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다가오는 마의 손길
“도대체가 마음에 안 들어!”
신경질적인 마화의 말에 시큰둥한 반응이 왔다.
“뭐가?”
“…….”
“넌 왜 그렇게 불평불만이 많아?”
별일 아니라는 듯한 임충의 말에 신경질이 돋은 마화가 울컥하는 기분에 따지기 시작했다.
“그럼 불평 안 하게 생겼어? 지금 하는 꼴을 보라고……. 몽고 놈들이 도와주지 않아도 찬황흑풍단의 힘만으로도 몽고 놈들 9만 정도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야. 그런데 왜 대장군은 몽고 놈들하고 손잡아서 일을 처리한다고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거야.”
“그건 다 단장한테 생각이 있어서겠지.”
“거기에 저건 또 뭐야.”
임충은 마화가 가리킨 곳을 힐끗 쳐다본 다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긴 뭐야, 몽고 계집들이지.”
“저런 것들은 뭐 하려고 잡아들이는 거야. 매일매일 끌려 들어오는 저 처참한 계집들 모습만 봐도 먹은 게 올라오려고 한다구. 아예 본때를 보이고 싶으면 몽땅 다 죽여서 들판에 던져 놓든지. 그것도 아니고 질질 끌고 오면서……. 이 부근에 정찰 나가면 길가에 지쳐서 쓰러져 죽은 애들의 시체가 한둘이 아니라구.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지?”
“너무 신경 쓰지 마. 관지 대장의 말로는 조만간 결판이 날 거라고 그러던데…….”
“하지만 결판이 난다고, 철진천의 목을 벤다고 끝날 것 같지 않아.”
“왜? 적의 우두머리가 죽었는데, 왜 돌아가지 않겠어.”
“우두머리만 죽일 작정이었으면 흑풍단 내에서 고수 열 명만 뽑아서 암살하면 된다구. 그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 우리 대장…, 참내 국광이라고? 흥! 웃겨서…….”
“너 오늘 왜 그러냐? 신경이 보통 날카로운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대장 이름은 왜 들먹여.”
“그냥 대장, 대장하다가 얼마 전에 이름을 물었더니 국광이라니까 웃겨서 그런다. 흥! 뭐가 국광이야. 그런 이름도 있어? 그런 멍청하고 무공만 강한 나으리를 앞세워 너 같은 바보들 열 명 정도만 보내면 끝날 걸 가지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학살할 필요가 있냐고.”
“…….”
‘단단히 성질이 받친 모양이군. 오늘이 그날인가. 계집들은 그날이 되면 성질이 더러워진다고 누가 그러던데…….’
“거기다 공지, 그 파렴치한 녀석은 허구한 날 잡아 온 계집들 중에서 그래도 얼굴이 반반한 애들 골라 가며 계집질을 해 대는데, 수하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참내 얼굴 뜨거워서……. 겨우 몽고 녀석이 쏘는 화살도 못 피해서 어깨에 구멍이 난 주제에 낯짝이 두꺼워도 유분수지……. 흥!”
드디어 이성을 상실한 마화가 상관 욕까지 해 대자 임충은 얼굴색이 핼쑥해졌다. 국광이야 성질이 좋은 것을 알기에 혹시나 이런 욕설 듣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위인인 것을 알지만 공지 천인대장의 귀에 욕설이 들어갔다가는 세상 종친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너… 오늘 말조심 해야겠다. 안 되겠다, 이리 와.”
“왜 그래?”
“나하고 같이 순찰이라도 돌자구. 말을 타고 달리면 기분이 풀릴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퍽!
임충은 짐짓 엄청나게 고통스럽다는 듯 배를 주무르며 우는 소리를 했다.
“윽! 빌어먹을, 손은 매워 가지고……. 아이고, 나 죽는다.”
“뭘 엄살떨고 있어.”
“이봐, 그러지 말고 저리 가자. 응? 여기는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이라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내 입으로 내가 말하는데 뭔 참견이야.”
“제발…, 나 좀 살려 주라. 정 그렇게 눈 밖에 나고 싶으면 너 혼자 나라구. 나까지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려고 하지 말고…….”
“이게 내뱉으면 다 말인 줄 알아?”
퍽!
임충은 가슴팍을 주무르면서 투덜거렸다.
“아구구구…, 오늘 재수 더럽…….”
‘이년하고 싸워 봐야 나만 개망신이고 우선은 이 위기를 잘 피해 나가는 게 최선의 길이지…….’
“…아니지. 마화야, 그러지 말고 나한테 술이 약간 있는데, 마유주 말고……. 혼자 마시려고 꽁쳐 놓은 것이 조금 있으니까 그거 마시면서 얘기하자, 응?”
“술?”
“그럼, 아주 향기로운 중원 토종 술이지. 그리 가자구. 여기서 떠들어 봐야 답도 안 나오니까 이럴 게 아니라 한잔 쭉 하면서 얘기하면 말도 술술 잘 나오고 좋잖아.”
“좋아, 가지. 가자구.”
‘끙, 무공이 비슷하니 간단하게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치고받자니 나만 못된 놈 되고……. 아고고, 애꿎은 귀한 술만 작살나는군…….’
마화와 임충이 이름하여 낮술(?)을 마시고 있을 때 국광은 10여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순찰을 돌고 있었다. 몽고군은 처음에는 꽤 당당한 진용을 자랑했지만 뛰어난 일부 장수들과 2만의 병사가 사라지고 거기에 자신의 가족들이 어찌 되었는지 소식도 불투명한 지금에 이르러 기세가 많이 꺾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순찰을 얼마나 돌았을까……. 국광은 미세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적인가? 아군인가? 대단한 고수다.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국광이 아무렇지도 않게 주위를 한번 쓱 둘러보며 수하들의 얼굴을 살폈지만 숨은 자의 기척을 눈치 챈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군. 아군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이쪽에 기척을 알리는 것이 도리……. 아직까지 조용하다는 것은? 적이 분명하겠군. 하지만 나로서도 숨어 있는 대략적인 위치만 알 수 있을 뿐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니, 놀라운 녀석이다.’
국광은 상대의 기습에 대비하여 살며시 옆에 있는 나뭇잎 한 장을 따서는 냄새를 맡아 보는 척했다. 그러면서 일부러 뒤따르는 수하에게 말을 걸었다.
“이게 무슨 나무냐?”
“잘 모르겠습니다. 나무의 이름은 알아서 뭐 하시게요?”
“모르면 됐다.”
국광은 얼렁뚱땅 답을 흘리며 상대의 위치를 잡아내기 위해 공력을 집중했다. 천라지청술(千羅知聽術)! 황궁무고에서 익힌 기술로서 미세한 소리로 상대의 위치를 잡아낼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다. 국광은 혹 잠결에 이상하게도 적이 어디에 있는지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잠결이 아니라 그런지 적의 위치를 알기가 힘들어 황궁무고에서 배운 술법을 쓰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국광 일행은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거의 10장(약 30미터) 정도 나갔을까……. 어느 순간 미세한 음향이 국광의 천라지청술에 잡히면서 그 위치가 파악되었다.
“갈!”
국광은 최대한, 하지만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만 공력을 끌어올려 나뭇잎을 쏘아 보냈다. 그가 사용한 기술은 황궁무고에 있는 암기술의 하나였는데, 나뭇잎이 쏘아져 들어간 위치에서는 이상하게도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잘못 알았나? 토끼일 수도 있지.’
갑자기 국광의 외침 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바위라도 부술 기세로 쏘아져 나가자 수하들이 저마다 무기를 뽑으며 주위를 경계했다. 하지만 아무런 동정도 없자 국광의 눈치만 보며 무기를 다시 거둘 것인지 망설였다.
“내가 신경이 좀 날카로워져서 실수를 한 모양이다. 모두들 무기를 거둬라.”
“예.”
국광 일행이 멀어져 간 다음 숲 속에서 한 인영(人影)이 나타났다. 그자는 짙은 녹의를 입었는데, 정확히 심장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니, 심장 부분의 옷에만 구멍이 뚫려 있었고, 기이할 정도로 심장에 난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 가고 있었다. 그 괴인도 그 상처에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과연 부교주가 확실하군. 지금까지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기억을 상실해 본교에서 익힌 모든 무공을 잊은 게 분명한데, 적엽상인(迪葉傷人)을 시전하다니……. 적엽상인은 한낱 나뭇잎으로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무학인 만큼 내공의 조화로운 통제가 필요한데, 역시 마교 사상 최강의 고수라 불릴 만하군. 심장에 칼을 맞고 전신 혈맥까지 파열된 상황에서 간신히 도망쳤는데 벌써 몸을 완전히 회복했다는 말인가?”
짙은 녹의를 입은 괴인은 점차 속력을 내기 시작하더니 엄청난 속력으로 경공을 전개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괴인이 그곳의 수풀을 뒤적이자 그 안에는 열 마리의 전서구(傳書鳩)가 들어 있는 큼지막한 새장이 있었다. 그는 전서구를 옆에 두고 주저앉아 작은 붓과 종이를 꺼내어 깨알만 한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묵향 부교주가 살아 있음이 확실함. 현재 흑풍단의 백인대장으로 근무 중. 묵혼검 대신 호화로운 검을 차고 있기에 부교주의 얼굴을 모른다면 추적이 불가능함. 적엽상인의 무공으로 속하의 심장을 관통시켰는데, 그걸 기초로 추측컨대 황궁의 무학을 익힌 것 같고 본교에서 익혔던 예전의 무공은 모두 잊은 것 같음. 그 내력이나 무공으로 보아 그는 화경 정도의 경지를 회복한 것으로 추측됨. 속하의 실력으로는 묵향 부교주가 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10장 내로 들어설 수 없었음. 기억은 잃었지만 몸이 예전처럼 반응하는 듯함.
天(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