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930)

인시(寅時 : 새벽 4시)가 되자 묵향은 자고 있는 공주를 깨웠다. 그냥 툭 쳤을 뿐인데도 공주는 소스라치듯 놀라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냐?”

“곧 있으면 날이 밝습니다. 지금부터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안기시겠습니까? 아니면 업히시겠…….”

“닥쳐라!”

그러더니 공주는 보이지도 않는 앞을 더듬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묵향도 말릴 생각은 없었으므로 느긋하게 뒤를 따라갔다.

‘자존심 세워 봐야 힘만 빠지지, 클클…….’

날이 밝자 전날과 같은 상황의 전개가 이어졌다. 상대의 추격이 시작되기 전까지 묵향은 공주 혼자 힘껏 걸어 다니게 만들었다. 그것 때문에 일부러 일찍 깨운 것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진짜로 사로잡히면 안 되기에 적의 추격이 시작되자 공주를 안고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정말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안 잡히는, 쫓기는 사람이나 쫓는 사람이나 피를 말리는 경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공주도 한 번씩 뒤로 언뜻언뜻 보이는 적 때문에 간이 콩알만 해질 지경이었고, 쫓는 쪽에서도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니 휴식이고 식사고 모두 때려치우고 오직 추격만을 해 대자니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때쯤이 되자 적은 30여 명에서 5명 정도로 줄어들어 버렸다. 경공술이란 것은 원래가 잔재주가 통하지 않는 순수한 내공만이 동원되는 기술이다. 짧은 거리만 경공술을 펼친다면 내공도 중요하지만 그 사용하는 경공술이 어느 정도 속도 위주로 만들어졌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속도 위주로 만들어졌을수록 내공의 소모는 그에 비례해서 커진다. 하지만 이런 장거리 경주를 하면서 그런 속도 위주의 경공술을 펼칠 바보는 없다. 그 전날에도 추격을 해 봐서 알지만 도망치는 녀석의 경공술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황군들과 힘을 합쳐 싸우지 않고 공주만 안고 튄 점으로 미루어 생각해 보면 경공술만 대단했지 무공은 고강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니 죽자고 적을 쫓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따라만 잡으면 저 얄미운 놈을 찢어 죽일 수가 있을 테니까…….

추격은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하면서도 하루 종일 반복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내력이 떨어지는 수하들은 뒤로 처져 버리고 내력이 고강한 자들만 남은 것이다. 하지만 추격하는 지휘자인 회의 무사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쫓아가면서 뒤로 낙오한 무리들이 충분히 따라올 수 있도록 표시를 해 두었을뿐더러 자신들만의 표식으로 만리향(萬里香)을 사용하기 때문에 어두워져도 그 냄새를 따라서 모두들 모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리향이란 어떤 한 가지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고 상당히 독특한 향기를 풍기는 여러 종류의 특수한 향을 총칭하는 것이다. 만리향은 그 향기가 오래가면서도 향기가 짙어 멀리서도 그 향을 추격할 수 있다. 만 리는 거짓말이고, 그 향내를 맡을 수 있는 독특한 내공 수련을 충분히 받는다면 1백 리 이내라면 가까스로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한 향기를 뿜는다.

하지만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들은 거의 그 향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향을 낸다. 그렇기에 갑(甲)이라는 만리향에 대해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훈련을 받았다고 해서 을(乙)이라는 만리향의 향내도 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피를 말리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곳은 숲 속이라 경공술을 펼치는 데는 상당히 무리가 있는 지형이다. 거기에 상대는 이 넓은 산속만을 왔다 갔다 하면서 벗어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저놈이 산속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이 일대 곳곳에 흩어져 기다리고 있을 고수들에게 연락을 보내어 껍질을 홀랑 벗겨 버리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놈이 이 넓은 수림 속에서 빠져나갈 생각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이 지겨운 추격을 계속 해야만 했다.

달리는 사람에게 안겨서 하루 종일 있어 본 사람이 있을까? 아무튼 이것은 진귀한 경험임에는 틀림없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보통 일이 아니다. 상대가 허리 아래쪽을 받쳐 준다고 하지만 이쪽에서도 힘을 써서 상대의 목이라도 끌어안아야지, 그렇지 않고 그대로 있을 수 있는 강심장은 없다. 받쳐 주는 상대도 상대 나름이겠지만 공주의 허리 밑에서 힘을 주고 있는 자는 그녀가 이 난리가 나고 나서야 얼굴이 익은 초면의 인물이었기에 사태가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면 언제 그녀를 패대기치고 도망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손은 아프고 계속 누운 자세니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앞으로 힘을 줘야 바로 되니 뻐근해 오고……. 차츰 시간이 지나다 보면 이건 보통 고문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공주로서는 불행 중 다행인 점이 있었다. 그것은 첫날은 도망친 시간이 짧아 별 문제가 없었지만 둘째 날부터는 하루 종일 도망쳐야 했다. 그 말은 곧 초면인 이 흑의 위사의 품속에서 하루 종일 안겨서 도망 다녀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난리가 난 후에는 식량이 없어 물 한 방울 먹은 것이 없으니 아직 그녀로서는 요의(尿意)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사실 적이 바짝 뒤쫓는 상황에서 소변보자고 내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니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둘째 날의 치열한 추격전이 끝나고 어둠이 내려앉자 흑의 위사는 또다시 식량을 구한답시고 떠났다. 거의 두 시진이 지난 후에야 갑자기 나타나서는 구해 온 식량을 불에 굽기 시작했다. 거의 배가 고파 실신하기 일보 직전에 이른 공주로서는 정말 되도록이면 참고 먹을 생각이었지만 그 식량(?)을 한 번 본 다음에는 솟구치던 식욕이 쑥 들어가고 말았다.

“헤헤헤, 오늘은 좀 많이 잡았습니다. 마마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 하늘도 감동하셔서 이렇게 많이 보내 주셨는 모양이죠. 헤헤헤…….”

화롯불을 빙 둘러 일곱 마리의 큼지막한 들쥐를 막대기에 꿰어서 조금씩 돌려 천천히 구우면서 너스레를 떠는 묵향이었다. 그 들쥐도 묵향이 일부러 내장만 제거 했을 뿐 교활해 보이는 머리도, 뾰족한 꼬리도 다 붙어 있는 통통한 놈들을 가죽도 안 벗기고 구워 대고 있으니 공주의 식욕이 날 리가 없었다. 그 모양을 보고 구역질이 올라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는,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배를 달래며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이런 산골짜기에서 저거라도 구해 오는 것이 용하지.’

이건 순진한 공주의 생각이었고 저 옆에서 흥얼거리며 공주에게 들으라는 듯이 맛있게 쩝쩝대며 쥐 고기를 먹고 있는 모진놈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사실 공주의 잘못이라면 저런 나쁜 놈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 하나였으니까…….

뜻밖의 구원자

하늘이 빙빙 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은 붕 떠서 어디론가 떠나가는 것 같고, 배는 고프고 목은 마르고, 온몸에 힘은 하나도 없고…….

“물… 물…….”

다른 것은 몰라도 물을 안 먹고 사람이 오랫동안 살 수는 없다. 밥이야 한 달 정도 안 먹어도 살지만 물은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공주의 경우 거의 24시진(48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으니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안고 뛰는 자의 무뚝뚝한 대답…….

“조금만 참으십시오. 해가 지고 나면 물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해가 지려면 아직 엄청난 시간이 남았지만, 본의 아니게도 묵향이 한 말은 진실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미쳤다고 지금 물을 가져다주냐? 좀 더 고생을 시킨 다음 가져다주지. 자, 다음에는 뭘로 생고생을 시키지? 흐흐흐흐흐…….’

공주도 물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지만 묵향을 뒤쫓아 오는 무리들의 사정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자가 건량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지만, 대나무나 사기, 또는 가죽으로 만든 자그마한 물병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 보니 제법 무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몇몇 고수를 제외하고 이틀에 걸친 격렬한 달리기를 견딜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묵향은 물이 졸졸거리는 소리를 멀찍이에서 듣고는 뻔뻔스럽게도 그쪽을 피해서 도망 다녔으니 그보다 무공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지는 추격자들은 여태껏 아예 물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주는 세 번째 맞이하는 야영에서 처음으로 물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흑의 위사는 먹을 것을 구해 온답시고 자신을 놔두고 떠났다가 거의 두 시진이 넘어 나타나서는 자신의 신발 한 짝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 물이 있으니 드시지요.”

흑의 위사가 신고 있는 냄새 나는 가죽신 안에 물이 들어 있었다. 흑의 위사는 그릇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기에 가죽신을 벗어 거기에 물을 담아 왔다는 답이었으니 따질 수도 없었다. 평상시의 공주라면 도저히 마실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만 3일을 굶으면 도둑질을 안 할 사람이 없다고 했던가……. 음식도 그렇거늘 하물며 물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그녀는 냄새 나는 가죽신에 담긴 물을 마시고야 말았다.

하지만 흑의 위사가 장만해 온 식사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흑의 위사는 가까스로 구했다면서 30여 마리의 털이 숭숭 돋아난 큼직한 송충이들을 나뭇가지에 꿰어서는 불에 구워 공주에게 권했던 것이다.

공주는 상대가 먹는 모습을 보면 더욱 허기를 느낄 것이 분명하기에 아예 돌아누웠고, 그 때문에 그녀는 묵향도 맛있는 소리를 내며 먹는 척만 했지 숲 속으로 불에 잘 익은 송충이들을 버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무리 묵향이라도 그것을 먹을 정도로 비위가 좋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묵향이야 오늘도 오리탕 두 그릇에 반주로 고량주 한 병까지 비운 다음 이리 달려왔으니 먹으나 안 먹으나 별 상관이 없었지만 공주는…….

다음 날 아침도 변함없는 일과의 반복이었다. 쫓고 쫓기는……. ‘그놈’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 묵향의 계획대로 공주를 ‘말려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묵향이 헐레벌떡 쫓아오는 적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도망치고 있는데 웬 껄렁하게 생긴 녀석이 앞을 가로막았다.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인물로 유약하게 보일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왼쪽 눈 위에서부터 시작해 오른쪽 뺨 위까지 이어지는 얕은 검상 덕분에 그의 얼굴은 한편으로 굳건해 보였다. 그의 양쪽 어깨 위에는 1척 반(약 45센티미터)이나 되는, 검에 극성인 외문병기(外門兵器)인 호조(虎爪)가 얹혀 있었다. 남루해 보이는 그의 옷차림으로 보아 아마도 떠돌이 무사인 듯한 인물이었지만 묵향의 앞을 경쾌한 몸놀림으로 가로막은 것으로 미루어 꽤나 한 수 하는 작자처럼 보였다.

‘이런, 매복이 있었나? 내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경공을 지닌 놈은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면 어젯밤에 예상 경로에 수하들을 매복시켰던지.’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빠르게, 하지만 지금은 적당한 무공으로……. 묵향은 곧 그의 허리에서 장검을 뽑아 들며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적을 제압할 목적보다는 도망칠 목적이 강했기에 내력을 거의 사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잠시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뒤로 황급히 물러서며 외쳤다.

“멈추시오. 소생은 적이 아니오. 당신들을 돕고 싶어서 그러오.”

묵향은 뒤쪽을 힐끗 바라본 다음 다시 몸을 날리며 말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딴 곳으로 꺼져.”

사내도 뒤에서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는 거의 30여 명이나 되는 무사들의 살기등등한 모습을 보더니 묵향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려 왔다. 묵향이 측정하기에 지금 자신의 계획을 망치고 있는 이 망할 녀석의 무공은 상당히 뛰어났다.

‘재수 옴 붙었군. 저놈의 실력이면 저 뒤쪽에서 쫓아오는 놈들 모두를 처치할 수 있을 거야. 저놈이 나를 돕겠다고 들면 곤란한데…….’

“도대체 왜 쫓기는 거요?”

“이런, 망할……. 꺼지라고 했잖아.”

하지만 상대는 끈덕지게 묵향을 따라오며 말을 걸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때 묵향으로서는 재수 없게도 배고픔과 목마름에 정신이 하나도 없던 공주가 깨어난 것이다. 그녀는 옆에서 따라오고 있는 상대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끼야야악!”

그녀는 아마도 옆에서 따라오는 상대가 여태껏 자신을 추적해 왔던 적들로 오인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젊은이가 말을 걸자 차츰 안정을 취하면서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쁜 놈이 아니오. 무슨 일이오?”

“본녀는 대 송제국의 공주다. 저 뒤의 반도들에게 쫓기는 중인데 그대는 제국의 신민(臣民)으로서 의무를 다해 본녀를 도와라.”

“공주 마마라고요?”

“그렇다, 본녀가 진영이다.”

상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묵향을 바라봤다. 묵향은 이 녀석을 떨쳐 버릴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네놈은 공주 마마의 말씀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발칙한 놈 같으니……. 어서 꺼져라.”

하지만 상대는 뒤를 한번 힐끗 보더니 공주에게 능청스레 말했다.

“마마를 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얼마를 주실 건지…….”

“뭐라구?”

“수고료로 얼마를 주시겠습니까?”

“무엄한 놈. 본녀와 흥정을 하자는 말이냐?”

“돈을 주시지 않겠다면 소생은 물러가겠습니다. 그럼 평안한 여행이 되시기를 비옵니다. 안녕히 가시옵소서.”

그는 일부러 옆으로 천천히 이탈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공주는 상대를 불렀다.

“잠깐, 네놈은 얼마를 원하느냐?”

그러자 그자는 재빨리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황금 1백 냥!”

“좋다. 본녀를 어림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까지 호위해 준다면 지급해 주겠노라.”

“알겠사옵니다.”

그러더니 상대는 호조를 어깨에서 끌러 양손에 부착했다. 호조란 것은 쇠스랑처럼 굽은 반 척에서 2척 사이의 칼날 네 개에서 일곱 개 정도를 강철로 된 장갑처럼 생긴 것에 붙여 놓은 무기로, 장검을 그 칼날의 사이에 끼워 부러뜨릴 수 있다. 여러 개의 날을 가지고 있으므로 거기에 찢기면 상처를 꿰매기도 힘들며 출혈이 심해 적에게 대단한 타격을 줄 수 있다. 거기에 양손에 하나씩 착용함으로 인해 검을 가진 상대를 압박해 나가는 데 있어 최상의 병기로 손꼽힌다.

묘조(猫爪)라는 외문병기도 있지만 이것은 호조와는 달리 한 치에서 다섯 치 사이 길이의 자그마한 칼날이나 송곳이 붙은 골무처럼 생긴 것으로 끝에 독을 발라 각 손가락에 끼워 사용하지만, 암습을 하는 데나 이용되지 정면 대결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 남자가 뒤로 돌아서서 적들에게 달려가자 묵향도 할 수 없이 걸음을 멈춰야 했다. 여기서 자신이 뺑소니친다면 아마도 공주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공주를 땅에 내려줬다. 공주는 비실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도와주겠답시고 적들에게 달려간 젊은이를 간절한 소망을 간직한 채 바라봤다.

다행히 그 젊은이의 실력은 공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상당한 실력으로 흑의인들을 죽여 나갔던 것이다. 왜 이런 골짜기에서 만나게 되었는지 아리송했지만 어쨌건 위급할 때 자신을 도와준다는 데야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 않은가?

그 젊은이가 먼저 덮쳐 온 흑의인들을 모두 다 죽여 버리자 우두머리인 듯한 회의인(灰衣人)이 그의 옆에 서 있던 네 명에게 손짓을 했다. 그 네 명은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면서 수비를 무시한 채 강렬한 합격(合格)을 전개했다.

먼저 두 명이 달려가다가 젊은이의 양쪽 어깨 위로 검을 쳐 내렸다. 그러자 젊은이는 순간적으로 호조로 그 양쪽의 검을 막았다. 이때 그 젊은이의 머릿속에는 위험 신호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적이 일격을 날리고 곧바로 후퇴할 줄 알았는데, 그대로 힘을 주어 위에서 아래로 밀어붙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상대의 검을 막기 위해 호조를 낀 양손에 힘을 주어 버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남은 두 명은 1진의 뒤쪽으로 나타나 검을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리며 젊은이의 복부 쪽으로 그어 올렸다.

그들의 공격은 대단히 오랫동안 연습을 거친 듯,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공격해 적이 순간적으로 1진의 공격을 막으면 동시에 2진이 공격하는 방법을 취했다. 만약 여기서 그가 뒤로 물러서려 한다면 먼저 막았던 두 개의 검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서 들어올 것이고, 또 2진의 공격이 바로 연결될 것이다. 어디 한 군데 베일 작정을 하지 않는다면 이 난국을 해소할 길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정말이지 고약한 일격이었다.

1진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밀어붙이는 덕분에 위로 뛸 수도 없었다. 있다면 한 가지뿐……. 젊은이는 1진의 쳐 내리는 검을 호조로 힘껏 뿌리치며 그 둘 사이를 빠져 앞으로 달려 나갔다. 위와 뒤는 물론 양옆으로도 움직일 수 없으니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상대가 더욱 기다리던 일이었다. 네 명의 부하들을 돌진시킨 후 뒤에서 기다리던 회의인이 그 순간을 노려 달려들며 순식간에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그어 왔다. 젊은이의 양손은 1진의 검들을 뿌리치기 위해 양 옆으로 벌어진 상태……. 회의인의 일격을 온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 순간 한 마디 짧은 기합성이 울리면서 사태가 역전되었다.

“이얍!”

그와 동시에 그 젊은이의 주위로 순간적으로 강기의 회오리가 퍼져 나가며 사방에서 육박해 들어가던 검들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다섯 명의 무사들은 온몸이 걸레가 되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저 무공은… 정말 대단하군. 한낱 떠돌이 무사가 아니야. 엄청난 수련을 거친……. 그런데 저런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젊은이는 아찔했었던 듯 창백한 안색에 한숨을 쉬면서 공주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만큼 방금 전 연수합격은 대단했었다. 아마도 젊은이의 무공이 대단히 뛰어나지만 않았다면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공주는 그 대결이 젊은이의 일방적인 도살로 막을 내린 것을 대단히 놀라워했다. 돈밖에 모르는 뻔뻔한 놈이었지만 그 실력 하나는 그자가 청구하는 금액만큼이나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금 1백 냥이면 은화로 2천 냥이다. 한 가족이 아쉬운 대로 4백 년은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막대한 금액인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공주는 그 금액이 하나도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드디어 며칠 동안이나 자신을 쫓아다니던 공포스러운 적들이 모두 시체로 변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 미련한 아가씨는 아쉬운 것을 몰라 황금 1백 냥이 어느 정도의 거금인지 잘 알지도 못했기에 처음부터 아깝다는 생각조차 없었지만…….

창백한 안색으로 돌아오는 젊은이를 보고 흑의 위사는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대단하군…….”

그러자 젊은이는 맥 풀린 표정이었지만 간단히 포권했다.

“과찬의 말씀을…….”

“정말 대단한 연수합격이었어. 저 녀석들의 실력이 지금보다 두 단계 정도만 높았으면 충분히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었는데…….”

상대의 시큰둥한 마지막 말에 젊은이는 똥 씹은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왜 죽고 살아왔느냐 묻는 거나 마찬가지니…….

그다음부터는 젊은이가 안내하고 흑의 위사와 공주가 그의 뒤를 따르며 길을 가게 되었다. 자신을 사령귀조(死令鬼鳥) 임방(任放)이라 소개한 그자는 야인(野人)임에도 궁중에서 쓰이는 존대어를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더욱 수상한 점은 주변의 지리를 파악하는 예리한 안목, 또 그에 따른 신속한 대응, 허를 찌르는 예리한 수법으로 적을 따돌리는 놀라운 재치라든지, 뛰어난 무공, 모든 면에서 노련한 강호인임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이런 시골구석에서 만날 가능성이 없는 상당히 뛰어난, 그래서 더욱 수상한 인물이었다.

그날 저녁 공주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비록 외딴 시골 식당이라 그 아무리 좋은 요리라도 황궁의 산해진미에 비할 바 못 되었지만 공주는 정말이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본다는 듯이 아귀아귀 먹어 댔다. 곧 공주의 뱃속으로 한 그릇의 오리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양에 안 차는지 그녀는 두 번째의 오리탕을 주문했다. 하지만 두 번째의 오리탕을 시켰을 때 임방이 그녀를 제지했다.

“공주 마마, 더 이상은 아니되옵니다.”

공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임방은 말을 이었다.

“며칠 굶으신 듯하온데, 저자처럼 무공을 익히지 않으신 이상 갑자기 음식을 많이 드시면 몸에 해롭사옵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쉬시면서 내일을 위해 원기를 보충하시옵소서.”

“알겠노라.”

묵향은 또다시 자신의 계획이 어긋난 것을 깨달았다. 돼지처럼 꾸역꾸역 처먹고 난 후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먹은 것을 다 토하면서 난리를 치기를 기대했었는데…….

‘하긴, 뭐… 복수도 이 정도 했으면 되었지. 저 좋던 살집이 몇 근은 빠졌을 테니까……. 이제 슬슬 돌려보내고 나도 본타로 돌아갈 궁리나 해야겠군.’

임방은 원래가 공주 마마의 행방불명 때문에 관부에 고용된 현상금 사냥꾼이다. 그는 3류 수준의 무예를 갖춘 악당들을 주로 사냥하기에 무공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모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추적술은 놀라워서 일단 그가 잡고자 마음먹은 상대를 놓쳐 본 적이 없었다. 관부에서도 그 점을 높이 사 공주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황군과 어림군을 파견하기에 앞서 임방 외에도 추격에 능한 다섯 명의 무림인들을 급히 고용하여 파견한 것이다.

임방은 원래 이렇게 큰일에는 끼어들기 싫어했지만 그래도 공주의 납치 사건이라 국가에 대한 얄팍한 충성심으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공주를 무사히 모셨을 경우 거금 황금 50냥을 준다는 말에 눈이 뒤집혀 동행들을 추월하여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공 실력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단 공주만 만나면 모든 일이 손쉽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공주와 만난 다음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흑의 위사!

공주를 모시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다. 도망 다니는 경공 실력이나 그 침착함, 그리고 며칠씩 굶었다는데도 멀쩡한 태도, 모든 것을 종합해 봐도 꽤나 무공을 수련한 자처럼 보이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무공을 익힌 것 같지 않았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무공을 익혔다면 그자는 상당한 무예를 익힌 것이 분명했다. 그건 여태까지 임방이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저런 시러베아들 같은 놈들에게 쫓겨서 며칠씩 산속을 헤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놈들에게 쫓기고 있었고, 그것을 기회로 자신이 돈을 챙기면서 상대를 도륙내는 데 성공은 했지만 아무래도 저놈의 눈치가 도와준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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