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령의 보고를 들은 철진천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오타이에 이어 타우가마저 죽다니……. 적을 너무 과소평가? 아니지, 나로서는 그 상황에서 2만을 보낸 것도 무리였는데…….’
낙심한 철진천을 보며 옆에 서 있던 무장이 입을 열었다.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된 이상 죽기를 각오하고 마지막 한판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적의 기습에 만전을 기하라. 아마 조만간에 정면충돌이 벌어질 거다.”
“예.”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갔지만 연합군은 본격적인 군사 행동을 취해 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더욱 신경을 쓰는 것은 완전히 군사적인 공백 지대가 되어 버린 주변의 군소부락에 대한 정벌이었다. 한 달 정도가 흐르자 철진천의 인내도 한계에 다다랐다.
“이런 치사한 자식들. 군사적인 우위를 차지하고도 여전히 힘없는 부락민들 학살을 그치지 않다니……. 이러면 할 수 없다. 카타쿠이와 테쿠진을 불러와라!”
“예.”
이윽고 두 무장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듣고도 잠시 뜸을 들이던 철진천이 파오 안의 무장들에게 명령했다.
“쥬베르만 남고 나머지는 나가라.”
“예.”
철진천은 쥬베르라는 무장과 함께 카타쿠이와 테쿠진을 맞이했다. 카타쿠이와 테쿠진은 뛰어난 무장들로서 지금까지 연합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병력을 운용하고 있는 장수들이다. 그만큼 상황 판단과 대처 능력이 뛰어나고 무예도 출중했다.
“요즘 적의 동태는 어떤가?”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적은 우리를 말려죽일 작정인 모양입니다.”
“흠…, 너희 둘은 이제부터 나의 적이다.”
그러자 두 무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그러니까 이제부터 너희 둘은 각자 비밀리에 흑풍단과 접촉을 해라. 그리고 나를 배반한다고 하는 거야. 밖에서 연합군이 치고 들어오면 내응(內應)을 하겠다고 전하는 거지.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물어 오면 너희들의 부모와 자식들이 죽는 것을 좌시한 철진천을 우두머리로서 받들 수 없다고 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냐?”
“예, 그래서 적이 공격해 들어오면요?”
“최대한 적이 공격해 들어올 날짜와 시간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해. 그리고 저들의 편인 것처럼 가장해서 적을 안심하게 만들었다가 한 번에 적을 해치우면 되겠지.”
그러자 테쿠진이 좀 회의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요? 저희는 칸(汗)과 함께 있는데, 어떻게 적을 기습한다는 겁니까? 거기다 칸을 빨리 공격하지 않는다면 적이 금방 눈치 챌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 이렇게 하면 되겠군. 만약 정규전으로 붙는다면, 적들도 너희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바보들은 아니니까 너희들의 말을 믿고 야습을 감행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정규전이 시작되면 내가 중앙에 집단을 이루고…….”
그러면서 바닥에 나무 막대기로 쓱쓱 그림을 그렸다.
“너희들은 오른쪽과 왼쪽에 각기 1만씩을 독립적으로 거느리고 상대를 약간 포위하는 진형을 구축하는 거야. 7만의 중군, 좌우 양 날개에 너희들……. 이런 배치를 하면 적을 기습 공격하기가 좋잖아? 우리가 뒤로 밀리는 척하면 적이 따라 들어올 거야. 너희들이 가만히 있는다면 자연히 포위되는 형국이 되지. 이때 불시에 적의 양쪽을 공격해 들어가는 거야.”
옆에서 듣고 있던 쥬베르가 철진천의 말에 토를 달았다. 그는 철진천의 오른팔로서 뛰어난 무장이자 철진천의 오늘이 있기까지 도와준 모사(謀士)이기도 했다.
“하지만 적들에게 이쪽의 작전을 납득시켜야만 합니다. 적들을 이해시키지 않는다면 칸이 후퇴해도 바로 따라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거야! 전에 포위되어서 고생한 경험을 살려 좌우에 양 날개를 두어 쉽사리 포위되지 않는 진형을 택했다고 하면 되지. 그러면 적들도 같은 진형을 택하든지 아니면 통상 해 오던 식으로 한 덩어리가 되든지…, 뭐 알아서 하겠지. 어쨌든 적의 대장은 중군에 있을 테니까 중군만 격멸시키면 이긴 것이나 다름없어.”
그러자 카타쿠이가 머리 회전이 잘 안 되는 듯 질문했다.
“하지만 적들도 세 덩어리가 된다면 좀 복잡해지겠는데요…….”
그에 대해서 쥬베르가 설명했다.
“그때는 이렇게 하면 되지. 우리가 양 날개에 1만씩을 두면 적들도 아마 배신자들을 앞세워 1만씩을 좌우 날개로 삼을 거야. 그리고 카타쿠이와 테쿠진이 배반을 약속한 만큼 저들도 양 날개에 대해서는 형식적인 공격만을 가해 올 테지. 이때 너희들이 그들과 싸우는 척하고 있으면 갑자기 본진은 후퇴할 거고, 그때 그들은 너희들을 믿고 앞으로 나올 거야. 이때를 이용해 일부는 안심하고 있는 적의 날개를, 일부는 나를 뒤쫓아 들어온 적의 뒤통수를 치는 거야. 그걸 신호로 칸이 지휘하는 본대가 적을 협공하면 승리할 수 있지.”
쥬베르의 설명을 듣고 있던 철진천이 두 무장들에게 물었다.
“이제 알겠냐?”
“예.”
철진천은 소리죽여 웃었다.
“크크크크, 역시 치사한 방법에는 치사한 방법으로 받아치는 게 정석이지. 안 그런가?”
장군 그리고 멍군
옥영진 대장군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마길수 상장군이 불러주는 대로 지도 위에 사라진 몽고족 부락들을 표시하고 있었다. 사람이란 짐승은 원래가 나쁜 짓을 할 때 더욱 흥이 나기 마련인가……. 옥 대장군은 치사한 방법을 쓰기는 했지만 요즘 줄줄이 묶여 들어오는 계집들을 보면서 신이 나 있었다. 하나라도 더 많이 노인들과 계집들만 남은 부락을 초토화할수록 철진천의 세력은 약화되는 것이고, 조금 더 박살 내면 아마 몽고족은 한동안 중원 정벌은 꿈도 못 꿀 정도로 피폐해질 것이 뻔했다. 그런 그를 장각(張角)이 못마땅한 듯이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대체 적은 언제 공격할 겁니까?”
“왜? 이것도 재미있잖아.”
“단장님, 이건 정도에 어긋나는 거라구요. 이제 철진천도 밑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으니 시간 끌지 말고 빨리 공격하시지요.”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옥영진 대장군이 허연 수염을 푸들거리며 짜증을 냈다.
“시끄러워, 이 앵무새야. 요즘 들어 만날 때마다 그 소리라니. 그거 말고 좀 더 참신한 의견은 없는 거야? 그건 더 전기(戰氣)가 무르익어야 한다고 내가 얼마나 말했냐? 원래가 전쟁이란 것은 정도(正道)와는 거리가 먼 거야. 이기는 사람이 최고라구. 알면서도 속고, 속이고, 하는 거야.”
장각이 뿌루퉁한 얼굴로 서 있는데 공지가 막사로 들어왔다. 옥영진 대장군은 환한 얼굴로 공지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나. 이제 돌아다니는 걸 보니 몸이 많이 좋아진 모양이군.”
공지가 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뭐… 싸움을 하다가 화살에 맞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래 구멍 난 어깨는 좀 괜찮은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 몽고 놈이 어찌나 큰 활과 화살을 사용하는지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흥, 못된 짓이나 골라 하고 다니니까 하늘이 노해서 그런 거다.”
장각이 표독스럽게 쏘아붙이자 옥영진이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자네 같은 고수가 한낱 화살에 상하다니 이해할 수 없군.”
“그게 아니에요. 그 녀석이 강철로 된 살촉을 쓴 데다, 살기와 함께 슝하는 소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착완순으로 막았는데…….”
“그런데?”
“세상에… 그놈의 화살이 착완순을 뚫고, 갑옷까지 뚫은 다음 어깨에 박혔다니까요. 혹시나 하는 예감에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어깨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처음부터 착완순으로 안 막았다면 화살이 아예 관통해 버려 활촉을 뽑는다고 그 고생을 안 해도 됐을 텐데…….”
옆에서 푸념을 듣고 있던 장각이 대소(大笑)를 터트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하하하, 그것 참 고소하군…….”
“잔말 마. 그래도 나한테 활을 쏜 그 녀석을 반 토막 냈으니까, 복수는 한 거라구.”
“복수는……. 내가 듣기로는 그 녀석의 무예가 뛰어나서 반죽음 상태가 된 너는 힘도 못 쓰고 노영이 목을 벴다고 그러던데?”
“하여튼 죽은 거는 죽은 거잖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지.”
평상시 같은 느글느글한 공지의 태도에 마음이 놓이기는 했지만 옥영진 대장군은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자네, 너무 무리하지 말게나. 소문이 쫙 퍼졌더군. 어깨에 구멍까지 뚫린 주제에 계집을 너무 밝힌다구…….”
“하하하, 단장님도. 오랜만에 마음 놓고 쉴 때 즐겨야죠. 바쁠 때야 어디……. 흐흐, 마음은 굴뚝같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공지의 여탐(女貪)에 구역질이 난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장각이 말을 받았다.
“단장님,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 녀석은 원래가 잡식성이라 가리지를 않거든요.”
옥영진 대장군은 이제 한결 편해진 모습이었다.
“그 때문에 노영하고 한바탕했다며?”
“아니, 그 자식이 그런 거까지 고자질을 하다니…….”
“참게나. 노영이 한 말은 아니니까.”
이때 밖에서 전령이 뛰어오더니 옥영진 단장에게 포권하며 아뢰었다.
“몽고족 병사 한 명을 사로잡았습니다. 그자의 말로는 대장군께 아뢸 사항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 들여보내게나.”
“예.”
곧이어 한 명의 몽고병이 끌려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할 말이 있다고?”
옥영진 대장군의 추상(秋霜)과 같은 위엄에,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몽고 병사가 답했다.
“예, 저희 대장님께서 대인께 협조하겠다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약간 흥미로운 눈빛을 띠며 옥영진 대장군이 물었다.
“너의 대장은 누구냐?”
“예, 카타쿠이 장군이십니다.”
“카타쿠이? 카타쿠이가 누구지?”
옥영진 대장군의 질문에 옆에 있던 마길수 상장군이 답했다.
“예, 카타쿠이는 철진천의 뛰어난 맹장입니다. 전황을 재빨리 파악하고 임기응변이 뛰어난 자죠. 정면 공격에 능한 장수이기는 하지만 술수를 잘 못 쓰는 것이 흠인 인물입니다.”
옥영진 대장군은 적절한 정보를 얻어 내자 다시 몽고병을 향해 질문을 시작했다.
“그래? 협조라……. 무슨 협조?”
“예, 카타쿠이 장군께서는 장군의 부락이 습격당하도록 방치한 철진천이 더 이상 우두머리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장군의 의견에 많은 장군들이 동의하고 계십니다. 장군께서는 자신의 부모를 죽인 것은 문제 삼지 않을 테니 제발 처자식을 돌려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무조건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나쁜 소식은 아니군. 허나…….”
옥영진 대장군은 속마음과는 달리 굳은 표정으로 이런저런 질문을 계속했다. 병사에게 금품을 약간 주며 치하해서 돌려보낸 다음 곧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옥영진은 둘러앉은 천인대장급 장수들에게 이제서야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장들! 이제 때는 왔다.”
지루한 기다림에 진이 빠져 있던 장수들이 반색을 하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드디어 정면 승부를?”
“그렇다, 제장들! 날이 갈수록 저들의 세력은 점점 더 약해지고 있고 우리들의 세력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거기에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저들의 뛰어난 장수 하나가 협조를 요청해 왔다.”
그러자 어디까지나 조심스러운 제1천인대장 곽가(郭苛)가 신중하게 말했다.
“속임수가 아닐까요?”
“아니야, 나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자의 처자식이 우리의 손에 있다. 또 부근의 부락들이 계속적으로 약탈당해 자신들의 부모와 처자식이 유린되는데도 방관하고 있는 철진천의 무능함에 많은 장수들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 확실하다.”
관지가 물었다.
“그렇다면 언제 적을 칩니까?”
“협조를 요청한 장수와 약간의 협의를 거칠 필요가 있다.”
그러자 공지가 나섰다.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야습을 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회의를 느낀 적장들이 항복해 올 것입니다.”
“껄껄, 자네는 구멍 난 어깨나 치료하게나. 그 몸으로 어디 검이나 들 수 있겠나?”
옥영진 대장군의 놀림에 모두들 킥킥거리는데도 불구하고 얼굴색 하나 안 변하며 공지가 느긋하게 말했다.
“아무리 어깨에 구멍이 나도 몽고 놈들 죽이고 계집질하는 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자네의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언제나 만약이라는 상황이 존재하지. 그렇기에 야습은 무리가 있어. 적들이 본진을 비워 놓고 우리가 함정 속에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부근에 포진하여 화살을 퍼부으면 치명타를 입는 건 우리들일 수도 있다. 그러니 좀 더 확실한 것을 알아보고, 우리들에게 협조할 장수들이 얼마나 되는지 빨리 파악한 다음 공격하기로 한다.”
단장의 설명에 관지가 물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행동은 어떻게 합니까?”
“협의가 되는 대로 정면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그때 배신자들이 철진천의 후미를 공격한다면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일어날 것이고 그때 몰아붙이면 간단히 승리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옥영진 대장군의 자신 있는 말에 관지가 신중한 어조로 덧붙였다.
“대장군, 결전의 시간이 임박한 만큼 흩어진 제3, 10천인대를 빨리 불러들여야 할 것입니다.”
“서두를 것 없다.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과 패잔병 토벌도 필요하니 그들을 이리로 불러들일 필요는 없겠지. 노영에게는 계속 부락 약탈을 시키기로 하고…, 순욱(純旭)의 제3천인대만을 몽고군 후방 2백 리(약 80킬로미터) 일대에 넓게 포진하라 일러라.”
이번에는 곽가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저도 관지의 말에 찬성입니다. 아무리 퇴로 차단이 필요하다 해도 결전에서 8개 천인대만으로는 힘에 부칠지도 모릅니다. 노영만이라도 불러들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흐음, 제장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옥영진 대장군의 질문에 부단장인 마길수 상장군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결전에서는 초반의 기세가 중요합니다. 초반에 기세를 잃는다면 어쩌면 배반을 약속한 무리들도 승세를 타서 배반의 약속을 어길지도…….”
“좋아. 그럼 제10천인대는 불러들이도록 하라.”
“예.”
“자세한 것은 차후에 다시 밀사가 오면 결정하기로 하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