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렇게 변색되어 가는 덩굴의 잎사귀들을 바라보며 매영인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뛰어난 무공, 무영문의 금지옥엽이라는 튼튼한 배경, 무공으로 다져진 날씬한 몸매, 그리고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아름다운 얼굴.
모든 무공을 익히는 소녀들의 목표이자, 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인 4봉에 들어 있는 그녀가 한숨을 내쉴 이유는 하나도 없을 듯이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휴우우.”
그녀의 방은 마화의 지시로 시녀들이 정성을 쏟아 단장을 했기에 꽤나 예쁘게 꾸며지기는 했지만, 조금도 그녀의 마음을 달래 줄 수 없었다. 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이 벌써 보름이 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높은 무공을 익혀 심신이 튼튼하지 못했다면, 또 악양소소와 마화라는 대화 상대가 없었다면 벌써 미쳐 버렸을 정도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왜 그렇게 한숨을 쉬니?”
“요즘 들어서 뭔가 더 이상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뭐가?”
“갑자기 방에 가둬 두고, 또 하녀가 음식을 가져오거나 어쩌다가 한 번씩 마화 언니가 들어올 때 힐끗 보면 문 앞에서 무사들이 감시하고 있고……. 이 모든 게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잖아요. 혹시 무슨 큰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저들을 보세요.”
매영인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여러 명의 무사들을 가리켰다.
“예전에는 경비를 서는 무사들이 도저히 경비 무사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뭔가 모를 숨 막히는 기운을 강렬하게 뿜어 댔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들은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저는 그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요.”
“괜찮아, 괜찮아. 다 좋아질 거야.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자, 응?”
소소가 매영인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동시에 그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험상궂은 마인이 서 있었다. 마인이라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방금 전 경비 무사에 빗대어 표현했던 엄청난 마기를 뿜는 고수였기 때문이다.
악양소소는 상대의 그 막강한 마기에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끼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간신히 그녀가 냉정을 유지하며,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상대의 태도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고갯짓을 했다.
“따라와라.”
상대의 으스스한 등판을 보며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 그들은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이제 드디어 처형되는 것은 아닐까? 아닐 거야. 그럴 거라면 무기를 그냥 휴대하게 놔뒀으려고. 아니면 마화 언니가 불러서? 아니지, 그 언니라면 자신이 찾아오지 저런 무례한 인물을 보내지는 않았을 테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들은 어느새 널찍한 방에 도착했다. 그 방에는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매서운 눈초리의 사내가 커다란 탁자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거기에 앉아라.”
사내의 말에는 상상하기 힘든 위압감이 있었다. 그들은 감히 찍소리도 못하고 의자에 앉았다. 숨 막힐 듯한 괴이한 기운. 자신들을 안내했던 인물도 엄청난 마기를 뿜었지만 저 인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너희들의 이름이 매영인과 악양소소가 맞나?”
조용히 앉아 있던 사내가 갑자기 입을 열었기에 잔뜩 긴장한 매영인은 하마터면 검을 뽑으며 일어설 뻔했다. 하지만 그녀보다는 그래도 연륜과 침착성이 앞서는 소소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나직하게 답했다.
“예.”
“흠…….”
사내는 흡사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그들을 잠시 노려봤다. 사내의 눈이 훑고 지나가자 그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너무 마른 것 같은데? 원래 이런 거야, 아니면 밥을 제대로 안 준 거야?”
“원래 날씬한 거예요.”
자신의 몸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자 매영인이 발끈해서 답했다. 그녀의 자부심 섞인 분노가 공포심을 눌러 버렸던 것이다. 그녀의 당돌한 태도에 사내는 역시나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녀를 잠시 쏘아보더니 이죽거렸다.
“그래? 그런대로 물품의 상태는 괜찮은 것 같군. 왕각(王珏)!”
“옛! 대주(隊主).”
뒤에서 답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비로소 밥을 안 준 게 아니냐는 질문의 대상이 자신들이 아니라 뒤에 서 있는 왕각이란 인물이었음을 알았다.
“확실하게 돌려주고, 인수증(引受證)을 받아오도록!”
‘인수증? 웬 인수증?’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사이도 없이 그녀들은 왕각이란 사내에게 이끌려 마차에 올라탔고, 목적지가 어딘지 묻지도 못한 채 10일간이나 끌려 다녀야만 했다. 정춘각(晸瑃閣)이라는 주루에 닿았을 때 왕각은 매영인과 악양소소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옥화무제가 들어왔다. 매영인은 할머니를 보고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
“오냐, 오냐. 고생이 심했지?”
매영인의 언니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옥화무제는 매영인을 부드럽게 안으며 토닥거렸다. 이때 왕각이 품속에서 종이쪽지를 꺼내며 조손 상봉의 분위기를 망쳐 버렸다.
“상봉의 기쁨은 나중으로 미루시고, 여기 서명부터 해 주시죠.”
왕각의 손에는 「매영인 및 악양소소를 무사히 돌려받았음을 증명합니다」하는 글자가 또렷하게 쓰인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손녀를 품에서 떼어 놓고는 종잇조각을 받아 들며 이죽거렸다.
“자네, 일 처리를 아주 철저하게 하는군.”
“감사합니다.”
하지만 왕각의 얼굴은 전혀 감사를 느끼는 표정이 아니었다.
“자네 직책이 뭔가?”
“그건 밝히기 곤란합니다. 이해해 주시기를.”
자신이 염왕대의 제12대 소속 무사라고 말한다면, 영리한 옥화무제는 그 한마디에서 염왕대의 위치를 파악해 낼 수도 있었다. 또 잘하면 현 마교의 상황까지도 눈치 챌 가능성이 있었기에 왕각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대답을 거절했다. 하지만 옥화무제는 왕각이 그런 식으로 거절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서명한 종이를 건네주었다.
“여기 있네. 손녀를 무사히 넘겨줘서 고맙다고 교주에게 전하게나.”
교주라는 말에 왕각의 눈썹이 꿈틀했다. 총단에서 매우 조용히 일어났고, 또 수습된 일을 벌써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과연 중원 무림 최고의 정보 조직 무영문의 수뇌답다고 그는 내심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교주님께서 만나 뵙기를 청한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좋아. 한 달 후, 그곳에서.”
왕각은 ‘그곳’이 어디를 뜻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자신은 다만 그렇게 전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교주가 알아서 할 것이다.
“안녕히 가십시오.”
정중히 포권하는 왕각의 몸가짐에는 정과 마를 떠나서 위대한 무인에 대한 경외심이 내포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