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930)

임방은 공주가 식사를 마치자 그녀를 방으로 안내했다. 임방은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그 옆에 빌려 둔 방으로 들어갔다. 임방은 어깨에 걸어 둔 호조를 풀어서 침상 머리맡에다 올려 둔 다음 벽에 기대어 한숨 돌렸다. 그로서도 오늘은 아주 힘든 하루였기 때문이다.

‘무공도 할 줄 모르는 계집을 호위하는 건 정말 싫어. 그리고 그 망할 놈은 하나도 도와주지 않다니…….’

내심 투덜거리고 있는데 조금 지나자 흑의 위사가 술병을 하나 들고 들어오더니 검대를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놨다. 그런 다음 의자에 털썩 앉아서는 임방에게는 예의상이라도 마시겠느냐는 말 한마디 없이 혼자서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그 모양을 임방이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멍하니 보고 있는데 갑자기 흑의 위사가 입을 열었다.

“흐흐흐, 자네는 나를 의심스런 눈으로 보고 있군…….”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

하지만 임방이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소리 안 하자 다시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어 갔다.

“크… 역시 술은 좋은 거야. 하지만 자네가 의심스런 눈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나도 자네가 의심스럽다네…….”

“…….”

“현상금 사냥꾼이라고 했지만, 사실 자네 정도 실력을 가진 현상금 사냥꾼도 많지 않을 거야. 현상금 사냥꾼치고는 실력이 너무 좋아. 그리고 강호 경험이 대단히 풍부하다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 나는 어느 정도는 자네의 신분에 대해 감을 잡고 있는데…….”

임방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탁자 위에 올려둔 검집에서 아무도 만지지 않았는데도 검이 쓱 뽑혀 나오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임방 쪽으로 날아왔다.

‘어기동검(御氣動劍)…….’

임방은 대경하여 황급히 상체를 옆으로 젖히며 한 손으로는 호조를 잡고 또 한손으로는 그것을 쳐 내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 쏘아져 들어오는 검의 속도는 놀라울 만큼 빨랐다. 유연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검은 이미 임방의 목을 꿰뚫기 직전의 위치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방심했군. 내가 이렇게 죽다니…….’

임방이 체념한 찰나 상대의 검은 더 이상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임방의 목에서 반 치도 안 되는 거리……. 임방은 상대의 검을 쳐 내지 않고 의아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이런 좋은 기회를 포기해 버리는 것으로 보아 상대에게 살심(殺心)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흑의 위사는 아직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편안히 앉은 채 또다시 술병을 기울여 한 모금 마신 후 임방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다.

“자, 사실대로 털어놔 보시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오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무엇을 털어놓으라는 거요?”

“네 녀석은 누구한테서 무공을 배웠나?”

“그건… 그건 말할 수 없소.”

그러자 흑의 위사는 마지막으로 한 모금을 더 마신 다음 술병을 탁자 위에 놓고 일어서서 다가갔다.

“꼭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군.”

“누가 눈물을 흘릴지는…….”

그와 동시에 임방은 비쾌하게 자신의 목 앞에 정지해 있는 상대의 검을 오른손으로 쳐 내면서 동시에 왼손으로 옆에 놓여 있는 호조를 잡았다. 아니 한쪽의 호조가 능공섭물(能空攝物)로 끌려 들어와 왼손에 저절로 끼워졌다. 그러면서 오른발을 들어 족장(足掌 : 발바닥)에서 그 빌어먹을 녀석을 향해 장풍을 쏘았다. 하지만 임방의 움직임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어느새 벌써 혈도를…….’

임방이 쏜 강맹한 장풍을 흑의 위사는 피할 값어치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몸으로 맞았고, 펑 하는 소리가 났지만 그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그리고 상대가 그 와중에 언제 격공점혈의 고명한 수법으로 임방의 혈도를 짚었는지, 점혈당한 당사자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흑의 위사는 장풍 따위 맞은 적도 없다는 듯 서서히 다가오며 임방의 오른발을 들어 발바닥을 힐끗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쯧쯧쯧, 쓸데없는 수고로 신발에만 구멍을 뚫어 놨군. 꼭 눈물을 흘리고 싶다면 뭐 그것도 좋겠지. 나도 고문하는 것을 별로 싫어하지는 않거든. 하지만 이건 장담할 수 있는데 나한테 고문받고 살아서 나간 녀석은 딱 한 녀석뿐이라는 것만은 명심하게나.”

임방은 정말 재수 더럽게도 상대를 잘못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기동검술(御氣動劍術) 따위는 허공을〔空〕 격하고 능히〔能〕 물건을〔物〕 당길 수〔攝〕 있을 정도의 내공 조예만 지니면 가능한 기술이다. 능공섭물의 기법만 죽어라고 연습하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상대가 어기동검술을 펼쳤을 때, 속도가 빠른 것이 마음에 좀 걸리기는 했지만 상대의 검에 기가 응축되어 발생하는 어기충검(御氣充劍)의 현상이 벌어지지 않았기에 호조만 가진다면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의 한 수는 그의 마지막 기대감마저 무참히 부숴 버린 것이다. 임방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물었다.

“그 한 명은 누구요?”

“내 사부가 아끼던 녀석이었지. 꽤 장래가 촉망되던 놈이었는데, 그 사실을 일찍이 알았으니까 살았지 안 그러면 염라대왕도 그놈이 누군지 못 알아봤을 거야. 누구한테서 무공을 배웠는지는 아주 중요해. 내가 아는 사람의 제자일지도 모르거든. 죽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빨리 말하라구.”

임방은 거의 포기한 듯 털어놨다. 재수 없어서 사문과 원수지간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현재 가주(家主)의 인품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없었기에 그는 진실을 말했다.

“초씨세가에서 배웠소.”

“초씨세가라……. 그렇다면 초우란 놈을 알겠군.”

순간 임방은 속으로 찔끔 했지만 자신이 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주님의 인품은 믿지만 설마 초우 그놈이 못된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허기야 저자의 실력을 보니 못된 짓을 했다면 먼저 초우가 작살이 났겠지……. 이렇게 애꿎은 나를 잡고 닦달을 하려구…….’

“알고 있소.”

“그 녀석은 누구지?”

“가주의 아들이지 누구겠소?”

“자네는 그 녀석과 어떤 관계지?”

“어떤 관계는요? 그냥 초씨세가에서 무공 좀 익히다가 가주 눈 밖에 나서 쫓겨난 처지인데…….”

“흐흐흐, 자네의 무공은 겉핥기로 배운 게 아니야. 거의 수십 년을 처박혀서 가전(家傳)의 비급(秘級)을 깊이 있게 배운 적전제자(適傳弟子)라구. 안 그래? 아까 낮에 써먹은 일초식으로 보아하니 초우란 녀석보다도 몇 등급 위더군. 적전이 아니라면 그 가주의 아들보다 자네의 무공이 강할 수는 없지.”

“먼저 초우와 어떤 관계인지 말해 주면 나도 말을 하겠소.”

“훗!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니야. 전에 한 번 내 일을 도와준 적이 있지. 다음에 자네가 그 녀석을 만나거든 그때 일을 발설하면 혓바닥을 뽑아 버리겠다고 한 말을 잊지 말라고 전하게나.”

“무슨 일인데 도와준 사람을 그렇게 핍박한다는 거요?”

“그건 자네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러니 이제 본론을 시작해 보자구.”

“내 원래 이름은 초류빈(楚柳濱)이오. 나는 초씨세가에서 자랐고 거기에서 가전의 비급을 배운 것은 사실이오. 그렇지만 한 가지 일에서 가주하고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고 뛰쳐나왔소. 지금은 보시다시피 현상금 사냥꾼 노릇이나 하고 있죠.”

“어떤 의견이 차이가 났는데 사문을 버릴 정도인가?”

“그건 말하고 싶지 않소.”

“흐흐흐, 아마 말하는 게 자네 건강에 좋을 거야.”

음흉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상대의 눈빛은 단호했다. 단 한 점의 타협이나 양보조차 불가능함을 느낀 임방은 체념한 듯 실토했다.

“뭐, 좋소. 꼭 숨겨야 할 정도로 구린내 나는 과거도 아니니까. 그때 의견 차이는 사파에 대한 가주의 행동이었소. 나는 사파 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 찢어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소. 그놈들의 사악한 행위를 가주는 그냥 참고 있는 거요. 그래서…….”

“웃기는 노릇이군. 사파가 자네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 모두 찢어 죽여야 한다는 거지?”

“그건 말하기 싫소. 내 신상에 관한 일이고, 또 당신은 알 권리가 없소.”

“흐흐흐, 나는 알 권리가 있지. 나도 사파거든.”

임방은 흠칫하는 표정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흑의 위사를 바라봤다. 사파의 인물이 공주를 호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또 사파의 인물들 중에서 저 정도 뛰어난 고수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임방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굳은 안색으로 물었다.

“당신은 천마신교의 인물이오?”

“호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말 돌리지 마시오. 사파의 쓰레기들 중에 당신 정도의 무공을 지닌 사람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오. 있다면 천마신교뿐.”

“그래, 본좌는 천마신교의 인물이지. 뭐 천마신교의 인물임을 부인할 생각은 없으니 그다음을 계속하게나.”

“지옥혈귀(地獄血鬼) 천진악(天進惡)은 잘 지내고 있소?”

“그 녀석이야 잘 지내고 있겠지. 왜 그러나?”

임방은 흑의 위사가 ‘그 녀석’이라고 호칭하는 것에 경악에 물든 표정으로 안색이 바뀌었다. 마교에는 외부에 별로 잘 알려진 인물이 없었다. 잘 알려진 수뇌부로는 막강한 무공을 지닌 4천왕이 있었고, 그다음 고수로 알려진 인물은 고루혈마(枯?血魔) 외총관과 음희(淫嬉), 지옥혈귀(地獄血鬼) 정도였다. 그 나머지 인물들은 무림에서 거의 활동을 안 하기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4천왕 같은 경우에도 정파에서 3황5제라고 칭하며 여덟 명이나 되는 화경의 고수를 보유하고 있음을 자랑 삼아 떠들어 대자, 심사가 뒤틀린 마교에서 이쪽은 극마(極魔)의 고수가 네 명 있다고 발표했고, 그 말은 세인들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여러 문파에 한 명씩 있는 것과 한 문파에 네 명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옥혈귀라면 마교에서도 대단히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자를 ‘그 녀석’이라 칭할 정도라면 이자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직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당, 당신은 누구요?”

“자네가 내 질문에 먼저 대답을 해 주면 나도 말해 줄지 모르지.”

“내 얼굴에 난 흉터를 그놈이 만들었소. 그것도 내가 무림초출 때… 내 얼굴이 잘생긴 게 마음에 안 든다면서 만들어 놓은 상처요. 나는 그놈을 죽이기 위해 죽자고 수련했소.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을 때 그놈에게 도전을 해 보려고 했었는데 가주가 나를 막았고, 서로 다투다가 사문을 뛰쳐나왔소. 그리고는 지옥혈귀를 찾아갔는데 의외로 그는 순순히 비무에 응해 줬소. 그에게 패한 다음 사문에 돌아갈 면목도 없어 그냥 현상금 사냥꾼이나 하고 있소.”

“꽤나 재미있는 얘기군. 지금 자네의 실력이라면 조금 더 노력한다면 지옥혈귀를 진짜 귀신으로 만들 수 있지. 어때? 내 밑에서 일해 보지 않겠나? 그러면 내가 무공을 가르쳐 주지.”

“당신은 마교인데……. 고마운 제의이기는 하지만 나는 마교에 들어갈 생각도 없고, 들어가지도 않겠소.”

“자네보고 마교도가 되라는 소리가 아니야. 지금 나는 마교 놈들에게 쫓기는 처지라고 볼 수 있지. 지금 마교에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중이야. 그래도 안 되겠나?”

“하지만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소.”

“뭐, 못 믿어도 하는 수 없지. 나는 묵향이라는 사람일세. 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보력을 갖춘 집단에게 의뢰를 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내가 지금 말해 봐야 믿지도 않을 테니, 나에 대해 알아보고 믿음이 가면 찾아오게나.”

“알겠소. 한번 생각해 보겠소.”

묵향은 상대의 혈도를 풀어 준 다음 다시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마시기 시작했다.

새로운 일행

다음 날 새벽이 되자 일행은 어제저녁에 만들어 둔 식은 만두로 아침 식사를 급히 해결한 후 출발했다. 아직 상대를 완전히 따돌린 것이 아니기에 놈들도 흩어져서 공주 일행을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테니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을 구할 수도 없었기에 여태껏 해 오듯 흑의 위사가 공주를 안고 경공술을 펼쳐 일행은 최대한 빨리 강수(崗守)에 도착할 생각이었다. 쫓기는 중이었기에 감히 관도(官道)로 나갈 생각은 못 하고 산길로 산길로 달리고 있는데, 앞쪽에서 마차와 함께 말을 탄 다섯 명의 인물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최대한 빨리 말을 몰아대는 것으로 보아 아주 급한 용무가 있는 듯 보였다.

묵향은 임방이 말릴 사이도 없이 안고 있던 공주를 내려놓은 다음 길을 가로막아 섰다. 공주 일행에게 가까워진 마차와 그 호위들은 웬 사람이 길을 막고 서 있자 급히 말을 멈췄다.

“웬 놈들이냐?”

묵향은 진영 공주를 힐끗 보며 말했다.

“이분은 진영 공주 전하시다. 너희들은 우리들을 강수까지 안내해 줘야겠다.”

“…….”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곧이어 오른쪽에 있던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정중히 말했다.

“그대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증거를 제시해 주기 바라오.”

그러자 모두의 눈길이 진영 공주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곧이어 벌게지더니 앙칼지게 외쳤다.

“증거는 무슨 증거란 말이냐? 네 녀석들은 본녀가 공주란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냐?”

노기에 찬 그녀의 말을 듣고 묵향도 잠시 자신들 패거리의 꼬락서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송의 신민들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호패(戶牌)를 가지고 다닌다. 그것이 있어야 관에서 통제하는 모든 곳을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무림인의 경우 관병들 따위는 생각도 안 하므로 자신들만의 표식인 각 문파나 직위를 나타내는 독특한 문양의 명패를 호패와 함께, 또는 명패만 가지고 다니기 마련이었다. 만약 검문을 하면 그곳을 돌아서 통과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공주를 나타내는 어떤 패(牌)가 있다는 말은 누구도 들은 바가 없었다. 또 관병들조차도 황족을 나타내는 호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왜 그런고 허니 황족인지 아닌지는 호위하는 인물들이 누군지 보면 모두들 아는 노릇이었으니까 구태여 신분 확인 작업 따위의 절차도 필요 없었다. 그리고 공주의 표정을 보니 자신을 증명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상대의 이목을 속인답시고 남장을 한 공주나 공주를 호위한다는 인물, 즉 묵향과 임방의 모양새를 보고 황족이나 황군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너무 무리한 요구였다.

공주가 벌게진 얼굴로 대들자 아예 상대는 멸시조로 나왔다.

“호오, 이건 심하군. 요즘 공주 마마들은 황군의 호위도 없이 바깥출입을 하시는 모양이지?”

“그러게 말이야. 시녀도 옷도 노잣돈이 떨어져서 팔아 먹으셨군.”

“요와의 전쟁에서 그 많던 황군은 다 죽은 모양이야. 저런 놈들이 황군이라면…….”

이러쿵저러쿵 한소리씩 해 대자 공주의 얼굴은 벌게지다 못해 퍼레지더니 악을 썼다.

“저런 발칙한 놈들을……. 본녀를 업신여기다니. 여봐라, 저놈들을 쳐라.”

그러자 여태껏 공주의 말이라고는 귓등으로 듣던 묵향이 얼씨구나 하고 싸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검을 천천히 뽑았다. 묵향이 척 보아도 상대는 정기(精氣)를 내뿜는 것이 정파를 자처하는 무리들처럼 보였다. 그런 데다가 ‘저런 놈’ 운운하고 있으니, 공주한테 화풀이하기는 글렀으니 새로 생긴 화풀이 대상인 저놈들을 몽땅 다 죽여 버린 다음, 그 책임은 공주한테 홀딱 뒤집어씌울 생각이었다. 사태가 돌아가는 모양을 보던 임방은 급히 앞으로 나서며 묵향을 제지한 다음 상대에게 말했다.

“귀하들의 주인에게 한 말씀 여쭐 수 있게 해 주실 수 없겠소? 그편이 쓸데없이 검을 교환하는 것보다 좋을 거외다.”

“하하하, 별 미친 녀석들을 다 보겠군. 길 앞을 막아서서 공주 운운 해 대더니 이번에는…….”

챙! 챙! 챙!

그와 동시에 묵향의 검이 그 녀석에게 날아갔다. 상대는 더 이상 말을 할 정신도 없이 몸을 피했지만 묵향의 검은 다행히도 그에게까지 날아가지 않았다.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그는 하마터면 목숨이 날아갈 뻔했지만, 간밤에 묵향에게 혼쭐이 났었던 임방이 암암리에 묵향을 주시했고 그에 대한 대비를 했던 것이다. 역시나 묵향의 검이 재빠른 속도로 검집에서 쏘아져 나가는 것을 보고 임방도 오른편 호조를 검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던졌고, 어기동검술에 의해 조종되는 묵향의 검을 임방 역시 같은 수법으로 세 번에 걸쳐 막아 낸 것이다.

세 번에 걸쳐 호조에게 진로를 차단당한 검은 천천히 미끄러지듯 후퇴하여 묵향의 검집 안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묵향의 입에서는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녀석이 감히 본좌가 하는 일을 막는 거냐?”

“쓸데없이 무력을 쓸 필요는 없지 않소?”

그러면서 임방은 품속에서 옥패를 하나 꺼내어 앞의 인물들이 볼 수 있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본인은 초씨세가의 탈명도(脫命刀) 초류빈(楚柳濱)이란 사람이오. 그대들의 주인을 뵙게 해 주시오.”

그러자 상대들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서로 쑤군거리기 시작했다. 탈명도 초류빈이라면 과거 7룡4봉에 들어갔던 인물이며 초씨세가가 자랑하던 신예고수로서 그의 외호처럼 한 자루 도를 악마처럼 잘 다루어 맞붙었던 인물들은 삶을 포기해야 했던 뛰어난 고수다. 수년간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저 명패가 초씨세가에서 사용하는 것이 분명했고, 또 그가 진짜 초류빈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앞의 말도 진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초씨세가는 5대세가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오래된 도의 명가였고, 요즘에 와서는 오히려 가주의 오랜 부재로 인해 세력이 많이 줄어든 5대세가의 말석인 남궁세가(南宮世家)를 능가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잠시 쑤군거리더니 그중의 한 명이 마차로 달려가 낮은 목소리로 마차 안의 인물과 소곤거렸다. 그자는 곧 돌아와서 정중히 말했다.

“아씨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세 사람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도 노기를 거두지 않은 공주, 김샜다는 표정의 묵향, 그리고 한숨 놓은 표정의 초류빈이었다.

이때 마차 문이 열리면서 얼굴을 면사(面紗)로 가린 여인과 시비(侍婢)인 듯 보이는 여인이 황급히 내리면서 일행을 향해 간단히 예를 취했다. 얼굴은 면사로 가렸지만 날아갈 듯한 작은 학들이 수놓아져 있는 엷은 색 녹의(綠衣)에 감싸여 있는 날씬한 몸매는 주인의 몸에 밴 예절 교육에 따라 우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크고 맑은 눈으로 아직도 들고 있는 초류빈의 명패를 바라보며 초류빈을 향해 물어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굵은 편이었지만 탁하지는 않았다.

“만나서 반갑군요. 방금 초 공자께서 하신 말이 정말인가요?”

“그렇소. 이분께서는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고 계시는 진영 공주 전하시오.”

그러자 그녀는 공주를 향해 우아하게 절을 올리며 사죄했다.

“천녀(賤女)가 공주 마마를 배알하옵니다. 수하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어인 일로…….”

그녀의 공손한 태도에 공주는 약간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본녀의 잘못도 있으니 용서하겠노라. 본녀의 일행을 강수에 있는 어림군 사령부까지 안내해 주기 바란다. 관광 중에 적도들의 기습을 받아 황군들은 모두…….”

여태까지의 기막힌 고생이 생각나는 듯 공주의 목소리는 후반에 들어 떨리기 시작했고, 이를 눈치 챈 상대방은 재빨리 공주에게 말했다.

“갈 길이 머옵니다. 어서 오르소서.”

공주가 먼저 마차에 오르자, 그다음은 면사를 쓴 여인이 올랐고, 시녀가 탄 다음 묵향은 시녀의 옆에 앉았다. 초류빈이 들어오려 하자 마차 안의 공간은 넓었지만 묵향이 손을 내저었다.

“자네는 위야.”

씁쓸한 표정으로 마차 위의 마부 옆 자리에 초류빈이 자리를 잡고 앉는데 그의 귀에 전음이 들려왔다.

<내 정체를 공주에게 알리기 싫어서 이번은 넘어가 주겠지만, 한 번만 더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면 죽을 줄 알아…….>

“그대는 누구인고?”

면사를 쓴 여인이 공손하게 공주에게 말했다.

“소녀는 백운옥(白雲玉)이라 하옵니다.”

“급한 일이 있는 것 같던데…….”

“아니옵니다. 마마를 모셔 드린 다음에 처리해도 충분하옵니다.”

밝혀지는 진실

손……. 연한 자색(紫色)이 감도는 기괴한 색깔의 손이었지만 계집의 손처럼 고왔다. 아무튼 특이한 손이었는데 그 손은 지금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잠시 지나자 그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그 종이에 쓰인 내용과 관계가 깊었다.

제목 : 묵향 부교주에 관한 2차 조사 보고서

기간 : 2년

목적 : 중간 보고

투입 인원 : 천마(闡碼) 1호부터 10호

작성자 : 천마 1호

내용 : 묵향 부교주 축출 후 3년에 걸친 대대적인 1차 조사가 행해졌었지만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 이번 2차 극비 재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사 시작 후 1년도 안되었는데도 여태까지의 묵향 부교주에 대한 보고 내용이 대단히 많이 왜곡되었음이 밝혀졌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많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음. 그 이유는 1차 조사는 묵향 부교주의 배후 세력 내지는 사조직에 대한 일제 조사였지만 이번 조사는 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해 그의 모반설 등의 사실 유무나 인위적인 여론 조작 등에 초점을 맞춘 결과이기도 함. 게다가 삼비대를 이번 조사에서 제외시킨 후 그들도 조사 대상에 올려놓은 결과라고 볼 수 있음.

一. 한영영 : 부교주와 함께 무림맹으로 향하는 도중 부교주에게 지독히 쓴 맛을 본 것에 대한 원한으로 대단히 악의에 찬 보고를 올렸었으나 부교주 독립 호위였던 사군자(四君子) 중 진춘(辰椿), 옥련(玉蓮), 마식(馬殖)에 대한 심문 결과 무혐의로 판명됨. 하지만 그가 했던 말 중 자신은 ‘교주에게만 충성을 하지 나머지에게는 아니야’라는 말은 사실이었음. 그때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미루어 교주의 퇴진 후 변절하겠다는 말은 아니었음이 확실함.

二. 장인걸 부교주 : 묵향 부교주에 대한 척결에서 가장 큰 득을 본 인물로 놀랍게도 본교와 암흑마교와의 통합 전에도 일부 사조직을 본교 내에 침투시켜 묵향 부교주에 대한 여론을 조작했음이 밝혀졌음. 그 여론 조작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은 혁무상 장로이며, 그 외에도 일부 고위급 고수들이 관계된 것 같음. 그들에 대한 확실한 물증을 잡으려면 더욱 많은 시간이 필요함.

三. 혁무상 장로 : 삼비대의 수장이라는 지위를 이용, 그에 대한 모반설 등 최악의 경우들만을 상정하여 안 좋은 면만을 교주께 보고함으로 인해 교주님과 묵향 부교주와의 갈등을 조성해 나간 인물로, 아직 확실하지는 않으나 장인걸 부교주와 상당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함. 정확한 물증을 잡으려면 이 건도 시간이 필요함.

四. 마영대(魔影隊) : 묵향 부교주가 포섭한 무리들의 모임이라고 알려졌기에 1년여 기간 동안 철저하게 조사했지만, 부교주 축출 후 있었던 대대적인 1차 조사에서도 밝혀지지 않았듯이 허위 단체인 것이 확실함.

현재 장인걸 부교주는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는데, 심증은 있으나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포착하지 못했음. 좀 더 깊게 조사하는 데는 더 많은 인력과 시간이 필요함. 극비리에 조사 중이므로 더욱 시간이 많이 들어가고 있음. 거기에 삼비대가 냄새를 맡고 역공작까지 하는 낌새가 보임. 추후 사항에 대한 지시를 조속히 해 주기 바람.

급기야 그 손은 종이를 움켜쥐었고 곧이어 종이는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감정을 억누른 침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내가 매(鷹)의 먹이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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