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희(礎曦)는 근래 들어 새로이 길동무가 된 인간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왜 마음이 편치 못하냐고? 그녀의 나이도 이제 스물하고도 두 살이 되어 버린 노처녀에 가까운 데다 무림초출이라 은근히 이번 기회에 근사한 남자들을 많이 사귀고 싶었고, 또 그중에서 기회만 된다면 장래의 반려자감도 물색하고 싶었다.
원래가 둥지 안에서 고이고이 자라난 금지옥엽(金枝玉葉)이었으니 타인들과 왕래나 교류도 거의 없었고, 자신의 집안 자체가 이름난 무가(武家)였기에 그 잘난 남자라고는 오빠 말고는 거의 접해 보지 못한 가련한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길동무로 통칭 남자라고 불리는 꽤 재미있는 동물이 한 마리 생겼으니…….
“그럼 대협께선 그렇게 고수(高手)란 말이에요?”
그러자 상대의 자랑스런 대답.
“그럼! 나보다 강한 사람은 이 세상에 거의 없다고 봐도 무관하지.”
‘말도 안 돼!’
“그렇게 대단한 대협께선 사문(師門)이 어떻게 되세요?”
“내 사문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구. 요즘 들어 그 녀석들 이름만 나와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해서 가급적 이름을 거론하고 싶지가 않아.”
상대가 어물쩍 넘어가려 들자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사문과 별로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나만 보면 죽이려고 드니까…….”
“파문(破門)…당하셨어요?”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 파문은 안 당했군.”
“당신 사부님은 누구신데요?”
“유백이란 분이지. 지금 살아 계신지도 모르겠어.”
‘유백이란 이름도 처음 듣는군. 그럼 확인해 볼 건 한 가지뿐이지…….’
“그렇다면 대협의 절기(絶技)는 뭐예요?”
“음, 절기랄 것도 없지만 나는 검을 즐겨 쓰고 무상검법(無上劍法)이 특기지.”
‘들어 본 적도 없는 허무맹랑한 검법 이름이군.’
“그 외에는 어떤 무공들을 익혔어요?”
“그 외에? 엄청나게 많이 익혔지.”
“얼마나요?”
“한… 만(萬) 종류 정도 되나? 기억도 안 나는군.”
‘점점 더…….’
“그렇다면 그중에서도 강한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예를 들어 몇 가지…….”
“음…, 수라월강도법(修羅月剛刀法), 천강혈룡검법(天降血龍劍法), 소수마공(素手魔功), 혈수마공(血手魔功), 회풍무류검법(廻風舞柳劍法), 육합검법(六合劍法), 태청검법(太淸劍法), 태허도룡검법(太虛渡龍劍法)…….”
‘어쭈, 이거 완전히 정파와 사파의 유명한 무공이라는 무공은 다 말해 대는군. 기가 막혀서…….’
상대가 계속 검법 이름들을 나열하자 더 이상 못 참고 막았다.
“그만… 됐어요. 저희 아버님께서 곤륜파(崑崙派)와는 아주 친분이 깊으셔서 우연한 기회에 태허도룡검법(太虛渡龍劍法)을 조금 배웠는데……. 잘 아신다니 한번 구결(口訣)을 말해 보세요.”
“구결? 가만있자…, 구결이 뭐더라……. 허허, 잊어버렸어. 너무 많이 외우다 보니 잊을 수도 있지. 사실 중요한 건 구결이 아니니까.”
상대가 또다시 어물쩍 넘어가자 다시금 꼬치꼬치 물었다.
“그럼 자신 있게 구결을 외울 수 있는 무공이 있어요?”
“가만있자… 이건 아니고……. 응, 음…, 이것도 아니군……. 끄응, 글쎄…, 원체 오래전 일이라 하나도 제대로 기억이 나는 게 없는데…….”
‘휴우, 저러면서 나더러 믿으라고? 웃겨서…….’
“그럼 대협께선 글은 좀 읽으셨어요?”
“글? 천자문(千字文) 같은 거 말인가?”
“아뇨. 소학(小學)이나 대학(大學) 같은 거 말이에요.”
“아주 오래전에 소학은 읽은 적이 있지. 그리고 몇 권 더 읽었는데, 원체 오래전이라 책 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군. 무인(武人)으로서 이 정도 읽었으면 많이 읽은 거야.”
‘아예 무식한 놈이라고 광고를 해라, 광고를 해!’
여기서 초희가 소학이나 대학을 읽었냐고 물은 이유는 어릴 때 천자문이란 낱말 책을 뗀 아동들이 처음에 접하게 되는 문장으로 된 아동용 도서가 소학이기 때문이다. 소학은 쉬운 문장들을 사용했지만 그 문체가 뛰어난 아주 잘 지어진 책으로서 문장을 익히는 입문 단계에서 가장 많이 채택되는 교과서 같은 책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상대의 말이 그 정도나 겨우 읽었다니 기가 막힐 수밖에.
‘이자가 하는 말이 원체 오래전, 오래전 하는 걸 보면 혹시나 반로환동(反老還童)의 고수? 설마……. 하지만 아직도 그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실례가 되지 않게 재삼 확인을…….’
“대협.”
“왜?”
“이∼ 한번 해 보세요.”
“이∼.”
묵향은 그녀가 뭘 확인하려 하는지 눈치 채고는 한껏 입술을 벌려 자신의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사랑스러운 누런 이빨들을 보여 줬다. 자신과 같은 영감탱이 반로환동의 고수인 경우 딴 건 다 젊게 보이지만 이빨만은 어떻게 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젊은 애송이들과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고……. 그런데 묵향도 실수한 부분이 있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니까 기억이 없을 때 자신의 이빨이 몽땅 빠지고 새로 자랐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이빨이 새하얗잖아. 이런 사기꾼 같으니……. 그럼 그렇지, 무림인들은 원래가 자부심과 자존심, 아집으로 뭉쳐진 인간들. 그렇게 대단한 고수라면 우리를 닦달해서 끌고 가면 끌고 갔지 오빠가 혈도를 점하고 수갑을 채우도록 놔뒀을 리가 없지. 근사한 남자를 만나고 싶었는데 근사한 남자는 모두 굶어 죽었는지 한 놈도 보이지 않고 거기다 이런 놈팡이하고 같이 다녀야 하다니. 휴∼ 내 인생이 너무 한심해…….’
대화가 이런 식이었으니 이제 산통 다 깨진 허풍꾼을 얌전히 대해 줄 필요가 없었다. 조금 무례하게 대해도 상대는 그런 예의에 있어 무관심한 듯이 행동했기에 같이 지내기에는 별로 무리가 없었다. 초희가 보기에 묵향이란 인간의 얼굴은 후하게 봐 주면 그런대로 매끈한 편이지만, 무지무지하게 허풍이 셌고 또 무공에 대해 안하무인인 것처럼 거드름을 피워 대는 놈팡이였다. 초희처럼 명가(名家)에서 자란 자제가 봤을 때는,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으로 허름한 싸구려 도(刀)를 하나 대장간에서 구해서 허리에 차고는 무림을 돌아다니며 무식하고 가련한 무사들에게 사기나 치는 진짜 바닥 인생이 틀림이 없어 보였다.
초연이나 초우 같은 경우 상대의 허풍에 질려 버려 아예 말도 안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초희의 성격도 성격인지라 자신이 상대해 주지 않으면 완전히 외톨이 신세가 되는 상대가 불쌍해서 마음을 고쳐먹고 말 상대를 해 주었다. 상대가 눈에 빤히 보이는 허풍을, 자기 딴에는 잔머리를 굴려서 곱빼기로 쳐 대는 것을 보는 게 재미있어 이것저것 물어 댔다.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초희의 관심에 흥이 난 묵향이 더욱 자화자찬을 해 대면, 초희는 그 얄팍한 거짓말에 배꼽이 빠지게 웃어 대며 재미있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자칭 최고의 고수이자 금(琴)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는 희대의 허풍선이를 동반한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원래 묵향은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고, 또 아무도 없는 곳에 몇 달씩 박혀 있어도 외로움을 탈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과 같이 갈 때 자기들만 얘기하고 혼자 외톨이로 떼어 놓는 건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귀여운 얼굴을 한 초희라는 묘령(妙齡)의 아가씨가 말상대를 해 주니 자기가 생각해도 꽤나 유쾌한 여행이었다. 자신의 무공에 대해서나 아니면 전에 있었던 싸움 등을 얘기해 주면 이상하게 심각한 장면에서도 까르르 웃는 게 별로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웃는 모습이 귀여웠기에 참아 준 것이다.
묵향은 초우란 청년을 처음에는 애송이라고 얕잡아 보는 경향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함께 지내다 보니 놀랍게도 그는 나이에 비해 상당히 무림 경험이 있었고, 매사에 철저함을 좋아했다. 점혈(占穴)을 할 때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났다.
점혈 수법은 그냥 힘으로 때린다고 되는 게 아니다. 상대의 혈도에 자신의 내공을 불어넣어 일시적으로 진기(臻氣)의 유통을 방해하는 수법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그 진기가 진신내력(眞身內功)이 아닌 한 공력의 크기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언정 일정 시간이 지나면 소멸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상대가 대단한 고수라면 스스로 진기를 움직여 혈도를 막고 있는 타인의 진기를 소멸시키는 수법도 있다.
그렇기에 초우란 녀석은 매일 아침이 되면 묵향의 혈도를 재차 점혈하는데, 이때 세심하게도 묵향의 혈도에 자신의 내력(內力)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본 다음 내력이 남아 있는 그 위치에 다시 내공을 보탰다. 이건 언뜻 듣기에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만에 하나 상대가 진짜 고수라고 가정했을 때, 자력으로 막힌 혈도를 뚫었을 수도 있고 또 아주 드물게 특이한 무공을 익혀 혈도를 이동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점혈을 했던 혈도와 해혈을 하는 혈도를 서로 뒤바꿔 놓으면 다음 날 자신은 점혈을 한다고 때린 것인데 사실은 해혈을 하게 되는 이치다.
그런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의에 주의를 하는 것을 보고 묵향은 그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 지나지 않아 역시 당사자는 눈치 채지도 못한 채 애송이로 평가 절하된 사건이 있었으니…….
희대의 허풍선이를 동반한 지 4일째 되던 날 저녁, 그날도 평상시와 같이 객점에 들었다. 오는 도중에 수소문을 한 결과 무산 남쪽의 탕창(宕昌) 쪽으로 흑색 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이동하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탕창 부근을 통과하여 백수강(白水江)을 건너 사천성으로 들어갈 예정인 모양이었다. 그런대로 실마리는 잡았기에 푸근한 기분으로 마을로 들어가 여관을 잡고 몸을 대강 씻은 다음 식사와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크지 않은 식당이었지만 몇 명이 식탁에 앉아 식사 중이었고, 그들은 빈 탁자에 널찍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 점소이에게 음식을 주문했다. 묵향은 거의 잡식성이라 할 만큼 음식을 가리지 않았기에 그의 음식까지 몽땅 초희가 주문을 한 다음 객점 안을 둘러봤다. 혹시나 근사한 남자가 하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였다. 초희는 조금 자아도취 증세가 있는 평가이기는 했지만 뛰어난 가문을 배경으로 한 자신의 미모와 말솜씨라면, 안 보여서 그렇지 일단 멋진 남자가 보이기만 하면 자신의 곁에 잡아 둘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 식당 안에 초희가 꿈에도 그리던 멋진 남자가 있었던 것이다. 창가에 위치한 자리에 고상한 무늬의 청의(靑衣)를 입은 잘생긴 청년이 간소한 안주를 두고 죽엽청(竹葉淸)을 마시고 있었다. 그가 앉은 옆 의자에 화려한 문양의 검집을 가진 검이 놓인 것을 보고 제법 형편이 좋은 무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에 시원하게 뻗은 콧날, 검은 콧수염을 짧게 다듬은 멋쟁이였다. 거기에 많은 수련을 쌓았는지 간혹 술병을 잡기 위해 팔을 뻗을 때 드러나는 팔목은 근육이 잘 발달해 있었다. 잠시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던 초희가 묵향에게 살며시 말했다.
“대협, 저 사람 정말 멋있죠?”
“누구?”
“저 청의를 입은 사람 말이에요.”
“으음, 글쎄……. 제 딴에는 있는 대로 멋을 낸 바람둥이군.”
그러자 초희가 새침한 표정으로 나무랐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나는 원체 사람을 못 믿어서 말이야…….”
“그건 병이라구요. 창피한 줄을…….”
그녀의 말은 잠시 중단되었다. 이쪽을 힐끗 바라본 그 멋쟁이 청년이 살며시 일어나 자신들이 있는 탁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멋쟁이 청년은 탁자 옆에 다가와서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십니까? 소생은 절검문(?劍門)의 말학(末學) 진소추(振召秋)라 합니다. 보아하니 무림인이신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서로 통성명이나 하시는 게 어떠하올는지요?”
상대가 이렇듯 정중히 나오니 잡배(雜輩)라 해도 거절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절검문이라면 섬서성 남쪽에 위치한, 작기는 하지만 검의 명문인 데다 거기에 혼기가 꽉 차 있는 여자가 두 명이나 있으니 어쩌면 이자와 인연이 닿을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여러 가지 정보도 얻을 겸 모두들 그를 환영했다. 초우도 그에게 마주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아, 진소추 대협이시군요. 저는 초우라 합니다. 이 아이들은 제 여동생들로 초연, 초희라 하고 저쪽에 계신 분은 묵향이란 분이오.”
진소추란 남자는 처음부터 묵향이 그들과는 달리 낡은 옷을 입고 있는 데다 그 옷도 그렇게 고급이 아니었기에 그냥 간단히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음식을 먹기 위해 손을 올렸을 때 묵색(墨色) 수갑이 손목에 채워져 있는 것을 본 다음에는 아마 묵향을 범죄자쯤으로 인식한 모양인지 아예 상대도 안 했다.
“하하, 대협은 아니올시다. 절검문의 말학 주제에 대협이란 말을 들으면 모두들 욕합니다. 하하…….”
“원, 겸손하시기도. 그래 진 형은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예, 저는 이번에 수행도 좀 쌓을 겸, 눈요기도 할 겸해서 무산 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무산의 절경은 소문이 자자하니까요.”
“그럼 이번이 초출이십니까?”
“아닙니다만 사천 쪽으로는 초행입니다.”
진소추란 사람이 자신들과 거의 유사한 방향으로 가는 데다 이쪽으로는 초행이라니 처음부터 흑풍단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여러 가지 검학이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진소추는 얼굴도 잘생기고 성격이 호방한 데다 명문가의 자제답게 차분하고 진중한 말투이기는 했으나, 아주 말을 재미있게 했다. 그렇기에 묵향을 제외한 모두는 진소추의 매력에 빠져 들며 호탕하게 술판을 벌였다.
묵향도 대화에는 끼어들지 않았지만, 그들의 옆에서 아예 죽엽청을 독째로 가져다 놓고 퍼마시기 시작했다. 묵향은 술을 잘 마시지는 않지만 일단 마시면 뿌리를 뽑는 성격인 데다 수소문하러 다니면서는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못했으니 거의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목구멍에 들이 붓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묵향은 혼자서 한 독을 깨끗하게 비운 후 담소를 나누는 그들을 뒤로하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여태껏 여관을 잡으면 언제나 나란히 위치한 방을 두 개를 빌려 한쪽은 초연과 초희가 사용하고 또 하나는 묵향과 초우가 썼다. 이러는 것이 돈도 절약될뿐더러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불의의 사태에 대처하기도 편하기 때문이다.
초우가 술자리를 파하고 거나하게 취해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묵향은 문 근처에 자리를 잡고는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아직도 초우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 중의 하나가 묵향이란 인물은 침대에 누워 자는 꼴을 못 봤다는 것이다. 언제나 벽에 기대고 조금 졸듯이 자거나 밤늦게까지 운공조식(運功調息)을 하는지 명상을 하는지 그렇게 앉아 있다가, 다음 날 깨어나 보면 이미 일어나 있든지 아니면 명상을 하고 있었다.
‘저자는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도 바뀐 게 하나도 없군.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편히 누워서 잠을 못 잘꼬…….’
초우는 더 이상 생각하기도 귀찮아 쓰러지듯 침상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들었다.
초우가 방에 들어온 지 반 시진 후 묵향은 인기척에 잠에서 깼다. 설마 하고 있었는데 창문 쪽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리더니 약한 들릴 듯 말 듯 한 슈우우우 하는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독(毒)인가?’
하지만 창가에서 가장 가까운 침상에 누운 초우의 드렁드렁 코고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으로 보아 독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미혼분(迷混粉)이나 미혼향(迷混香)이겠군. 일단 약속을 해 놔서 임의로 해혈을 하기는 내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하고……. 뭐 되는 대로 놔두자…….’
하지만 공력을 거의 사용할 수 없는 관계로 1각쯤 지나자 숨이 턱에 차기 시작했다. 그래서 묵향은 기척 없이 슬며시 움직여 문 쪽으로 이동했다. 그런 다음 살짝 문을 열고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신 후 기척을 살폈다. 그런데 요상한 점은 상대가 금품을 털 목적이라면 계집들이 묵고 있는 방보다는 이쪽을 뒤질 것이 분명한데 아직도 들어올 생각을 안 하고 있었고, 문 앞에서 느껴지던 기척조차 없어졌다는 것이 수상했다.
‘금품이 목적이 아니라면 뭐를……. 그럼 혹시 인신매매하는 놈들인가? 하기야 초연이란 계집애는 잡혀 가서 곤욕을 치러도 상관없어. 선배 대접도 안 해 주는 못된 계집은……. 아니지, 그놈이 초연이만 가져간다는 보장이 없잖아. 할 수 없군……. 일단 몰래 살펴보고 초연이만 가져가면 놔두고 초희까지 손대면 이 몸이 나설 수밖에…….’
여자들이 묵는 방은 바로 옆방이었기에 찾아가는 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슬며시 움직여 여자들이 있는 방문 앞에 도착한 다음 기척을 살피니 뭔가가 방 안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살며시 문을 열어 보려 했지만…….
‘이런 빌어먹을……. 안에서 잠겼군. 창문으로 갈까? 아냐, 이 나이에 내가 창문을 넘어 돌아다니리? 천하제일이라 자부하는 이 몸이? 여관 문이야 별로 강하게 만든 게 아니니 한 대 차면 경첩이 뽑혀 나갈 거야. 차고 들어갈까? 그냥 놔둘까? 지들도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데……. 참! 그런데 계집들이 잡혀가면 초우란 놈도 계집들 구한답시고 헤맬 테니 흑풍단을 손쉽게 만나려면 하는 수 없이 구해 줘야겠군.’
쾅! 콰지직!
발길질 한 번에 문짝은 부서져 나갔고, 그 안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어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여자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어떤 행동을 하려는 찰나에 문짝이 떨어져 나가자 놀라서 묵향 쪽을 쳐다봤다. 놀랍게도 그 남자는 절검문의 진소추라는 놈이었다. 진소추는 침입자를 보자 하던 일을 중단한 후 손에 든 것을 침상 위에 놓고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침상 옆에 세워 둔 자신의 호화로운 검을 뽑아 들었다. 그걸 보며 묵향이 이죽거렸다.
“이봐, 자네 친구들은 어디 있어? 왜 혼자뿐이지?”
“웬 놈이냐? 다치기 싫으면 꺼져라.”
“인신매매면 그래도 먹고 살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놈이니 봐줄 테니까 해약이나 내놓고 꺼져라.”
“미친놈!”
그와 동시에 진소추는 수갑을 찬 채 검도 뽑지 않고 있는 묵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식은 죽 먹기의 상대로 생각하고 처음부터 과감한 공격을 퍼부었다. 일검에 작살을 내려는 듯 공력을 끌어 모아 직검단천(直劍斷天)의 기세로 내리찍었으나, 묵향은 수갑의 사슬을 이용해 간단히 검을 막으면서 즉시 왼발을 날려 낭심(囊心)을 가격했다. 놀랍도록 빠르지만 자로 잰 듯한 움직임이었다. 급소를 가격당한 격심한 통증에 진소추가 인상을 찌그리는 찰나 가격의 반동을 이용해 왼발을 뒤로 빼며 오른발이 사내의 낭심을 다시금 가격했다. 사내가 주춤거리며 내려앉기 직전 뒤로 돌아온 왼발로 땅을 박차고 오르며 이 사내의 턱 아랫부분을 오른발로 차고 뛰어오른 왼발의 힘을 교묘히 조절하며 왼발로 오른쪽 두개골을 가격했다.
챙 하는 청아한 쇳소리와 거의 동시에 퍽퍽거리는 둔탁한 소리가 네 번 동시에 들리면서 누구의 목소린지 처절한 비명성이 울리며 두 사내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하지만 묵향은 곧 일어난 반면 진소추는 완전히 뻗어서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묵향은 아직도 낭심을 감싸 쥐고 신음하는 진소추에게 다가가 힘껏 머리통을 차 버렸다.
퍽!
“끄윽!”
그다음 진소추의 움직임은 정지했다. 하지만 묵향은 공력(功力) 없이 순전히 근육만을 이용한 숙련된 몸놀림으로 상대를 제압했기에 내력(內力)을 쌓은 상대가 그렇게 심한 타격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란 걸 잘 알았다. 그렇다고 내공을 끌어올리기가 힘들기에 평상시처럼 점혈을 해 둘 수도 없었다.
‘이런 녀석을 밧줄을 구해 묶는다고 해도 힘 한 번 쓰면 끊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초우 녀석 말(馬)에 있는 수갑을 들고 오기도 그렇고, 열쇠도 없잖아. 또 그사이에 도망치면 무슨 개망신이냐……. 이따위 혈도 푸는 건 순식간이지만 생명의 위협이 오는 것도 아닌데 풀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에라 모르겠다. 막힌 혈도를 우회해서 진기를 모아 보자. 정파 놈들이야 불가능하겠지만 나는 역혈(逆穴)의 내공을 쌓았으니 길이 있겠지.’
진소추가 정신을 대강 수습했을 때 그가 처음 본 것은 자신을 비웃듯 내려다보고 있는 묵향이란 사내였다.
‘제기랄, 수갑을 차고 있어서 별로 주의를 안 했는데…….’
묵향은 진소추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미소를 짓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오호… 이제 깨어나신 모양이군. 자네를 위해 발바닥에 진기를 좀 모아 뒀지. 그렇다고 이거 점혈할 정도는 안 되고 조금씩 모으자니 감질나서 못 하겠더라구. 그래도 자네를 잡아 둘 정도는 되니 걱정 말게나. 우선 그 귀한 뼈다귀가 부러지는데, 자네에게 사전에 양해도 구하지 않고 기절한 상태에서 하기는 뭣 해서 말이야.”
퍽!
“크아악!”
설마하니 정신을 차리자마자 오른쪽 종아리뼈가 생으로 부러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진소추가 비명을 질렀지만 묵향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한소리했다.
“역시 무릎 밑에다 나뭇조각을 받쳐 뒀더니 잘 부러지는군. 흐흐, 좀 아픈가? 미안허이. 공력이 모자란 게 죄지. 흐흐, 평상시 같으면 그냥 서로 편하게 혈도를 점한 후 분근착골(粉筋鑿骨)만 사용하면 술술 부는데 말이야……. 흐흐, 자 이제 말해 보실까? 네놈 패거리는 지금 어디 있어?”
사내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크아… 패거리는 없다.”
“뭐라구?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그러면서 묵향이 부러진 발을 툭툭 차자 뼛조각이 근육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사내는 지독한 통증에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비명을 질러 대며 발악했다.
“크악! 날 죽여라, 악!”
“패거리는 어디 있어?”
“으악! 모두 말할 테니 제발, 크으아악!”
진소추가 식은땀을 흘리며 애원하자 묵향은 발길질을 멈췄다. 상대가 정신을 어느 정도 찾도록 시간 여유를 준 다음 재차 부드럽게 물었다.
“패거리는 어디 있어?”
“패거리는 없습니다. 소인 단독 범행입니다.”
“힘도 좋군. 여자를 둘이나 업고 어디로 갈 생각이었냐?”
“업고 가려는 게 아니라…….”
진소추가 머뭇거리는 걸 보고 묵향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으응? 설마…….”
묵향은 약간의 진기를 손끝에 힘들게 끌어 모아 상대의 단전(丹田)을 탐색했다.
“역시, 이종(異種)의 진기(臻氣)가 들어 있군. 더러운 녀석! 사내 녀석이 할 짓이 없어서 채음보양(採陰補陽)이나 하다니…….”
그러자 진소추는 애원하기 시작했다.
“살려 주십시오, 대협.”
사정하는 진소추를 향해 묵향은 의외로 부드럽게 말했다.
“내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채음보양 따위 수법을 써서 남의 진신내력(眞身內力)을 갈취해 봤자 나중에 이종의 진기를 화합시키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야. 채화음적(採花淫敵)들이 엄청난 숫자의 계집들을 통해 내력을 흡수할 텐데도 왜 그중에 초고수(超高手)가 한 명도 나오지 못했겠냐? 다 이유가 있다구. 네놈의 기를 보아하니 지금은 그런대로 상관없지만 더 이상 흡수하면 공력 증대는 고사하고 목숨까지 내놔야 할 거다. 알겠냐?”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대협.”
“내놔.”
“예?”
“해약 내놓으라구.”
그자는 침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떨어져 있는 게 해약입니다.”
“저 아이들에게 사용하려는 음약(淫藥) 같은 게 아니고? 바른대로 말해, 안 그럼 이번엔 왼팔 뼈마저 부숴 주겠다. 난 아주 인자한 사람이라서 목발은 짚을 수 있게 해 주니 걱정 마.”
짐짓 인자한 척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말하는 묵향을 보니 이상하게도 온몸에 소름이 쭉쭉 끼친 진소추가 말했다.
“예, 대협……. 저건 미혼약의 해약 하고 음약을 섞어 놓은 것입죠. 그편이 일하기가 편해서요…….”
“그럼 음약이 들어가지 않은 해독제는 없냐?”
“없습니다. 그냥 놔두시면 내일 아침쯤 되면 상쾌하게 일어날 겁니다.”
“그래? 추호도 거짓이 없겠지?”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제가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흐음, 좋아. 사실이라고 믿어 주지. 자네 절검문 문하라고 했는데 사실이냐?”
“아닙니다요. 소인이 어찌 그런 명문에 있겠습니까……. 그냥 절검문의 이름만 팔고 있습죠.”
그러자 묵향은 웃음을 터트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하, 좋아. 진짜 절검문의 제자라면 살려 두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사파(邪派)라니 살려 주지. 참,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자네 참 잘생겼군.”
“감사합니다, 헤헤…….”
“난 그게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예?!”
그와 동시에 묵향의 발이 상대의 머리로 날아왔다.
퍽!
“크윽!”
묵향이 차고 난 다음에도 지근지근 문지르던 발을 떼자 코뼈가 내려앉은 뭉개진 코가 비참한 형상을 드러냈다. 묵향은 그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부드럽게 말했다.
“한결 보기에 좋군. 그래, 이왕에 시작했으니 좀 더 손을 봐 주지.”
팍!
“크아악!”
사내가 부러진 앞니 여섯 개 정도를 뱉어 내는 걸 보며 빙긋이 웃었다.
“아주 좋아. 이 정도면 내 취향에 딱 맞군. 앞으로 내 근처에 얼씬거리면 수족(手足)의 뼈다귀를 몽땅 다 부숴 놓고 남은 이빨도 몽땅 뽑아 버릴 테니까……. 빨리 꺼져.”
“예, 예…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사내가 검을 허리에 차고는 벽을 짚고 절뚝거리며 헐레벌떡 사라지는 뒷모습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며 묵향이 나직이 말했다.
“꽤 재미있는 밤이군……. 저따위 놈에게 속아 술을 그렇게 퍼 마시고 일찍이 잠에 곯아떨어지는 걸 보면 아직도 애송이야…….”
그렇게 돼지 멱따는 비명 소리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그만큼 울렸으니 사람들이 나올 만도 하건만 한 명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묵향이 하는 수 없이 밑에 내려가 보니 점소이가 숨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묵향은 점소이의 뒷통수를 퍽 하고 때린 다음 젊잖게 말했다.
“방 문짝에 경첩이 떨어져 나가고 바닥에 피가 좀 묻어 있으니 빨리 올라가서 깨끗하게 원상태로 만들어 놔. 알겠냐?”
“예? 예…….”
점소이가 부리나케 2층으로 달려 올라가는 것을 보며 묵향이 혀를 차며 나지막이 말했다.
“참으로 각박한 세상이군……. 그렇게 소란을 떨었는데, 아무도 코빼기조차 안 비치니, 쯧쯧. 이만 올라가서 잠이나 조금 더 잘까, 아니면 명상이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