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이군.”
“뭐가요?”
“왜 말들을 다 버리고 갔지?”
초우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수많은 말들이 흩어져 있었고, 몇몇 관군들이 그 말들을 한곳에 모은다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관군들이 지키고 있으니 저건 관군들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어.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까지 이어지던 흑풍단의 말 발자국이 없어졌다. 이건 그들이 말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경공술을 쓴 거야. 그리고 저기에 쌓여 있는 흑색 갑주들을 봐라. 일부러 갑주까지 다 벗어 버렸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정면 대결보다는 도망치는 것에 더욱 주력하겠다는 뜻이지. 왜 그렇게 작전을 바꾼 거지?”
“혹시 그때 만났던 묵향이란 선배를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요?”
“맞아요. 그 선배의 무공 수준으로 보아 잡배는 절대 아닐 거고 어떤 단체의 수장(首長) 정도라면 그의 단체에 포섭되었을 수도 있지요. 그러면 목적지가 생겼으니 쓸데없는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도망치려고 들겠죠.”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조심해라. 관군들 외에도 제법 고수들이 몇 명 있는 것 같으니까.”
“예.”
초우 일행은 마을에서 말을 다 팔아 버린 후 경공술을 이용했다. 산길을 달리는 데는 말보다 경공술을 사용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용히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아직 무공이 떨어지는 여동생들 때문에 골치였다. 아마도 이걸 염려한 묵향이 혼자서 앞서 갔을 것이라 생각하니 속이 터졌지만, 그래도 여동생들이라 버려 놓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누이동생들을 독촉하며 길을 재촉한 결과 묵향과 헤어진 그날 저녁때 흑풍단이 버리고 간 말들을 호위하고 있는 관군들을 만난 것이다. 관군들의 행동이 예상외로 빠름을 감지한 초우는 아무래도 추격의 전문가쯤 되는 무림인들이 관군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기에 그 누이동생들에게 주의를 준 것이다.
이들은 밤을 무릅쓰고 한 시진 반 정도 산길을 달리다가 어둠 때문에 더 이상 흔적을 좇을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야숙을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다시 추격을 시작했다. 추격을 시작한 후 두 시진 정도 지났을까……. 그들은 희한한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여덟 마리의 개……. 아마도 관군에서 기르는 군견인 모양인데 모두 입에 거품을 물고,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 아직 네 마리의 개가 살아 있기에 그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개들 또한 입에 거품을 물고, 광기(狂氣)에 가득 찬 눈으로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아마도 미친개들한테 물렸는지 여러 명의 부상자들이 있었다. 일부 병사들은 그들을 간호하고 있었고, 일부는 미친개들을 공포 어린 눈으로 죽인다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이때 유독 그중에 세 명의 인물들이 초우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들은 관군들과는 달리 각기 검을 가지고 있었고, 이 난리통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관군들에게 협조하는 무림인들인 모양이었다. 보통 돈이 궁한 무림인들 중의 일부가 관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다행이라면 그런 인물들 중에는 아주 뛰어난 고수는 없다는 점인데…….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으니 조심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저 들개들은 뭐죠?”
“들개들이 아니다. 목에 끈이 묶여 있잖아. 관군들이 사용하는 군견이다. 아마도 흑풍단이 어떤 약물을 길에 뿌린 모양이야.”
“약물을 뿌린다고 개가 미쳐요?”
“그건 모르지. 이럴게 아니라 빨리 가자. 흔적 남기지 않도록 조심해라. 저 난리가 나는 걸 봐서 아마도 저들이 제일 앞서서 추격하는 놈들인 모양이니까.”
“예.”
초희는 순순히 대답했지만 초연은 그래도 약간의 무림 경험은 있는지라 자신이 생각하는 우려할 만한 점을 말했다.
“오빠, 그러지 말고 저들 뒤로 따라가는 건 어때요? 함정이라도 있다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럼 조용히 그들을 따라간다.”
과연 그 세 명은 추격의 전문가들이었다. 개들이 죽어 버린 후에도 그들이 앞장서서 아주 미세한 흔적들을 더듬으며 3백여 명의 관군들을 인도했다. 그러면 관군들은 뒤에 10장(약 30미터) 간격으로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하면서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아마도 그 뒤에는 관군의 주력 부대가 따라올지도 모른다. 초우는 일부러 그 뒤를 따라가며 그들이 묶어 놓은 빨간 천을 풀어 다른 샛길 쪽으로 연결해 뒀다.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여섯 개 정도만 연결한 후 다시 돌아와 그 샛길을 즈음해서 나 있는 관군의 발자국도 모두 지워 버리고 계속해 그들의 뒤를 따르면서 모든 표시들을 없애 버렸다.
이렇게 두 시진 정도 갔을까, 갑자기 앞에서 화살 10여 대가 동시에 날아와 추격하던 무림인들 세 명과 뒤따르던 군사들의 몸통에 맞았다. 그들은 그 즉시 고꾸라졌고 모든 화살의 앞부분이 등 뒤까지 튀어나온 것이 그것을 쏜 사람의 공력(功力)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화살이 날아오자마자 모두들 나무나 바위 등의 뒤에 숨었지만 더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그제서야 모두들 쓰러진 사람들을 살펴보기 위해 조심조심 일어섰다. 그들의 표정으로 보아 화살을 맞은 모든 사람들은 즉사한 모양이었다. 이때 숲 속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추격하면 모두 다 죽여 버릴 테니 알아서 해라. 모두 다 꺼져!”
희망을 가졌었던 무림인들도 다 죽어 버렸고, 상대는 얼마 전까지 관에서 최강을 자랑하던 찬황흑풍단이다. 거기에 상대는 이쪽을 알지만 이쪽은 상대가 어디에 숨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니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 명이 뒤로 도망치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며 모두들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관군들이 사라지자 초우는 이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경공술을 이용해 앞으로 쏘아 나가 시체들이 있는 곳에 당도한 다음 신형을 멈추고 말했다.
“저는 초씨세가의 초우란 사람입니다. 그대들이 죄도 없이 쫓기는 것을 알기에 도와 드리려고 먼 길을 달려왔으니 동행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의외로 상대의 답은 손쉽게 떨어졌다.
“좋소. 그대의 동생들과 함께 오시오.”
‘동생들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초우는 동생들을 불러 앞으로 나갔고 그 앞에는 열 명의 전포(戰袍)를 입은 무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각기 활을 휴대한 것으로 보아 아마 이들이 조금 전 활을 쏜 인물들인 모양이었다.
“그대가 초우인가? 나는 임충이라고 한다네. 대장한테서 자네 얘기 들었어. 젊은 나이에도 꽤나 유능하다던데……. 참, 관지 대장이 있는 곳으로 가세나.”
초우는 경공술을 이용해 따라가며 임충에게 물었다.
“지금 흑풍단을 이끄는 분이 관지 대장이란 분입니까?”
“그렇지. 나중에 자네도 만나 보면 알겠지만 대단한 분이야. 지금까지 우리들이 버텨 온 것도 그분의 덕이지.”
“묵향이란 선배는 여기 계십니까?”
“아니, 일이 있다면서 먼저 떠났어. 제길, 예전에도 대단했지만 지금은 아예 저 먼 하늘이더군. 그때는 꼭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었는데…….”
“그렇게 대단한 분인가요?”
“그렇지. 내가 이상형으로 삼는 분이라고 할까……. 무공도 고강하지만 유식하고, 또 마음 씀씀이는 얼마나 인자하고 부드러운데. 예전에는 술도 자주 마셨었는데…….”
‘인자하고 부드러워? 유식하다고? 전혀 아니던데…….’
“저… 그분 책은 많이 보셨나요?”
“응, 관지 대장의 말로는 황궁무고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몽땅 다 읽은 유일한 인물이라고 하더군. 그리고 단장이 예전에 그에게 뛰어난 선생들 몇 명을 붙여 줬는데, 글공부도 아주 폭넓게 한 모양이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떨떠름한 얼굴로 초우가 되물었다.
“그래요?”
“자네도 만나 봤었다니 알 거 아냐? 무식한 무림인들하고는 뭔가 분위기가 다르지 않던가?”
“글쎄요. 저는 안목이 짧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대장이 바빠서 그런지 나도 얼마 얘기를 못 나눴거든.”
한 시진 반 정도 달려가자 흑풍단의 본대가 있었다. 모두들 나무 기둥에 의지해 쉬든지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는 무리들도 있었다. 임충은 그들을 데리고 한 인물 앞으로 다가갔다. 그 인물은 청색 전포를 입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젊은 무사였는데, 오랜 시간 쫓긴 탓인지 다듬지도 못한 수염이 숭숭 돋아 있었다. 그리고 다부진 턱선과 피로한 듯한 안색, 시원하게 솟은 콧날,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강인한 정신력을 담은 강렬한 안광을 내뿜는 두 눈……. 한마디로 패기가 넘치는 뛰어난 무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예상외로 상대가 아주 뛰어난 인물임을 자각하고 초우는 포권하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인사를 하면서도 누이동생들이 이 근사한 상대를 앞에 두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을 눈치 채고는 옆구리를 찔렀다. 서로 간의 인사가 끝난 후…….
“초씨세가의 초우라 합니다. 직접 보니 더욱 뛰어난 분이시군요.”
“허허, 과찬의 말씀을……. 그대의 이야기는 묵향 부교주에게 들었소.”
“예? 부교주라니요?”
“그는 얼마 전까지 본단(本團)의 백인대장으로 있었던 대단히 뛰어난 무인이오. 하지만 그때 그를 알게 되었을 때도 화경(化境)에 준하는 무공을 소유한 인물이 겨우 백인대장 노릇이나 하는 게 이상하게 생각되었었소.”
놀란 초우가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방금 화경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 화경이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그 이전의 기억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소. 그러니 자신이 익혔던 모든 무공 또한 잊었지요. 그래서 단장님이 그를 황궁무고에 들여 무공을 익히게 한 것이었는데, 그의 무공을 몽고 전투 때 직접 봤지만 정말 대단했소. 그런데 이번에 어떤 계기로 기억을 되찾았다고 하더군요. 그의 본래 위치는 무림의 마교란 단체의 부교주라고 했소. 자기가 몇 가지 일을 벌이는데 나보고 도와 달라고 하더군. 사실 우리들도 갈 곳이 없던 처지고 해서, 그의 일에 동참하기로 했소.”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저… 마교란 단체를 들어 보셨습니까?”
“난 잘 모르오. 난 관부에서 자라나 그곳에서 무공을 익혔고, 또 들리는 소문만으로 상대를 평가할 정도로 속 좁은 인간도 아니오. 사실 내가 직접 본 묵향이란 인물은 정파라 자처하던 인물들에 비해 뒤질 게 없었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는 지금 마교하고 좀 껄끄러운 관계인 모양이고, 별로 좋지 못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 다음에 만나면 괜히 먼저 마교에 관계된 말을 꺼내지 마시오. 어쩌면 그대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르니까…….”
“예?”
“이번에 만나 보니, 기억을 되찾은 다음 사람이 조금 변했더군요. 하지만 솔직 담백한 것은 여전하기에 그를 믿기로 했소. 그의 무공은 지금 현경(玄境)의 수준이라 했소. 그러니 그의 신경을 건드려 좋을 게 없다는 말이오.”
“그럴 리가…….”
초우는 경악했다. 내심 묵향이 마음껏 어검술을 쓸 때부터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놀라움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경이란 수준이 그냥 무공을 쌓는다고 올라가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어려운 수준이기에 기나긴 무림 역사에도 단 한 명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묵향 선배도 없는데, 그럼 어디로 갑니까?”
“중경(中京 : 지금의 시안시) 서남쪽에 태백산(太白山)이란 곳 근처에 세워진 흑룡문이란 문파가 있다고 했소. 그리로 오라고 했으니, 조심해서 가 봐야지요.”
중경은 섬서성 남쪽에 위치한 거대한 도시로, 과거에는 장안(長安)으로도 불리던, 많은 국가들이 수도로 채택했던 도시다.
“참, 오다가 미친개들을 봤는데, 그건 어떻게 한 겁니까?”
“그건 묵향 부교주가 주고 간 광견분(狂犬粉)이란 독을 사용한 것인데 그걸 땅에다 뿌려 놓으면 개가 냄새를 맡는다고 킁킁거리다가 콧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콧속의 습기에 녹으면서 발작을 일으키게 만든 것이지요. 아마도 사람한테도 효과는 있겠지만 사람이 어디 땅바닥에 대고 킁킁거릴 일이 있겠소? 다만 물에 잘 녹기 때문에 비만 오면 끝난다는 단점이 있다고 하더군.”
벼룩의 간 꺼내 먹기Ⅰ
묵향은 지금 별로 기분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누구라도 길을 갈 때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좋은 기분이 될 리가 없을 것이다.
‘어찌한다……. 기분도 꿀꿀한데, 재미 삼아 한번 족쳐 봐?’
누군가가 뒤쫓는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흑풍단과 헤어지고 홍원(紅原)이라는 도시에 들어선 다음부터다. 홍원은 사천성 북쪽에 있는 제법 큰 상업 도시로 감숙성으로 들어서는 관도 상에 위치한 사천성과 감숙성 간의 물류 유통의 중심이었다.
묵향은 일부러 조금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선 다음 다시 오른쪽에 나 있는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그의 기다림은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먹음직한 먹잇감이 바로 거미줄을 향해 돌진해 왔기 때문이다. 묵향은 골목 안으로 뒤따라온 거지 두 명의 혈도를 재빨리 점혈한 다음 음흉한 미소를 띠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호… 개방의 나으리들이 왜 나를 따라다니지?”
그러자 점혈당해 쓰러진 두 명은 익히 상대의 무서움에 대해 들었는지라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해 댔다.
“오해십니다요, 나으리. 저희들은 동냥을 받기 위해 이리 들어온 것뿐입니다요.”
“쯧쯧, 아니야. 그건 사실이 아니야. 좋게 말로 할 때 털어놔. 응?”
“사실입니다요. 저희들은 그냥 동냥을 받으려고 이리 들어온 것뿐입니다요.”
“그으래에? 난 오늘 내 평생 본 것보다 더 많은 거지들을 봤다구. 그게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묵향이 그들의 품속을 뒤지자 곧이어 품속에서 세밀히 그려진 묵향의 초상화가 나왔다. 그 초상화에는 몇 마디 말이 쓰여 있었다.
「마교 부교주 묵향
단독 행동을 좋아하며 검은색의 아무 장식이 없고 칼날받이조차 없는 특이한 모양의 기형검(奇形劍)을 사용함. 이자의 무공은 화경을 넘어선 상태로 대단히 사악한 위험인물이니 절대 충돌은 피할 것. 이자의 위치가 발견되는 대로 총타에 최우선적으로 보고할 것.」
묵향은 그 초상화를 쓰러져 있는 거지들의 눈앞에 들이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건 내 얘기 같은데? 아무래도 말로 해서는 안 들을 것 같군.”
묵향은 우선 놈들이 자해하지 못하도록 아혈을 제압해 버렸다.
“말할 생각이 있으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라구. 먼저 뭘 해 볼까… 분근착골(粉筋鑿骨)은 별로 재미가 없고……. 흠, 맞아.”
한 거지의 윗도리를 벗긴 다음 때가 잔뜩 묻어 있는 가슴을 부드럽게 만졌다.
“아주 예쁜 갈비뼈를 가지고 있군. 이걸 하나씩 뽑으면 아주 재미있을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면서 제일 밑에 위치한 갈비뼈로 손가락을 박아 넣어 갈비뼈를 모질게 그러쥐었다. 그런다음 아주 천천히 힘을 가하자 공포에 질린 눈으로 거지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도 생으로 갈비뼈를 뽑겠다는 데야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초상화에 쓰인 것보다도 더욱 사악한 놈이군. 제기랄, 잘못 걸렸다.’
묵향은 고개를 끄덕인 놈의 아혈만 풀어 주면서 속삭이듯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가 혹시나 자살한다면 저기 남은 친구는 더욱 처참하게 당할 테니 잘 생각하라구.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하나뿐이야. 홍원 분타가 어디 있지? 뭐 싫다면 대답 안 해도 상관없어. 여기 거지들이 아주 많은 것 같으니까 하나하나 잡아다 주리를 틀어 보면 누군가는 실토를 하겠지.”
“홍원 동남쪽에 보면 관제묘가 있는데, 그곳입니다요.”
“흠, 좋아, 좋아. 안내해. 길 찾기는 성가시니까.”
두 거지는 그 즉시 묵향이 혈도를 완전히 풀어 줬으므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묵향을 쳐다봤다.
“끌끌, 딴 생각하지 마. 전 무림을 뒤져 봐도 나보다 경공술이 빠른 놈을 찾기는 어려울 테니까. 도망치다 잡히면 다리뼈를 부숴 놓고 길 안내를 시킬 거야. 그것도 재미있겠지?”
사색이 된 두 거지가 묵향을 안내해서 개방의 홍원 분타에 나타난 것은 반 시진 후였다. 그들이 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고참 거지가 으르렁거렸다.
“정보 수집은 안 하고 왜 벌써 돌아오냐? 헉!”
모두들 거지들을 뒤따라 들어오는 묵향을 발견하고 경악했지만, 정작 묵향은 평안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서서는 그들이 굽고 있는 멧돼지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흐흐흐, 배고프던 차에 잘되었군. 역시 나는 먹을 복이 있단 말이야.”
“네, 네놈은 누구냐?”
“다 알고 왔으니 나를 모르는 척할 필요는 없어. 이봐, 여기 분타주가 누구냐?”
“…….”
“좋게 말할 때 나와. 나도 피비린내 나는 곳에서 식사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초상화에 쓰인 대로 진짜 화경의 고수라면 여기 모여 있는 10여 명이 조금 넘는 수로는 그야말로 변변한 대항조차 못 해 보고 말 그대로 ‘도살’당할 것이 분명하다. 개방은 30만이 넘는 인원을 가진 거대 방파지만 다만 한 가지 고수라고 부를 만한 인물들이 극소수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 많은 인원을 가지고도 무림의 패권에 도전한 적이 한 번도 없이 정보만을 취급하는 소식통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리고 개개인의 무공이 뛰어나지 못하기에 고급 정보를 획득하는 데도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요즘 들어서는 뛰어난 첩보 능력과 잠입술을 가진 고수를 많이 거느린 무영문에 뒤지는 처지였다.
묵향이 품속에서 시커먼 비수를 하나 꺼내 익은 부분을 잘라서 씹어 먹기 시작하는데, 뒤에서 주춤주춤 한 거지가 앞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본인이 홍원 분타주입니다.”
“흠, 그래? 쩝쩝……. 고기가 질기군. 나를 감시하라는 명령은 총타에서 내려온 거냐?”
“예.”
“그럼 네놈이 총타에 연락해라. 감시를 하는 건 좋은데, 내 눈에 안 띄게 하라고 해.”
“예? 무슨 말씀이신지…….”
“쩝쩝… 거지들이 내 뒤를 따라다니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 게 못 되지. 나는 네놈들에게 동냥 줄 돈도 없다구. 감시를 하고 싶으면 멀리서, 내 눈에 안 띄는 곳에서 하란 말이야. 감시를 하는 것을 두고 시비를 걸고 싶지는 않은데, 만약 앞으로 내 눈에 띄는 개방 거지가 보이면 뼈다귀를 분질러 버릴 거야. 알겠어?”
“예, 예.”
“여기 술은 없냐? 쩝쩝…….”
“여기 있습니다요.”
옆에 있던 거지가 술이 든 호리병을 내밀자 그 거지의 머리를 딱 소리가 나게 쥐어박으면서 말했다.
“역시 멧돼지에는 술이 있어야……. 빨리 따라, 이 녀석아. 네놈이 입을 가져다 댔던 건데 거기다 나를 보고 입을 대란 말이야?”
묵향은 멧돼지 고기와 술을 배터지게 먹은 다음 관제묘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명심해. 눈에 안 띄게 감시하라구. 어쨌든 오늘 잘 먹었다. 그리고 이하고 빈대, 벼룩 같은 것 좀 잡아라, 이 더러운 놈들아.”
묵향은 공력을 운용하여 몸속에 숨어든 못된 벌레들을 태워 죽여 버린 다음 경공술을 이용해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다.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 버린 묵향을 바라보며 한 거지가 말했다.
“참 내, 더러워서……. 거지 것도 뺏어 먹는 놈이 있군.”
그러자 분타주가 말했다.
“아서라. 저 경공술만 봐도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겠다. 목숨을 부지한 것만 해도 다행이야. 그건 그렇고 저렇게 위험한 인물을 왜 감시하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