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모두들 모여서 식사를 했고 묵향은 따로 자신이 묵게 된 별채에서 식사를 했다. 묵향은 혼자서 먹는 것이 편하다고 사양했기 때문이다. 원래 그런 것은 객으로서 조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낮에 묵향이 보여 준 비사교적인 태도 덕에, 감히 모두들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조금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고맙게 생각하며 묵인했던 것이다.
모두들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자 식당에서 맛있게 요리된 음식들이 날라져 들어왔다. 그때 차로 입술을 적시던 조연(趙蓮)은 살며시 입을 열었다.
“다른 손님도 한 분 더 계신 것 같던데, 왜 안 보이나요?”
조금 당황한 백상 대협. 그의 아내 조연은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또 가치 있게 생각하는 거의 유일한 여자였다. 그녀는 비단 채찍 하나로 그의 집을 다스려 나가는 부드럽고 따스한 아내요, 자애로운 어머니였고, 또 엄격하면서도 부드러운 집안의 지배자였다.
“아, 그는 따로 식사를 한다고 했소.”
“그 별채에 묵게 하신 걸 보니 꽤 중요한 손님인 것 같은데, 그러면 실례지요.”
그러자 백상 대협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변명했다.
“그, 그 손님의 성격이 워낙 괴팍한지라 그렇게 하라고 일렀소. 부인은 너무 신경 쓰지 마시구려.”
“뭐가 괴팍하다는 말입니까? 저도 낮에 만나 뵈었는데, 아주 친절하고 마음씨 고운 분이시던데……. 가가께서 그렇게 함부로 평가하시다니 오늘 이상하시군요.”
“허흠, 그게 아니라 부인… 그는 마교의 인물이요. 마교의 인물치고…….”
“사람을 그렇게 한꺼번에 잡아서 말하면 실례지요. 아이들도 있는데……. 정파라 자처하는 자들 중에서도 인면수심의 인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역으로 마교라 해도 좋은 인물들도 있겠지요. 깊이 사귀어 보지 않고 단정을 내리는 것은 안 된다고 평소에도 자주 말씀하시는 가가께서 언행일치를 안 하시다니…….”
“험험, 부인 그만하시구려. 손님도 와 계시는데…….”
“아, 참 초류빈 소협을 잊었군요. 그래 가내(家內) 평안하신가요?”
“예, 모두들 평안하십니다.”
“요즘도 자당(慈堂)께선 정정하신가요?”
초류빈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지는 듯싶었지만 곧이어 대답했다.
“예…….”
초류빈의 어머니 독수낭랑(毒手郞郞) 왕운하(王雲河)는 그 괄괄하면서도 괴팍한 성질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초류빈의 아버지 옥면일랑(玉面一郞) 초풍천(楚風天)이 명호대로 그 잘생긴 얼굴로 무림에 초출한 것을 낚아채어 거의 강제로 결혼한 왈가닥이다. 초류빈의 아버지가 한 번씩 눈두덩이가 시퍼런 상태에서 손님들을 만나게 되다 보니 자연히 그 소문이 퍼져 나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결혼한 지 4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두 살 연하의 남편이 자기 부인에게 구타당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10년쯤 전에 초풍천은 아이들이 장성한 것을 보고 지금쯤이면 아이들 낳고 살림한다고 바빠서 자신보다는 무공이 떨어질 거라고 판단하고 최후의 반항을 시도했다가 묵사발이 난 다음부터는 아예 반항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나이도 당년 73세에 이르렀으니 조금 나아진 점이 있나 해서 조연은 안주인답게 약간 빙 돌려서 물은 것이다. 하지만 초류빈의 난감해하는 표정을 보니 그 나이에 이르러서도 독수낭랑의 성격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기야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으니 7년은 더 기다려 봐야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이곳에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백씨세가에 들어온 지 7일이 되었을 때 묵향이 초류빈에게 물은 말이었다. 그동안 묵향과 초류빈은 이곳 별채에서 그야말로 식객 생활을 해 오고 있었다. 초류빈은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묵향은 여기 온 다음부터 줄곧 이 별채에서 떠나지 않았기에 당연히 주위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적대―그는 마교도이니까―할지도 모르는 인물들 틈에서 1주일 동안 아무런 질문도 없이 한가하게 명상이나 하며 지내는 것을 보면 묵향도 보통 태평스런 인물은 아니었다.
초류빈은 이제서야 질문을 하냐는 표정으로 묵향에게 말했다.
“오늘이나 내일쯤 5대세가의 수장인 서문세가에서 사람이 온답니다. 서문세가에서 구휘 대협의 무덤 지도를 제일 먼저 입수했으니 그들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은 당연하죠. 서문세가에서 사람이 오면 그들과 의논을 한 후 백상 대협이 행동을 시작할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때까지 기다리셔야겠는데요.”
“뭐 기다리지. 그건 어려울 게 없으니까…….”
“그런데 정말 지금 반란 중이라면서 이러고 계셔도 됩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급하면 어련히 연락이 오려고……. 몇 명 믿는 녀석들이 있으니 갑자기 망하지는 않을 거야. 또 망하면 다시 시작하면 되지. 뭐가 걱정인가?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초류빈은 정원의 땅바닥 위에 돗자리 하나를 깔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젊은 모습의 묵향을 보며 생각했다.
‘겉모양으로 봤을 때는 정말 남아도는 게 시간처럼 보이는군. 한 60년은 끄떡없이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니까. 그런데 저자의 진짜 나이는 몇 살일까? 그리고 진정한 무공의 깊이는?’
이때 저쪽에서 시녀 한 명이 다가오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아씨께서 잠시 오시라고 하십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묵향은 방금 전 대화를 끝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었으므로, 초류빈은 그냥 갈까 하다가 한마디 한 다음 시비의 뒤를 따랐다. 시비가 안내한 곳은 화려한 거실이었고 그곳에는 백운옥 외에도 새로운 인물이 네 명 더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벌떡 일어서며 먼저 인사해 왔다.
“오오, 오랜만이야. 정말 반갑구만……. 가출했다더니 의외로 생생하구만.”
초류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비천검(飛天劍) 혁련운(赫蓮運)은 황룡문이라는 이름 없는 작은 문파의 제자였다. 하지만 천운을 타고났음인지 과거 기연을 통해 능비영이란 선배 고인으로부터 그 이름도 높은 청월검법의 비급을 얻어 오랜 수련 끝에 10성까지 익혔다. 거기에 무당파에서 어떤 무시무시한 고수를 만나 안계(眼界)를 넓힌 후 그의 검술은 더욱 정진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최강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자였다. 그의 나이는 43세였고 한 살 어린 초류빈과 형제의 의를 맺고 있었다. 원래 뛰어난 명가가 아니라 그런지 말이 조금 거친 게 흠이었지만 인간성은 7룡 중에서 최고였으며 현재 황룡문의 부문주였다.
“오랜만이에요, 류빈 오빠.”
혁련운에 이어 20세 안팎으로 보이는 정말 눈 튀어나올 만큼 예쁜 여인이 인사를 건네 왔다. 그녀의 이름은 매영인(梅瑛仁)으로 무림에서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별호는 없었지만 4봉의 한 사람이었다. 5제(五帝) 중 유일한 여인 옥화무제 매향옥의 손녀로서 방년 31세였다. 그 할머니의 무공 수위로 짐작해 보건대 그녀의 무공도 엄청날 것이라는 게 세인들의 추측이었다.
“그래…… 안 본 사이에 더욱 예뻐졌구나.”
“고마워요.”
고맙다는 뻔뻔한 대답이 얼굴색도 안 변하고 주저 없이 흘러나오는 걸 보면 자신이 예쁜 줄은 잘 아는 듯…….
“안녕하셨습니까?”
이번에는 매영인의 옆에 앉아 있던 옥면공자(玉面公子) 능소천(陵紹天)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무당파의 속가제자로, 대단히 뛰어난 외모를 가졌지만 어딘가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다. 태극검법(太極劍法)의 달인으로 뛰어난 무예의 소유자였으며, 피리나 금에도 소질이 대단했고, 그를 이용한 음공(音功)에도 조예가 있는 인물이었다.
“오, 반갑군. 오랜만이야. 자네하고 피리 실력을 겨눌 만한 인물이 여기 있으니 나중에 만나 보게나.”
“예,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쪽은?”
그러자 능소천이 사근사근하게 옆에 서 있던 영준하게 생긴 젊은이에게 말했다.
“인사하시게, 탈명도 초류빈 대협이시네.”
“처음 뵙겠습니다. 불초 서문길(西門佶)이라 합니다.”
“오호, 서문세가에서 젊은 기재가 계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젊으신 줄은 몰랐소. 만나서 반갑소.”
초류빈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후기지수의 최고봉이라는 7룡4봉의 네 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이 녀석이……. 네 녀석도 중간에 문파에서 뛰쳐나가지만 않았다면 7룡에 계속 들어가 있었을 거 아냐? 네놈이 빠져나간 덕분에 내가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이 나이에 7룡에 들어 있다니…….”
“참, 형은 언제 장가드실 겁니까? 연세를 생각하셔야죠.”
“네놈이나 생각해. 나는 아직도 생각 없다.”
“왜요?”
“하루라도 무공단련을 게을리 하면 과거 무당파에서 그 괴인과 싸울 때, 배 위로 그자의 검이 훑고 지나가던 악몽을 꾸게 된다구. 그게 얼마나 섬뜩한지 너 아냐?”
초류빈은 미소하며 응대했고 다른 인물들은 처음 듣는 말인 듯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에이, 농담도……. 그게 언젯적 일인데?”
“너 같으면 생각이 안 나게 생겼냐? 내 뱃가죽 바로 1촌 앞으로 그 전설의 어검술이 통과했는데…, 검강이 내 뱃가죽을 훑고 지나가는 그 느낌…….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바짝바짝 난다구. 그자의 검이 짧지만 않았다면 내 목숨은 그때 끝난 거였어.”
“그래도 덕분에 형 검술 솜씨 따라갈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덕분은…, 제발 하루라도 편안하게 푹 자고 싶을 뿐이야. 도저히 그때 생각을 하면, 아마도 평생 편안한 잠을 자기는 틀린 것 같다.”
“그래도 형이 빨리 장가들어야 또 다른 후배가 7룡에 들어가죠. 형 때문에 지금 밀려 있는 뛰어난 후기지수들이 몇 명인 줄 알아요? 마흔셋이나 되어 가지고 아직도 7룡에 들어 있다는 건, 아마 고자…….”
그러자 혁련운은 두 여자를 재빨리 훑어보며 얼굴이 벌게져서 떠들었다.
“너 죽을래? 그러는 네놈은 왜 안 가냐? 마흔둘이나 되어 가지고……. 피장파장이니 헛소리하지 말라구.”
“그런데 웬일로 이렇게…….”
“그거야 당연히 구휘 대협의 무덤 때문이지. 몇 가지 의논할 점도 있고 해서 모두들 모였지. 백상 대협과 의논한 후에 무림맹으로 갈 거야. 그런데 백 소저한테 얘기를 들어 보니 어떤 사람하고 같이 왔다며? 그런데 그 사람은 왜 안 데려오고 너 혼자 오냐?”
“예, 조금 사정이 있어서요. 나중에 소개해 드리죠.”
“그 사람의 수하가 되었다며? 뭐 하는 사람이냐? 백 소저는 너한테 들으라던데…….”
“그것도 나중에 말해 줄게요. 그런데 의논할 게 뭐예요? 뭐 새로운 정보라도 들어온 게 있어요?”
“조금 있으면 백상 대협이 오실 거야. 그건 그때 이야기하기로 하지.”
백상 대협은 아직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으므로 좌중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이때 초류빈과 혁련운의 대화를 들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매영인이 갑자기 혁련운에게 물었다.
“혁 오빠! 분명 어검술이라고 했어요?”
“응.”
“그 사람 어떻게 생겼어요?”
“흑의를 입은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아마도 반로환동했을 테니 나이는 모르겠다. 그렇게 잘생긴 얼굴은 아니야. 못생긴 얼굴도 아니구. 그런대로 이목구비가 반듯한 인물이었지. 검은 빛깔이 나는 짤막한 검을 썼어.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말이야. 내가 검을 뽑아 들자 본 척도 안 하더니 검법을 펼치니까 그제서야 검을 뽑더군. 청월검법이라면 상대해 줄 값어치가 있다는 듯이 말이야. 그때 상대의 실력을 알아보고 꼬리를 내렸어야 했는데, 그게 잘되냐? 그때 막 청월검법을 10성까지 익혔던 때라 간 크게도 달려들었지. 그때 그자의 검이 갑자기 불타오르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푸른빛을 내더군. 그 상태로 검을 휘둘러 오는데, 단 일초에 내 검과 호신강기가 박살이 났지. 정말 무시무시했어. 하지만 그의 검이 짧았기에 이렇게 내 배 앞쪽을 통과했지 뭐냐. 하지만 그 어검술에서 나오는 강기의 여파 때문에 호신지기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뱃가죽이 푹 파였지. 그때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
혁련운은 손짓까지 해 대며 상대의 어검술이 어떻게 통과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설마…, 그가?”
“뭐? 그 괴인이 누군지 알고 있냐? 하기야 무영문이라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적은 문파니까. 그 사람이 누구냐?”
혁련운은 정말이지 궁금해 미치겠다는 음성으로 말했지만 매영인은 그 정보의 정확도에 조금 자신이 없는 듯 힘없이 말했다.
“나도 잘 몰라요. 사실 저는 문파의 깊은 일까지는 잘 모르니까요. 전에 할머니하고 총관이 주고받던 대화 중에서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말이에요.”
“뭔데?”
“그렇게 초식을 무시하고 어검술을… 쓴다면 현경의 고수가 아니겠어요?”
“그렇다고 봐야지.”
“구휘 대협 다음에 나타난 현경급의 고수가 한 명 있대요.”
“뭐라구?”
“마교에 한 명 있었죠. 놀랍게도 탈마의 고수라고 들었어요. 탈마면 현경과 마찬가지라고 들었으니 그도 현경급의 고수라고 봐야 하겠죠?”
“그렇지. 하지만 나는 마교의 고수가 그렇게 엄청난 무공을 깨달았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거야 당연하죠. 성격상 문제가 좀 있는 인물이었던 모양인지 10년쯤 전에 마교에서 제거되었으니까요. 그가 활동했던 시기로 보면 혁 오빠가 만난 괴인이 그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거 같네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혁련운이 말했다.
“제거되었다고?”
“예, 예전에 얼핏 듣기로 그는 기억을 상실해서 떠돌아다닌다고 했어요. 마교에서 탈출할 때 엄청난 중상을 입은 모양이에요. 그래서 모든 무공을 잊은 상태에서 황궁에 포섭된 모양이었어요. 놀랍게도 그자는 단기간에 황궁무공을 익혀 다시 화경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를 포섭할 방책을 할머니하고 총관 아저씨하고 의논하는 걸 우연히 들었었거든요.”
“그 외에는?”
“그것 말고는 없어요. 탈마라는 말이 들려서 잠시 엿들은 것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