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찍하게 발이 쳐 있는 실내. 그 덕분에 발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발 뒤편에 어렴풋이 느껴지는 인기척을 향해 부복한 채 공손히 뭔가를 아뢰고 있는 사내. 발 속에 앉아 있는 사람의 반응은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뭐라고요?”
발 속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가면서, 짜증을 더해 가자 사내는 식은땀을 흘렸다. 발 뒤편의 여인은 매우 무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 그것이, 젊은 것들이 공명심(功名心)에 눈이 멀어 가지고는…….”
“아이고, 머리야…….”
발 뒤쪽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기척이 없더니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묵향이 그곳에 없는 것은 분명하겠죠?”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사내는 머리를 더욱 조아리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옛! 지금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대략 세 군데 정도로 압축됩니다. 그에게 연락을 보낼까요?”
“아니, 연락을 보낼 필요는 없어요. 묵향이 섬서분타에 없다는 것이 그나마 그 녀석들에게 다행스런 일이군요.”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건지 하명해 주십시오.”
“지금 본문에 여력(餘力)이 좀 있나요?”
“에…, 그러니까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3할은 지금 군부의 동향을 감시하는 중이고 1할은 묵향을, 1할은 장인걸, 3할은 혈교, 남은 1할이 무림의 대략적인 정보를 모으고 있죠. 그 덕분에 이번 일을 알아내는 게 늦었습니다.”
“여력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그냥 되는 대로 놔두세요. 그런 꼬맹이들 몇 죽는다고 해서 본문에 영향이 미치는 것은 없으니까 말이죠. 장인걸이 하는 짓에 장단을 맞춰서 무림맹을 자극하고 서문세가의 세력을 소모시킬 생각이었는데…….
멍청한 놈들! 마교가 요즘 원체 조용하다 보니 실력도 없는 것들까지 마교를 우습게 보는 게 문제예요. 수라도제와 합류해야 할 놈들이, 그의 의견은 들어 보지도 않고 앞서 가서는 섬서분타를 공격하려고 하다니……. 그런 놈들은 죽어도 싸요! 그건 그렇고 수라도제는?”
“예, 수라도제는 서문세가의 정예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무림맹 및 9파1방, 그리고 나머지 4대세가에서 파견한 주력 3천과 합류하여 비밀리에 이동 중입니다. 물론 수라도제가 이번 정사대전(正邪大戰)에서 대승을 거두기를 무림맹은 원하지 않지요. 그 때문에 뛰어난 고수들의 수는 많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수라도제는 젊은 것들을 기다리다가 그들이 앞서 갔다는 것을 눈치 채고 뒤늦게 이동을 시작했기에, 섬서분타에는 15일쯤 후에 도착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15일 후라……. 그때가 기대되는군요. 묵향이 과연 어떤 식으로 대처할지 말이에요. 참! 요즘 혈교의 동태는 어떤가요?”
“무림맹에서는 초기에 파견한 2천여 명의 정예 무사 외에도 3천여 명을 추가로 파견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지휘자는 공동파의 장문인 옥진호지요. 옥진호는 이번 혈교와의 전투를 무림맹주에 즉위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는 모양입니다. 그 때문에 각 문파에서 뛰어난 고수들을 지원받아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있는 것이죠. 벌써 3백이 넘는 강시를 없애 버렸고, 6백여 명의 혈교도들을 주살(誅殺)했다고 합니다.”
총관은 이 보고를 듣고 상관이 혹시나 짜증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안에서 들려온 반응은 정반대였다.
“호오, 그 녀석도 꽤 의욕적으로 덤비기 시작했군요. 그런 식으로 좀 더 공을 쌓는다면, 맹주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죠, 호호호.”
발 뒤편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사내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반박했다.
“그렇게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분명 섬서분타는 젊은 것들이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곳은 정보에 의하면 주력이 빠져 나간 빛 좋은 개살구고, 그 덕분에 수라도제는 정사대전의 초반을 압승으로 장식하며 명성을 높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옥진호 또한 지금 상태로 나간다면 차곡차곡 공을 쌓게 되겠죠. 어느 쪽도 문주님께는 불리한 전개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섬서분타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에요. 총관이 생각하듯 그렇게 마교라는 단체는 물컹하지 않아요. 그건 그렇고 다음 수(手)는 어떤 게 좋을까? 호호호.”
“어떻게 하시겠어요?”
음희 설약벽(薛若碧)의 물음에도 상대는 곧장 대답을 하지 않고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음희는 상대가 입을 열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지옥혈귀!
이 무서운 명호의 주인공은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마교의 검도고수(劍道高手) 천진악(天進惡)이었다. 천진악은 오랜 옛날부터 그녀의 상관이었고, 지금도 그러했기에 그녀는 끈기 있게 그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이다.
1각(15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냉막해 보이는 그의 입술을 뚫고 얕은 한숨과 함께 억양이 없는 무뚝뚝한 말이 흘러나왔다.
“매복 기습을 하기로 하지. 지금 분타에 있는 정예는 처음부터 주둔하던 염왕대 1개 대(隊)와 우리가 데려온 2개 대뿐이다. 그 인원으로 방어만 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야.”
“소녀가 이끌까요?”
음희의 제안에 천진악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본좌가 하기로 하지. 그대는 상황을 잘 살피고 있다가 안에서 치고 나오도록!”
지옥혈귀 천진악과 음희 설약벽은 과거 마교가 분열되기 전에도 정파문도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실력 있는 고수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뛰어난 고수고 또 그들에게 3백 명의 염왕대가 있다고 하지만, 수라도제가 거느린 6천에 달하는 적을 지금의 인원으로 완전히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이 염왕대 2개 대와 함께 파견되어 온 것은 섬서분타가 무너지는 시간을 좀 더 늦추기 위함이었지 적의 섬멸은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고 있었다.
“자네는 여기에서 음희를 돕도록!”
천진악의 지시를 받은 제13대주 곽철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옛!”
염왕대 제13대주 곽철은 제5대주 염상(炎翔)과 제9대주 왕정(王靜)을 이끌고 나가는 천진악의 믿음직스러운 등판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곽철은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지휘하던 섬서분타를 향해 6천의 적이 이동 중이라는 사실 때문에 심한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는 우두머리가 아니었다. 자신과 동급의 인물 둘과 상관 둘이 한 시진 전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사대전(正邪大戰)
정사대전의 서막은 정파의 선발대 2천이 섬서분타를 기습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기습이 아니었다. 상대방은 그들이 올 걸 알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진하랏!”
군데군데 찢어진 청의를 입은 젊은이가 검을 휘두르며 수하들을 독려했지만, 그에 응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매우 교묘하게 위치를 선정하여 어떤 곳에서 적이 침입해 오더라도 화살이나 연노(連弩)를 발사할 수 있게 구축된 보루들 때문이었다.
연노에 장착되는 화살은 길이가 짧고 가늘기 때문에 강노(强弩)처럼 사정거리가 길지도, 또 파괴력이 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수의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 탓에 침입자들은 거의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로 화살 세례를 받고 있었다.
폭포처럼 퍼부어 대는 화살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기습 전에 수집한 정보로 모두 널찍한 나무 방패를 하나씩 구해 둔 덕분이었다.
무림인들은 원래 이렇게 커다란 방패를 가지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간밤에 각자 나무를 잘라 서둘러 만든 것이 이렇듯 도움이 되고 있었다.
급조(急造)한 방패라서 방어력은 현저히 떨어졌지만,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그들에게는 그 정도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각자가 들고 있는 방패에는 적게는 한두 개, 많게는 수십 개씩의 화살이 박혀 고슴도치와 같은 형상이었다.
청의를 입은 젊은이 장 소협의 독려에 힘입어 수하들은 수십 개의 화살이 박힌 방패를 의지하여 천천히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 소협이 거느린 선발대를 뒤따라 각각의 젊은이들이 거느리는 무사들이 속속 진격했다.
“적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 모두 힘을 내라! 이보게 육 소협! 자네는 오른편 보루를! 그리고 이 소저는 왼편 보루를 맡아 주시오. 자, 돌격하라!”
공격자들은 각 문파의 젊은 기재들인 만큼 그 왕성한 혈기로 밀어 붙이며 전투를 점차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쏟아지는 화살 덕분에 뛰어난 고수가 아닌 자들은 운신하기도 힘이 들었지만 그들은 지속적으로 적을 압박해 들어갔다.
공격자들은 각 보루에서 엄청난 화살비가 쏟아지는 것에 대해 오히려 마음을 놓고 있었다. 마교란 원래가 힘을 숭상하는 단순 무식한 단체였다. 교묘한 진세나 모략을 잘 모르는 단체. 그렇기에 그들에게 강력한 힘을 지닌 세력이 있다면 초반부터 그들을 투입해 왔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으로써 쓸데없는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고, 또 적에게는 더 큰 피해를 입히려고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격이 시작되고 나서 거의 2각이 지나도록 상대는 각각의 보루를 중심으로 완강한 저항을 하고 있을 뿐, 강력한 고수들을 투입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서서히 밀어 붙이던 공격자들은 이제는 아예 총력을 기울여 돌진해 들어갔다. 백도의 젊은이들이 맹렬히 공격해 들어가자 각 보루의 두터운 문짝이 파괴되고 곳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처럼 쏟아지던 화살의 양은 점차 줄어들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