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공격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곳은 마교도들에게였고, 우습게도 호위대 중에서도 가장 피해가 적은 곳도 마교도들이었다. 그리고 이 난투극을 벌이는 무리들 중에서 가장 무장도가 빈약한 곳이 마교도였다면 그 반대가 황군이었다.
하지만 적들은 무장도나 숫자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무공은 강하지만 달랑 흑의 한 벌에 무기만을 들고 있는 마교의 무리들을 집중 공격했다. 하지만 이들은 하수들이 아닌 마교 안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인 천랑대 소속의 무사들인 것이다. 모두들 간단하게 화살을 막아 내면서 묵향의 명령을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었고, 그 명령은 곧이어 하달되었다.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묵향은 석진에게 명령을 내렸다.
“열 명은 왼쪽, 열 명은 오른쪽을 맡아라. 석진, 너는 절벽 위의 적들을 적당히 없애 버린 다음 전장을 이탈하여 마화를 이끌고 소주로 직행하라.”
진의를 알기 힘든 상관의 수상한 명령에 석진의 표정은 이상하게 변했다.
“예? 하지만…….”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 소주로 가서 마화한테 관광을 충분히 시켜 주고 본타로 돌아가라. 시행하라. 그리고 마화 너는 석진을 따라가라. 본좌가 안내해 주고 싶지만 여기가 더 재미있을 거 같아서.”
의문과 불만이 가득한, 기괴한 표정이었지만 석진은 묵향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존명!”
그와 동시에 천랑대는 좌우측의 절벽을 위에서 쏘아 대는 화살들을 쳐 내며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경공술이었다.
절벽 위에서 천랑대와 적들과의 교전이 시작되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금세 눈치 챈 금 사령이 다시금 명령을 내렸다.
“전진! 빨리 이곳을 탈출하라.”
거의 50기에 가까운 시체들을 남겨 두고 질서 정연한 탈출이 시작되었다. 간간이 적들의 화살이 날아오기는 했지만 위쪽에도 벌써 치열한 접전이 시작되었기에 처음과 같은 집중 사격은 아니었다.
“황군을 공격하다니, 도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그러자 금 사령의 옆에 서 있던 묵향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마도 공주 마마를 해치고자 하는 무리들인 것 같습니다. 무림인들로 보이는데 요새에 주둔 중인 어림군들은 이미 모두 죽음을 당했겠지요. 아마도 놈들의 일부가 태을령의 끝부분에서 기다릴 것입니다.”
“설마…….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는 것이 좋겠군.”
“적들은 아마도 충분히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뒤쪽 출구에도 적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 화살을 퍼부었던 적들도 아직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30리 앞에 나갔다던 위사들은?”
“아마 모두들 습격을 당해 죽었다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흐음, 진퇴양난이로고…….”
“저에게 좋은 계책이 있습니다. 적은 다수이고 이쪽은 소수이니 적을 속이기 위해 두 패로 나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좋은 의견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면 세력이 줄어들 텐데…….”
“공주 마마를 평복으로 갈아입힌 후에 태진령에서 기다리는 적을 돌파한 후 왼쪽으로 탈출시킵시다. 그리고 마차에는 공주 마마의 친구 분을 놔두고 미끼로 쓰는 겁니다. 그들도 공주 마마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을 기꺼워할 것입니다. 세력이야 반으로 줄겠지만 우리는 적들과 정면전을 벌일 필요 없이 강수(崗守)에 있는 어림군과 합류하기만 하면 되니 그때까지 시간을 벌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좋은 의견이요.”
금 사령은 현명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 이 흑의인에게 감사를 하며 즉시 계획을 실행했다. 만약 그가 상대의 음흉한 속마음까지 알았다면 결코 이런 방법을 쓰지는 않았으리라…….
원체 일이 갑자기 터져 나오며 돌아가는 판이라 금 사령이 깊이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 이런 수법은 강호에서 매우 널리 사용되는 낡아빠진 수법이었다. 처음부터 마차를 버리고 옷만 바꿔 입고 탈출했다면 몰라도 한쪽은 마차를 가지고 있고 한쪽은 안 가진 상태에서 두 패로 갈렸으니 어느 쪽이 미끼인지는 멍청한 강호인이라도 단박에 알 수 있는 사실……. 하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태와 공주의 안전에 대한 병적일 정도의 조바심, 그리고 이 계획을 사용한다면 공주의 친구들―아주 지체가 높은 양반들의 자제이거나 황족―의 목숨을 희생해야 한다는 일말의 죄책감, 특히 그놈의 죄책감이 어떤 희생을 해서라도 이 사태를 돌파해야만 한다는 그의 강박 관념에 아주 그럴듯하게 양념으로 다가서면서 금 사령은 흑의 위사가 제안한 계책을 이용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금 사령은 일단 적들이 매복하고 있던 장소를 벗어나 안전한 곳에 이르자 공주와 그녀의 친구들이 타고 있는 커다란 마차로 다가가 공주에게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공주 마마, 지금 아주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고 있사옵니다.”
“무슨 말이냐? 대 송제국의 황군이 그깟 산적패에게 밀린다는 말이냐?”
“산적패가 아니옵니다. 저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무리들이옵니다. 거기에 마마께오서 이곳을 지나실 줄 미리 알고 치밀하게 준비를 한 듯 보이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공주 마마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계책을 써야 하겠사옵니다.”
“어떤 계책이냐?”
“공주 마마께오서는 승마를 배우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우선 평복으로 갈아입으시고 소장(小將)이 마차를 호위하며 적의 이목을 속이는 동안 반대편으로 몸을 피하시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그래야 할 정도로 일이 심각하다는 말이냐?”
“예, 가장 가까운 관청으로 간다 하더라도 1백 리는 족히 되는 거리이옵니다. 그런데 방금 경험했던 적의 규모로 보아 관청에 소속된 소수의 향방군(鄕防軍 : 지방군. 지금의 경찰이라고 볼 수 있음)은 보탬이 되지 않사옵니다. 강수에 있는 어림군과 합류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우선 가장 염려되는 것은 태을령이 끝나는 지점에 적이 매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옵니다. 만약 적이 매복하고 있다면 소장의 계책을 써야만 하오니 준비를 하시옵소서.”
“알겠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공주가 수수한 복장의 옷을 입고 마차에서 내렸고, 금 사령은 수하에게 명령하여 이미 전사한 황병의 말을 공주에게 대령했다. 공주가 말에 오르자 다시 전진이 시작되었다.
태을령의 끝에 다다르자 역시 예상대로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자그마치 3백여 명이나 되는 숫자였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 정도의 병력이 이곳까지 침투해 들어왔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지금 겨우 2백여 명의 황군만을 거느린 상황이라서 그렇지 적들이 여태껏 투입해 온 1천여 명 남짓한 정예는 능히 상인들이나 여행자로 가장해서 흩어져 돌아다녀도 별로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적은 숫자였다. 거기에 관부와는 별 상관없이 무기를 제멋대로 들고 다니는 무림인들이 존재했기에, 대로를 활보하고 다녀도 그들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적들은 그 숫자를 믿고 있음인지 아예 매복도 안 하고 모두들 말을 탄 상태에서 먹이가 항아리 안에서 튀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 사령은 적들이 모두 말을 타고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아예 적이 매복한 상태로 기다리고 있었다면 상대가 제아무리 경공을 전개한다고 하더라도 이쪽은 말을 타고 있으니 어느 정도 따돌릴 수가 있지만, 적도 말을 타고 기다린다면 두 패로 나뉘어 도망친다 하더라도 적의 추격이 거셀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뾰족한 다른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으므로 처음의 계획대로 하기로 결심했다.
“돌격 준비!”
금 사령의 명령이 떨어지자 황군은 모두들 안장에 매달려 있던 두터운 방패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 든 창을 앞으로 세워 돌격 진형을 갖췄다.
“돌격!”
금 사령을 선두로 황병들은 모두 적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처음의 충돌은 폭넓게 전개한 상태에서 방패와 긴 창을 가지고 달려 들어간 황군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상대방은 거의 대부분이 검이나 도 등의 근접 병기나 활 따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두터운 방패와 창을 가진 황군이 무기 면에서 훨씬 유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처음의 충돌로 일부 적을 없애기는 했지만 곧이어 양쪽은 서로 섞여 버렸고 곧이어 치열한 난투극이 벌어졌다.
일단 전투가 난전(亂戰)으로 돌아서자 길이가 긴 창을 가진 황군이 마상 전투에서 어느 정도 유리하기는 했지만, 상대는 무림인. 검이나 도를 사용함에 있어 월등한 기량을 자랑하며 황군을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앞선 황병들이 치열한 기마전을 벌이며 확보한 통로를 통해 소수의 황병들이 마차를 호위하며 뚫고 나갔다. 공주를 태운 마차가 전장을 이탈하자 황군은 두 패로 나뉘며 양 방향으로 전장을 이탈해 전속력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황군의 3분의 1은 공주를 호위하며 왼쪽으로 탈출했고, 나머지는 그 반대 방향으로 마차를 호위한 채 탈출했는데 그 모양을 보고 적도 병력을 나눴다. 하지만 그 병력을 나눈 양(量)은 완전히 반대였으니 3분의 1은 마차를 쫓아가고 3분의 2는 마차 없이 도망친 자들을 쫓는 것이었다.
적을 유인하기 위해 호위대의 지휘관인 금 사령도 마차를 호위하며 달려갔는데, 상대의 다수가 반대편을 향해 미친 듯이 말을 몰아 달려가는 것을 보고 아차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금 사령이 끌고 온 황군은 전투가 아닌 호위 임무이기에 중무장이 아닌 경무장이었고, 이런 상태로는 노련한 강호의 고수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의장용(儀裝用)의 경갑주가 아닌 전투용 중갑주라면 강호의 뜨내기들쯤이야 겁날 게 없었지만, 모두들 경갑주를 입고 있다 보니 믿고 의지할 것은 두터운 방패 하나뿐이었다. 방패만 믿고 앞의 놈들과 싸우고 있을 때 다른 놈이 뒤에서 단검이나 화살에 내공을 실어 쏘아 보내면 경갑주쯤이야 없는 거나 마찬가지……. 이런 상황이니 3분의 1인 적이지만 빠른 시간 안에 적을 돌파할 수는 없었고, 늘어만 가는 사상자들을 지켜보며 금 사령은 눈앞이 캄캄할 수밖에 없었다.
공주 일행은 적을 돌파하자마자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공주를 호위하는 무리들은 48명, 나머지는 미끼인 마차에 타고 있는 ‘가짜 공주’를 호위하고는 반대편으로 이탈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잔꾀가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알았다. 거의 150여 명이 넘는 적들이 이쪽으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뒤로 돌아가 금 사령이 이끄는 ‘미끼’와 합류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먼저 150명이 넘는 적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공주를 호위하는 막중한 임무를 떠안게 된 종5품 장철(張哲) 교령(僑令)은 어떻게 해서든 적의 추격을 뿌리쳐야 한다는 생각에 부대를 둘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공주를 조금이라도 멀리 도피시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투라고는 경험해 보지 못한 무방비 상태의 공주를 이끌고 적과 격투를 벌여 돌파해 나간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20여 기를 차출하여 그들이 사력을 다해 적의 진격을 막는 동안 조금이라도 멀리, 그러니까 15리 전방에 보이는 안진산(安進山)까지만 간다면 그곳 산길에서 매복하여 공격을 가해 점차적으로 후퇴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장 교령의 명령을 받은 오순(吳順) 교위(橋衛)가 20기의 황병들을 이끌고 적들을 향해 말머리를 돌리며 돌격해 나갔다. 장 교령은 오 교위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끌어 주기를 바라며 안진산을 향해 말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장 교령은 그렇게 오래한 편은 아니지만 10여 년이 넘는 군 생활을 통해 이번의 임무가 자신이 맡은 최악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공주를 무사히 강수에 있는 어림군 사령부에 넘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사실 그에게는 자신이 별로 없었다.
‘그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보자. 그러고도 안 된다면 운명이겠지…….’
공주의 기마술이 별로인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오 교위가 이끄는 20기가 예상외로 2각에 가까운 시간 동안 분투를 해 준 덕분에 가까스로 안진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 교령은 이제 겨우 27기로 줄어든 수하들을 독려하여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저격하기 좋은 위치에 수하들을 한 명씩 배치하면서 달리다 보니 10리 정도 지나자 이제 남은 수하는 17기. 위사랍시고 고용한 무림인은 활이 없었고, 또 그의 옷차림으로 보아 암기 주머니도 안 가지고 있기에, 처음부터 이런 산악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흑의 위사는 제외되고 있었다.
점점 더 수풀이 울창하게 우거지기 시작하여 말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때 장 교령에게는 근사한 꾀가 한 가지 떠올랐다. 그는 달려가는 마상에서 무림인에게 물었다.
“이봐. 자네 경공술은 어떤가?”
“괜찮은 편이죠.”
“그러면 자네가 공주 마마를 맡게나. 이봐, 정 위사(衛司)!”
그러자 옆쪽에서 달려가던 한 황병이 답했다.
“예.”
“자네가 6기를 이끌고 남은 말들을 끌고 저쪽으로 탈출하라. 나는 공주 마마를 모시고 산길을 택해 나가겠다. 최대한 빨리 도망쳐서 적들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자네의 임무다. 해낼 수 있겠나?”
“옛!”
일단 어느 정도 지시를 하달한 장 교령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달리고 있는 공주에게 접근해 갔다.
“공주 마마!”
“무슨 일이냐?”
“황공한 질문이오나, 공주 마마께옵서는 무술을 익히셨사옵니까?”
“익히지 아니하였노라.”
공주가 쌀쌀맞게 대답하자 장 교령은 공주가 눈치 채기 힘들 정도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기 있는 흑의 위사가 공주 마마를 호위해 드릴 것이옵니다. 그를 따르소서. 마마의 위엄에 조금 손상되는 일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용서를 바라옵니다.”
장 교령은 수하들에게 외쳤다.
“이봐, 자네들은 나를 따른다. 산악전이니 창은 필요 없다. 모두들 나뭇가지를 밟고 경공술을 전개해 땅 위에 흔적이 남지 않도록 주의하라.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에게 말의 고삐를 건네줘라. 자 이탈하라!”
그와 동시에 모두들 말고삐를 옆 사람에게 건네준 다음 장 교령을 따라 달리는 말 위에서 경공을 펼쳐 산속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법 무술을 닦은 황병답게 육중한 갑옷을 입은 상태에도 불구하고 빠른 몸놀림으로 말 등에서 뛰어올라 가지들을 건너뛰며 장 교령의 뒤를 따랐다.
장 교령과 열 명의 황병들이 말등을 박차고 경공술을 전개하자 흑의 위사가 공주에게 바짝 다가붙은 다음 “실례하옵니다”하는 단 한 마디만 하더니 곧이어 공주를 안고는 말등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자신의 옥체(玉體)를 얼떨결에 외간 남자의 손에 내맡긴 꼴이 된 공주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자신의 몸이 하늘 위로 날아오르자 앙칼진 노성(怒聲)을 터트렸다.
“나를 내려놓아라!”
공주가 큰 소리로 외쳐 대자 묵향은 곧바로 공주의 아혈을 제압해서 더 이상 떠들지 못하게 만든 다음 묵묵히 대열을 따라갔다. 무공도 모르는 상황에서 외간 남자에게 안겼지만 창피한 것은 둘째 치고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휙휙 소리가 날 정도로 사물들이 빠른 속도로 뒤로 움직이는 데다,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며 아래위로 솟구쳤다 가라앉아 대니 공주의 얼굴이 차츰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공주는 원체 흑의 위사가 자신이 느낄 수도 없을 정도로 빨리 격공점혈의 고난도의 수법으로 아혈을 막았기에, 지금 자신의 목구멍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조차도 인식을 못 하고 있었다. 설혹 인식을 했다 하더라도 놀라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줄 알았을 것이다.
장 교령은 흑의 위사가 공주를 안고 있는 상태에서도 상당히 안정적인 몸놀림을 구사하는 것을 보고 처음의 계획을 수정하여 더욱 먼 거리까지 가지를 밟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의 2리에 가까운 거리를 나뭇가지를 밟고 도약하며 이동한 다음 땅 위에 내려섰다.
묵향은 땅 위에 내려서기 직전에 공주의 아혈을 같은 수법으로 표시 안 나게 풀어 주었다. 묵향이 부드럽게 내려선 다음 공주를 내려놓자마자 곧바로 짜악 하는 경쾌한 음향이 울려 퍼졌다.
“감히…….”
하지만 흑의 위사는 뺨을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얼굴색도 붉히지 않고 무표정하게 그대로 서 있었다. 사실 묵향으로서는 무공도 모르는 여자에게 한 대 맞았다고 해서 뺨이 아플 리도 없는 데다가, 자신의 뺨을 친 공주가 오히려 손바닥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는 꼴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터져 나오려는 미소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무표정한 상대를 보고 더욱 약이 올랐는지 공주는 노화를 터트리며 으르렁거렸다. 사실 공중에서 날아다니다시피 오느라 엄청나게 무서웠던 것이다.
“감히 본녀의 몸에 손을 대다니……. 능지처참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 꼴을 보고 있는 묵향으로서는 배알이 뒤틀렸지만, 이 계집을 잘못 건드려 놓으면 후환이 두려운 정도는 아니지만 상당히 귀찮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더럽게 비싸게 구는군. 하지만 조금 더 지나면 더욱 재미있어질 거야…….’
“소신이 원체 일이 다급하여 옥체에 손을 댄 것을 황송하게 생각하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묵향은 낮은 목소리로 점잖게 말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황족에 대한 존경심 따위는 애초에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꼈으리라.
공주는 지금 안 그래도 급박한 판에 이 멍청한 녀석의 목을 벤다고 시간을 허비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장 교령은 일이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시금 출발 신호를 올렸다. 하지만 공주가 무공도 모르는 상태에서 걸어가다 보니 전진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누가 안거나 업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장 교령은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장 교령은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곧이어 적들에게 포착당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주에게 다가가 공손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말을 꺼내면 펄펄 뛸 게 분명하니 조금 돌려서…….’
“공주 마마, 발이 안 아프시옵니까?”
“왜 그러느냐? 나는 괜찮느니라.”
“지금 가마도 없고 말도 없사옵니다. 그리고 먼 길을 가야 하오니 저 위사의 등에 업히시는 게 어떠하올는지요?”
그러자 공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눈이 희번득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장 교령은 찔끔해서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저렇게 성질을 부리다니……. 저년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도 못 챈다는 말인가? 자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도 모르다니. 하는 수 없군. 운명이야…….’
장 교령은 걸음을 멈추고 뒤로 약간 처져 흑의 위사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흑의 위사가 다가오자 장 교령은 그에게 입을 열었다.
“아까 보니까 자네 무공이 꽤 높은 것 같더군.”
그러자 무뚝뚝한 상대의 대답.
“그렇게 높지도 않습니다.”
“자네의 장기는 뭔가? 혹시 암기 같은 것도 다룰 수 있나?”
“아뇨. 무기는 잘 다룰 줄 모르고 경공술이 장기죠. 물론 무공이 아주 약하다는 것은 아니고 동료들 중에서는 제가 제일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전의 전투에서도 저를 남겨 두고 모두들 돌격한 것이지요. 평상시에는 경공술 덕택에 연락원 노릇이나 하고 있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도망치면 쫓아올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흠, 하지만 제대로 수련을 받았다면 아무래도 무림인인 자네가 우리들보다는 검술이 나을 걸세. 이제 남은 황병은 열 명 정도……. 이 상태에서 적과 교전에 들어가면 공주 마마의 안전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자네의 경공술은 믿을 만한 것 같으니 다음에 적과 만나면 공주 마마의 신병을 책임지고 강수에 주둔하고 있는 어림군 사령부까지 모셔다 드릴 수 있겠나?”
“최선을 다하죠. 하지만 저하고 같이 가려고 하실지…….”
“억지로라도 모시고 가게나. 그리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만으로는 안 돼. 무조건 해내야 해.”
“알겠습니다. 해 드리죠.”
“좋아. 다음에 적과 부딪치면 내가 수하들을 이끌고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볼 테니 자네는 마마를 모시고 최대한 멀리 도망치게나.”
“휴, 알겠습니다.”
정말 힘든 일을 맡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한숨을 쉬면서 마지못해 억지로 하듯 묵향은 수락했다. 하지만 실상은 정말 날아갈 듯한 즐거운 기분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묵향이 이 우직한 무인의 부탁을 간단히 들어준 것은 공주를 악당들의 마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은 절대로 아니었다. 사실 이런 버릇없는 계집이 죽든 살든 자신이 알 바 아니었고, 처음부터 이렇게 사건이 악화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30명이나 되는 수하들을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적이 공격해 오고 나서 묵향이 죽자고 공주가 포로가 되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공주는 대단히 중요한 인질이었기에 사로잡힌다면 포로로서 자유는 조금 구속되겠지만 극진한 대우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 계집을 끌고 다닌다면 무사히 어림군에 인계되기 전까지 자유고 극진한 대우고 없는 무지막지한 고생만이 기다리게 될 것이다.
계집 또한 한 번도 상대에게 잡혀 본 적이 없으므로 잡히는 것을 겁낼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것을 묵향에게 의지할 것은 분명한 사실……. 이제부터는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시키면서, 대신 이것들이 다 공주를 위한 행동이라 생색을 내면서 옆에서 그 꼴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묵향은 일부러 무공이 약한 척한 것이다.
적들은 묵향의 기대에 충실히 따르려는 듯, 제법 잔꾀들을 부려 놨음에도 2각도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아마도 선발대인 듯 30여 명이나 되는 무리들과 함께 우두머리로 보이는 회의(灰衣) 무사가 날렵한 경공술을 전개하며, 열심히(?) 걸어가고 있던 공주 일행의 뒤편에 떨어져 내렸다. 회의 무사는 땅에 내려서자 비웃는 듯한 음성으로 한마디 했다. 사실 그로서도 죽자고 쫓아왔는데 상대가 얼마 도망가지도 않았으니 허탈했기 때문에, 이죽거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별의별 잔꾀를 다 부려서 추격대를 막아 대더니 정작 도망쳐야 할 놈들은 느지렁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니, 기가 막혀서……. 본좌를 얕보는 것도 아니고.”
한마디 빈정거린 다음 공주에게 간단히 포권하며 말했다.
“공주 마마, 저희들의 손길을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보아하니 도망칠 생각도 없으신 것 같은데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마시고 순순히 항복하시지요.”
상대의 그런대로 공손한 음성을 들으면서 장 교령은 필사의 각오를 굳힌 듯 침통한 얼굴로 잠시 공주와 묵향을 바라본 다음 부하들에게 외쳤다.
“적을 막아랏!”
그와 동시에 이제 10여 명밖에 남지 않은 황군들은 저마다 병장기를 뽑아 들고 상대를 향해 달려 나갔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 숫자는 물론이고 실력마저 더욱 뛰어난 적을 향해 뛰어들어, 죽음을 각오하고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벌기 위해 악착같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적들까지도 암수를 사용하지 않고 정정당당히 승부를 해 주는 것으로 주인을 향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그들에게 예를 표할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 한 사람 그들을 바라보며 딴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멍청이들. 이따위 계집을 위해 목숨을 버리다니, 쯧쯧. 하지만 이제 방해꾼들은 모두 없어졌으니 슬슬 시작해 보실까…….’
코앞에서 벌어지는 난투극을 바라보며 얼이 빠져 있는 공주를 재빨리 낚아챈 묵향은 경공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묵향은 상대를 완전히 따돌릴 생각은 없었으므로 추격술에 능한 상대라면 충분히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약간씩 흔적을 남기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주가 도망치자 더 이상 예의를 차릴 여유가 없어진 적들은 암기를 사용하여 간단히 싸움을 종결지은 후 추격을 재개했다.
회의 무사는 상대가 펼치는 경공 수준이나 그가 남기는 흔적 등으로 미루어 봤을 때 간단히 상대를 포획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그것이 오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는 완전히 미꾸라지처럼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 안 잡히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해가 지고 어둠이 사방에 자리 잡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추격을 포기해야 했다. 상대가 남기는 미세한 흔적을 밤에 횃불이나 밝힌다고 알 수도 없을뿐더러 횃불을 가지고 가면 적 역시 그 불빛을 보면서 이쪽의 위치를 파악하여 더욱 도망치기가 용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묵향은 사방이 어두워지자 공주를 풀 위에 내려놓았다.
“다행히 적들을 어느 정도 따돌린 것 같습니다. 조금 쉬시지요. 저는 요기할 만한 것을 구해 오겠습니다.”
묵향의 말투는 황족에게 말해야 하는 존칭이 전혀 없는 무식한 말투였지만, 공주는 이것이 묵향이 일부러 황족에 대한 존칭을 쓰지 않은 게 아니라 다만 무식해서 그것을 모르는 줄로 알았다. 예로부터 모르고 한 일은 죄가 아니라 했으니 그걸 따질 수도 없었지만 그 말과 동시에 흑의 위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기에 따질 상대도 없었다.
공주에게는 그따위 존칭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산속에 혼자 버려져 있다는 점이 더욱 무서웠기 때문이다. 깊은 산속, 수림이 울창하게 우거져 달빛조차 들어오지 못해 자신의 손가락도 안 보이는 곳에 혼자 남아 있는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하다. 오랫동안 물 한 모금 못 마셨지만 목마름이나 배고픔 따위는 공포에 눌려 느끼지도 못했다.
공주가 벌벌 떨고 있는 이 시간, 적들은 짙은 어둠 때문에 한 치 앞도 잘 보이지가 않으니 내일의 추격을 위해 건량으로 요기를 하며 푸근히 쉬고 있었고, 묵향은……? 묵향은 멀찌감치 경공을 전개해서 이동하여 주막에서 때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주막은 묵향이 도망쳐 오면서 저녁 식사를 위해 이미 봐 뒀던 곳이고, 공주가 있는 곳에서부터 130리(약 52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그의 경공 실력으로 봤을 때는 조금도 먼 거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공주에게는 먹을 것을 구한다고 했으므로 시간이야 얼마가 걸리든 큰 문제가 없는 것이다.
묵향은 구운 오리 다리를 탐스럽게 한 입 가득 뜯어서 질근질근 씹어 꿀꺼덕 삼킨 후 술 한 잔을 목구멍에 흘려 넣어 입가심을 했다. 지금쯤 굶주림과 추위와 공포에 벌벌 떨고 있을 공주를 생각하니 통쾌한 기분이 절로 일어나며 끊임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기 힘들었다. 아마도 저쪽 자리에 앉아서 힐끔거리며 묵향을 바라보는 녀석들은 이놈이 미치지 않았나 생각 중일 것이다.
‘한 일주일 질질 끌면서 산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면 황궁제일미(皇宮第一美)도 피골이 상접한 요염한(?) 모습이 되겠지. 흐흐흐, 굶는 사람 생각하면서 먹는 재미도 각별하구먼.’
원래가 굶는 사람 생각하며 먹으면 식욕은 더욱 동하는 법.
“이봐! 술 한 병하고 오리 한 마리 더 가져오너라.”
“예.”
묵향은 점소이가 구운 오리를 가져오자 다리를 뜯어 한 입 베어 물며 생각했다.
‘그래도 딴에는 생각해 줘야 하니까 요깃거리를 가져다주긴 해야 하는데 뭘 가져다줘야 하나…….’
두둑이 배를 채운 후 묵향은 숲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지자 그럴듯한 놈이 하나 눈에 띄었다. 토끼라든지 뭐 그런 것은 몇 마리 보긴 했지만 그 녀석들은 묵향이 원한 놈이 아니었다. 역시 이런 산골에서의 몸보신에는 길쭉한 몸매를 가진 통통한 놈이 제격이니까……. 내공이 반박귀진(返縛歸眞)의 현묘한 경지에 이른 묵향인지라 어둠이 내려앉은 밤 사냥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예 빛이 없어도 어느 정도 볼 수 있는데, 거기에 달빛까지 비치니 대낮이나 다름없었다. 묵향은 사냥물을 잡아들고 떠나올 때 보아 뒀던 특이한 모양의 고사목(枯死木)을 찾았다. 그 고사목에서 동남쪽으로 5리만 가면 공주가 묵향이 돌아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리라.
묵향은 공주가 앉아 있는 나무 위에서 한참을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정말이지 혼자 보기 아까운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기에 아래로 몸을 날렸다. 묵향이 위에서 떨어져 내리자 갑자기 나타난 묵향 때문에 놀라는 듯하던 공주는 다음 순간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달려들었다.
“네 녀석은 지금까지 어디 갔다가 온 거냐?”
“쉿! 목소리가 큽니다요. 적들이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디 갔다가 오다니요? 저는 분명히 요깃거리를 찾아보겠다고 가지 않았습니까? 이런 산속에서 먹을 만한 것을 찾기가 어디 쉬운 일인 줄 아십니까?”
“그래 가져왔느냐?”
“예, 일단 좀 앉으십시오. 소인이 요리를 해 올리겠습니다.”
묵향은 공주를 앉힌 다음 나무에 걸터앉은 공주 앞쪽에 구덩이를 하나 팠다. 손바닥을 이용해서 슥슥 구덩이를 하나 판 다음 구덩이 앞부분, 그러니까 나무의 반대편에 나뭇가지 둘을 꺾어다가 세운 다음 상의를 벗어 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런 후 구덩이 안에다가 나뭇가지를 집어넣은 후 약하게 불을 지폈다. 한쪽은 나무에, 한쪽은 옷가지에 막혀 불빛은 거의 새어 나오지 않았다. 묵향이 불을 피운 이유는 알맞게 요리를 할 목적도 있었지만 더욱 큰 목적은 자신이 가져온 사냥물을 공주에게 보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묵향이 허리춤에서 사냥물을 꺼내어 불 위에 올려놓자 기절할 정도로 놀란 공주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끼약! 그게 뭐냐?”
“뱀이지요. 이놈을 잡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걸 지금 나보고 먹으라고 하는 것이냐?”
“이거 생긴 것은 좀 징그러워도 몸에 좋습니다. 내일도 도망 다니려면 아무 거라도 먹고 힘을 비축해 둬야지요.”
“나는 되었으니 네놈이나 먹거라.”
공주가 옆으로 돌아누우며 아예 외면해 버리자 묵향은 조금이라도 더 냄새를 풍기기 위해 천천히 구웠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가자 주위로 구수한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 나가기 시작했다.
“다 익었는데 조금이라도 드시지 않겠습니까?”
공주는 그럴듯한 향기에 식욕이 마구 솟구치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그것을 먹을 수는 없었다. 애써 고기에서 시선을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놈이나 먹거라.”
“그럼, 소인 혼자서 먹겠습니다.”
묵향은 일부러 더 이상 공주에게 권하지 않고 뱀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사실 오리 고기로 포식한 후라 별로 식욕이 일지도 않았지만 묵향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우두둑… 오도독…….
“쩝쩝…….”
묵향은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먹으면서 열심히 공주의 반응을 살폈다.
‘흐흐흐, 저렇게 외면하고 있어도 이 맛있게 먹는 소리를 듣고 아무렇지도 않다면 사람이 아니지. 흐음, 그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낄낄낄! 아마 지금쯤 먹지 않겠다고 한 것을 후회하고 있겠지?’
식사를 맛있게(?) 끝낸 묵향은 한쪽에 누우며 쌀쌀하게 말했다.
“이 어둠 속에서는 상대가 조화경을 넘어섰거나 심안(心眼) 정도 익힌 고수가 아니면 수색할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그러니 마음 푹 놓으시고 내일도 쫓길 것에 대비해 좀 쉬십시오.”
그런 다음 서서히 명상의 세계로 들어갔다. 더 이상 공주에게 할 말도 없었고 어쨌든 자신의 피를 말리는 복수는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