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930)

제자

오랜만에 중경(中京)에 온 옥항(玉恒)은 혼잡한 거리를 바라보며 뿌듯한 기분에 괜히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검의 명가로 알려진 청성파(靑城派)에 가서 검을 수련하고 자신감을 얻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적전제자(適傳弟子)가 아니었고 또 장문인이 원해서 받은 제자도 아닌 장군가의 후광과 위압에 의해 받은 제자였기에 그가 배운 무공의 깊이는 얕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버지인 옥청영은 꼿꼿한 성격에 비해 무공의 깊이가 얕아 흑풍단에 들어가지 못하고 장군으로서 일반 군무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이번의 수련을 통해 익힌 무공으로 흑풍단에 들어가려는 생각이었다. 대단한 무공이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흑풍단은 그만큼 관부의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존재였다.

옥항은 관부의 고관대작들이 모여 사는 주작로에 들어섰다. 그는 줄지어 서 있는 으리으리하고 거대한 건물들 중에서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제법 위용 있게 지어진 집으로 들어갔다.

그의 할아버지 옥영진 대장군은 그를 반겨 맞아 주었다. 하지만 그에게 거처를 정해 준 다음부터는 만나기도 어려웠다. 집사에게 물으니 요즘 흑풍단의 재건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흑풍단에 걸맞은 고수를 수천 명이나 구하는 일이 하루아침에 해결될 리도 만무했고, 또 새로 받아들인 고수들을 훈련시키는 데도 많은 시간이 들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그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는 국광이라는 젊은이였다. 그는 여태껏 장군가의 손자라 하여 모두에게 깍듯한 존경을 받아 왔는데, 국광이라는 미친 녀석에게는 싸늘한 눈총만을 받았고 그가 질문을 해도 돌아오는 건 모른다는 말이나 싸늘한 비웃음뿐이었다. 성질 같아서는 주리를 틀겠지만 할아버지의 손님이라는 말에 참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국광은 거의 자신의 거처에서 나오지 않았기에 옥항이 그곳으로 찾아가지 않는다면 그 녀석을 볼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하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국광의 처소 근처에는 가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옥영진이 애지중지하는 손자를 불렀다. 옥항이 문 앞에서 인사를 드리고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내부는 그렇게 넓지 않고 오히려 아담한 편이었다. 여러 무기들이 벽에 장식되어 무인이 기거하는 방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 방은 옥영진의 서재로, 각종 병서 등 한쪽 벽에 있는 서가에 서책이 빽빽이 꽂혀 있었고, 다른 벽 쪽으로 여태껏 옥영진이 사용하던 두 자루의 검이 차례로 용의 형상으로 새겨진 흑색 좌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좌대의 왼편에는 세 개의 갑주가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호화로운 예식용 경갑주(輕鉀胄)였고, 또 하나는 흑색의 전투용 중갑주(重鉀胄), 그리고 근래에 이르러 사용하기 시작한 흑색의 경갑주였다. 갑주들과 그 뒤쪽에 놓여 있는 네 개의 방패도 손질이 잘되어 있어 옥영진이 이들의 보관에 대단한 신경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 안에는 무기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가구가 없었지만 등이나 책상 등, 놓여 있는 것들은 모두 오래된 최상품으로 이 소박한 무인의 가문이 오랜 전통을 가진 명가임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옥영진은 근래에 사용하는 애검을 언젠가 사냥해 온 호피(虎皮) 위에 앉아 닦고 있었다. 옥영진은 과거에는, 관부의 장교들이 그렇듯이, 좌대 위에 놓여 있는 30근 정도되는 중검(重劍)을 사용했다. 하지만 요즘은 기운이 딸려서 길이 3척의 13근 정도 나가는 ‘청영(靑影)’이라는 보검을 구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무림인들과는 달리 관부의 무사들은 무거운 중병(重兵)을 애용한다. 그래야 좀 힘이 들더라도 단번에 두터운 갑주를 꿰뚫고 상대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두터운 방패까지 사용하기에 웬만한 고수가 아니라면 관부의 정병(精兵)과 맞붙어 싸우려는 사람은 없었다.

장교급 정도 되는 장사(壯士)들은 힘이 좋아 두터운 갑주 외에 심장을 보호하는 둥그런 강철판인 엄심갑(掩心甲)을 착용하고 가죽을 몇 겹으로 덧대어 어깨부터 아랫배까지 내려오게 만든 보호의(조끼와 비슷하게 생겼음)를 입으며 그 위에 두터운 갑옷을 착용한다.

갑옷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갑옷 전체를 용린(龍鱗)과 같이 만든 비늘 갑옷이다. 기운이 좋은 사람일수록 두터운 비늘의 갑옷을 선호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어깨나 옆구리 부분, 그리고 허벅지 부분은 비늘 갑옷이지만 복부(腹部)와 배부(背部)는 둥그런 철판을 통짜로 댄 갑옷으로 어떤 이들은 배부의 철판을 없애고 비늘을 사용하기도 한다. 배부에 철판을 댄 갑옷은 그 철판에 각종 문양을 양각하여 멋을 내어서 젊은이들이 선호하며, 또 통짜 철판이기에 방어력도 좋다. 하지만 노장(老壯)들은 훨씬 움직임이 자유로운 비늘 갑옷을 즐겨 입는다.

이런 중갑주나 방패는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얄팍한 도검으로 꿰뚫기 어렵다. 그리고 갑주나 방패는 무림인들이 자랑하는 호신강기(護身剛氣)처럼 2각 정도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마르고 닳도록 사용자의 몸을 지켜 주기에 무림인들로서도 관부와의 충돌은 될 수 있으면 피한다. 이런 이점 때문에 관부에서는 무거운 중병을 애용했고, 중병을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체력 저하를 방지하기 위해 황궁무예는 날카롭지만 단조로운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신병이기(神兵異器)는 가벼우면서도 쇠를 가볍게 베어 낼 수 있어서 돈이 많은 노장들이 즐겨 이용했고, 또 그들은 군을 통제하여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데 첫째 목표를 두고 있기에 직접 싸울 일이 거의 없으므로 갑주도 얇은 것을, 그리고 검도 될 수 있으면 가벼운 것을 선호했다.

할아버지가 검을 닦고 있는 동안 옥항은 뒤편에 세워져 있는 할아버지의 전투용의 흑색 중갑주를 힐끔힐끔 훔쳐봤다.

‘흑색 갑주…….’

그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혹시나 하고 조바심을 치고 있는데 드디어 옥영진이 입을 열었다.

“청성파에서 얼마나 수련을 했느냐?”

“5년이옵니다.”

“5년이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구나. 그래 좀 진전은 있었느냐?”

“예.”

“대답이 자신 있구나.”

“예, 소손(小孫)이 그래서 흑풍단에…….”

“흑풍단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조금 더 검술을 배우거라.”

“다시 청성파로 가란 말씀이십니까?”

“아니야, 그보다 더 좋은 상대가 있지. 국광이란 사내를 본 적이 있냐?”

“예.”

‘아주 건방진’이라는 말이 따라 나오려는 것을 황급히 얼버무리며 옥항은 고개를 숙여 당황한 자신의 얼굴을 숨겼다.

“그에게 검술을 좀 더 배워라.”

“그에게 말씀입니까? 제가 보기에 그는 체격이 별로…….”

“무공이란 체격으로 하는 게 아니야. 아무리 겉모습이 나약해 보인다 하더라도 그는 대단한 고수다.”

옥항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처음 봤을 때 그 건방진 태도하며…, 그는 국광을 제법 믿는 구석이 있는 모사(謀事) 정도로 봤던 것이다. 옥항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옥영진이 말했다.

“할애비의 말을 못 믿는 모양이구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검은 가지고 왔느냐?”

“예, 청성파에서 쓰던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중검(重劍)이냐?”

“아닙니다,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가벼운 겁니다.”

“그럼 그 검을 가지고 국광의 처소로 나오너라. 내 거기 가 있을 테니 빨리 오너라.”

“예.”

옥영진이 국광의 처소로 가자 국광은 책을 읽고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자네도 안녕한가? 실은 긴한 부탁이 있어서 왔네.”

“부탁이라뇨?”

“손자 녀석의 검술을 좀 가르쳐 줄 수 있겠나?”

“싫습니다.”

“왜 그러나?”

“제가 왜 어린아이의 검술까지 가르쳐야 합니까?”

“허허…, 어린아이는 아니네. 금년으로 스물하나가 되지. 5년이나 청성파에서 검법을 수련했으니 자네가 조금만 힘을 써 주면 될 거야.”

“저는 검법은 거의 잘 모릅니다. 또 알고 있다 하더라도 기억도 나지 않는 데다가 과거에 배워 펼치는 기술만 몸에 배어 있지 그걸 상대에게 전할 수는 없습니다.”

“허허허, 그러니까 누구 하나를 골라 가르치다 보면 좀 더 자극이 되어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글쎄요……. 어쩌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가르쳐 보라니까. 가르쳐 보다가 영 재미없으면 그만두면 될 거 아닌가?”

“좋습니다. 하루 한 시진(두 시간) 정도 가르쳐 보죠. 손자는 어디 있습니까?”

“검을 가지러 갔으니 곧 올 거야.”

“알겠습니다.”

국광은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뒤지더니 2척 반 정도의 나무 몽둥이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그걸 어디다 쓰려고?”

“검술을 가르치라면서요?”

“진검을 안 쓰고?”

“이걸로 충분합니다.”

이때 옥항이 들어왔다. 그의 허리에는 무림인들이 보통 사용하는 2척 8촌 길이의 패검이 걸려 있었다. 국광은 옥항의 검집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검을 좀 보세나.”

“여기…….”

국광은 옥항이 내미는 검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 검을 얼마나 사용했나?”

‘이 자식은 계속 반말이군.’

하지만 할아버지가 묵인하고 있었기에 옥항도 속으로 삭여야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10년 정도 되었소.”

“흠, 10년이라……. 계속 이 검을 썼단 말이지?”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국광은 검을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자, 공격을 한번 해 보게나.”

국광은 그러면서 몽둥이를 잡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몽둥이를 잡고 수비 자세라도 취했으면 옥항도 그렇게까지 신경질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 그래도 몽둥이를 들고 있어 자신을 얕잡아보는 것 같은데, 거기에다 수비할 생각도 않으니 옥항은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어 형식적으로 인사를 하고는 바로 살초(殺初)를 펼치기 시작했다.

각 방향으로 세 번 찌르기를 하고 국광의 행동을 보아 후퇴하면 따라 들어가며 베려고 했는데, 국광은 그냥 살짝살짝 몸을 틀어 세 번의 찌르기를 피하면서 몽둥이로 옥항의 손을 쳤다. 놀란 옥항은 조금 뒤로 빠지면서 검 길이에 의존해서 국광의 몽둥이를 후려쳤다. 하지만 국광은 살짝 몽둥이를 틀어 검을 흘리면서, 앞으로 한 발자국 정도 거리를 엄청난 속도로 좁히며 옥항의 목을 베어 왔다. 아무리 몽둥이라도, 그 기세로 보아 맞으면 목뼈가 부러지겠다고 느낀 옥항은 몽둥이의 사거리를 벗어나려고 몸을 뒤로 빼면서 검을 수평으로 베었다.

‘몸을 뒤로 뺐지만 저 녀석의 몽둥이를 피할 수 없어. 그래도 이쪽이 3촌(약 10센티미터) 정도 기니까 승산이 있다. 거기에 저쪽은 나무고 이쪽은 쇠이니 맞으면 어느 쪽이 타격이 클지는 뻔한 노릇.’

옥항으로서는 꽤 잔머리를 굴려 펼친 초식이었는데, 국광은 갑자기 왼발로 옥항의 손을 찼고 동시에 국부에 국광의 오른발이 박혀 들어왔다. 급소를 맞은 옥항은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설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냥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는데, 위에서 비웃는 듯한 국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리를 생각하지 않았군. 자네와 나의 거리는 충분히 각술(脚術)을 쓸 수 있어. 자네도 머리가 있다면 각술을 썼어야지.”

“이… 이건 검술 대련이 아니오?”

“오, 내가 말 안 했던가? 검을 들고 상대와 섰을 때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살아남는다구.”

“그건 비겁한 짓이오.”

“비겁은……. 죽은 녀석이 비겁 찾게 생겼어?”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옥항은 계속 국광을 공격했지만 국광의 옷자락도 건드릴 수 없었다. 국광은 별 치사한 방법을 다 사용했고 심지어는 살짝 흙을 집어 옥항의 눈에 뿌리기까지 했다. 한 시진 동안 몽둥이와 손발에 얻어터진 옥항은 아무리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고 하나 대련이 끝나고 나자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탈진해서 뻗어 있는 옥항에게 국광은 “그럼 내일 봅시다. 흐흐…”하는 비웃음만 남겨 두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옥항은 국광이 정통적인 검술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우선 연결되는 똑같은 초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거기에 언제나 일격필살을 노려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든지 아니면 허초로 신경을 그쪽으로 쏠리게 만들고는 비어 있는 왼손이나 발을 사용해서 공격했고, 그 공격 방식도 상황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하지만 즐겨 쓰는 초식은 몇 가지뿐이어서 뻔히 아는 것인데도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괴력을 내고 있었다.

국광이 공격에 힘을 적절히 안배했기 때문에 완전히 맞고 뻗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계속 두들겨 맞다 보니 온몸이 퉁퉁 부어올라 약을 바르고 찜질까지 해야 했다. 그도 공격을 해 보았지만 국광의 움직임은 미꾸라지처럼 빨라 도저히 따라붙기가 힘들었다. 그 경공술과 신법은 어디서 배웠는지 옥항은 찬탄할 수밖에 없었다.

석 달이 지나자 옥항은 겨우 국광의 발차기를 가까스로 한 번 피할 수 있었다. 국광은 간발의 차이로 피한 옥항을 보더니 씩 웃으면서 말했다.

“어쭈, 피해? 이건 어때?”

그러더니 더욱 공격에 속도를 붙여 옥항을 신나게 두들겨 팼다. 국광의 수법들을 얄팍한 잔재주라고 생각했지만, 국광과 상대를 하려면 자신도 그런 편법적인 수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고 국광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곧 깨달은 것은 이 특이한 공격을 아주 자연스럽게 펼치려면 보통 숙련도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은 옥항이 틈틈이 손발을 이용해 반격을 하면서 제법 용을 써 대자 국광은 그를 열심히 두들겨 패고는, 뻗어 있는 옥항에게 책 세 권을 던져 주었다.

“내가 여태까지 사용한 무공은 모두 이것들을 응용한 거다.”

“이게 뭡니까, 사부? 저는 정파의 문하라서 사파의 무공은 안 배워요.”

몇 달 지나면서 옥항이 국광에게 존대를 하게 된 것은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에 대한, 또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예의였다. 국광의 무공은 확실히 뛰어났기에 조금쯤은 배워 볼 생각도 있었지만 명문정파의 무공을 익혔다는 얄팍한 자존심이 아무리 대단한 무공이라도 사파적인 무공을 익히는 것은 거부했다.

“뭐긴 뭐야, 황궁무공 세 권이지. 권법, 검법, 각법인데, 초식들이 꽤 재미있으니 열심히 배워 봐. 모두 읽으면 옥 대인께 반납하도록.”

“그럼 지금까지 사부가 펼친 게 모두 황궁무공이란 말입니까?”

“그럼, 그 세 가지를 응용해서 조합한 것이지.”

‘도대체 어떻게 단순 공격 위주의 황궁무공을 조합하면 저런 치사한 공격법이 되는 거지?’

대련이 끝나고 욱신거리는 몸으로 비급들을 읽으면서 그는 국광의 말대로 그가 사용한 모든 초식들이 거기 다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국광이 준 세 권의 비급은 황실에서 많은 무관들이 익히는, 강하면서 그런대로 잘 알려진 무공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광명정대하게 적을 정면에서 힘으로 제압하는 무공들이지 결코 이런 식으로 서로 조합하여 상대의 허점을 공격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정작 옥항이 놀란 점은 다른 데 있었다. 국광이 즐겨 쓰는 진린검법(進躪劍法)이라는 공격 일변도의 검법 중 네 가지 초식과 칠세연권법(七勢連拳法) 중 세 가지 초식, 천영팔황각법(千影八荒脚法)의 네 가지 초식들을 서로 연결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데에 옥항은 불가사의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열나게 맞았던 것인데도 아무리 비급 세 권을 펼쳐 놓고 보아도 비급들의 내용만으로는 그것들을 연결시킬 수 없었고, 이렇게 저렇게 궁리를 해 봐도 서로의 움직임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밤새껏 궁리를 하다가 날이 밝자 옥항은 국광의 처소로 비급들을 가지고 달려갔다.

“밤새 생각을 해 봤는데 이게 비급상으로는 사부가 사용하던 초식처럼 도저히 연결이 안 되는데요?”

“쯧쯧, 멍청한 녀석. 왜 연결이 안 돼. 왼발로 비천각뢰를 쓰고, 이 상태에서 오른쪽의 손이나 발을 사용해서 초식을 펼쳐 상대와 부딪치면 흔들린 중심은 자연스레 잡히는 것이고, 또 이리로 발이 나갔으면 왜 돌아와서 펼쳐야 하느냐? 그 기세를 이용해서 운천직권(雲千直拳)을 펼치면 다시 뒤로 돌아가기도 편하잖아?

그 초식들을 보면서 셋을 서로 연결하면 다소 무리가 있지. 하지만 그걸 상대에게 사용하면 상대는 어떻게 해서든 그걸 막거나 아니면 맞을 테니까 그 반동을 이용하면 초식이 자연스레 연결되는 거야.”

“아…, 상대가 있어야만 서로 연결되는군요.”

“대신 상대가 피하면 다른 방법을 써야지.”

“그런데 언제까지 대련을 계속하실 생각입니까? 요즘은 저녁에 누우면 안 아픈 곳이 없다구요.”

“글쎄…,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언제나 명심할 것은 검을 사용하면서 너무 초식이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이 따라가고 몸이 가는 대로 마음이 움직이면 되는 거야. 황궁무공은 깊이 익히면 아주 대단한 경지까지 들어갈 수 있으니 지금 네가 익힌 수박 겉핥기식의 무공과는 확연히 다르지.

정식 사제지간은 아니니 지금이라도 내 방식이 싫으면 그만둬도 상관없고, 또 나도 가르치기 귀찮으면 언제라도 그만둘 테니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열심히 해 봐. 너와 함께한 지도 다섯 달……. 이제 몸이 많이 부드러워지고 또 안목도 높아졌으니 어느 정도 수준이 되었다고 생각되면, 그때 대련을 끝내고 진지하게 교육을 해 볼까 생각 중이야.”

“그런데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수련 방법은 청성파에서 배우던 것과는 너무 다른데요?”

“내가 너무 심하게 하나?”

“좀… 그렇죠. 어디서도 이렇게 무공을 가르치지는 않고 제자를 두들겨 패기만 하지는 않는다구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는데?”

“강력한 무공을 가르쳐 주셔야죠. 그래야 더 강해질 거 아닙니까?”

“강해진다……. 내가 황궁무고에서 수많은 비급을 읽어 보고 느낀 점이 뭔 줄 아나?”

“글쎄요.”

“절대적인 신공(神功)이란 존재하지 않아. 어떤 무공이라도 허점이 있지. 모든 무공이 물고 물리는 관계에 있어. 갑이라는 무공이 을이라는 무공을 제압한다면 을은 병에게 제압되지. 그 병은 또다시 돌고 돌아 갑에게 지는 거야. 이건 물론 똑같은 수준의 무인들끼리 겨뤘을 때에 한해서지.

예를 들어 너와 나는 엄청나게 무공 수준에서 차이가 난다. 그건 너도 느꼈을 거야. 나는 소위 무림에서 3류 축에도 끼이지 못하는 무예들만으로 네가 배운 청성파의 1류 무술을 박살 낼 수 있어. 무공이 얼마나 강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걸 사용하는 사람의 자질이 어느 정도냐가 중요한 거야.”

“그렇다면 강한 무공은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겁니까?”

“아니지. 강한 무공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무공이 가진 깊은 뜻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이야.”

“깊은 뜻이라뇨?”

“가령 자네가 한 번씩 나한테 사용하는 청성파의 추의환영검법(追意幻影劍法)에서 환사영주(幻蛇影走)라는 초식이 이렇게 나가지?”

“그렇죠.”

“하지만 이렇게 찌르기를 들어간다면 누구나 알아챌 게 뻔하잖아. 물론 초식 사용자가 아주 뛰어난 속도로 전개한다면 상대가 당하겠지만…….”

“그 때문에 변초를 쓰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변초를 쓰지. 1류의 검법일수록 이 변초가 아주 발달되어 있어. 하지만 꼭 변초까지 외워서 사용할 필요는 없지. 상대를 속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어떻게 하더라도 베거나 찌르기만 하면 되지 어떤 틀에 꼭 맞춰 휘두를 필요는 없는 거야. 초식이란 그걸 빠른 속도로 펼치자니 능력이 안 되어 할 수 없이 만들어 놓은 한 가지의 틀일 뿐이야. 상대가 약해서 허초조차 막지 못하는데, 그 허초를 다시 돌려서 거두어들이고 진짜 초식을 쓸 필요가 있을까? 상대가 못 막으면 허초였다고 해도 그대로 찔러 들어가야 해. 그리고 실초라도 상대가 막을 기색이 보이면 회수하여 그걸 허초로 만들어 상대의 정신을 딴 쪽으로 쏠리게 유도해야 하고……. 그러니까 꼭 틀에 맞출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그게 저를 두들겨 패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멍청한 녀석! 두들겨 맞다 보면 맞기 싫어서라도 피해서 내가 공격하는 방식을 익히게 되어 있어. 너도 요즘 들어서는 조금씩 피하고 반격까지 하게 되었잖아?”

“그러고 보니…….”

“먼 거리에서 대결한다면 강한 초식이 우위를 차지하겠지만 근거리에서 대결한다면 누가 실전 경험이 많은지가 가장 크게 작용하지. 그러니 잔말 말고 나한테 맞다 보면 모든 걸 다 깨닫게 되는 거야.”

그러자 옥항은 과장되게 놀란 척하면서 말했다.

“그럴 수가? 너무 무책임한 대답인데요?”

“참, 너는 살인을 해 본 적이 있냐?”

“예? 아직 없습니다.”

“무공이 높은 사람은 살인을 잘할 수 있는 소질이 있지. 하지만 반대로 살인을 잘하는 사람이 꼭 무공이 높지는 않아. 자네가 살인을 안 해 봤다고 하니 말인데 꼭 죽여야 할 상대가 아니면 싸울 필요가 없고, 또 그 약점을 발견했으면 무조건 찔러 죽일 마음가짐이 필요해. 안 그러면 그 멈칫하는 순간에 상대에게 당하게 되지. 상대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어.”

“사부는 할아버지께 들으니 모든 기억을 상실했다고 들었는데, 그걸 어찌 아십니까? 실제로 그 후에 사부가 살인한 적은 없잖아요?”

“몇 번 초식을 써 보면서 느꼈지. 상대가 공격했을 때, 또 자네와 처음 초식을 주고받았을 때, 모두 다 상대의 허점을 보자마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의식적으로 손발이 나가더군. 내가 힘을 줄이지 않았으면 모두 저세상에 갔겠지. 그걸 느끼고 나는 이전부터 수많은 살인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 과연 나는 이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또 왜 이렇게 무공이 강할까?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았을까? 나에게 처자식이 있을까? 하기야 처자식에 대해서 아무런 그리움도 없는 걸 보면 아마 없는 것 같아.”

빙긋이 미소 짓는 국광을 보면서 옥항은 처음엔 사부가 무자비한 무뢰한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전부터 조금씩 느껴 왔지만 지금에 이르러 확신하게 되었다.

“사부님은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살인귀(殺人鬼)는 아니었을 겁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국광이 과거에 대해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국광의 말을 듣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은 그 한마디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께 기루에라도 모시고 가서 기분을 풀어 드리라고 부탁해야겠군.’

잘 정돈된 방……. 방 안의 호화로운 가구들이 그 주인의 신분을 알려 주고 있다. 그 방은 둘로 나뉘어 그사이에는 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발 앞에는 두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부복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약간 앞쪽에 있던 남자가 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금의위에서 비밀리에 조사하는 것을 저희들이 입수하여 조사한 결과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발 뒤쪽에서 상큼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금의위에서 하는 일이야 황실 모반 따위나 감시하는 걸 텐데, 그걸 입수해 봐야 뭐 좋은 게 있다고…….”

“아니옵니다. 실은 금의위에서 1년 전부터 비밀리에 무림을 돌며 고수 하나를 찾고 있었습니다.”

“어떤 인물인가요?”

“거의 현경의 경지에 이를 정도의 초고수인데, 갑자기 실종되었든가 아니면 살해되었다는 자입니다.”

그러자 발 안의 목소리가 흥미 있다는 듯 생기를 띠었다.

“그래 찾았나요?”

“예, 찾았기에 말씀을 올리는 겁니다. 무림에서 그 정도의 고수는 거의 무림에서 손가락에 꼽을 만큼 수가 적습니다. 갑자기 사망했다면 차리리 알아내기 편할 것이라고 속하는 생각했는데, 의외로 힘들었습니다.”

“그래 그가 누군가요?”

“마교의 부교주로 묵향이라는 인물입니다.”

“묵향?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예, 마교의 일은 거의 세상에 드러난 게 거의 없으니까요. 지금 마교가 조금 술렁거리고 있기에 과거와 달리 정보 입수가 가능했습니다. 문주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 마교는 교주와 장인걸 부교주가 다투고 있는 중이라…….”

알고 있는 사실을 주절거리자 발 안의 인물은 짜증스럽다는 듯 말했다.

“요점만 말하세요.”

“예, 속하가 입수한 정보로는 마교 사상 최강의 고수라고 합니다.”

“그런 자가 어떻게 밖에 드러나지 않았지?”

“그의 출신 때문이죠. 살수 출신으로 환사검(幻邪劍) 유백(柳伯)이란 인물의 마지막 제자입니다. 그의 실력은 사부를 넘어서서 최강의 고수로 올라섰지만, 살수라는 신분상 마교의 검술을 익힌 것이 아니라 정파 계열의 검법을 익혔기에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종의 이단자인 셈이군. 그래, 그자의 무공이 어느 정도이기에 금의위에서 흥미를 느낀다는 말인가요?”

“현경의 고수라 합니다.”

놀란 듯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현경이라고? 그럴 리가……. 죽을 때까지 정파의 무공을 익힌 자들도 오르기 힘든 것이 현경이거늘, 하물며 마교에서 엉터리로 배운 정파의 무공으로 현경에 오른단 말이오? 그의 사부인 환사검 유백이란 인물도 들어 본 적이 없고…….”

“묵향이 현경의 고수라고 추정되는 이유는 제령문의 뇌전검황을 벤 자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묵향의 사부도 마교에서는 환사검(幻邪劍)으로 통하지만, 일선에서 은퇴한 다음 3년 정도 무림을 떠돌며 이름을 날린 인물입니다. 독고구패(獨孤九敗)라는 명호를 들어 보셨을 겁니다.”

“그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무림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을 쓰러뜨리고 역시 갑자기 사라진 그자의 제자란 말인가?”

“예, 속하가 조사해 본 바로는 그가 은퇴하기 직전에 가르쳤던 마지막 제자가 묵향이란 인물이고, 또 마교에서 은퇴하여 3년 동안 그가 만년에야 창안해 낸 검법을 시험하려 무림을 떠돌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묵향이란 인물이 마교에서 살해되어 실종되었습니다.”

“살해되었다고? 설마, 현경의 고수를 누가…….”

“그의 무공이 너무 강한 것에 위기감을 느낀 교주가 제거했다고 합니다. 이건 미확인된 정보지만, 무림맹주도 그의 제거에 관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미 죽은 사람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금의위에서 수소문을 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속하가 관부 쪽으로도 조사를 했더니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묵향이 살아 있다는 겁니다.”

상당히 흥미를 느낀 듯한 음성이 날아왔다.

“살아 있다고?”

“예, 지금 옥영진 대장군 저택에 식객으로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국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국광이라 불리고 있는데, 처음 그가 발견되었을 때 무공에 의한 상처 외에도 급류에 휩쓸려 오며 극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전신의 혈맥이 파괴된 데다가 모든 기억까지 상실했다더군요.”

그러자 실망한 듯한 목소리.

“그런 폐인이라면 이용 가치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게 폐인이 아닙니다.”

“폐인이 아니라니?”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상처가 다 나았답니다.”

발 속의 여인은 경악한 듯이 되물었다.

“완전히?”

“예, 더욱 놀라운 것은 기억은 지워졌지만, 그가 익히고 있던 무공을 몸이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 옥 대장군의 배려로 황궁무고에 들어갔다 나와서, 지금은 거의 화경의 경지까지 회복한 상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미가 당기는군…….”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윽고 발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그를 이쪽으로 회유할 수는 있을까요? 우리 편으로만 만든다면 대단한 성과가 될 거예요.”

“이렇다 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구명(救命)의 은혜를 갚겠답시고 머물고 있는 자를 어떤 방법으로 끌어내겠습니까?”

“과거의 기억에 대한 정보를 미끼로 한다면?”

“그것도 어렵습니다. 한 달도 안 되어 금의위에서도 속하가 알아낸 사실을 모두 다 알아낼 겁니다.”

“금의위의 정보 입수를 방해할 수는 없나요?”

“그것도 힘듭니다. 잠시,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지체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은 무립니다.”

“아깝군. 근래에 드문 먹음직한 먹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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