 분들이 아닙니까?”
“자네는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나?”
“여러 사부들에게 배웠죠. 그중에서 유백 사부에게서 가장 많은 걸 배웠습니다.”
“유백? 들어 본 적이 없군. 그의 검술이 그렇게 대단한가?”
“아뇨, 대단하지는 못하죠. 하지만 제자들을 참 잘 가르치시더군요.”
“제령문에서 듣고도 설마 했는데, 아까 령인이와 비무를 할 때 보니 그대는 특히 근접전에 강하더군. 노부도 근접전을 벌인다면 적수가 되기 힘들 거야. 어쩌면 떨어진 거리에서는 좀 오래 버틸지도 모르지만 근접전에서는 10초도 넘기기 어렵겠더군.”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냐. 자네는 초식을 초월했더군. 그 정도 경지에 오르기는 참으로 힘들지. 노부도 오랜 수련을 해 왔지만 그 정도까지 부드럽게 넘기기는 힘들어. 자네는 어떤 검법을 익혔나?”
“여러 가지죠. 본교의 검법, 불문의 검법, 도가의 검법 등 본교에 보관 중인 건 거의 다 봤죠. 하지만 그게 다 그거더군요. 요즘 들어서는 이게 그건지 저건지 헷갈려서 아예 상대가 쓰는 검법이 뭔지 잘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무초식의 검법을 구사한다 하더라도 하나의 큰 규칙성은 있게 마련이지. 그 검법의 이름은 뭔가?”
“오래전에 제가 한 가지 검법을 만들었는데, 그건 무상검법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검법이라고 부르기는 그렇고, 그냥 그저 그런 무공입니다. 예전에는 무공을 사용하면서 무상검법의 형식을 따르려고 노력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것도 귀찮아져서 되는대로 펼치고 있죠.”
“그 검법의 비급은 만들었나?”
“아뇨. 처음에는 만들려고도 했지만 여러 가지로 생각하다가 그 양이 너무 많아 끝이 없을 거 같아 아예 포기했습니다.”
“자네는 노부가 마지막 벽을 못 뚫어서 아직 현경에 못 올라갔다고 했는데 그 벽이 뭔가? 알려 줄 수 있나?”
“못 알려 드릴 것 없죠. 너무 생각이 많아서 그러시는 거죠.”
“생각이 많다니?”
“저자를 어떻게 죽이면 되지? 다음 검초는 뭘 쓸까? 저자가 쓰는 검법은 뭔데 그중에서 어떤 초식을 쓰면 요런 초식으로 맞받아쳐야지……. 상대는 강한 것 같은데 어떻게 피하는 게 좋을까, 상대는 수가 많으니 한 명씩 꾀어내서 하나씩 죽이는 게 좋을 거야. 상대는 수가 많으니 이쯤에서 도망가는 게 좋겠지……. 뭐, 이런 것이죠.”
“자네 말이 틀렸네. 노부는 적과 싸울 때 무아의 경지에서 자신을 잊고 대결을 하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
“하지만 그걸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입장일걸요? 내 수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만 너무 들어가는 게 아닌가? 수하들을 후퇴시키고 나 혼자서 저들을 절단내 버리는 게 피해가 적겠지……. 안 그래요?”
“하지만 그건 수하들을 거느리는 자로서 당연한 거 아닌가?”
“아니죠. 정말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완전히 모든 걸 잊고 무아의 상태에서 오직 베고 베고 또 베고 피를 덮어써야 하는 거죠. 내가 지금 적을 만나 어떤 초식을 사용할 것인지조차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순간 순간을 나의 의지가 아닌 검이 원하는 지점을 따라가며 검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신검합일(身劍合一)의 상태를 만들어야 합니다. 검의 의지가 나의 의지이고 나의 의지가 검의 의지! 이것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좋은 검법을 만들지 못하죠.”
“신검합일이라. 노부는 이미 그 경지를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겠죠. 그건 검을 맹주님의 의지에 완전히 일치시켰을 뿐, 검의 의지는 하나도 살아나지 않았죠. 그걸 이룩하면 바로 어검의 경지가 눈앞에 펼쳐질 겁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옥매화가 냉소를 흘리며 비웃었다.
“흥! 말은 잘하는군.”
묵향은 싸늘하게 옥매화를 쏘아보았다.
“모르면 옆에서 닥치고 있어. 이 어르신이 말씀하는데, 젖비린내 나는 것이 까불기는…….”
그러자 옥매화가 대로(大怒)해서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네 녀석이 남자라면 비무를 해 보자. 너 같은 쓰레기가 그렇게 고수라는 걸 본녀는 믿지 못하겠다.”
“너 같은 것 하고 겨뤄 봐야 이 어르신의 품위만 손상될 뿐이야.”
“미친 녀석! 겁먹은 주제에 둘러대기는…….”
“정 그렇다면 상대해 주지. 나와라.”
옥매화는 검을 검집에 넣고는 앞장서서 나가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못 나갈 줄 알고? 빨리 따라와!”
널찍한 공터로 나온 옥매화는 씨근거리며 검을 뽑았다.
“검을 뽑아라. 네 녀석에게 본맹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 주지.”
“흥! 네년이 상대할 사람은 본어르신이 아니라 옥령인이지. 이봐! 네가 비무를 해 봐.”
“저, 저는…, 언니는 저보다 훨씬 더 강해요.”
“괜찮아. 이제부터 내가 네게 전음으로 지시를 할 테니 그대로 해라. 이 비무를 잘 기억한다면 대단히 높은 성취를 얻을 수 있을 거야. 내가 말하는 대로 재빨리 펼쳐야 한다. 준비되었느냐?”
“예.”
“본인은 옥령인 소저의 몸을 빌려 무공을 사용하려 하오. 물론 차력대나인수법(借力大拿引手法)을 사용하는 건 아니고, 그냥 전음으로 지시만 할 거외다. 여기서 옥령인 소저가 진다면 그건 본좌가 진 것으로 생각해도 무관하오. 그럼, 시작해 보기로 하지.”
차력대나인수법은 자신의 공력을 남에게 빌려 주어〔借力〕 그의 몸을 완전히 사로잡아〔大拿〕 원하는 대로 이끄는〔引〕 수법이다. 허공을 격하여 공력을 전해 상대를 움직이므로 시술자의 공력이 대단히 많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움직임을 펼쳐 나갈 수 있다. 그렇지만 묵향은 전음으로 지시만을 하겠다고 했으므로 당연히 약간의 시간차이가 생기게 되고, 또한 사용할 수 있는 무공도 옥령인이 알고 있는 것으로 한정되므로, 옥매화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좋은 조건이었다.
옥매화는 그래도 옥령인이 묵향의 지시로 움직인다는 생각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내력을 끌어올려 상대가 검을 뽑기를 기다렸다. 옥령인은 천천히 검을 뽑은 후 옥매화에게 포권했다.
“언니, 그럼 이제 시작하기로 해요.”
옥매화가 옥령인의 예에 답하는 걸 보고 묵향이 말했다.
“예법은 생략하고 곧바로 시작합시다.”
묵향의 말은 예의상 허초를 교환하기 번거로우니 바로 실초를 사용하자는 말이다.
<곧바로 달려 나가면서 6초, 피하면 그 방향으로 따라 붙으며 12초.>
옥령인의 몸이 앞으로 쏘아 나갔다. 옥령인은 옥매화에게 뛰어나가면서 초식을 펼쳤다.
“적하비룡(赤霞飛龍)!”
“흥! 겨우 적하무류검법 따위로…, 악!”
옥매화는 처음에 공격해 들어오는 초식을 보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적하무류검법인 줄 알았지만, 순간적으로 그것이 검무가 아닌 패도적인 검초로 핏빛 노을과 함께 몇 줄기의 강인한 검기가 쏘아 오는 걸 보고 경악성을 지르며 피했다. 그와 동시에 검초를 펼치려 했지만 한 번 잃은 선기를 잡을 수는 없었다. 옥매화가 옆으로 피함과 동시에 더욱 가까이 따라붙은 옥령인은 두 번째 초식을 펼쳤다.
“적하매개(赤霞梅開)!”
그와 동시에 여섯 번의 찌르기. 공력이 충만히 실려 검에서는 약간 푸른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옥매화가 이 기습적인 공세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이 적하무류검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래 적하무류검법에서는 실초와 허초를 포함해 스물네 번의 찌르기가 들어가지만 그걸 여섯 번으로 줄인 만큼 모두가 실초였으며 더욱 깊이 찔러 들어왔다. 그녀가 가까스로 오른쪽으로 피하자 묵향은 옥령인에게 말했다.
<선 채로 22초.>
옥령인은 옥매화가 가까스로 피해 나가자 묵향의 지시대로 제3초를 날렸다.
“적하낙일(赤霞落日)!”
동시에 옥령인의 검에서 하나의 붉고 큰 검기 덩어리가 붉은 노을 사이를 빠져나와 엄청난 속도로 옥매화를 덮쳤다. 옥매화는 더 이상 수세에 몰리면 재미없겠다는 걸 느끼고 맞받아치기로 작정했다.
“백매낙월(白梅落月)!”
그녀의 자세는 불안했지만 그런대로 훌륭히 검초를 펼쳤고 검기의 덩어리와 그녀의 검초에서 뿜어낸 검기가 충돌해 폭발성을 울렸다. 서로가 그 충격에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옥매화는 뒤로 물러서서 외쳤다.
“이건 엉터리예요. 저자는 분명히 자신의 공력을 전해 주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번 초식으로 저 파렴치한 인간이 차력대나인수법을 사용해 공력을 보냈다는 게 확실해졌어요.”
그러자 묵향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라. 그건 분명히 옥령인의 공력이야. 안 그렇습니까, 맹주?”
맹주는 약간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이 맞다. 옥령인은 오늘 부교주의 도움으로 엄청난 내력의 증가를 거뒀지. 대신 부교주가 지금까지 적하무류검법에서 발전시킨 적하마령검법만 쓰고 있으니 잘해 보도록 해라.”
두 자매의 공방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옥령인이 묵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지만 언제나 약간의 시간차가 있었기에 옥매화가 그렇게 밀리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50여 초식이 교환되었고, 묵향이 조합해 나가는 초식을 보면서 맹주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탄성을 지르기도 하면서 그 초식의 운용에 감탄했다.
아마 직접 묵향이 옥령인과 같은 공력으로 적하마령검법을 펼쳤다면 5초도 되기 전에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옥령인은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기에 묵향의 주문대로 부드러운 초식의 연결을 하지 못한다는 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50초가 넘어서자 이대로 장기전으로 들어가면 불리함을 깨달은 묵향이 연속 공격을 주문했다.
<따라붙으며 6, 2, 22초를 동시에.>
그러자 옥령인이 미꾸라지처럼 피해 나가는 옥매화를 향해 검을 들고 뛰어들면서 외쳤다.
“적하비룡(赤霞飛龍), 적하유천(赤霞流天), 적하낙일!”
옥매화는 그 엄청난 공세를 신법과 백류매화검법으로 가까스로 헤쳐 나가며 자신의 실력을 있는 대로 발휘했다. 하지만 그녀도 겨우 지시만 받는다고 해서 동생이 이 정도 괴력을 발휘하리라고는 짐작도 못하고 있었던 터라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검만 알고 살아온 내가 겨우 버티기만 할 수 있을 줄이야……. 먼저 공격을 해 대면 령인이가 겁에 질려 지시를 어기게 되지 않을까?’
일단 생각을 굳히자 몸을 돌보지 않고 강공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백매천심(白梅天沈), 백매일절(白梅一切), 백매유향(白梅流香)!”
그녀의 검기와 검풍이 사방으로 몰아치자 급기야 실전 경험이 떨어지는 옥령인의 눈에 공포가 자리 잡았다. 그녀는 묵향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몸을 놀려 피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거기에 그녀는 묵향의 지시에 따라 강공을 펼칠 때 차마 언니에게 독수를 쓰지 못하고 손속에 인정을 두어 몇 번이나 위기를 모면하게 해 준 후라 언니가 이토록 물불을 안 가리고 독수를 펼치자 심약한 그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자신의 지시로는 어떻게 되지 않음을 느낀 묵향은 1백 초식 정도 지시를 하다가 입맛을 다셨다.
“본인이 졌습니다. 저 바보 같은 맹꽁이는 내 말을 듣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군요.”
그러자 옆에서 보고 그 속사정을 짐작한 맹주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묵향을 위로했다.
“저 아이가 심약해서 그런 거니 꼭 자네가 진 게 아니네. 20초 정도 싸웠을 때 상대가 피할 길목을 골라 연속된 검초로 적을 몰아넣는 그 방법은 본좌도 감탄했다네. 그런데 저 아이가 차마 독수를 못 써서 잠시 미루는 사이 매화가 빠져나간 거지. 저 둘이 자매간이 아니면 자네가 이겼을 거야.”
그러나 재미가 없어진 묵향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진 건 진 거죠. 그러니 더 이상 헛소리하지 않고 제 숙소에 들어갈까 합니다, 그럼.”
맹주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일이 이런 식으로 풀려 묵향에게 더욱 많은 질문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운명과 옥매화의 경솔함에 울분이 터졌지만 이미 떠나 버린 화살이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묵향은 나머지 날 동안 한영영을 잘 통제하여 본타로 돌아왔다. 한영영은 워낙 묵향에게 혼쭐이 나서 그런지 돌아올 때는 별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구출 작전의 결과
묵향은 교내로 돌아온 다음에도 수행을 계속했다. 묵향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과 소나무 숲 사이를 왕복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서는 소나무 숲보다는 집에 있는 시간이 더욱 길어졌다. 때때로 음희 설약벽이나 유백 사부를 방문하는 걸 제외하고는 언제나 집 안에만 박혀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하루 이틀 세월이 흘러 다섯 달의 시간이 지나 묵향은 갑작스럽게 교주의 호출을 받았다. 하지만 언제나와 같이 회의실이나 집무실이 아닌 십만대산의 높은 절벽에 만들어진 정자에서였다는 점이 달랐다. 묵향이 도착했을 때 교주의 호위대는 정자 부근에 매복하고 있었으며 정자 안에는 한 명도 없었다. 묵향이 경공술을 전개하여 정자에 오르자 교주는 반갑게 맞아들였지만 어딘지 근심이 있는 표정이었다.
“어서 오게나. 실은 긴박한 일이 있어 그대를 불렀다네.”
“무슨 일입니까?”
교주는 다급하게 말했다.
“장 부교주가 일을 벌였어.”
“모반을 꾸몄다는 겁니까?”
“아니야, 더 나쁜 거야.”
“예?”
“그는 무림맹주의 두 손녀를 납치해서 비밀리에 가둬 두고 있어.”
“뭐라구요?”
“이로서 무림맹과는 메울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골이 생긴 셈이지. 이걸 좋은 방향으로 해결해야만 해. 될 수 있다면 조용하게. 최악의 경우에는 장인걸을 죽여서라도 말이야.”
“그가 왜 두 손녀를 납치했단 말입니까?”
“그는 모반을 일으키기에 앞서 본좌의 이목을 그쪽으로 돌려놓을 속셈으로 아주 극비리에 납치에 성공했고, 그녀들은 지금 장인걸의 숙소 근처에 갇혀 있네. 본좌는 그 일대에 천라지망을 펼쳐 두고 비밀리에 감시하고 있지만 함부로 나섰다가는 그녀들의 생명이 위태롭기에 손을 아직 못 쓰고 있는 형편이지.”
“그러면 저 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자네가 사군자를 이끌고 잠입하여 그녀들을 탈출시켜야만 해. 장 부교주의 숙소 주위는 그의 수하 3백 명이 지키고 있네. 장인걸의 교내 지위상 무턱대고 집을 수색할 수는 없어. 만약에 그자가 눈치 채고 먼저 빼돌리고 책임을 물어 오면 그때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구.”
“하지만 3백 명의 고수라면 그렇게 대단한 수도 아닌데 이 기회에 장인걸을 없애 버리면 어떻습니까?”
“그럴 수도 없어. 심증만으로 그를 처단하면 교내에서 그의 처리에 대해 의심을 품고 따지는 무리들이 생겨날 수 있지. 그래서 본좌의 생각으로는 인질들의 안전이 우선인지라……. 여기를 보게나.”
그러면서 교주는 한 장의 지도를 품속에서 꺼냈다.
“이건 십만대산 부근을 아주 정밀하게 그려 놓은 지도야. 장인걸의 집은 이곳이고, 자네가 여기 들어가서 그녀들을 구출해야 해. 하지만 그녀들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아마 지하에 있는 밀실에 감금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하고 있다네. 아주 조심해서 처리해야 해. 그녀들을 구출해서 이쪽으로 이끌고 오면 되네. 거기에는 본좌가 장인걸을 비롯한 고수들을 초대하여 술을 마시고 있을 테니, 그녀들의 신변이 확실히 확보되는 대로 이리 오면 그 자리에서 장인걸을 문책하여 잠재우도록 하세나.”
“왜 이렇게 일을 힘들게 하려고 하십니까? 그냥 쳐들어가서 목을 베어 버리면 끝나는 일을…….”
“원래 무리를 이끌다 보면 이렇게 귀찮게 일을 처리할 줄도 알아야 하네. 그래야 수하들이 본좌를 믿을 테고, 그래야 본교가 유지되지. 서로가 믿지 못하면 아무리 본교라도 금세 무너져 내려. 자네한테 부탁한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제대로 처리하도록 하죠. 그럼 언제 잠입해 들어가면 됩니까?”
“사흘 후 장인걸을 불러낼 거야. 그때 해 주게.”
최종 결정이 나자 묵향은 포권했다.
“존명!”
2일 후 묵향은 사군자와 함께 장인걸의 사택으로 향했다. 마교에서는 그 사택의 규모를 거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므로 장인걸은 요새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사택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게 할당된 3백 명의 사사혈시마대를 거느리고 사택을 방비했다. 그들은 마교의 정예였으므로 묵향으로서도 섣불리 안으로 들어가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일단 사택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가 경비가 허술한 밤 시간에 진기를 이용해서 극음(極陰)의 장력으로 벽을 가루로 내며 살며시 파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극양의 장력과는 달리 극음의 장력은 외부는 멀쩡하고 내부를 소리 없이 가루로 만들 수 있다. 익히기는 어려우나 그 무서움은 오히려 극양을 뛰어넘는 것이다.
묵향은 그 무음(無音)을 이용해 사택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했으며 난과 죽, 매는 탈출을 돕기 위해 남아 있고 살수 출신의 국만을 데리고 잠입했다. 살수란 원래 표시 안 나게 침투, 구멍을 뚫고 몸을 숨긴 상태에서 먹이가 올 때까지 소리 없이 장시간을 버티도록 특수 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둘 다 살수 출신이라 묵향과 국은 손발을 맞춰 재빨리 들어가 내부를 정탐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지하실로 뚫고 들어간 묵향과 국은 거의 호흡조차 멈춘 채로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그러자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봐 교대 시간 안 됐나?”
“이제 2각 남았어.”
“그렇게 악을 써 대더니 이제 좀 조용해졌군. 두 계집 중에서 언니라는 년이 정말 독종이란 말이야.”
“그러게 말일세. 하지만 그 상판이나 몸매는 정말 끝내 주더군. 고놈의 성질만 죽이면 정말…, 흐흐…….”
“군침 흘릴 거 없어. 저런 계집이 어디 우리한테까지 차례가 오겠어? 높은 분들끼리 시식하고 첩으로 삼겠지.”
“옆에 가만히 있는 계집도 정말 괜찮지 않아? 그런데 왜 혈도를 봉하고 묶기까지 해서 밥을 안에까지 가져다주게 만드는지…….”
“왜 좋잖아? 자네는 아직 밥을 안 날라 봐서 모르겠지만, 흐흐……. 밥을 앞에 가져다주면서… 흐흐…….”
“왜 그러나? 갑자기 뭐가 그렇게 좋다고 음흉한 웃음을 짓기는…….”
“그 두 계집 정말 가슴이 토실토실하면서도 탄탄하더군. 눈앞의 떡인데 표시 안 나게 만져는 봐야지… 흐흐…….”
“정말 그런 방법이 있었군. 왕가(王家) 녀석 나한테 인심이나 쓰는 듯한 표정으로 자기가 밥을 주겠다고 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더 이상 들어 볼 것도 없었다. 일단은 국에게 목표가 눈앞에 있으니 쉬고 있다가 내일 낮이 되면 움직이자고 지시하고는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묵향이 기다리는 사이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갔고 드디어 때가 되었다. 묵향은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국에게 일렀다.
<자네, 검술 말고 권법이나 장법도 할 줄 아나?>
<예, 권법은 좀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소림의 철수공(鐵手功)도 익혔죠.>
<저들에게 검을 써 봤자 별로 타격을 주지 못해. 거의 강시와 같은 강인한 신체와 회복력을 가지고 있다. 검집 자체를 이용하거나 손을 이용해 상대의 머리를 바숴라.>
<알겠습니다.>
<먼저 내가 뛰어들어서 두 놈을 작살내겠다. 너는 통로를 장악하여 내가 인질을 구출하는 사이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해라.>
<예.>
<가자!>
묵향은 그 말과 동시에 쏘아져 나갔다. 묵향은 지루한 보초 시간을 메우기 위해 농담을 즐기고 있는 두 명의 고수를 향해 달려들어 순식간에 머리를 부숴 버렸다. 보초의 머리와 묵향의 벌겋게 달아오른 듯한 손이 부딪치자 뇌수가 터지면서 살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거 혈수마공은 냄새가 지독해서 못 쓰겠군. 다음부터는 소수마공을 사용해야겠어.’
언뜻 생각을 하면서 쓰러진 보초의 옷 속에서 열쇠를 찾아내어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두 여자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 묵향은 비수를 꺼내어 둘을 묶고 있는 오철(烏鐵)로 만든 수갑과 족쇄를 끊어 버렸다. 그들의 혈도를 풀어 주고는 전음으로 물었다.
<둘 다 몸은 괜찮소?>
그러자 옥매화가 의외로 부드럽게 말했다.
<덕분에 살았어요. 몸은 괜찮아요. 그냥 미혼약에 당하고 혈도를 짚인 채 잡혀 왔기에 혈도가 소통되니 살 것 같군요. 그건 그렇고 우리들한테도 뭔가 무기를 줘요.>
<와 주셨군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구출을 받았음에도 전음을 발하며 묵향을 바라보는 옥령인의 표정은 뭔가 좀 씁쓸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묵향은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지도 알지 못했고, 그녀의 표정이 그런 것은 아마도 오랜 시간 갇혀 있었기에 피곤해서 그럴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묵향은 옥매화의 말에 뭔가 무기가 될 게 있을까 해서, 살짝 문을 열고 해치운 두 고수를 바라봤지만 그들은 장법이나 권법 등 전통적인 마공을 익힌 고수라 그런지 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묵향은 할 수 없이 묵혼검을 뽑아 옥매화에게 건네 주었다.
<부드럽게 사용해 주시오.>
<알았어요. 나중에 돌려 드리죠.>
<이건 그대가 사용하시오.>
묵향은 자신이 가진 비수를 옥령인에게 건네 준 후 그녀들을 이끌고 빠져나왔다. 일단 인질이 구출되었으니 묵향에게는 거리낄 게 없었다.
<자! 이제 조용히 나갑시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묵향의 손에서는 엄청난 양강의 장력이 뻗어 나갔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지하실에서부터 비스듬히 위쪽으로 장력이 쓸고 지나가며 거대한 구멍을 만들었다. 그의 돌연한 행동에 옥매화가 기가 찬 듯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헛소리 말고 따라와.”
묵향은 앞장서면서 벌 떼처럼 달려드는 3백여 명의 사사혈시마대를 대적했다. 각 상대는 거의 2초도 안 되어 묵향에게 맞아 머리가 터지며 숨을 거뒀다. 아무리 귀혼강신대법이라도 머리가 터져 나간 이상 그 머리를 복구하라고 명령을 내릴 신체 기관이 없는 것이다. 묵향은 순식간에 30여 명을 때려죽이며 사군자와 합류하였고, 사군자가 그녀들을 호위하자 이제는 거칠 것 없이 주위를 돌아다니며 덤벼드는 사사혈시마대를 상대했다. 묵향은 50여 명을 더 해치우고 그들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사군자 일행에게 돌아왔다.
묵향이 교주가 지정한 장소에 도착하니 교주는 장인걸 이하 주축 고수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장인걸은 묵향이 두 여자를 거느리고 나타나자 조금 경악한 듯 외쳤다.
“묵향 부교주, 그녀들은……?”
“당신도 잘 알 텐데?”
그러자 교주 이하 10여 명의 고수들이 그녀들에게 다가왔다.
“너희가 맹주의 손녀들이 맞냐?”
옥매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교주는 장인걸을 향해 외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장인걸은 광소를 터트린 다음 외쳤다.
“크하하하, 천하가 눈앞에 있었는데……. 내가 죽더라도 네 녀석만은 용서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장인걸은 묵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묵향 또한 그에 사양하지 않고 뛰어들었다. 장인걸은 진기를 한계까지 뽑아 올리며 강공으로 나왔다. 먼저 묵향과 부딪치기 직전에 극성의 흑살마장을 뿜었다. 묵향이 검풍을 뿜어 막아 내자 1장 거리까지 접근한 그는 흑시마조, 혈수마공 등을 사용하며 몇 초식을 교환한 후 뒤로 튕겨 나오며 검을 뽑아 들고는 외쳤다.
“받아랏!”
그와 동시에 수십 가닥의 검강이 뿜어져 나왔다. 묵향이 손을 휘젓자 그의 손에서 강기들이 뻗어 나가며 장인걸의 강기 막을 뚫고서 그의 몸에 박혔다. 피와 살이 튀었지만 장인걸은 멀쩡하게 서 있었고 그 상처는 곧 아물어 버렸다. 묵향은 장인걸에게 결정타를 입히기 위해 접근해 들어가다가 곧바로 등에 와 닿는 강력한 충격을 느꼈다. 묵향이 순간적으로 뒤돌아보니 교주가 쓰러져 있었다. 그 옆에 있는 능비계 부교주가 무음 무형의 마음장(魔陰掌)으로 그를 기습한 것이다. 묵향은 갑작스런 기습에 상당한 내상을 입고 대노하여 장인걸을 버려두고 능비계를 덮쳤다. 능비계는 묵향이 뿜어낸 강기의 세례를 받고는 엄청난 충격에 뒤로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 묵향은 교주를 일으키며 말했다.
“괜찮으시오? 교주! 정신 차리시오.”
그와 동시에 묵향은 엄청난 충격을 단전으로 느끼며 뒤로 날아갔다. 묵향은 옥령인과 옥매화가 있는 지점까지 충격으로 밀려가 그녀들과 부딪치면서 간신히 몸을 세울 수 있었다. 묵향은 피를 토하면서 외쳤다.
“교주, 왜 암습을?”
교주는 서둘러 방어 자세를 갖추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정말 대단하군. 아무리 기습을 하기 위해 8성의 공력밖에 사용하지 못했다지만 자전강기(紫電剛氣)를 정통으로 맞고도 살아있다니…….”
교주의 말을 들은 묵향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 외쳤다.
“네 녀석을…, 으악!”
묵향은 교주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진기를 끌어올리는 도중 단전으로 파고드는 강렬한 통증에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그의 아랫배에 익히 자신이 보아왔던 검은색의 검신이 삐죽하게 튀어 나와 있었다. 묵향이 딴 곳에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옥매화가 묵혼검으로 기습을 가한 것이다. 묵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돌아보자 옥매화는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녀석이 너무 강하고 오만하기에 자초한 일이니 날 원망하지 마라. 이번 일은 너를 없애기 위해 할아버지와 교주가 만들어 낸 합작이지. 정파에서는 너를 없애 버리는 것이 마교와의 균형을 잡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마교에서는 오만하고 아무에게나 무공을 가르쳐 대는 너를 없애고 싶어 했거든? 그래서…….”
옥매화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묵향이 어느새 그 몸을 이끌고 옥매화에게 접근했는지, 사람들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빠른 동작이었다. 옥매화는 묵향에게 결정타를 날린 후 방심하다가 멱줄을 잡힌 것이다. 묵향은 옥매화의 목을 그러쥔 상태에서 허공에 들어 올리며 교주를 보고 외쳤다.
“교주, 이 계집의 말이 사실이오?”
그때 묵향은 또 다른 엄청난 고통이 심장을 통해 전해지는 걸 느꼈다. 묵향의 손은 반사적으로 그 상대를 향해 뻗어 나갔다. 뱃속 깊이 묵향의 손이 파고들자 옥령인은 입으로 피를 쏟으면서도 미소 지었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어길 수가 없었어요. 용, 용서하세요. 당신과 했던 맹세는… 지, 지켜진 것 같군요. 저는 맹세를 어기고 할아버지에게 모든 걸 말할 수밖에 없었…….”
묵향은 옥령인이 숨을 거두자 이왕 내친 것 옥매화의 목뼈까지 부숴 버리고 내던졌다. 하지만 그의 부상은 너무나도 엄청났다. 묵향은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함을 깨달았다. 그는 최후의 방법으로 역혈수라마공(逆血修羅魔功)을 끌어올려 진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의 암습으로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고, 또한 단전이 파괴되었기에 그가 공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이걸 사용하면 공력의 회복이 가능하나 몸이 버티지 못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급속도로 육체가 사그라들며 죽음에 이르게 된다.
묵향은 손에 푸른 강기를 뿜어 대며 교주를 덮쳤다. 그러자 교주는 뛰어드는 묵향을 향해 외쳤다.
“가랏!”
교주의 장심에서는 극성의 자전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묵향은 그 강기를 뚫고 앞으로 나왔다. 공포스러운 묵향의 기세를 보고 주변의 고수들까지 묵향을 향해 장풍을 날렸고 급기야 그들의 합공에 밀린 묵향의 몸은 뒤로 날아갔다. 정신을 잃기 전에 묵향은 자신의 몸이 날아가다가 누군가의 손에 잡힌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잡아랏!”
“놓치지 마라!”
묵향의 몸을 안은 국이 최고의 속도로 경신술을 전개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묵향 부교주, 그대는 우리들 살수에게는 신화적인 존재입니다. 저는 당신을 모시게 된다는 걸 알았을 때 정말 기뻤고, 또 당신이 저에게 무공을 가르쳐 줄 때 너무나도 고마웠습니다. 당신을 해치우기 위해 이번에 수많은 고수들이 동원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렇게 예상을 뒤엎고 빨리 쓰러진 것은 주위의 사람들을 너무 믿은 탓이겠지요. 교주가 당신을 없애고자 마음먹은 것은 이번 무림맹 방문 후부터였습니다. 당신이 맹주에게 현경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 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걸 안 교주는 당신을 없애기로 결정했고, 맹주에게 연락해서 그 자매를 불러들인 겁니다. 죄송합니다, 부교주. 빨리 당신에게 말해야 했지만 저는 교주의 함구령을 거역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쓰러지는 걸 보고서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나선 겁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때 국의 뒤에서는 추격하는 마교의 고수들이 쏘아 대는 암기들이 계속 날아왔다. 묵향은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국에게 중얼거렸다.
“용서하네…….”
국은 죽어라고 도망치면서 지속적으로 몸을 좌우로 움직여 뒤에서 날아오는 암기들을 피하고 있었지만 워낙 많은 숫자가 날아왔으므로 그것들을 모두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덩치 큰 것들이나 공력이 비교적 많이 실린 것들은 피했지만 몸에 격중되어도 충분히 호신강기로 버틸 수 있는 것들은 그냥 맞으면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공력도 이제 거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달려온 거리는 거의 25리. 이제 몇 리만 더 가면 탄령하(嘆靈河)다.’
국은 유속이 엄청나게 빨라 마치 저승에 떠도는 영혼들이 탄식하는 소리를 내는 것 같다고 이름 붙여진 탄령하에 묵향을 던져 넣을 작정이었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묵향이 이곳에서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그냥 이대로 있으면 무조건 죽을 것이 확실하므로 실낱같은 가능성에 운을 걸어 보기로 작정하고 도망쳐 온 것이다.
사군자는 이미 묵향 제거 계획을 알고 있었다. 계획에 따르면 묵향이 멍청하게 탄령하로 도망갈 리 없다는 추측하에 탄령하를 제외한, 마교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수많은 길목과 나루터를 중심으로 천라지망을 펼쳐 놓았다. 왜냐하면 탄령하는 현경의 고수라고 해도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국은 탄령하로 도망치는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국은 탄령하에 도착하기 직전 10여 명의 고수들이 그곳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입은 옷으로 보아 수라마참대의 고수들이 분명했다. 이번 묵향을 죽이는 일에 마교는 전 세력을 동원했다. 묵향은 마교의 장악에 뜻이 없었기에 교내에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그래서 사군자가 교주의 압력을 받아 그를 배신하자 그 엄청난 마교의 주력 부대들이 움직이는데도 그 사실이 묵향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묵향의 무공이 어느 정도 무서운지 익히 아는 교주인지라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전 세력을 동원하고도 결정타를 입히지 못하면 그를 없앤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무림맹주를 설득하여 그의 손녀들을 빌려 온 것이다.
그의 두 손녀를 빌려 오기는 쉬웠다. 묵향을 죽이는 일이라고 하자 묵향과 감정이 많던 옥매화는 자원해서 나섰고, 옥령인은 마음이 여려 맹주의 강압에 그들을 돕기 위해 파견되었다. 원래 옥령인은 맹주의 아들 옥진호(玉振湖)의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이다. 그래서 맹주는 예전부터 무공에 열심인 옥매화를 편애하여 마교에서 옥령인을 원하자 선뜻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걸 엿들은 옥매화가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우겨 자매가 함께 온 것이다.
묵향이 입은 타격 중 이 자매가 입힌 것이 가장 컸다. 교주도 묵향이 묵혼검을 옥매화에게 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사사혈시마대(邪死血屍魔隊)에 무장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고, 옥매화에게는 그에게 무기를 달라고 조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기를 안 줄 경우에 대비해 그녀들은 각기 한 자루씩의 비수를 가지고 있었지만, 묵향이 그녀들에게 준 마교의 명장(明匠)이 현철로 만든 묵혼검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묵향을 암습하려고 호신강기를 꿰뚫을 수 있는 비수를 가지고 있다가는 그 예기를 묵향이 알아 챌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국은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10여 명의 고수들을 보자 곧장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상대방도 각자 무기를 빼들고 국과 묵향을 끝장내려고 덤볐지만 국은 처음부터 그들과 싸울 생각 자체가 없었다. 국의 등은 이미 진기가 다해 호신강기가 엷어지면서 날아와 박힌 수많은 암기로 엉망진창이었다.
국은 수라마참대의 고수들에게 접근하자마자 묵향을 탄령하로 던지면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암기들을 던졌다. 상대방이 암기를 피하는 그 순간 그도 따라서 탄령하로 뛰어들며 세심하게 신경 써서 묵향의 옆에서 떨어져 내렸다. 수라마참대의 고수들은 묵향과 국을 향해 암기와 장력을 뿜었지만 그건 고스란히 국이 모두 다 맞았다. 이렇게 해서 묵향은 실낱같은 생명을 유지한 채 급류에 실려 떠내려가게 되었다.
『<묵향>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