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930)

정략결혼

가을 햇살이 따사로운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주위의 수목들은 저마다 붉고 노란 가지각색의 색깔로 단장을 했다. 거기에 질 수 없다는 듯 화초들도 예쁜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이때, 잘 가꿔진 화단을 둘러보며 한 젊은이가 걷고 있다. 대개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주위의 화초들을 보는 듯 마는 듯 했지만 그도 나름대로 가을이란 계절을 느끼고 있었다.

고운 비단으로 멋을 부려 만든 청의 자락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이 청년은 서문세가가 자랑하는 차세대의 고수, 벽력도객 서문길이다. 그가 허리에 찬 폭넓은 도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서문세가는 정통적인 도의 명가였다. 그는 이제 29세란 젊은 나이에 뇌전도법을 5성이나 성취한 기재로, 무림에 초출했을 때 포악하기로 이름 높던 하남광마(河南狂魔) 여춘길이란 악당을 베어 버렸기에 벽력도객이란 명호를 얻었다.

여춘길은 광마라는 칭호가 붙었을 정도로 미치광이 짓거리를 하는 나쁜 놈이었지만, 무공이 원체 높아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사실 여춘길은 진짜 미친놈은 아니었고, 또 멍청한 바보도 아니었다.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가 자기를 없애기 위해 오면 줄행랑을 쳤다가, 찾다 찾다 지친 고수가 포기하고 돌아가면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마냥 어슬렁거리며 다시 나타나 자신보다 하수들을 괴롭혔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도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 실수를 했는데, 서문길이란 애송이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늘 그랬듯이, 공명심이나 영웅심에 머리가 반쯤 돌아 버린 애송이가 악을 퇴치하겠답시고 찾아왔으려니, 생각하고 가볍게 상대했다가 그만 머리통이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사실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 여춘길이 상대를 깔보지만 않았다면 최소한 양패구상이라도 가능했겠지만, ‘꾸르르르…’하는 낮은 뇌성(雷聲)을 흘리며 상대의 도(刀)가 날아오는 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 되었든 여춘길이라는 공갈, 협박, 살인, 강도, 강간 등 무수한 악행을 저질러 오던 희대(稀代)의 악당을 없애며 그는 화려하게 등장했고, 곧 무림 최고의 신랑감들의 집단이라는 ‘7룡(七龍)’에 들 수 있었다.

7룡에 들어가자면 아주 조건이 까다롭다.

첫째, 못생겨도 용서하지만 4봉(四鳳)과는 달리 무조건 남자여야 했다.

둘째, 미혼이어야 했고 홀아비도 안 된다. 그렇기에 결혼한 인물들이 빠져나가면서 새로 참신한 인물들로 물갈이가 되는 것이다.

셋째, 결혼할 수 있는 몸이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후기지수라도 승려나, 도사(道士), 거지―개방의 방도들은 혼인을 할 수 없었다. 거지의 첫 번째 원칙은 무소유였으니까―는 그 미혼을 영원히 지켜야 하기에 7룡에 들지 못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뛰어난 무공 실력.

다섯 번째는 그 가문과 혈통이 기준이 되었다. 그렇기에 비사비협(非邪非俠) 모용명(慕容鳴)이나 비천검 혁련운은 원체 무공이 높아 7룡에 끼인 것이지 사실 다섯 번째 조건을 엄밀히 따진다면 들어오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7룡 중에서도 최강의 무예 실력을 자랑하는 인물들로 손꼽혔다.

무림맹에서 열릴 회합에 가는 길에 백씨세가에 모였던 모든 젊은이들은 단 한 명을 빼고는 회합이 취소되자 자파에 돌아가 모두 연공실로 직행했다는 기이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연공실에 틀어박혀 있다가 가주인 서문길제(西門吉制)의 부름을 받고 가는 중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며 그때 연공실로 직행하지 않은 인물은 혁련운뿐이었는데, 황룡문에 도착하는 그 길로 연공실이 아니라 자기 방에 틀어박혀 며칠 동안 늘어지게 잤다나 어쨌다나…….

아무튼 서문길은 아버님의 호출 덕분에 무공수련을 멈췄다. 우선은 며칠 동안 씻지도 않았기에 목욕하면서 때도 좀 밀고, 뿌숭뿌숭하게 돋아난 수염도 깨끗이 깎았다. 그리고 땀에 절어 냄새나는 속옷도 오랜만에 뽀송뽀송한 새 걸로 갈아입고 산뜻한 청의를 걸치고는, 부친의 처소로 부랴부랴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준비하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들인 것 같다는 걱정을 하면서 말이다.

그의 부친은 딴 건 다 좋은데,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게 흠이라고 할까. 재수 없으면 혹 하나 생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늦게 결혼한 데다가 거기에 뒤늦게 얻은 아들이었지만, 부친의 지론에 따르면 아무리 애지중지하는 아들이라도 매를 아끼면 인간이 안 된다나? 하여튼 그 이론을 착실히 이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버님, 소자(小子) 대령했습니다.”

그러자 방 안에서 일가를 이끌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중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수라도제 서문길제의 목소리는 천성적으로 좀 걸걸했기에, 그 사정을 모르는 인물은 쓸데없이 목에 힘준다고 뒤에서 비꼴 정도였다.

“들어오너라.”

“예.”

방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무서운 아버지는 호피를 깔고 앉아서 애도(愛刀)인 묵룡도(墨龍刀)를 비단 천으로 닦고 있었다. 서문길은 조심스레 부친의 정면 1장(3미터) 앞에 앉았다. 아무리 아들이라도 무기를 휴대한 상태로는, 상대의 허락이 있지 않고서는 더 이상 접근하지 않는 것이 이 시대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수라도제는 아들을 불러 놓고는 일언반구 없이 도를 열심히 광내는 데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슥슥슥… 슥슥…….

서문길은 무릎을 꿇고 앉아 이제나저제나 질문이 날아올까 기다렸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저 애도 광택 내기에 바빴다. 말없이 기다리던 서문길의 인내심은 무려 4각(1시간)이 흐르자 완전히 고갈되고 말았다. 그는 내심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누르며 약간은 노성(怒聲)이 가미된 투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 부르셨으면 말씀을 하셔야 할 거 아닙니까?”

“으음…….”

그제야 서문길제는 도를 집에 꽂아 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실은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불렀다.”

“…….”

“네 나이 이제 스물아홉이 아니더냐? 좀 이르기는 하다만, 혼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어… 지금 물어보시는 건 제 의견을 반영하실 생각이 있으신 것인지, 아니면 형식적으로 물어보시는 것인지…….”

그러자 서문길제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서문길제의 목소리에는 반론을 용서하지 않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물론 형식적인 것이지. 아직 새파란 네 의견이 감히 이 집안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느냐?”

풀죽은 서문길의 대꾸…….

“그럼 의논하실 것도 없는데, 왜 부르셨습니까?”

“험, 그래도 일단 절차상 ‘의논’은 해야 하는 것이지. 그래, 혼인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서문길에게는 서로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이미 오래전에 혼약(婚約)을 한 참한 색싯감이 있었다. 그녀는 올해 스물여덟 살 난 종리세가(鍾里世家)의 금지옥엽 종리옥란(鍾里玉蘭)이었다. 서문길제가 종리세가를 방문했다가 당시 열두 살이던 그녀의 깜찍한 미모와 뛰어난 재주를 보고 며느릿감으로 점찍었다. 그는 종리영우를 넌지시 떠보았고, 종리영우도 흔쾌히 찬성하여 아이들이 장성하면 혼인시키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5대세가 중에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게 서문세가라면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문파가 종리세가였다. 서문세가나 종리세가는 둘 다 도(刀)의 명가였고, 그렇기에 그들의 말을 빌리면 ‘겉멋만 잔뜩 든 검을 쓰는 놈들’보다는 그들끼리 잘 통하는지도 몰랐다.

서문길은 부친이 말하는 상대가 종리옥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 부친이 질문을 했으니 그는 가장 모범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자 아직 나이도 어리고, 또 수련도 끝나지 않았사온데, 어찌 지금 혼인을 하겠습니까? 수련을 끝내고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의 모범생과 같은 답을 들은 후, 서문길제는 일부러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며 아들을 지긋이 노려봤다. 서문길은 혹시 자기가 잘못 대답한 것은 없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 나이가 된 후에도 아버지에게 구타(?)당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사랑의 매라고 우겼지만 그게 복날 개 잡는 것하고 다를 바가 거의 없었는데, 과연 그것이 사랑의 매일까?

어쨌든 잠시 여유를 둔 후 서문길제는 입을 열었다.

“흐음, 길아.”

“예, 아버님.”

“너는 무영문의 매영인이란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 하지만 저는 이미 옥란 소저하고 혼약이…….”

“선약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은 없지. 그 약속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사실 아주 어릴 때 그 아이를 한 번 보고 서로 구두로 약속했을 뿐, 정식으로 매파가 오간 것도 아니니까. 나중에 네가 옥란이 하고 한 번 만나서 네 취향이 아니라고 넌지시 한마디 하면 자연스레 넘어갈 수 있는 문제지.

네 대답을 듣고 옥란이라는 아이가 충격을 받고 몸져눕더라도, 어쨌든 그건 결혼이라는 가문의 중대사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게 아니야. 문제는 종리세가나 무영문이 본가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되느냐 하는 것이야. 그리고 아울러서 며느릿감의 됨됨이도 중요한 것이고. 어제 무영문에서 매파(媒婆)를 보내왔다. 혼인할 생각이 있느냐고 말이다.”

자신이 직접 가서 거절의 의사를 밝혀야 한다니……. 서문길은 ‘솔직히 소저는 내 취향이 아니오’하는 말을 듣고는 까무러치는 여자를 상상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서문길이 물었다. 뭐 뒷수습이 어려울 때는 아버지라는 편리한 울타리가 있지 않던가?

“아버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슬쩍 문제를 떠넘기는 아들놈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면서 서문길제가 대답했다.

“네 어머니와도 상의를 해 봤고, 가신(家臣)들과도 상의를 해 봤다. 양쪽 모두 일장일단이 있다 보니 의견 통합이 잘 안 되더구나. 종리세가는 패도적인 도법을 자랑하는, 어떤 면에서는 본가와 비슷한 문파다. 문도 수가 6천에 이르는 명문이지. 본가와 힘을 합친다면 두려울 게 없을 정도의 힘을 갖추고 있다 이 말이야. 그리고 패도 종리영우는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기와 의형제를 맺은 관계가 아니더냐? 제갈세가까지 보탬이 된다면 그 힘은 대단한 거지.

그에 비해 무영문은 문도 수 4천 정도……. 옥화무제가 있지만 사실 무영문의 무공은 종리세가와 비교한다면 대단한 게 못 된다. 옥화무제라는 뛰어난 인물 덕분에 지금과 같은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이지. 하지만 무영문은 정보 단체인 만큼 양(陽)으로는 보탬이 안 되어도 음(陰)으로는 큰 힘이 되지. 그래서 여러 가지로 의견이 분분한 거야. 네 생각은 어떠냐? 네가 데리고 살 여자니까, 너의 의견도 조금은 들어 보려고 부른 것이다.”

부친의 황당한 질문에 서문길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으음, 파혼 선언을 하고 새로운 여자를 잡아 정략결혼을? 전에 만나 보니 매영인이란 소저도 그런대로 괜찮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 정략결혼이란 것이……. 거기다가 약속이 중요한 게 아니라니. 그리고 약속 파기를 나더러 그 무지막지한 패도 어르신한테 직접 가서 하라고? 으윽, 나를 죽이려고 들 텐데?’

성질나면 자신을 개 패듯 하는 아버지도 무서웠지만, 종리영우는 그보다 성질이 더 개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혹자는 그것을 ‘좀 급하기는 해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로운 성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정파의 거두(巨頭)에게 ‘개 같은 성격’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기에 빙 돌려서 하는 말일 뿐이었다.

서문길은 종리영우의 성격에 대해 미리 장인이 될 인물이라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상세히 알아본 후였기에, 아마도 자신이 파혼 선언을 하러 간다면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뼈마디 몇 개 부러지는 정도로는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정략결혼이란 것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종리영우의 개 같은 성격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이 합쳐져서 서문길이 선택할 길은 아마도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님께서는 예전부터 약속의 중요성을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전에 말로만 한 약속이라고 해서 하찮은 이유로 깰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옥란 소저가 신체나 정신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렇다면 너는 옥란에게 아무런 불만이 없다는 거냐?”

서문길은 잠시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답할 수밖에 없었다.

‘얘기가 왜 이렇게 돌아오는 거야?’

“그,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죠.”

“흐음, 그렇다면 조만간 날을 잡아 함께 종리세가를 방문하자꾸나. 옥란이를 한 번 보고 문제가 있다면 말하거라. 곧장 매영인으로 바꿔 줄 테니. 알겠느냐?”

“예.”

서문길의 대답은 좀 시큰둥했다. 오간 대화는 논리가 정연한 것 같았는데, 뭔가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만 가 보거라.”

“소자 물러가겠습니다.”

고집 센 아들이 나가자 서문길제는 밖에 대고 외쳤다.

“차를 가져오너라.”

“예.”

시비가 다소곳이 차를 놓고 나가자 서문길제는 찻잔을 들고 향을 음미하며 빙긋이 웃었다.

‘클클클, 이번에도 당했지. 옥란이 얘기를 꺼내면 자기 마음에 드는 상대와 결혼하겠다고 전처럼 길길이 뛸 것 같기에 매영인을 슬쩍 동원한 것뿐이다, 이 녀석아. 제 꾀에 제가 넘어갔지.’

“휴우, 하나뿐인 아들놈이 머리가 커가니까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지. 아들놈을 꼬신다고 별의별 잔머리를 다 굴려야 하다니……. 에구, 내 팔자야. 매질을 좀 약하게 해서 키워 그런가?”

이제서야 개 맞듯이 맞고 울부짖는 어린 아들이 안쓰러워 차마 몇 대를 더 때리지 못하고 멈췄던 것이 한스러워지는 서문길제였다.

원래 서문길제와 종리영우는 그렇게 절친한 사이는 아니다. 어릴 때부터 맺어진 서문길과 종리옥란의 혼약도 정략의 요소가 다분했다.

서문길제는 아들에게 오래전에 혼약을 한 참한 색싯감이 있으니 딴 데 한눈팔지 말라고 넌지시 말했고, 서문길은 그런 혼약은 지킬 필요 없다고 반박하면서 마음에 드는 색시감을 강호에 나가 직접 구하겠다고 대들었다. 그런 후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난 아버지에게 잡혀 다리몽둥이가 부러지기 전에 재빨리 도망, 아니 가출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서문길은 스물여섯이라는, 명문의 자제치고는 대단히 젊은 나이에 강호초출을 경험했던 것이다. 벅찬 상대와 싸워 간신히 이긴 후 정신 차리고 연공실로 다시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7룡의 서열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문길제는 종리옥란과의 혼약 문제에, 이번에 매파가 들어온 매영인을 끼워 넣은 것이다. 둘 다 정략결혼이지만 하나는 예전의 약속이요, 하나는 이번에 들어온 청혼이다. 이번에 들어온 게 좀 더 정략적인 냄새를 짙게 풍기니까, 말만 잘하면 새 것보다는 과거의 것을 택하게 되는 게 사람의 심리.

서문길제는 일부러 오랜 시간 뜸을 들여 아들의 심기를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교묘한 화술로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 운운하는 소리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저 약속 위반에 대한 도의적인 반발을 느끼도록 유도했다. 그리고는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만들었으니 서문길이 자신의 처지는 잊고 얼떨결에 종리옥란을 택한 것이다. 원래 그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는데…….

“실패입니다.”

총관의 말에 발속에 앉아 있는 여인은 몹시 황당한 느낌이 드는지 재차 질문을 해 왔다.

“무슨 말인가요? 중원 최고의 정보 집단과 혼약을 맺자는 제의를 양쪽에서 다 거절했다는 건가요?”

여인의 말에 총관은 머리를 조아렸다. 평상시에는 명철하며, 예의 바르고 수하를 생각해 주는 뛰어난 상관이었지만, 이성을 상실하면 매우 무서운 여자였기 때문에 그도 이번 보고를 올리기 전에 매우 많이 망설였었다. 하지만 이미 보고는 시작된 것이었기에 그는 상당히 조심조심 살얼음을 걷듯 말을 이어 갔다.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수라도제는 아들에게 이미 약혼자가 있다면서 정중히 거절하더군요. 그거야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래도 정략결혼이 싫다고 서문길이 뛰쳐나갔던 걸 생각하면 조금 의외의 결과라 할 수 있겠죠. 종리옥란과는 달리 아가씨께서는 4봉에 들어가는 최고의 신붓감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백씨세가에서 아가씨와 서로 만나기까지했구요.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혼인이란 것이 상대가 싫다는 걸 억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다면 묵향은?”

아직까지는 자신의 사랑하는 손녀가 차여 버렸다는 것에 대한 노기가 그렇게 심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그것도 다 아직 그녀에게 또 다른 패가 남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아, 예. 그…, 그쪽은 더 지독한 대접이었죠. 본인은 만날 수조차 없었고, 군사인 설무지라는 인물만 만났습니다. 청혼을 설무지가 정중히 거절하더군요. 지금은 혼사 따위를 논할 때가 아니라면서요.”

“흥! 만나 주지도 않았단 말이에요? 이런 못된 녀석! 아니지. 가만… 혹시, 그의 신변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닐까요?”

성질을 터뜨릴 뻔했던 그녀는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미치면서 일단 노기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이것은 총관에게 있어 매우 좋은 반응이었다. 그녀는 매우 호기심이 왕성했기에 뭔가 딴 흥밋거리를 제공하면 곧장 그쪽으로 정신이 팔리기 일쑤였다.

“아닐 겁니다. 전 중원에 퍼져 있던 마교의 분타들이 잠적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또 섬서분타에서 벌이던 위사 사업이나 표국, 전장, 기루 등에 파견 나간 고수들이 모두 섬서분타로 돌아갔다 합니다. 그걸 보면 지금 마교의 모든 전투 세력들이 두 곳으로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하나는 총단이고 또 하나는 섬서분타입니다. 조만간에 둘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승리하게 될까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전체적인 전력은 총단 쪽이 낫지만 섬서분타에는 묵향이 있습니다. 그 하나의 힘이 웬만한 문파 하나와 맞먹습니다. 그가 어느 정도 활약을 하느냐에 따라 승자가 결정되겠죠. 아마도 장인걸은 묵향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막는 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한 추론을 내릴 수는 없나요?”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의 정보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야 총단의 내분으로 정보를 약간 얻었지만, 마교는 예전부터 정보를 빼내기가 아주 힘들었던 곳이죠. 장인걸이 마교를 완벽하게 장악한 후에는 약간씩 흘러나오던 정보조차 완전히 막혔습니다. 섬서분타는 대대적으로 무사 모집을 하기에 꽤 기대를 했는데, 열 명이나 첩자를 넣었지만 모두 외곽에서 허드렛일이나 할 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낌새도 챌 수 없었습니다. 양쪽 다 첩보 활동을 하든 암살을 하든 최악의 조건이라 할 정도로 대비가 철저합니다.”

“섬서분타 내부의 규모는?”

“약 4천 명이 기거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천 명이라……. 그렇다면 식량 소모가 대단하겠군요. 그렇죠?”

“예, 엄청난 양의 식량이 반입되고 있습니다. 식량 반입에 투입되는 호위병들의 무공이 대단히 뛰어나기 때문에 그쪽에 수작을 부릴 수는 없을 겁니다. 그 외에 방대한 양의 병장기들도 매입하고 있죠. 중경이 가까우니 구입은 순조롭다고 수하들에게 보고받았습니다.”

“섬서분타의 자금 사정은?”

“보고를 종합해 봤을 때 그렇게 풍족한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교도들이 원래 가족들을 거느리고 높은 봉록을 받는 자들은 아니니 그걸로도 충분하겠죠. 총단도 마찬가집니다. 전면전을 벌이기에 앞서 분타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두 지하로 숨긴 걸 보면 둘 다 몇 년은 외부 지원 없이 싸울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옥화무제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총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방금 4천 명 규모의 시설이라고 했죠?”

“예.”

“숫자가 좀 안 맞는 것 같은데요?”

“예?”

“천랑대와 염왕대를 흡수했으니 약 3천 명.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흑풍단이 적게 잡아도 3천 명. 그렇다면 6천 명의 식솔이 되지 않나요?”

“흐음, 예, 그렇지요. 하지만 무인들은 잠자는 데 그렇게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잠자는 것 또한 수련의 연장으로 치니까 말입니다.”

“아닐 수도 있어요. 총관은 섬서분타 내부로 유입되는 식량, 건초(乾草), 의류, 병장기의 양을 좀 더 정확히 조사해 보세요. 특히 인원 파악에 도움이 되는 식량이나 그런 확실한 물품 말고, 의류라든지 신발 따위의 소모량에 중점을 맞춰요. 만약 그것이 위장이라면 그런 쪽이 의외로 허술할지도 모르니까요. 내 생각으로는 일부 세력이 섬서분타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그게 진짜 섬서분타의 주력일 수도 있고…….”

“알겠습니다.”

어쨌든 총관은 이로써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자신의 상관이 더 이상 자존심 상하게 하는 그 일에 대해 말할 의사는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관은 몰랐지만 그녀는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은 그 두 인물에 대해 이것으로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되게 만들든지 아니면 복수를 해야만 자신의 짓밟힌 자존심이 다시 풀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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