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뻗어 버렸는데 어쩔 거예요?”
“글쎄, 세 가지 방법이 있겠지.”
“어떤 거요?”
“먼저 이틈을 이용해서 저놈을 죽여 버린 다음 무림맹에 공치사를 하는 거야. 그리고 두 번째는 이대로 놔두고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거고, 세 번째는 좀 더 좋은 여관으로 옮겨 우리들의 호의를 보여 주는 것이지.”
“흐음, 그럼 우선 첫 번째를 시도해 보고 가능성이 없을 거 같으면 세 번째를 사용할까요?”
“그게 좋겠군. 네가 가지고 있는 팔황장천비(八荒長天匕)를 빌려 다오.”
“오라버니도 좋은 검이 있잖아요?”
그러자 사내는 좀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내 것이 아무리 좋아도 10대기병(十代奇兵)에 견줄 수 있겠냐? 내 거로는 영 자신이 없어서…….”
“좋아요. 여기 있어요. 예민한 녀석이니 부드럽게 다뤄 줘요.”
여인은 품속에서 1척 정도 길이의 호화로운 단검을 사내에게 건넸다. 검신의 길이 7촌(약 21센티미터), 손잡이 3촌 반(약 10.5센티미터)의, 비수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긴 이 비수는 팔황장천비라는 근사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대의 호신강기를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얇고 날카로운 검신(劍身) 덕분에 10대기병의 말석(末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비수는 그녀의 선친이 천신만고 끝에 구한 것으로 그녀의 서른다섯 번째 생일에 선물한 것이었는데, 그 예리함에 반한 그녀는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사내는 건네받은 비수를 왼손에 감춘 후 수하들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서자 쓰러진 묵향을 일으키려고 애쓰고 있는 점소이가 보였다. 그런데 아무리 점소이가 흔들어 대도 줄기차게 뻗어 있던 묵향이 갑자기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뒤에 서 있던 점소이가 뒤로 벌렁 쓰러져 탁자에 부딪쳤다. 살기를 품었던 무리들은 그것을 보고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무심을 가장해서 옆의 탁자에 우루루 앉았다. 그들을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던 묵향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입을 열었다.
“응? 이상하군……. 살기가 느껴진 것 같은데, 네놈들이냐?”
그들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여 짐짓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답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네놈들이, 네놈들이 감히 본좌에게 살기를 품었냐 이 말이다.”
“아, 아니올시다. 착각을 하셨겠죠…….”
“그런가…….”
털썩.
묵향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탁자 위에 뻗어 버렸다.
‘휴, 살기를 최대한 억눌렀는데도 이 모양이니. 아무래도 내가 너무 긴장한 모양이야. 좀 마음을 안정시키고…….’
“이봐, 여기 술하고 안주 좀 주게나.”
“예.”
뒤로 넘어졌던 점소이는 일단 묵향을 그대로 놔두고 주문한 음식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사내는 안주도 없이 술을 몇 잔 들이켜면서 긴장된 몸과 마음을 조금 느슨하게 푼 다음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면서 사내는 죽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저건 통나무야. 저건 통나무야. 저건 통나무야…….’
뭔가를 죽인다는 기분을 조금이라도 가지면 끝장이었다. 저런 민감한 놈은 베는 그 순간까지……. 될 수 있다면 벤 후에도 살기가 없어야 한다. 사내는 묵향의 등 뒤로 슬며시 다가선 다음 살며시 왼손에서 비수를 아래로 내렸다. 사내는 자신이 익힌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왼손에는 팔황장천비의 집을 잡고 또 손잡이는 오른손으로 살며시 잡은 상태로 천천히 묵향의 등 뒤 가까이로 가져갔다.
미세한 살기까지도 감지하는 인물인 만큼 엄청난 예기(銳氣)를 뿜는 팔황장천비를 뽑은 상태로 그의 등 뒤에 가져갈 수는 없었다. 최후의 순간에 뽑음과 동시에 휘둘러야 했다. 그는 처음에는 쿵쾅거리며 움직이고 싶어 하는 심장을 정상적으로 돌리게 만드느라고 갖은 애를 썼지만 일단 먹이가 코앞에 위치하자 그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목표에 정신을 집중했다. 통나무의 심장이 위치하고 있을 거라 생각되는 부분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상대가 절대로 눈치 채지 못하게 천천히 공력을 약간만 모으면서 근육을 조금씩 긴장시켰다.
‘이제 조금만…….’
그가 팔황장천비를 이용해 일(一) 자로 베어 통나무를 두 토막 내려는 찰나, 죽은 듯이 뻗어 있던 통나무의 몸에서 강렬한 기가 방출되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허름한 식당 안은 지독한 술 냄새로 꽉 차서 숨쉬기도 힘들 지경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통나무처럼 뻗어 있던 묵향은 강렬한 기가 넘치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이런!’
사내는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팔황장천비를 왼손에 황급히 밀어 넣었다. 사내가 숙달된 동작으로 순식간에 모든 증거를 인멸하고 모르는 척하고 있는데, 모든 술기운을 순간적으로 체외로 밀어내 버린 묵향이 언제 취해 있었냐는 듯이 멀쩡한 안색으로 천천히 일어서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해…….”
그러면서 수하들과 여인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갔다.
“이상하게 여기서 지속적으로 살기가 느껴진단 말이야.”
사실 막주는 살기를 초인적인 노력으로 감추는 데 성공했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수하 놈들이 상관을 지원하려고 준비를 늦추지 않은 것이 탈이었다. 묵향은 정작 막주의 살기가 아닌 그 수하들의 살기를 읽은 것이다.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감을 느낀 여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방긋이 화사하게 웃으며 먼저 선수를 쳐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세요? 묵향 부교주님. 또다시 뵙는군요.”
“으응? 누구시더라?”
“저, 그때 살막에서…….”
“아아, 막주의 대리인이군.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근사한 제안이 있어서 막주님을 모시고 이리로 따라왔어요.”
“막주?”
그때 사내가 묵향의 뒤에서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십니까? 홍진(洪搢)이라 합니다.”
“안녕하시오? 묵향이라 하오. 추격술이 대단하시군요.”
“과찬이십니다. 제가 부교주님을 따라온 이유는 그 제안에 동의하고자 함이지요.”
“그런데 아까 그 살기는?”
“그게…, 전에 부교주님의 놀라운 무예의 경지를 목격했던 수하들이 저희들의 안전을 생각해서 대비한 것이겠지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허허…….”
“좋소. 그대들이 도와준다니 정말 고맙소.”
“다행히 이렇게 만났는데 저희들과 같이 술이나 한잔하심이 어떠하실는지요?”
“좋지.”
“전에는 소개를 못 드렸지만 저 아이는 제 동생인 홍청(洪淸)입니다. 무공은 보잘것없지만 지혜가 뛰어나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의 살해 일보 직전까지 갔었지만 이상하게 반전되어 이런 식으로 화기애애한 술판이 벌어져 버렸다. 이 둘의 합체가 화(禍)가 될지 복(福)이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이것으로 두 단체의 합체는 이루어진다.
모두들 축배를 들며 담소를 나누다가 살막의 인물들은 떠나가고 묵향 혼자 식당에 남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참 술을 마시던 묵향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사실 그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들어서면서부터 발견했을 텐데, 그때는 사부의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런대로 마음이 안정되자 자연히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놀랍군.’
묵향은 탁자를, 정확히 말하면 탁자의 윗부분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사부의 죽음도, 살막 합병에 대한 기쁨도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것은 놀랍다는 감정 하나였다. 한참을 탁자를 살펴보던 묵향은 다음에는 의자들을 살피기 시작했고 그다음에는 다른 탁자들을 살펴봤다.
‘정말 놀라워…….’
급기야 묵향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점소이를 불렀다.
“이봐.”
“예, 나으리.”
“이 탁자는 어디서 구한 거냐?”
“예, 숲 속에 사는 진팔(振八)이란 목수가 만든 것입죠. 별로 볼품은 없지만 아주 튼튼합죠.”
“튼튼할 만도 하겠군. 그자가 사는 곳을 자세히 말해 보거라.”
그러면서 묵향이 다섯 냥의 동전을 쥐어 주자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진 점소이는 나불나불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묵향은 음식값을 지불한 다음 진팔이란 목수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진팔의 집은 산 중턱쯤에 위치한 자그마한 초가였다. 초가의 앞에 있는 자그마한 텃밭에는 아마도 진팔이라고 생각되는 젊은 목수가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모든 작물을 다 거두고 새로운 소채들을 심기 위해서리라…….
묵향이 점점 다가가자 곡괭이가 땅을 치는 박자와 묵향의 걸음걸이가 이상하게도 일치하기 시작했다. 목수는 묵묵히 땅만을 바라보며 곡괭이를 놀리고 있었고 묵향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묵향은 그 순간 응축되어 숨겨진 미세한 살기가 곡괭이 속에서 묻어 나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묵향이 목수에게 다가설수록 그 살기는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묵향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품속에 숨겨 두고 있던 묵영비(墨影匕)의 손잡이를 더듬고 있었다.
묵향은 땅을 바라보고 있는 목수가 자신의 전신을 훑어보고 있다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아래로 휘둘러지는 곡괭이가 자신의 온몸을 노리고 있다는 느낌 또한 받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묵향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묵향은 몸속의 모든 세포들이 지금의 상황을 즐기며 폭발적으로 반응하고 있음을 느꼈다. 놀라운 쾌감이었다. 다음 순간 묵향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목수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묵향이 목수에게 2장(약 6미터)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지금까지와는 달리 곡괭이가 막대한 기를 머금은 채로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묵향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재빨리 뒤로 신형을 뺐다. 하지만 그보다도 목수의 곡괭이가 땅에 부딪친 것이 조금 빨랐다. 목수의 곡괭이가 땅에 부딪침과 동시에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무시무시한 강기의 회오리가 생성되어 그곳을 기점으로 하여 구형(球形)으로 퍼져 나갔다.
강력한 강기가 퍼져 나옴을 느끼는 순간 묵향은 품속에서 묵영비를 꺼내어 순간적으로 아래로 그었다. 직검단천(直劍斷天)의 기세로 떨어져 내리는 그의 비수에서는 검강의 회오리가 반월형(半月形)으로 형성되어 구형(求刑)으로 퍼져 나오는 상대의 강기와 부딪쳤다.
상호 간의 강기가 부딪침과 동시에 묵향은 지금 뻗어 오는 강기의 회오리가 무식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지금의 강기는 상대의 필생의 깨달음을 이용하여 방대한 공력으로 준비한 필살의 공격이리라. 그는 더 이상의 헛된 공격을 포기하고 외부에는 4장 3절, 망강(網剛 : 강기의 사슬)을 이용하여 보호하고, 그 안에 최강의 수비식이랄 수 있는 1장 4절, 방(防)을 전개했다. 그와 동시에 상대가 퍼뜨린 강기의 회오리가 묵향을 덮쳤다.
지독한 강기의 회오리는 망강을 순식간에 허물고 들어와서는 방에까지 막강한 충격을 주어 뒤흔들었다. 곧이어 놀랍게도 여태껏 무너진 적이 없던 방까지 무너지며 묵향의 호신강기에 강력한 힘으로 부딪쳐 왔다.
“크윽!”
‘정말 대단하군……!’
묵향은 목구멍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꿀꺽 삼키면서 회심의 반격을 시작했다. 선수는 놓쳤지만 당하고 살 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회오리가 지나감과 동시에 묵향은 4장 1절, 통강(通剛)을 4장 5절, 다강(多剛)의 법칙을 이용해 막강한 공력을 투입하여 뿜어냈다. 묵향이 다강을 응용하여 강기를 전개한 적은 거의 없었다. 다강이란 수 개에서 수백 개에 이르는 강기를 한꺼번에 뿜어내는 요령을 이르는 것으로, 다강 하나만으로는 어떤 위력도 발휘할 수 없다. 통상 절강이나 통강과 함께 응용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향해 찌르는 듯 겨눈 묵영비에서는 순식간에 수백 가닥의 검강 다발이 상대를 향해 뻗어 나갔다. 이때 상대는 묵향에게 일격을 먹인 후 마무리를 할 작정인지 튕기듯이 뒤로 후퇴 중인 묵향에게 엄청난 속도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묵향의 공격은 상대에게 그대로 격중되었고, 상대는 묵향의 공격을 일부러 찾아와서는 온몸으로 때우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
상대는 묵향의 강기 수백 가닥이 뻗어 옴을 보고 눈이 약간 커지더니 곧이어 곡괭이를 떨어뜨리며 머리를 아래로 수그리고 발을 최대한 위로 끌어 올리면서 양손으로 이(二) 자 형식으로 만들어 몸 앞을 막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양팔에서는 시퍼런 강기의 막이 퍼져 나오며 그의 몸 앞부분을 두터운 방패와 같이 막아섰다.
쾅!
거의 지축을 울리는 듯한 굉음이 퍼져 나오며 상대는 그 반탄력에 의해 뒤로 날아갔다. 상대는 뒤로 튕겨 나가면서도 그의 열 손가락에서 각기 지강(指剛)을 쏘았다. 역시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기 때문이다.
‘얄팍하게 시간을 벌려고 드는군.’
묵향은 순간적으로 1장 4절, 방을 이용하여 몸을 감싸면서 뒤로 튕겨 가는 상대가 준비할 시간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쫓아 들어갔다.
펑!
열 개의 지강이 방에 격중되는 순간 묵향은 상대의 지강이 상상 외로 강하다는 것에 놀랐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면 방이 깨지면서 다시금 호신강기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지강들이 방에 격중되면서 발생한 강력한 반탄력에 의해 뒤로 밀리면서 묵향의 눈에는 상대방이 처음 가한 공격의 결과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구형으로 퍼져 나간 상대의 강기 회오리는 곡괭이가 부딪친 곳에서부터 반경 50장(약 150미터)을 거의 평지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묵향은 상대의 공력이 자신보다 더욱 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묵향은 자신의 장기인 근접전을 펼칠 생각을 포기하고 곧바로 뒤로 몸을 빼면서 상대와의 거리를 더욱 벌렸다. 묵영비를 품속에 집어넣고 다급한 김에 공력을 이용해 상자와 무명을 순식간에 삼매진화로 태워 버리면서 묵혼을 꺼냈다. 묵혼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묵향은 다시금 필승의 기세를 북돋우기 시작했다.
또 다른 현경의 고수
묵혼을 뽑아 든 다음 새로운 투지를 불태우며 묵향이 목수에게 몸을 날렸다. 둘의 사이는 순식간에 좁혀졌고 묵향은 곧바로 어검술을 전개하며 상대의 목을 향해 묵혼을 휘둘렀다. 하지만 상대는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 어떤 반격도 하지 않았다. 묵향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공력을 투입한 어검술이라면 어떤 방어적인 행동을 했을 것이다. 피한다든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행동으로 대응을 하든지……. 묵향 자신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 공격을 호신강기 따위를 이용해서 몸으로 때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묵혼검은 상대의 목 반 촌 거리에서 멈췄다. 묵향의 입에서 딱딱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죽고 싶소?”
그러자 목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이 오기를 기다렸지. 정말 놀랍군. 자네는 내 목을 칠 충분한 자격이 있어. 자… 뜸들이지 말고 실행하게나.”
“뭐, 부탁을 들어 드리는 것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이유나 알고 싶은데요.”
그러면서 묵향이 묵혼검을 검집 속에 집어넣고는 허리에 차자 상대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자네는 나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닌가?”
“선배를 만나러 온 것은 사실이지만, 죽일 생각까지는…….”
“그럼 자네는 청해성의 살겁(殺劫)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청해성의 살겁이라뇨?”
목수는 아무 말 없이 잠시 생각하더니 묵향에게 말했다.
“일단 이것도 인연이니……. 따라오게나. 술이나 한잔하세.”
목수가 첫 번의 출수로 인해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린 초가의 옆쪽에서 구덩이를 파자 안에서 자그마한 항아리가 하나 나왔다. 목수는 항아리를 꺼낸 다음 그것을 들고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묵향을 이끌고 갔다. 목수는 그런대로 운치 있는 자리를 골라 묵향에게 앉기를 권한 다음 묵향과 자신의 사이에 항아리를 놓았다.
목수가 항아리를 열자 그윽한 주향(酒香)이 흘러나왔다. 목수가 항아리 안으로 꼭 잔을 쥐고 있는 것 같은 손짓으로 술을 뜨자 놀랍게도 진기로 형성된 무형의 그릇에 술이 담겨 올라왔다. 목수는 그것을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부가 누군지 자네는 아는가?”
“글쎄요…….”
“노부는 과거 혈마(血魔)라 불렸었네.”
그제서야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묵향이 대꾸를 했다.
“혈마 선배셨군요. 사파의 인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강기를 자유로이 사용하신다는 말을 들었었습니다.”
“클클클, 아닐세. 노부는 사파의 인물이 아니야. 노부의 사문은 전진일세.”
“아… 그 정과 마의 무공을 함께 익힌다는?”
“자네도 알고 있었군. 노부의 나이 180세에 더 이상 무공은 증진되지 못하고 어떤 벽에 막혔지. 바로 현경의 벽이야. 그래서 노부는 그 벽을 부수기 위해 주야로 무수한 노력을 했어. 너무 과도하게 노력한 탓에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려 그 마성(魔性)이 은연중에 골수에까지 침투해 버렸지. 노부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것은 거의 1백 년 전이었네. 그때 노부가 느낀 것은 어떤 촌민의 심장을 내 오른손이 움켜쥐고 있다는 것이었지. 그리고 정말 많은 사람이 죽어 있었어. 그들의 시체를 검사해 보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내가 모두 죽였다는 것을 알았지.
나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네. 그래서 사문에 돌아가서 죄를 청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었지. 사문에 돌아가 보니 그곳은 황폐하게 변해 있더군. 수많은 동문들이 백골이 되어 군데군데 쓰러져 있었네. 그 흉수는 곧이어 알 수 있었지. 아무리 뼈만 남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손쓴 흔적을 찾기는 쉬웠어. 노부는 마성에 미쳐 날뛰며 동문과 사부까지 모두 죽여 버린 거야.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을까도 생각해 봤네만, 나까지 죽어 버리면 사문의 맥이 끊어지기에 그럴 수도 없었지. 그래서 자그마한 문파를 하나 만들고 그들에게 한 번씩 찾아가 사문의 절학을 알려 주면서 여기저기를 떠돌며 참회를 하고 있는 중이었어.
별로 인재가 들어오지 않아 이제 사문도 끝장이라는 절망을 하고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온 왕중양(王仲陽)이란 녀석이 꽤나 쓸 만해 보이더군. 아마도 전진의 미래를 다시금 넓혀 갈 대들보가 될 테지. 새로운 전진에는 마(魔)의 무공을 전수하지는 않았어. 나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면 안될 것 같아서…….
그나저나 자네도 대단하더군. 자네와 같은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네.”
“과찬이십니다. 제 실력이 조금만 떨어졌다면 선배님의 그 첫 번째 일격으로 가루가 됐을 텐데요…….”
“그건 자네의 말이 틀려. 노부는 1백 년간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참회를 하고 땅을 파다 보니 어느 날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더군. 자네도 대자연에 떠도는 강렬한 기를 느껴 봤나?”
“예.”
“그래. 그렇다면 이해하기 한결 편하겠군. 나는 곡괭이에 기를 담아 그냥 대지를 내려친 것이 아니야. 그렇게 한다면 땅만 파이지 뭐 그렇게 가공할 기운이 뿜어져 나오지는 않지. 나는 나의 기를 대지의 기와 충돌시킨 거지. 그것은 극강한 두 개의 기가 충돌하며 뿜어져 나오는 강기의 회오리야. 노부는 그것을 깨달은 후 이 무공을 전개했을 때 살아나올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네. 아마 노부도 그것에 당한다면 살아남기 힘들지도 몰라.”
조금 어리둥절한 묵향의 표정을 보더니 혈마는 껄걸 웃었다.
“자네도 오랜 시간 땅을 파 보면 알 수 있을 걸세. 사실 대지의 기를 포착하여 그것과 충돌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지. 참, 그런데 자네는 여기 왜 왔나? 노부와 은원(恩怨)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이곳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을 텐데…….”
“사실은 작은 식당에서 선배님이 만든 탁자를 봤죠. 그것은 어떤 연장을 사용해서 만든 것이 아니더군요. 아주 단단한 나무를 일격에 강기로 잘라서 판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호기심에 찾아왔습니다.”
“껄껄, 술값이나 벌자고 만든 것 덕분에 오늘 목숨을 날릴 뻔했군. 나는 자네의 발걸음을 보고 놀랐지. 힘과 자신감이 넘치는 발걸음……. 그 발자국 소리가 나는 고수고 너를 죽이러 왔다고 말하는 것 같더군. 노부는 내 생애 최고의 고수가 찾아온다는 것을 느꼈어. 아마 상대도 나를 괜히 찾아온 것은 아닐 테니,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내력을 모으고 준비한 후 처음의 일격을 날린 거야.”
“그런데 선배께서는 제가 출수를 하자 곡괭이를 버리시던데, 그것은 왜…….”
“아, 나는 검을 쓰는 사람이 아니야. 장(掌)과 권(拳)을 주로 사용하지. 물론 사문에서 검을 배우기는 했지만 내 나이 1백여 세에 더 이상 검을 쓸 필요가 없더군. 그다음부터는 검을 잡아 본 적이 없어. 검을 들고 다니는 것도 귀찮았고 말이지. 자네를 보아하니 검을 통해서 거의 극한에 가깝게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데, 나는 그 반대일세. 나는 도중에 검을 버리고 장과 권을 통해서 무(武)의 극한을 깨달았지. 그렇기에 도저히 검으로는 자네와 대결할 자신이 없었어. 설혹 내가 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나는 검을 버리고 손으로 막았을 걸세. 사실 검으로는 자네의 그 엄청난 강기 다발을 막을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비무를 청해도 될는지요?”
“클클, 고수들의 싸움에서 그 정도 초식을 교환했으면 되었지 더 이상 뭘 원하는가? 노부는 거의 3백여 년을 살아왔기에 이제 더 이상 무공이고 은원이고 뭐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어. 그리고 요즘 들어서는 뼈다귀까지 물렁해져서 자네의 공격을 버틸 재간이 없어. 그나저나 밭도 새로 갈아야 하고 집도 지어야 하고,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군…….”
“다음에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하하하, 이리저리 떠도는 몸이라 아마 힘들 걸세. 사실 이렇게 새파란 몸으로 한 곳에서 10년 동안 있기도 힘들어. 여기서 10년 저기서 10년, 이렇게 살고 있지. 정 만나고 싶으면 전진파에 연락을 해 두게나. 운이 있다면 만날지도 모르지. 하지만 점점 그곳도 기틀이 잡혀 가니 노부도 잘 안 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