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괴인
백운옥이나 초류빈은 백씨세가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2주일 동안 함께 여행을 하며, 자신들이 처음 접해 보는 묵향이란 마교도를 주목해서 관찰했다. 초류빈이야 묵향에게 자신의 생을 의탁한 처지였기에 만약 주인감이 아니라면 뺑소니칠 생각이었고, 백운옥은 말로만 들었지 ‘사악한 마교도’를 처음 봤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둘이 대단한 호기심으로 묵향을 관찰한 결과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들은 대로 마교도는 마교도였다. 어떤 관습이나 체면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 거기에 무림에 통용되는 문파 간의 존중 따위는 아예 없었다. 그건 함께 백씨세가로 여행을 시작한 지 4일째에, 주변에는 그래도 이름이 나있던 ‘진무문(晉武門)’이라는 정파 계통의 제자 열두 명을 만나면서 알 수 있었다. 비록 면사를 썼다고 하지만 꽤나 미인인 듯한 소저와 그의 시비를 보고 옆에서 조금 농을 걸어 오며 장난을 치던 세 명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네 명의 팔뼈를 부숴 버린 것이다. 세상에, 그것도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망설임 없이…….
뒤미쳐서 그녀의 호위 무사 다섯 명이 말과 마차를 대어 놓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누구에게 추태를 벌인 것인지 눈치 챈 그들이 먼저 슬쩍 도망쳐 버리고 말았지만……. 그때 묵향의 잔인했던 얼굴은 백운옥과 그 시비의 뇌리에 아주 오랫동안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꼴 같지 않게 무림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잘해 주는 편이었고, 특히나 자신의 수하로 들어온 초류빈에게는 상당한 신경을 써 줬다. 그의 무공을 봐 준다든지 하면서……. 그래서 하루는 백운옥이 자신보다는 자신의 시비에게 더욱 따뜻하게 대해 주는 묵향에게 조금 신경질이 나서 한마디 한 적이 있었다.
“진랑이에게 마음이 있으신 거 같은데, 오늘 밤 빌려 드릴까요?”
뭐, 주인이 계집종과 하룻밤 함께 잤다는 것은 정말 농담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시대였기에 주인이 손님에게 마음에 들어 하는 계집종을 빌려 준다는 것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그 질문을 처음에는 가볍게 받아들였다.
“아니, 필요 없다.”
“어떻게 보면 여자한테 약하신 거 같기도 하고, 강하신 거 같기도 하고, 도저히 감이 안 잡히는데 좀 알려 주실래요?”
“흠, 감히 노부의 속마음을 알아내려고 시건방지게 굴지만 않는다면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지. 그래서 너하고는 사이가 좋을 수 없는 거야.”
그러면서 묵향은 똥 씹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백운옥을 뒤로 하고 목욕하러 가 버렸다.
백씨세가까지 제법 오랜 시간 진행된 여행으로 백운옥과 초류빈, 시비, 그리고 경호 무사 다섯 명은 묵향의 괴상한 성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은 성격이라는 결론에, 아예 묵향을 건드리지 않는 게 최상의 길이라는 대응책까지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묵향의 성격에 가장 빨리 적응한 것은 시비였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백씨세가에 들어가 시녀 노릇을 해 왔기에 눈치가 빨라 상전의 기분 변화를 재빨리 알아채는 재주를 익혔던 것이다. 마음 좋은 상전이라면 상관없지만 성격이 모난 상전이라면 곧바로 따귀가 날아오는 것이다.
그런 점에 미뤄 보면 아예 가식이라곤 거의 없는 묵향의 성격이 밑의 사람이 모시기에는 최고의 성격이었다. 조금 기분이 언짢은 것 같으면 접근을 안 하면 그만이요, 조금 기분이 좋은 것 같을 때 주위에서 서성이면 운 좋게 금음(琴音)이라도 얻어 들을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 적응한 무리들은 호위 무사들……. 건드리지만 않으면 되니 주위로 가지만 않으면 된다는 결론. 멀찍이서 죽은 듯이 조용히 있으면 찾아와서 시비까지 거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찾아와서까지 행패를 부리지 않으니 무슨 짓을 하든지 그냥 멀찌감치 서서 구경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마도 묵향의 성격에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인물이 백운옥일 것이다. 그녀는 백씨세가의 금지옥엽. 여태껏 아쉬운 것 없이 자신을 떠받들던 무리들에게 감싸여 자라 온 인물이니, 제멋대로인 이 녀석과 도저히 한자리에서 공존할 수 없는 성격이라고 할까……. 사사건건 간섭하며 성질부리다 이틀 전에 따귀 한 대 맞은 다음 정신을 차리고 요즘은 아예 묵향에 대해 신경을 끄고 있었다.
마차가 제법 큼직한 장원(莊園)에 이르렀을 때 일행의 여행도 끝이 났다. 예전에 백가장(白家莊)이라 불렸으나 그 규모가 커지자 세가(世家)로 불리기에 이른 것이다. 1천 명이 넘는 식구를 거느리게 된 백씨세가는 일대에서 가장 거대한 무력 단체였고, 그 무력을 기반으로 각종 사업을 벌여 그 수입으로 기반을 더욱 튼튼하게 다져 오고 있었다.
사악함과 공포적인 힘의 대명사인 마교 같은 경우도 음으로 양으로 수많은 사업체를 거느리고 있다. 그만큼 무림과 상권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다. 사람이란 동물이 흙이나 공기만 먹고 움직일 수 없기에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자신들의 상권을 지키려면 강력한 무력이 필요했고, 또 그 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러니 각 문파가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그건 문제가 될 게 없었다. 문제는 자신들의 상권을 아무에게도 뺏기면 안 되었고 될 수만 있다면 남의 상권을 빼앗아야만 했다.
상권을 뺏기면 그만큼의 돈이 줄어들고, 그렇다면 그들이 유지할 수 있는 무사의 수도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면 상권은 왜 뺏기느냐? 대부분의 경우 정당한 상거래에 의한 경쟁 때문에 뺏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상권을 놓고 문파끼리 칼부림을 해서 서로의 구역을 뺏어 나가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무림에서는 수많은 다툼이 벌어졌고 오늘의 명가가 내일은 거지 소굴로 변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점을 감안해 본다면 과거 한낱 백가장 정도로 불리며 무림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작은 장원이 1천여 식솔을 거느리는 거대 문파로 발전한 것은 그 가주들의 뛰어난 능력을 대변해 주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서 오너라.”
6척에 가까운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흰색의 문사(文士) 차림을 한 40대 정도로 보이는 인물이 마차에서 내리는 백운옥을 반겼다.
“다녀왔어요, 아빠.”
“뉘시냐?”
물론 마차에서 꾸역꾸역 내리고 있는 묵향과 초류빈을 보고 한 말이었다.
“이분은 초씨세가의 탈명도 초류빈 소협, 그리고 저분은 묵향 분타주에요. 이쪽은 저의 아버님이세요.”
“오, 반갑구려. 어서 들어오시오.”
백운옥의 소개로 백씨세가의 부가주 분광창(分光槍) 백상(白橡) 대협이 가볍게 포권했고, 그에 따라 묵향, 초류빈이 마주 포권했다. 묵향이야 이런 시골 문파 따위 알 바가 없었지만 그래도 정파에서는 큰 문파였는지라 초류빈이 아는 척을 했다.
“대명을 익히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허허, 안으로 듭시다. 이번에 좋은 차를 구했다오.”
귀하기로 이름난 용정차의 향긋한 향이 퍼져 가는 가운데 주객(主客)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운옥의 전음으로 묵향이란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대강 알게 된 백상 대협으로서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자리였다. 정파로 이름 높은 백씨세가의 마당 안에 마교도가 들어오다니……. 하지만 백상 대협은 감히 발작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상대의 실력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던 것이다. 만만해 보인다면 곧장 병신을 만들어 내쫓겠지만, 영 만만해 보이지가 않았다. 거기에 초류빈까지 거느리고? 괜히 일을 벌여 망신을 당할, 아니 어쩌면 목숨을 날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허허허, 이번 여행에서 혹시 여식이 실례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요?”
“…….”
“차를 조금 더 드시겠습니까?”
“…….”
이쪽에서 떠들어도 묵향은 닥치고 있었고, 당연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초류빈과 백운옥이 끼어들어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한쪽에서 인상 쓰고 가만히 있으니 분위기가 날 리 없었다. 이윽고 차를 다 마신 묵향이 쓱 일어서면서 말했다.
“먼저 가서 좀 쉬어야겠소. 방을 좀 안내해 주시오. 그리고 노부를 찾는 사람이 혹시 있으면 노부에게 지체 없이 알려 주면 고맙겠소.”
“…그러지요.”
묵향이 나가고 나자 백상 대협은 딸에게 질문을 퍼부어 댔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전음으로 말씀드린 대로예요. 우연히 만나서 왔는데, 단편적으로 제가 듣기로는 아무래도 이번 구휘 대협의 무덤에 마교가 관여한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묵향 분타주의 말로는 마교에서는 구휘 대협의 무덤에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구요. 저 묵향 분타주의 무공 수준으로 봤을 때 마교의 아주 고위층의 인물인 것 같기도 하니까 꽤 신빙성 있는 말 같아요.”
백상 대협은 딸의 말을 시큰둥하게 듣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 서열 높은 자가 하는 말이라고 그게 모두 사실일 가능성은 없지 않은가? 오히려 거짓말이 더 많을 수도 있지. 이때 백운옥의 말을 초류빈이 옆에서 보충했다.
“아마도 그 추리는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와 대화를 나눠서 알아본 결과로는 그의 지위가 최소한 마교 서열 20위 안쪽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마교에서 벌어진 섬서분타 반란의 핵심 인물이라는 사실이죠. 오랫동안 같이 여행을 해 본 결과 최소한 그가 거짓을 말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진실 중에 얘기하지 않은 부분도 많겠지만요.”
그러자 백상 대협이 경악해서 되물었다. 마교에서 20위 안쪽이라면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상 대협은 한순간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방금 전에 마음에 안 든다고 괜히 강짜라도 부렸다면? 마교 서열 20위 안쪽의 인물에게 백씨세가는 아예 무림에서 사라져 버렸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마교 서열 20위 안쪽이라고?”
“예.”
“그의 이름이 묵향이라고 했나?”
“예.”
“특이한 이름인데, 아무래도 가명이 아닐까?”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행동으로 봤을 때…….”
“알아보면 확인할 수 있겠지. 거기에다 반란의 주모자라면…….”
“참, 이번에 아주 특이한 인물들을 만났습니다. 진영 공주 전하를 납치하려고 했던 무리들 중에서 검붉은 혈의를 입은 고수들이 있었는데, 그때 저 묵향 타주와 싸웠죠. 저도 그때 딴 무리들과 싸운다고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여덟 명 정도가 묵향 분타주를 빙 둘러쌌는데 무슨 진법같이 보이지도 않았고 그냥 빙 둘러싼 상태에서 이상한 주문 같은 거만 외우고 있더군요.
그러다가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그들에게 합류한 다음 손에서 검은 기운을 뿜어냈는데, 그게 묵향 분타주를 감쌌습니다. 그러다 조금 더 지나고 나니 엄청난 대 폭발이 일어났구요. 그 안에서 묵향 분타주가 걸어 나오더니 지독한 독기라고 그러더군요. 완전히 옷이 다 삭아서 떨어지는 걸 보면 과연 독하긴 독한 모양이었습니다. 제 설명이 좀 두서없지만 혹시 이런 무공을 쓰는 인물들이 강호에 있습니까?”
“혈의, 주문, 검은 기운, 독기, 대 폭발이라…….”
“참, 그 혈의를 입은 무리들의 무기가 특이했습니다. 한 5척 정도 길이에 윗부분에 해골 같은 형상을 붙여놓은 철봉을 사용했습니다.”
“해골 모양을 붙여 놓은 봉? 그렇다면 출사봉(出邪棒)인가? 하지만 그건 혈교의 무기인데……. 정말 해골 모양이 맞나?”
“예, 해골 모양이 맞습니다. 그 부근이 원체 독기가 짙어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갈갈이 찢어진 그들의 시체 사이에서 봤죠.”
“갈갈이 찢어진 시체?”
“대 폭발이 있었다고 했잖습니까? 묵향 분타주를 중심으로 엄청난 폭발이 있었죠. 혈의인들은 모두 그 폭발에 휘말려서 죽었기에 온전한 시체라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고 나니까 그 시체도 독기 때문에 흐물거리며 녹아 버렸으니까요.”
“흐음, 오래전에 황궁에 짓밟힌 다음 행적이 묘연하더니, 또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모양이군. 공주 전하를 납치하는 무리에 혈교가 있었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겠지.”
“뭐예요? 아빠?”
“진천왕과 혈교의 합작.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구나. 혈교가 원하는 것은 무림. 진천왕이 원하는 것은 황실……. 같은 중원을 원하지만 서로의 목적이 다르니 합작도 가능하겠지. 진천왕은 혈교의 힘을 필요로 하고, 혈교는 난세를 이용해서 자신의 세력을 더욱 넓히고자 할 것이니까……. 그리고 기존의 무림 세력들도 황실을 편들지 진천왕을 편들 자는 없을 테니 서로의 이득이 합치된다고 봐야지.”
“과거 제가 듣기로는 마교와 싸워 마교 세력의 4할을 부쉈다는 게 혈교 아닙니까? 그 덕분에 마교는 거의 30년 동안이나 세력을 보충하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혈교가 이제 슬슬 활동을 시작한다면 전과는 다른 어떤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요? 최근의 전투에서도 마교와 거의 맞먹는다는 찬황흑풍단이 겨우 혈교의 분타 하나 부수는 데 2천 명이 넘게 죽고 7천 명이 넘는 부상자를 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면에서 승부를 겨눈다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칠지…….”
“글쎄, 하지만 그건 조금 다르지.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것과 강시와 사람이 싸우는 것은 아주 차이가 크지. 사람은 최소한 싸우다가 지치기도 하고 상처가 생기면 그게 전력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 하지만 강시는 달라. 강시들을 상대하려면 무공이 약한 사람은 오히려 방해만 돼. 무공이 아주 강한 사람들만, 강시를 일검에 토막을 칠 수 있는 사람들만 나서서 공격을 해야 해. 그래야 간단히 강시를 물리치지, 어중이떠중이 다 뭉쳐서 공격하면 그들이 도리어 방해가 되어 고수들이 필요로 하는 충분한 공간을 만들어 주지 못하기에 피해가 더욱 커지는 거야. 만약 고수들이 많은 마교가 그들을 공격했다면 그렇게 대단한 피해를 당하지도 않았을 거다. 어쨌든 마교는 거의 5천 명이나 되는 극강의 정예를 가진 문파니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힘없이 무너져 버린 찬황흑풍단과 마교가 예전에는 거의 동급으로 비교 되었을까요?”
“그거야 그 당시 흑풍단을 이끌었던 옥영진 대장군의 능력, 그리고 강력한 호신강기의 역할을 해내는 두터운 갑주, 우수한 장비, 그것이 그때의 찬황흑풍단의 명성을 만들었던 것이지. 하지만 강시와 사람은 다른 거니까……. 물론 그때 상대가 마교였다면, 그것도 넓은 평야에서 붙었다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졌을 거야.”
“그렇다면 마교란 단체는 아무도 손도 못 쓸 정도로 강하다는 말입니까?”
“아니지. 마교는 혈교와 달리 강시 따위는 쓰지 않아. 그러니 정파에 밀려서 활개를 치지 못하는 거지. 사람 대 사람이라면 어중이떠중이라도 숫자가 많은 쪽이 어느 정도는 유리한 법이니까. 그리고 마교와의 투쟁이 시작되면 은거했던 기인들까지 모습을 드러내니 그렇게 마교에게 고수의 숫자에서도 밀리는 것이 아니고……. 아니 그분들까지 합한다면 고수의 수는 정파가 월등하다고 봐야 하겠지. 대신 그쪽은 한 덩어리로 뭉쳐진 상태고 이쪽은 숫자는 많지만 흩어진 상태. 어떤 큰 위기가 닥치지 않으면 뭉칠 생각을 안 하니까 마교의 무리들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는 거야. 그리고 고인 물은 썩는 이치와 같아서 정파의 세상이 된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별의별 파렴치한 놈들이 다 나오게 되니, 그게 마도의 무리들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나? 그냥 이런 식으로 양분되어 서로를 견제하는 편이 좋지.”
묵향은 목욕을 끝낸 다음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고는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묵향이 안내된 작은 별채는 제법 아담하게 꾸며진 조용한 장소였다. 가구들도 그런대로 좋은 편이라 이런 예정에도 없던 객에게 주어진 방임을 생각한다면 백씨세가는 꽤나 풍족한 살림살이를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앉은 의자에서 바라다 보이는 정원은 제법 세심하게 가꾼 화초들이 우거져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었다.
묵향은 천천히 일어서서 정원으로 내려섰다. 예로부터 정원이야말로 살수들이 숨어서 암살하기 딱 알맞은 장소지만 묵향의 촉수에는 그 어떤 살수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정원사가 열심히 가꾼 아담한 정원만이 묵향의 눈을 즐겁게 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묵향은 천천히 정원의 한쪽 귀퉁이에 국화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 국화꽃은 피지 않았지만 싱싱하면서도 흠집 없는 푸르른 잎사귀가 자신은 가을에 아름다운 국화를 피울 것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온 다음에도 국화를 좋아하는 묵향의 취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예전처럼 광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한 살수를 기억하게 해 줬기에 예의상 다른 것들보다는 좋아한다고 봐야 할까……. 묵향이 지긋이 정원의 화초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사람이 정원으로 들어왔다. 묵향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40대 초반은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의외의 장소에서 사람을 만나 조금 놀라는 듯하더니 친근하게 말을 걸어 왔다.
“여기는 거의 사람의 출입이 없는 곳인데, 여기에 묵게 되셨나요?”
“예,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저는 백상 부가주의 안사람입니다.”
그녀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기에 약간 돌려서 말했고, 묵향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들었다. 노가주는 이미 늙었고 그의 부인도 거의 은퇴 직전일 것이다. 그러니 아마도 앞에 있는 이 중년의 부인이 백씨세가를 이끌어가는 안주인인 모양이었다.
“아, 예. 실례를 했군요. 저는 이번에 신세를 지게 된 묵향이라 합니다.”
“이곳의 정원은 아주 아름답지요. 그래서 저도 한 번씩 마음이 갑갑할 때는 여기에 와 보곤 한답니다. 남편이 이곳에 자리를 잡아 드린 걸 보면 아주 귀중한 손님이신 모양이군요.”
“별로 귀중한 편은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저는 이만 물러나지요. 참으로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의 위안을 얻으시기를…….”
묵향이 이렇게 노부인에게 신경을 쓰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림에서 남자 고수는 정말 많다. 하지만 여자 고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 이유는 남편과 부인이 둘 다 무공에 미쳐 버리면 집안 살림은 망하게 되는 게 정석. 그렇기에 남편이 무공에 미치면 부인은 내조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내조……. 말이 좋아 내조지 남편은 연공실에 틀어박혀 있을 때―무림인이 아닌 경우 글공부 따위 한다고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을 때―부인은 가정을 이끌어 가게 된다. 그렇기에 부인이 남편보다 무공이 강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만약 있다면 그 여자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남편보다 몇 배는 뛰어난 오성을 지니고 있는 여자라야만 남편보다 조금 더 뛰어난 정도로 무공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살림살이를 책임지고도 약간씩 연공 시간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히 부지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교육을 받는다. 남자는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이라고 하는 허울은 좋지만 실상은 적성에 안 맞아도 무공을 뼈 빠지게 익히든지, 아니면 어디에 쓰일지 알지도 못하는 공부를 쌍코피 터지게 하든지. 그래서 입신양명하는 게 목적인 불쌍한 족속들이다. 묵향처럼…….
하지만 여자는 완전히 다르다. 공부나 무공은 부차적인 것이다. 명가의 여자들이라면 어릴 때부터 그녀의 어머니가 수많은 하인들과 고용인들, 어떤 때는 노예들까지 거느리며 각종 사업을―농사도 사업이니까―처리해 나가는 것을 보고 배우게 된다. 자신도 딴 집에 시집가게 되면 그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어릴 때부터 장부 작성, 정리라든지 산학(算學), 그리고 어디에서 물건을 구입하면 싸게 구입하는가라든지, 돈을 빌릴 곳, 또는 차용증 작성 요령 등 실생활에 관계되는 수많은 교육을 받는 것이다. 시집을 잘 간다면(?) 수백 명의 하인을 관리 감독하면서 집안일을 처리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자가 한 집안의 살림을 처리하게 되는 그 순간, 즉 시집가는 그 순간부터 그녀의 고달픈 인생이 시작된다. 그게 언제쯤 멈추게 되느냐 하면, 자신의 며느리를 볼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완전히 집안의 경제권을 쥐고 흔든다는 막강한 힘이 그녀에게 주어지긴 하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만약 남편이 상인이라면 그 남편이 외부 거래의 일정 부분을 처리해 주어 한결 부담이 덜해지지만 그래도 수없이 많은 물건들이 드나들기에 그것을 유지, 관리, 감독함에 있어 일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게 된다. 그렇기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시집간 다음 과로사했는지는 역사에 나오지 않아도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첩(妾)이라든지 뭐 그런 이유로 받아들여진 여자라면 이와 같은 사항에 해당이 없다. 그런 여자들은 대부분이 화류계의 여인들로 남자를 성적으로 즐겁게 해 주는 언어적 기교, 안마술, 방중술(房中術)이라든지, 노래, 춤, 악기 등 실생활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잡기들만 배운 여인들이다. 그렇기에 그런 여인들에게 부인(婦人)이 해야 할 일을 시킨다면, 며칠 되지도 않아 야반도주할 가능성이 컸다. 이 첩이라는 것도 다 부인이 모든 경제를 책임져 주기에 글만 읽다가, 또는 무공만 익히다가, 친구들과 놀다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자들이 계집에 혹 해서는 끌어들이는 거였으니까 말이다. 마누라는 집안을 이끈다고 죽어 나가는 줄도 모르고서…….
이런 이유가 있기에 묵향은 안살림을 직접 책임지게 되는 부인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만약 무공의 고하로만 모든 것을 생각한다면 그녀 또한 그녀의 남편과 같은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녀는 무공이 아닌 살림을 책임지는 것이다. 설무지처럼 말이다. 사실 그녀가 책임지게 되는 부분들 중에 상당 부분 무력하고 연관되는 부분은 설무지 같은 어떤 인물이 책임지겠지만 그래도 집안일은 부인의 소관이니 그 일이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게 공짜 인력은 결코 놀릴 수가 없다는 남자들만의 이론에서 만들어진 아주 편리한 노동력 착취 방법이었으니까 말이다. 머리 좋고, 일 잘하고, 아랫사람 잘 부리도록 어릴 때부터 교육받았고, 그걸 알고도 놀릴 바보가 있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그녀들은 남편들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매일 힘들다는 내색도 못하고 중노동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묵향은 관리라든지, 산학 등 원체 그쪽으로는 공부를 안 해서 무식했기에 그런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우대를 해 줬다. 그렇기에 부인은 묵향으로부터 깍듯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