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 대협과의 의논이 끝난 다음 그들은 무림맹에서 벌어질 회합에 참석하기 위한 출발 날짜를 내일로 잡고는 백상 대협이 마련해 준 숙소에 짐을 풀었다. 사실 내일 떠날 것이니 짐을 풀 것도 없었지만 몇 가지 필요한 것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서로들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능소천이 초류빈에게 물었다.
“저하고 피리 솜씨를 겨루게 할 사람이 있다면서요? 잠시 시간도 나는데 풍류를 즐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그러자 백운옥이 애교 띤 음성으로 그의 말에 찬성했다.
“와아,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그 사람도 정말 금을 잘 타던데, 능소천 소협의 실력이 뛰어나시단 소문은 들었거든요. 그분과 함께 저희들의 이목을 좀 넓혀 주세요.”
사실 옥면공자 능소천의 피리 솜씨와 거문고 솜씨는 널리 소문이 퍼져 있었다. 거기에 그는 시서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기에 모두들 그를 풍류공자라고도 불렀다. 그 덕분에 그를 사모하는 여자들이 줄을 섰다나? 어쨌다나…….
모두들 이렇게 나오자 초류빈은 그들을 묵향이 있는 곳으로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마교도라고 선전을 하지는 않겠지. 그러면 나는 파멸이라구…….’
“뭐, 좋겠지. 따라들 오게.”
묵향은 초류빈이 떠날 때 그 상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정원 한 구석에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가부좌를 튼 채 앉아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웅성거리면서 사람들이 몰려오자 그는 천천히 일어섰고, 그의 허리 뒤쪽으로 검대에 매달려 있는 평범한 3척 장검이 얼핏 보였다.
혁련운은 중인들과 떠들며 별채의 문을 통해 들어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자신에게 수없이 악몽을 꾸게 만든 장본인이 여기 서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모습과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그때는 낡은 흑의였는데 지금은 새 옷이었다. 독 때문에 백씨세가에 와서 새로 사 입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와 거의 똑같은, 아니 꿈에서 나타나던 얼굴보다 조금 더 젊은 것 같기도 했다. 그의 검은 약간 모양이 다른 것 같기도 했지만 그 차고 있는 모양새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아주 거만하게 뒤로 늘어뜨려 차고 있는 모습이…….
‘제기랄…….’
혁련운이 갑자기 멈춰 서서는 흑의인을 노려보며 식은땀만 흘리고 있자 모두들 궁금해했다.
“왜 그래요?”
초류빈이 묻자 그제서야 현재 자신이 취하고 있었던 행동을 의식하며, 혁련운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황룡문의 부문주가 공포에 얼어 있다면 누구에게나 그 면목이 서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쪽은 묵향 타주. 이쪽은 차례로 서문길, 혁련운, 매영인, 능소천입니다. 모두들 7룡4봉에 들어가는 최고의 후기지수들이죠.”
“만나서 반갑소. 나는 시끄러운 건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딴 곳으로 가 보겠소. 이왕 오셨으니 편히 쉬시기 바라오.”
묵향이 퉁명스레 답하고는 천천히 별채의 문 쪽으로 걸어가자 혁련운은 마지막 남은 용기를 다 짜내어 다급히 묵향에게 말했다.
“잠깐… 묵향 타주.”
묵향이 뒤로 돌아보자 말을 이었다.
“혹시 우리 구면이 아닌가요?”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글쎄, 나는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렇다면 이건 기억이 나시나요?”
주위 사람들이 말리기도 전에 허리에서 검을 쭉 뽑더니 검초를 시전했다. 그걸 본 묵향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했다.
“청월검법? 같기도 하군. 그런데 뭘 기억하라는 건가?”
“묵향 타주는 무당파에서 청월검법을 사용하는 사람과 싸운 적이 없습니까?”
그러자 모두들 설마하는 표정으로 묵향과 혁련운을 둘러봤다. 묵향은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물었으면 간단한 걸 가지고 돌려서 말하니 뭔 소린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당연히 나는 무당파에도 한 번 갔었고 그때 청월검법 사용하던 애송이에게 본때도 보여 줬지.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제야 그 둘의 관계를 눈치 챈 다른 사람들이 경악스러운 눈길로 묵향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이자가 바로 현경급 고수라는 말인가?
혁련운이 떠듬떠듬 말했다.
“비무…, 비무를 청합니다.”
그러자 묵향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절한다. 나는 비무 따위 안한다. 대결이라면 몰라…….”
“대결이라구요?”
그러자 묵향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목숨을 걸 각오가 있나? 그렇다면 덤벼라! 죽여 줄 테니.”
검을 쥐고 있는 혁련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은 도저히 상대도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놈은 3황의 한 사람이었던 뇌전검황을 저세상에 보낸 인물이다. 그건 무당파의 장문인에게 그때 듣지 않았던가. 하지만 혁련운은 지금 자신이 위축되어 버리면 다시는 검을 못 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놈의 악몽 때문에 거의 사는 것 같지가 않은데, 여기서 더욱 위축되면 검을 버리는 길밖에 없었다.
순간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떨림이 천천히 멎기 시작했다. 단 일초라도 자신 있게 펼치고 싶었다. 그때 자신이 그렇게 믿었던 검초가 산산이 부서지며 느꼈던 공포감……. 하지만 이번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수련을 했던가. 단 일초만이라도 자신 있게 저 괴물 같은 상대에게 펼칠 수 있다면 이제부터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호오, 기세가 제법이군.”
혁련운이 ‘단 일초만…’이라는 말을 되뇌며 자세를 잡자 묵향이 내뱉은 말이었다.
묵향도 천천히 검을 뽑았다. 보통 묵혼검의 그 짧으면서도 휘어진 검신에 익숙해져 있는 그였기에 일직선이면서도 긴 검을 뽑는 것은 약간 성가신 작업이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자신이 가진 평범한 검을 약간은 어색한 동작으로 뽑았다. 그것을 보면서 이번 사건의 경과를 약간의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던 그들은 묵향의 싸구려처럼 보이는 저 검을, 그것도 조금, 아주 조금 어색한 동작으로 뽑는 것을 보고 과연 저 사람이 소문의 주인일까 일순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묵향이 검을 뽑아 자세를 잡자 혁련운은 일순간 당황했다. 검을 뽑기 전에는 뭔가 만만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검을 뽑은 순간 그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의 몸은 수많은 허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그 모든 게 함정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너무 완벽해서 치고 들어갈 틈이 하나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원래 이론상으로는 허초를 몇 번 날려 상대의 자세를 허물고 그다음 실초로 공략하는 게 좋지. 하지만 그게 통할 상대가 아니야. 단 일초라도 제대로 펼칠 수 있을지 의문이니, 처음부터 강공……. 방어 따윈 생각할 필요도 없어. 단 일초만이라도 제대로 펼치자.’
“이얍!”
혁련운은 오늘과 같은 날을 대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다 털어서 산 천로(泉露)라는 보검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검이었고, 이 보검이라면 아무리 어검술이라도 한 방에 검을 두 토막 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검은 수류천월(水流天月)의 초식을 그리며 그 짧은 거리에서 강기의 다발을 묵향에게 쏘아 보내려 했다. 하지만 묵향은 이미 혁련운에게 더욱 가깝게 접근해 들어오며 곧바로 검을 그의 왼쪽 허리로 찔러 넣었다. 수류천월의 초식이 만들어지면서 잠시 나타난 아주 작은 허점……. 그 허점으로 검을 찔러 온 것이다. 이것을 막는다면 그의 초식은 와해되고 지금까지 쏟아 부은 공력을 회수해야 했기에 잘못하면 내상까지 입을 수 있었다.
혁련운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대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허리에 맞아 봐야 심하면 양패구상이다. 묵향은 상대가 초식을 거둬들일 생각을 안 하자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혁련운의 완성된 검초에서 강기의 다발이 후퇴 중인 묵향을 향해 날아왔다. 순간 묵향의 검은 푸른색으로 이글거리기 시작했고, 묵향은 그 상태로 검을 휘둘러 간단히 검강들을 튕겨내 버렸다. 그런 다음 또다시 상대와의 거리를 급속도로 좁혔다.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신법이었다. 이제 간신히 일초를 끝낸 혁련운에게 묵향은 너무도 빨리 다가왔고 혁련운으로서는 검초를 펼칠 시간 여유조차 없었다. 그런 가운데 묵향의 검은 혁련운의 목으로 날아왔고, 혁련운은 간신히 목을 움직여 피한 후 묵향을 향해 자신의 검을 찔렀다. 이건 초식도 뭐도 아니었다. 그저 살기 위한 발악이었을 뿐…….
묵향은 혁련운의 검을 간단히 왼손의 두 손가락 사이에 잡은 다음 그대로 혁련운의 복부를 차 버렸다.
퍽!
“우악!”
혁련운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정원 구석에 처박혔다가 일어섰다. 심한 내상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픈 건 사실이었기에 비실거리면서 걸어 나왔다. 이 둘의 대결은 설명은 길었지만 정말 검초조차 펼칠 시간 여유가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벌어졌다. 중인들 중에 실력이 높은 한둘을 제외하고는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눈치 채기 어려울 정도의 대결이었다.
그냥 보기에는 혁련운이 검초를 구사하자 묵향의 몸이 눈으로 보기도 힘들 정도로 빨리 앞으로 바짝 붙었다가 뒤로 떨어졌다가 혁련운의 검초가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붙었다가 투닥거리는 것 같더니 바로 혁련운이 한 대 맞고 정원으로 날아갔으니까……. 아니, 이중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백운옥 같은 경우 묵향이 다시 뒤로 빠졌다가 다시 붙는 것은 아예 보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묵향은 검을 천천히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 정도 했으면 자네 실력은 대단한 거야. 대부분이 검초를 펼치다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으니까 말이야. 추정되는 나이를 생각했을 때 자네 실력은 대단한 편이지. 자네도 슬슬 청월검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군. 그렇지 않고 초식에 얽매인다면 자네는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할 수 없어. 어때? 더 해 보고 싶나?”
혁련운은 배를 쥐고는 기침을 몇 번 한 다음 말했다.
“콜록콜록, 아닙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께선 황궁에 계신가요?”
묵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황궁? 황궁이라니 무슨 말이냐?”
“매영인이 하는 말이 묵향 타주께서 마교에서 축출당하신 다음 황궁에 계신다고 그러던데요. 잘못 알고 있는 건지 모르지만…….”
“어찌 위대한 마인이 황실의 개가 될 수 있는가? 본좌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마인일 뿐이다.”
“묵향 타주께선 기억을 되찾으신 건가요? 아니면 매영인이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저 아이가 매영인인가?”
“예.”
“그 정도까지 알고 있는 걸 보니 다른 문파들보다 정보력이 그래도 나은 곳이군. 본좌는 기억을 되찾은 것이지.”
중인들이 묵향의 말을 듣고 무영문의 정보력에 대해 감탄하고 있을 때 하인이 한 명 들어오더니 묵향에게 말했다.
“저… 묵향 타주님을 찾아온 손님이 계신데 안내해 드릴깝쇼?”
“데리고 오너라.”
“예.”
딴 사람은 몰라도 초류빈은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묵향이 언제나 말하지 않았던가……. 일이 생기면 찾아올 거라고.
곧이어 낡은 흑의를 입고 장검을 찬 인물이 하인의 안내를 받아 도착했다. 그의 몸에서는 강렬한 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대단한 수련을 거친 마교의 인물임이 확실했다. 그는 묵향의 앞에 이르러 부복하며 외쳤다.
“부교주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주위의 인물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부교주라니! 분타주가 아니고?
“무슨 일이냐?”
“군사께서 급히 돌아오시랍니다.”
“군사가? 알겠다.”
묵향은 백운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본좌도 일이 생겨서 거기 따라가지 못하겠군. 하지만 본좌는 아직도 남의 무덤을 파 뒤지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아. 헤어지는 마당이니 한 가지 알려 주지. 그따위 무덤 파 봐야 별 볼일 없을 거야. 구휘의 무공이 집대성된 것이 어느 정도 위력일지는 알 수 없으나 북명신공보다는 못하겠지. 본교가 구휘의 무덤에 손을 대지 않는 이유는 본교에 북명신공이 있기 때문이야.”
그러자 중인들은 경악해서 외쳤다.
“정말인가요? 북명신공이 천마신교에 있다는 게…….”
“정말이지. 교주만이 익힐 수 있는 세 가지 무공에 들어가는 게 북명신공이야. 그러니 쓸데없는 일에 정력을 쏟지 말고 집에 돌아가서 수련이나 하는 게 좋을지도……. 참, 자네는 본좌와 함께 갈 건가?”
그러자 초류빈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물론,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했으니 따라가야죠.”
“좋아. 다음에 인연이 있다면 만나게 되겠지.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