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자
만리장성은 과거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찬란한 제국인 부여와 고구려를 막기 위해 건설되었다. 상대가 기마 민족이라 기동력이 뛰어나 방어에 곤란을 겪었는데, 성을 세우고 나니 그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자 거기에 재미를 붙여 점차 서쪽으로 확장해 나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북성(河北省)의 윗부분 동쪽 끝 바다에서 시작하여 산서성(山西省), 섬서성(陝西省)의 북단(北端)을 지나 길쭉한 감숙성(甘肅省)의 서쪽 끝까지 이어져 거의 만 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이 건설된 것이다.
티베트에 근거를 둔 서융족(西戎族)이나 여타 남만족(南蠻族)들은 기마 민족이 아니었기에, 건설하는 데 있어 엄청난 국고를 낭비하는 장성을 더 이상 확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만리장성은 감숙성을 지나 청해성 윗부분에서 끝난다. 대신 청해성(靑海省), 사천성(四川省), 운남성(云南省)에는 만리장성에 비해서는 강도가 많이 떨어지는 방어선(防禦線)을 가지고 있었고 이 정도로도 그들을 물리치는 데는 충분했다.
감숙성의 성도(省都)이자 최고의 군사 도시 난주(蘭州)로 뻗어 있는 잘 발달된 관도(官道)를 따라가다가 보면 난주로 가는 관문이라 불리는 무산(武山)이 나온다. 이곳은 사천성에 있는 무산(巫山)과는 달리 산(山)이 아니라 서부 장성에 군수 물자를 공급하는 보급의 통로이자 상행위가 융성한, 거대한 상업 도시이다. 무산 방향으로 흑풍단이 이동 중이라는 것은 그들이 감숙성을 지나 청해성의 산골에 틀어박힐 생각이든지 아니면 좀 더 나아가 북방의 이민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세운 만리장성이 없는 청해성을 지나 티베트 쪽으로 이동할 생각임을 엿볼 수 있다.
티베트는 산이 많고 지형이 험준하기에 아마도 그들이 자그마한 요새를 건설하고 새로이 정착하기에 알맞을 것이다. 몽고 같은 평야에 정착하면 목초를 하기에는 비교적 유리할지 모르지만 흑풍단이 원체 이번에 해 놓은 짓거리가 있어서 몽고인들이 잘 먹고 잘살라고 가만 놔둘 가능성이 없었다. 이 정도가 관도를 따라 말을 달려오며 묵향이 생각한 전부였다.
시간도 적당히 점심시간을 넘어가고 있었고, 때마침 작은 촌락이 나왔기에 묵향은 주저 않고 객점을 찾아들었다. 자그마한 마을치고는 꽤 많은 식당과 여관이 있었기에 묵향은 그중 그런대로 큼지막한 곳으로 들어갔다. 묵향도 이제는 무림초출이 아닌 만큼 객점에 들어서자마자 암암리에 모든 분위기가 느껴졌다. 비록 챙이 깊은 죽립을 쓰고 있어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그에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모든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식당은 작지 않은 규모인데도 꽤 붐비고 있었고, 묵향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간소한 음식을 시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때 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처음 들어설 때부터 이 식당 안에서 최고의 고수라고 생각되는 인물이 앉은 자리일 것이다. 그 때문에 묵향이 그들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았으니까……. 이때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묵향의 정신을 그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소녀의 음성이었는데 한 단어가 그의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오빠는 왜 흑풍단이 있는 곳에 가려는 거죠?”
그러자 제법 위엄을 가장한 점잖은 듯한 목소리.
“그야 그들에게는 죄가 없기 때문이지. 나는 연(蓮)아가 생각하는 대로 멍청하게 그들을 도와 싸우러 가는 게 아냐. 그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 주려고 할 뿐이야.”
그러자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여자의 목소리는 처음 목소리와는 달리 조금 더 차분했다.
“뭘요? 지금 그들의 진로를 보면 티베트로 갈 거 같던데요?”
“언니 말이 맞아요. 티베트는 산세가 험해서 숨어 들기도 좋잖아요. 그렇다고 남만 쪽으로 도망갈 생각이었다면 사천성이나 운남성 쪽으로 갔을 거 아니에요?”
“바로 그거야. 그게 문제라는 거지.”
“뭐가요?”
“만약 그들이 산세가 험한 청해성이나 사천성에 그냥 숨어 있다면 모르겠는데 티베트로 도망가면 오히려 더 위험하게 되지.”
그러자 좀 의아해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서요? 국외로 도망치는 게 더 안전하잖아요?”
“그게 아니야. 너는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고 있어. 그들이 국내에 숨는다면 이건 송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겠지?”
“예.”
“지금 그들을 격파할 만큼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원수부(元帥府)가 있냐?”
“무슨 말이에요? 5대 원수부(元帥府)의 군사력은 최강이라구요.”
그러자 거만한 목소리의 남자가 뽐내듯이 말했다.
“쯧쯧…, 평상시는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지. 지금 어림군(禦臨軍)의 군사력은 거의 대부분 요와의 전쟁에 출동해 있지. 그러니 남은 군사력은 거의 없다고 봐야 돼. 지금 어림군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곳은 정북원수부와 정서원수부뿐인데, 정서원수부는 들리는 소문으로 남만족과의 사이도 안 좋고, 또 산적 토벌 등으로 병력을 뺄 수 없어서 대요전쟁에도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정북원수부뿐인데, 그 20만 정예군을 빼 버린다면 만약 요와의 전쟁이 힘들어지면 그 뒷감당을 누가 할 거야? 그렇다고 향방군(鄕防軍)을 동원하자니, 그들의 힘으로는 흑풍단을 막을 수 없지. 거기에 각 군영에 있는 장수들이 안 그래도 대부분의 병력이 요와의 전쟁에 보내진 마당에 몇 안 남은 수하들을 잃고 싶겠어? 그냥 쉬쉬하며 모른 척하겠지. 하지만 그들이 티베트로 도망치면 문제가 완전히 달라진다구. 티베트 쪽에 압력만 가하면 되는 거야. 만약 그들의 목을 가져다 바치지 않으면 전쟁을 벌이겠다고. 그러면 티베트에서는 고수들을 모아서 그들을 토벌할 거고, 오히려 국내에 남은 것만 못한 사태가 벌어진다 이 말이야.”
오랜만에 잘난 척을 좀 해 봤지만, 여동생들로부터 돌아온 것은 애교 어린 야유였다.
“와! 오늘 오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와우! 오빠가 그런 생각까지 다 하고…, 다시 봤어요.”
“이 녀석들이!”
아마도 남매들인 듯, 그들은 목소리를 낮춰 도란도란 얘기하고 있었지만 대화에 흥미를 느낀 묵향의 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묵향은 이들을 우연히 만난 것이 하늘의 도움으로까지 느껴졌다. 우선 오빠라는 자의 말을 들어 보니 묵향보다는 비교적 정보에 밝은 것 같았고, 또 제법 생각이 깊은 인물인 듯했기 때문이다.
‘좋았어! 저 녀석만 따라가면 되겠군.’
묵향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대화는 이어졌다. 조금 차분한 여자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건 그렇고 샛길로 샌 걸 알면 아버님이 오빨 가만두지 않으실 텐데 어쩔 거예요?”
“괜찮아. 그래 봐야 한 며칠 면벽수련(面壁修練)밖에 더 시키시겠냐?”
“문제는 저희들이라구요. 참, 오빠 이렇게 하면 어떨까?”
“뭐 좋은 수라도 있냐?”
“이왕에 벌 받는 거, 오빠가 다 덮어 쓰는 거야.”
“뭐시라? 이 녀석이…….”
그러자 일부러 애교스럽게 치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오빠가 우리를 대신해서 고생을 해야지. 안 그래 언니? 오빠 좋다는 게 뭔데. 난 죽어도 벽만 보고는 못 살아. 그러니까 오빠, 응?”
“너한테는 못 당하겠군. 좋아, 내가 다 책임지지. 모든 게 다 내 탓이다. 에구… 이것들을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건 그렇고 황화루(黃華樓)에는 언제 갈 거예요?”
“얘는 누가 초출(初出) 아니랄까 봐…….”
“거긴 볼일 끝난 다음에 가자.”
그러자 짐짓 투정하는 말투…….
“에이잉, 오빠. 난 빨리 가 보고 싶단 말야. 황화루의 절경이 얼마나 소문이 나 있는데……. 무림인이라면 가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들었다구요.”
“네 말은 꼭 거기 안 가면 무림인이 아니라는 투로 들린다.”
“안 그래? 언니하고 오빠도 다 가 봐 놓고는…….”
그러자 젊잖게 타이르는 목소리…….
“아냐, 거기는 경치야 좋지만 아주 비싼 곳이라 무림인보다는 고관이나 부호의 자제들이 많이 들르는 곳이지. 여기 경치도 이 부근에서는 아주 유명하다구. 그래서 근처에 여관이나 식당들이 많잖아. 황하(黃河)의 절경이 많은 곳은 청해성이지만 감숙성도 그에 못지않은 명소들이 많지. 여기도 그중의 하나이고…….”
“그래도 난 이번에 청해호(靑海湖)를 보고 싶다구요.”
“글쎄 나중에 보여 준다고 해도 그러네……. 잔말 말고 밥이나 먹어. 빨리 먹고 나가야지.”
“흥!”
남매들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대금을 지불한 뒤 말을 타고 식당을 떠났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자신들 뒤에 검은 혹이 하나 붙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힐끗 뒤를 쳐다본 엷은 홍의를 입은 여자가 그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오빠… 뒤에 쫓아오는 사람이 있어요.”
“알고 있다.”
“알고 있었어요?”
“응… 처음엔 몰랐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식당을 나선 다음부터 따라왔어.”
그러자 매화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옅은 청의를 입은 여자가 뒤를 힐끗 보면서 말했다.
“오빠, 저 검은 옷을 입은 사람 말이야?”
“응.”
홍의를 입은 여자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허리에 찬 도(刀)라든지 뭐 낡은 흑의를 보니까 그렇게 대단한 인물 같지는 않은데……. 우리들 말을 엿들은 관부의 밀정(密偵)이 아닐까요?”
“흠, 그럴지도……. 아무래도 훈련을 받은 밀정이라면 따돌리기는 힘들 거야. 기회를 봐서 해치우는 게 좋겠지.”
그러자 청의를 입은 여자가 흥미가 있다는 듯 물었다.
“언제요?”
“내가 말했지, 기회를 봐서라고.”
“피… 저런 밀정을 없애는 데는 저 혼자 해도 충분하다구요.”
그러자 남자가 신중하게 말했다.
“아니야, 또 다른 밀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또 살인을 백주 대낮에 할 수도 없잖아. 인적이 드문 곳에서 숲 속으로 유인해서 없애야 돼.”
그들은 뒤따라오는 밀정을 조심해서 힐끔거리며 도란도란 작전을 짠 다음 이윽고 행동을 개시했다. 왼쪽으로 인적이 없는 오솔길이 나 있는 것을 본 그들은 태연하게 그리로 말을 몰아 들어갔다. 오솔길로 들어서서 2각 정도 갔을까……. 남자는 말의 고삐를 청의를 입은 소녀에게 건네준 다음 몸을 날려 나뭇가지를 밟고는 그 탄력을 이용해서 4장(약 12미터) 정도 떨어진 큼지막한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로 다시금 몸을 날렸다. 그 모든 일을 순간적으로 해치우는 것으로 보아 그 남자는 대단히 오랜 시간 고련(苦練)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나무 위로 몸을 날린 상태에서 청의를 입은 소녀는 앞으로 나가면서 홍의 여자에게 말했다.
“오빠의 신법은 정말 완벽해. 난 언제쯤 저 정도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하지만 돌아오는 건 비웃는 듯한 목소리…….
“꿈 깨거라, 얘야.”
“언니는……. 언젠가는 나도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사람을 어떻게 보고…….”
“후훗, 토끼 머리에 뿔날 때?”
“흥! 하여튼 미워 죽겠다니까……”
“여기서 기다릴까?”
“응.”
두 여자는 각자 말에서 내린 다음 말들을 끌어다가 도망 못 가게 나뭇가지에 묶었다. 그런 다음 말안장에 끼워 뒀던 검을 검집째로 꺼내어 손에 들고는 조심스레 수풀 사이에 숨어서 멀찍이서 살짝 따라오는 밀정을 기다렸다.
청의를 입은 소녀가 자신이 가진 검을 힐끗 바라보더니 나즈막이 힘없이 말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그녀의 손은 흥분 때문인지 아니면 살인이라는 미지의 행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걸 눈치 챈 홍의 소녀는 약간 놀리는 투로 속삭였다.
“오빠가 힘쓰면 네 차례는 오지도 않아. 괜히 맘 졸이지 마. 괜히 흥분해서 함부로 날뛰다가 오빠한테 상처 입히지 말고.”
“언니는? 그러는 언니도 살인은 처음이잖아.”
두 여자가 이상하게도 나타나지 않는 밀정을 기다리다 지쳐 서로를 헐뜯고 있는 사이, 그녀들의 오빠도 황당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흑의를 입은 밀정은 식당을 떠난 다음 언제나 30장(약 90미터) 거리에서 느긋하게 따라왔다. 그래서 생각해 낸 꾀가 자신은 나무에 남아 밀정의 퇴로를 차단한 후 자신이 직접 해치우든가, 최악의 경우 합공까지 고려하여 두 동생이 매복을 한 건데, 이놈의 밀정이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에게서 30장 거리에서 멈춰 서더니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대단한 놈이군. 고수 같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추격술에 대단히 능한 놈인 모양이군. 잘못 걸렸는데……. 어떻게 한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남자는 이윽고 마음을 정했는지 몸을 날려 3장쯤 아래쪽에 위치한 가지를 밟더니 그 탄력을 이용해 몸을 날려 거의 10장을 날아가 재차 다른 가지를 밟고 튀어 오르는 수법으로 삽시간에 흑의인의 뒤쪽에 떨어졌다. 정말이지 놀라운 신법(身法)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뒤로 돌아서는 밀정을 향해 칼을 뽑아 들었다.
챙―.
경쾌한 쇳소리를 내며 검을 뽑은 남자는 즉시 밀정의 목줄기를 겨누었다. 하지만 아직도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반항하지 않는 자를 도살할 수 없다는, 얄팍한 정파인으로서의 자부심이었다.
“칼을 뽑아랏!”
“왜 그러시오?”
“왜 그러는지는 네놈이 더 잘 알 게 아니냐?”
그런데도 상대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자 다시금 말했다.
“우리 뒤를 미행한 이유가 뭐냐?”
“흑풍단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소?”
“바로 그거야. 가긴 가겠지만 꼬리를 달고 갈 수는 없지.”
“내가 따라가서 안 될 일이라도 있소?”
“그들은 쫓기는 몸, 밀정을 달고 가면…….”
“나는 밀정이 아니오.”
“그러면 왜 미행하는 거냐?”
“난 흑풍단과 인연이 있기에 그들을 도와주러 가는 길이오. 그런데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니……. 그대들이 잘 아는 거 같아 따라가면 될 거 같아서 뒤따르던 길이오. 사실 내가 밀정이라면 이렇게 대놓고 미행하겠소?”
“하긴…, 그 말도 일리는 있군.”
이때 두 명의 여자들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갑자기 오빠가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매복한 위치에서 뛰쳐나온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싸우고 있을 거라 생각한 오빠가 검을 뽑은 상태이기는 했지만 밀정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그러나 남자는 그 말을 무시하고 밀정인 듯한 인물에게 물었다.
“하지만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증표라도 있나?”
“증표 같은 건 없소.”
“그렇다면 네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냐?”
한참 생각하던 밀정인 듯한 남자가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나는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니까, 당신들이 나를 정 못 믿겠다면 점혈(占穴)을 하든지 해서 함께 가면 되지 않겠소?”
“흠…, 그게 좋겠군. 대신 도착해서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면 목숨이 없어진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소.”
“좋다.”
그와 동시에 남자는 몸을 날려 흑의인(黑衣人)의 혈도를 찍었다. 상대가 마음대로 하란 듯이 자세를 바로 하고 있었으므로 점혈은 손쉽게 이뤄졌다. 그래도 남자는 못 믿겠는지 몸을 날려 숲 속으로 들어가서 말들을 끌고 와서 자신의 말안장에 있던 수갑을 꺼내서 채웠다. 그 남자는 정파의 후기지수답게 무림을 돌아다니다가 나쁜 짓을 행하는 놈들을 보면 잡아서 관가에 넘기기도 했다. 그렇기에 언제나 수갑 몇 개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런 상황에서 사용하게 될 줄은 자신도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는 수갑을 채우면서 말했다.
“이 수갑은 그냥 강철이 아니라 오철(烏鐵 : 검은빛이 나는 합금의 일종으로 현철보다는 강도가 많이 떨어지고 백련정강보다는 튼튼함)로 된 것이니 행여 풀 생각도 하지 마라.”
“나도 풀 생각은 없소.”
남자는 젊은 나이에 비해 강호 경험이 풍부한지 흑의인의 말안장이나 품속을 뒤져서 행여나 연락에 사용될 만한 도구가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품속에 있는 지갑에는 25냥의 은자와 동전 40냥이 달랑 들어 있었고, 비수라고 부르기에는 좀 긴 수수한 단검 한 자루, 괴이한 문자가 쓰인 자그마한 천 한 장과 용(龍)이 살아있는 듯 잘 조각된 작은 옥패(玉牌) 하나, 그리고 소금이 들어 있는 작은 주머니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리 뒤져도 아무것도 없었다.
‘웬만큼 무림에 자신 있는 자들도 이렇게 홀가분하게 하고 다니지는 않는데 하다못해 그 흔한 표창 하나 없다니……. 이상하군?!’
남자는 상대의 옷소매까지 뒤적이며 의아한 듯이 물었다.
“가진 것이 모두 이것뿐이오?”
“그건 왜 묻소?”
“혹시 빨리 만나지 못한다면 꽤 멀리까지 가야 하는데 근처 여관에 짐을 맡겨 놓은 게 아닌가 해서 묻는 거요.”
“짐은 이게 다요. 그리고 혹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도 못마땅하다면 일단 그대가 보관하다가 도착해서 돌려줘도 무관하오.”
혹시나 해서 검집에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가 살펴보는 중에 그런 말이 나왔으므로 그 남자로서는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할지도 모를 일을 저질렀다. 더 이상 살펴보지 않고 그냥 돌려준 것이다. 만약 그가 검집 속의 검이나 비수를 꺼내 봤다면 상대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철(玄鐵)이란 물건은 아주 귀하고 값지기에 웬만큼 좋은 검들도 날 부분을 보강하기 위해 조금씩 쓸 뿐, 아예 검 전체를 현철로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만일을 대비해서 비수는 흑의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신의 안장에 찔러 넣었다.
몸수색이 끝나자 통성명을 했다.
“이렇게 번잡하게 해서 죄송하오. 하지만 이 일은 꽤나 기밀을 요하는 것이고, 또 그대를 완전히 믿을 수 없어서 초면에 실례를 한 거니 용서하시오.”
“별로……. 상관없소이다.”
“저는 무림에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일진검(一鎭劍) 초우(礎雨)라 하고 이 아이들은 초연(礎蓮), 초희(礎曦)라 하오.”
“나는 묵향(墨香)이라 하오. 별호 따위는 없으니 그냥 그렇게 부르시오.”
“초면에 실례인 것은 알지만 이상한 이름이군요.”
“하하하, 뭐…….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니 성 따위는 없고, 그냥 묵향이외다. 얼마 전까지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국광이란 웃기는 이름으로 불렸으니……. 참, 흑풍단에서는 국광이란 이름만 알고 있으니 혹시나 그대가 먼저 만난다면 그렇게 말하면 알 거요.”
‘이름이 두 개라……. 어쨌든 수상한 인물이군. 아무래도 좀 더 주의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