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930)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날이 밝아서야 철진천은 연합군이 자신을 앞에 두고 밤 사이에 도망쳤다는 사실을 잠이 모자라 핏발이 선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그의 진노한 얼굴을 보며 주위에 늘어선 용장(勇將)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묵묵히 그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설마 그들로서도 적이 일부 병력으로 야습을 감행하고 그사이에 줄행랑을 놓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파오들 사이로 행색이 말이 아닌 부하들이 돌아다니며 시체들을 치우고 있었다. 그들 또한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지 눈이 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놈의 흑풍단 녀석들은 밤을 이용해 기습해 와서 거의 한 시진 반 동안이나 진 속을 누비고 다니며 휘저어 댔던 것이다.

흑풍단 놈들은 자신들의 표시라고도 할 수 있는 흑색 갑옷을 벗어 던지고 몽고병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었기에 누가 누군지 알 수도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몽고 장수 두셋이 덤벼도 힘들 정도로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럴 때 목숨을 부지하려면 구석진 곳에 숨어서 눈앞에 나타나는 사람은 무조건 공격하고 볼 일이다. 그래서 몽고병들의 피해가 더욱 컸는지도 모른다.

“오타이!”

그러자 덩치가 큰 눈매가 부리부리한 장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예.”

“1만을 줄 테니 연합군을 추격해라. 나는 정리가 되는 대로 본대를 이끌고 뒤따라가겠다.”

“예.”

“못된 자식들……. 타우가!”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지 씨근거리며 철진천이 부른 타우가라는 장수는 덩치는 그렇게 크지 않았으나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가죽 옷에 긴 활을 항상 휴대하여 자신의 활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답했다.

“예.”

“1만을 주겠다. 오늘 저녁에 기습한 자식들을 해치우고 나서 본대에 합류하라. 모두들 지금 떠나라!”

“예.”

오타이가 지휘하는 추격대 1만은 연합군의 퇴로를 쫓았다. 그리고 활의 명수 타우가가 이끄는 1만은 야습을 가한 흑풍단을 뒤쫓았다. 하지만 타우가가 추격을 시작했을 때 기습조는 이미 멀리 도망친 다음이었다. 그는 관지가 이끄는 천인대를 추격하다가 다음 날 그들이 이미 본대와 합류해 버린 것을 알고 별수 없이 되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철진천의 본대는 대강 시체를 수습하고 파오를 걷은 후 오타이의 추격대를 뒤따랐다. 의외로 연합군은 멀지 않은 곳에 다시 진을 치고 있었다. 철진천도 부근에 진을 쳐서 쌍방 간에 대치가 시작되었다.

싸움은 서로가 맞붙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상대가 수비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곳에 공격해 들어가면 오히려 막대한 피해만 보게 된다. 연합군의 진 부근에는 몽고 기병들의 난입에 대비해 목책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들은 무엇보다 몽고병들에게 없는 쇠뇌를 2백 틀이나 가지고 있다. 거기에 거의 1만에 달하는 보병들이 있다. 그중 5천은 궁병이니 연합군의 진에 돌진해 들어가 봐야 손해만 될 것은 뻔한 이치였다.

상대가 수비에만 전념하며 처박혀 있으니 철진천으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자들을 모아 일부 목소리 큰 병사들에게 욕지거리를 가르쳐서 상대방을 욕하게 하면서 도발해 봤지만 어찌 된 노릇인지 연합군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게 이상한 노릇이었다. 원래 전쟁을 오래 끄는 것은 수비하는 자들의 전매특허다. 왜냐하면 원정군은 필요한 군수 물자의 상당 부분을 본국에서 지원받아야 하지만 수비군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즉, 병참 지원을 받는 거리에서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기에 원정군에게는 속전속결이 절실했고, 수비 측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 전력이 달리면 지연전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원정을 온 상대가 오히려 지연전을 펼치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거기에 연합군에는 새로이 배신자 8만이 붙었으니 사기가 충천할 텐데…….

‘이쪽의 양 고기라도 다 떨어지기를 기다리나?’

철진천의 의문은 이틀째에 풀렸다. 거의 2천에 달하는 흑풍단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부족민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주민들이 많이 죽을수록 자신의 입지는 약화된다. 그로서는 이번 전쟁의 승리뿐만 아니라 원대한 꿈인 몽고 통일을 이루려면 우선 부족들의 협조가 있어야 하고 그 수는 많을수록 좋았다.

철진천은 전령으로부터 소식을 듣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치 못했다. 분노……. 송의 찬황흑풍단이라면 최고의 정예. 그 정예 군사들이 전사들이 빠져나간 틈을 타서 아이들과 여자들을 학살하고 있다니……. 그건 자신이 생각해도 필승의 전술임이 틀림없었고, 어쩌면 자신도 적을 향해 그런 방법을 쓸지도 몰랐다. 하지만 막상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상대에 대해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름은 어쩔 수 없었다.

철진천은 전력이 줄어듦을 알면서도 휘하 부족들의 전멸을 막기 위해 할 수 없이 적의 앞에서 부대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은 모두들 전장에 나와 있고 여자들이나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만이 남아 있는 마을을 중국 놈들에게서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전선 쪽이 급하다고 그들을 방치하면 부모와 처자를 놔두고 온 수하들의 자신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사기가 저하될 것이고, 최악의 경우 모반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래서 전력을 분산시킬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타이와 타우가를 불러와라.”

“예.”

오타이와 타우가가 도착하자 철진천은 잠시 뜸을 들이며 마음을 안정시킨 다음 자신이 지금 하려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한 번 더 생각해 봤다.

‘어쩔 수 없다.’

“너희들에게 각기 1만씩을 주겠다. 가서 부락들을 중국 놈들의 마수(魔手)에서 구해라. 부장(副長) 두 명씩을 뽑아 가라. 적은 송의 최고 정예다. 될 수 있다면 기습전을 전개하여 정면충돌은 피하는 것이 좋을 거다. 아직 습격당하지 않은 부락 주변에 매복하고 있으면 적이 나타날 거다.”

“예.”

“지금 떠나라.”

“예.”

타우가와 오타이가 예(禮)를 취하고 파오를 떠난 후 철진천은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격전으로 내게 남은 병사는 11만 정도……. 상대는 10만……. 하지만 그중에서 1만은 보병이니 제외한다면 11만 대 9만. 약간은 유리할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2만을 뺀다면 병력면에서 똑같아지는군. 그렇다고 조금만 보낸다면 격파당할 게 뻔하니 어찌 한다? 부처시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그로부터 4일 후.

오타이의 부대가 주둔 중인 부락에 5백 명 규모의 적이 나타났다. 오타이는 자신이 신처럼 받드는 철진천에게 받은 정예 부대 앞으로 적이 가까이 접근해 오기를 성질을 죽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적의 말이 걸어오는 속도가 굼뱅이처럼 느리게 느껴졌고, 그로서는 인내의 한계를 느낄 만한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상대는 일정 거리까지 접근해 오다가 갑자기 불꽃을 공중으로 쏴 올리더니 뒤돌아서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그로서는 아쉽게도 흑풍단은 무림의 고수들로 구성된 부대인지라 그들이 좀 더 다가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몽고병들이 뿜어내고 있는 살기를 느낀 것이다.

몽고병들은 평소 사냥할 때라면 이 정도로 살기를 뿌리지 않는다. 살기를 뿌리면 사냥감이 도망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 정도로 오감(五感)이 뛰어나지 않기에 매복해 있으면서 살기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수련을 거듭하면서 남달리 감각이 예민해지기에 그들의 기척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오타이는 그걸 몰랐기에 실수를 한 것이다.

‘저 자식들이 눈치 챘군.’

“공격하라!”

수천에 이르는 몽고 병사들이 눕혀 놨던 말을 일으켜 세워 재빨리 타고는 달려 나왔다. 그리고 일부 병사들은 그대로 최대한 시위를 당겨서 활을 쏘아 댔다. 오타이는 군사들을 재촉하느라 지평선 저쪽에 또 다른 불꽃이 올라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타이는 죽자고 부하들을 몰아붙였지만 매복을 눈치 채고 도망치기 시작한 적을 쉽게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타이는 한 가지에 희망을 걸고 적들을 필사적으로 추격했다. 자신들은 갑주를 입지 않았기에 말에게 부담이 적지만, 적은 두터운 갑주를 입은 자들이다. 그들은 어떨지 몰라도 말은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 죽자고 추격한다면 저쪽의 말이 먼저 뻗을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전개하는데, 갑자기 양 옆에서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좌우에 매복하고 있던 새로운 5백 명의 적이었다. 매복한 군사가 5백을 합쳐도 적은 1천 명밖에 안 되었기에 오타이의 병사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갑주로 무장한 1천 기를 쉽사리 해치울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한 시진 가까이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새로이 5백 기의 적이 가세했고, 또 한 시진이 지나자 또 다른 5백 기가 가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타이의 부대는 무공이 뛰어난 적들에게 압도당했다. 오타이는 맹렬히 칼을 놀렸지만 갑옷에 「十三(십삼)」이라는 중국어가 쓰인 자의 검 끝에 두 토막이 나고 말았다.

마지막 남은 몽고 병사의 목이 흑색 갑주를 입은 무사의 검에 떨어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던 한 무장이 입을 열었다. 그도 또한 흑색 갑주에 흑색의 안면 보호대를 해 분노에 찬 싸늘한 눈만을 드러낸 모습이었다. 다만 그의 갑주에는 「十(십)」이라는 숫자 하나만 덩그러니 쓰여 있었다.

“이 자식아! 늦었잖아. 뭐 하느라고 여기 집결시키는 데 두 시진(네 시간)이나 걸리는 거야.”

그러자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안장에 앉은, 흑색 갑주를 입은 사내가 느글느글하게 말했다. 그의 갑주에도 마찬가지로 「七(칠)」이라는 한 글자만 쓰여 있었다.

“노영(盧英), 그렇게 신경질만 낼 게 아니라니까……. 나도 수하들의 신호를 받고 150리(약 60킬로미터) 밖에서 열심히 달려왔어.”

“야, 겨우 150리 거리를 오는 데 두 시진이나 걸린다는 거냐? 수하들에게 물어봐라. 말을 타고 반 시간에 38리밖에 속도를 못 낸다는 게 말이 되는지.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공지(孔知), 너 이 자식! 바른대로 말 못해?”

독기를 품은 노영과는 달리 공지는 음흉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험험, 몽고 계집하고 뭐 하고 있었다고 차마 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 참 끝내 주는 싱싱한 애를 하나 봐서 말이야. 어찌나 쫄깃쫄깃하던지 그냥 올 수가 있어야지…….”

“…….”

느물거리는 공지의 태도에 질린 듯 노영은 아무 말도 못했다.

“너도 한번 고년을 보면 내 마음 이해할걸. 하하, 화 풀라니까……. 어찌 됐든 잘 끝났잖아.”

“적이 우리를 토벌하기 위해 어느 정도 병력을 보냈는지 알지도 못하는 판에 계집질이나 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냄새나는 몽고 계집하고, 우욱.”

노영은 일부러 구토가 난다는 듯한 시늉을 해 보이고는 공지를 다그쳤다.

“우리 둘이 순치(脣齒)와 같이 서로 돕지 않는다면 어떻게 적을 상대할 거야. 만약 한쪽이라도 전멸당하면 입술이 잘려 나간 이빨처럼 차가운 꼴을 당하게 된다구. 알아?”

“쩝…, 어찌 되었든 잘 풀렸으니까 이걸로 끝내자구. 그건 그렇고 겨우 1만을 잡고 몇 시간을 싸운 거야? 나라면 한주먹 거리도…….”

“네 녀석이 수하들을 늦게 데리고 와서 그렇다. 이제 됐냐? 처음에 5백 기만 거느리고 있는데 1만의 적이 갑자기 쏟아져 나오길래 놀라서 심장이 목구멍 위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다행히 살기 때문에 빨리 눈치 채서 최악의 사태는 당하지 않았지만…….”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부상자들 돌려보내고 다시 부락들을 부수러 다녀야지. 적도 병력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 보내 봤자 3만 안쪽일 거야. 이제 1만 명을 해치웠으니 2만이 남았다고 봐야지. 이제부터는 조심하라구. 계집들과 늙은이뿐인 허술한 부락이 아냐. 알겠어?”

“알았어. 나는 이제부터 좀 더 북쪽으로 갈 테니 나중에 전령을 보내라구.”

“나는 꾸준히 전령을 보냈잖아. 네 녀석이나 제대로 해!”

“하하하, 그럼 다음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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