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930)

가는 것과 오는 것

묵향의 세력 재편성은 놀랍도록 빨랐다. 물론 그 모든 게 설무지가 해치운 것이었지만 말이다. 뇌옥에 갇혀 있던 많은 고수들이 묵향이 교주가 되면서 복권되었다. 그들은 장인걸이 어떻게 해서든 회유하려고 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들이었기에 그들의 합류는 묵향으로서는 뜻하지 않았던 횡재였다.

묵향은 9대 장로에 천도왕 여지고, 수라혈신 북궁뇌, 인도 동방뇌무, 천리독행 철영, 고루혈마 옥관패, 염왕적자 한중평, 삼면인마 소무면, 지옥혈귀 천진악, 무영신마 장영길을 각각 임명했다. 그리고 5대 무력 세력을 통솔하는 막중한 자리인 내총관에는 동방뇌무를, 그리고 외부 분타를 통솔하는 외총관에는 소무면을 임명했다.

이렇게 하여 교내의 모든 크고 작은 일은 군사 설무지에 의해 입안(立案)되었고, 수석장로 여지고를 통해 실행되었다. 여지고는 총단의 일은 내총관 동방뇌무를, 외부의 일은 외총관 소무면을 통해 지시했다.

내총관은 5대 무력 세력을 통솔할 수 있는 지위였고, 외총관은 모든 분타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들의 직속에는 그 어떤 무력 세력도 없었기에 실세라고는 보기 힘든 위치였다. 묵향은 무공은 뛰어나지만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아직 확인되지 않은 그들을 한직으로 돌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 거사를 행했던 사혈천신 호계악, 천리독행, 고루혈마, 염왕적자, 지옥혈귀에게는 각기 독립적인 세력을 주어 그들에 대한 자신의 깊은 신뢰감을 표시했다.

차석장로였던 사혈천신 호계악은 호법원의 수장인 대호법으로 임명하고, 초진걸과 여문기를 붙여 절정고수 2백여 명을 통솔하게 했다.

천리독행에게는 고르고 고른 2백 명의 고수를 주어 새롭게 혈랑대(血狼隊)를 만든 후 그 대주에 임명했다. 혈랑대는 장인걸이 가진 유일한 무력 단체인 천마혈검대를 대적할 수 있을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루혈마 옥관패는 수라마참대를, 염왕적자 한중평에게는 천랑대를, 섬서분타 대전(大戰)에서 큰 공을 세운 천진악에게는 염왕대를, 그리고 뛰어난 지략으로 묵향을 상당히 애 먹였던 무영신마 장영길에게는 그 지휘력을 높이 사서 자성만마대를 맡겼다.

그리고 특이할 만한 사실은 장로원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단체의 수장인 관지와 홍진에게도 장로원에 출석하여 발언할 수 있는 발언권을 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말은 아홉 명의 장로지만, 실질적으로는 열한 명의 장로 체계가 성립되게 된 것이다.

설무지는 전체적인 세력을 재편성하면서 내적인 단결에도 힘을 쏟았지만, 사실상 마교라는 단체가 원래 강자지존의 법칙이 확실하게 통하는 곳이었기에 그의 노력은 별 필요 없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모두 묵향을 존경하며 확실하게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묵향은 교주가 된 후 원칙적으로 교주가 지니고 있던 막대한 권한의 상당 부분을 수하들에게 이양해 버렸다. 그 덕분에 교주의 명령을 중계하는 역할이었던 내총관의 권력은 많이 축소되었고, 대신 장로원의 힘이 급속히 부상했다. 마교는 원칙적으로 아홉 명의 장로를 거느렸고, 그들은 대부분 독립적인 세력을 거느렸다. 그렇기에 마교의 장로가 되려면 교주의 신임이 두터워야 했다.

묵향은 일부러 장로원의 권한을 크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해 놓으면 자신이 없어도 아홉 명의 장로가 모여 설무지나 내총관, 외총관의 견제를 받으며 마교를 이끌어 가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그런 식으로 잘 돌아가기만 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충분한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렇듯 나 몰라라 하는 묵향에게 원망 어린 시선을 보내며 설무지가 천마신교의 세력 재편에 정신없을 때, 묵향은 홀로 조용히 총타를 떠났다. 무영문의 문주 옥화무제와 약속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묵향에게 상당히 좋은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홀가분하게 총타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부러 호위 따위도 거느리지 않았다. 호위란 것은 자신과 같은 상상을 초월한 고수에게 있어서 불필요한 것이었다.

천천히 말을 몰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묵향은, 말안장에 검과 천으로 둘둘 말아 놓은 막대기 같은 것을 꽂아 놓았지만 평범한 체형 덕에 영락없이 할 짓 없는 서생처럼 보였다. 마화가 억지로 입혀 놓은 밝은 빛깔의 청의가 그의 섬세한 하얀 피부와 굵직한 선을 지닌 얼굴에 잘 어울렸다.

말안장에 매달아 뒀던 술병을 풀어 입을 축이던 묵향은 약간은 쓸쓸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술병을 안장에 달아 준 인물도 마화였고, 그 안에 독한 천일취를 넣어 놓은 장본인도 마화였다. 불현듯 그녀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묵향은 곧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잔소리가 너무 심해.”

“어서 옵쇼!”

점소이가 반갑게 맞이했지만 묵향은 일언반구도 없이 점소이를 밀치고는 아름다운 소녀가 앉아 있는 탁자에 주저앉았다. 순간 옆 탁자에 앉아 있던 사내들의 손이 검을 움켜쥐고 싶어 움찔거렸지만, 곧 청의를 입은 사내가 자신들의 문주가 기다리던 손님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모르는 척 딴전을 피웠다.

“오랜만이군요.”

“…….”

“우선은 교주가 되신 것을 축하드려요. 그런데 만나자고 한 용건은 뭐죠?”

옥화무제는 짐짓 흥미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도대체가 이 단순한 인물이, 너무나 단순하고 무식하게 생각하는 바람에 오히려 파악이 불가능한 사내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묵향은 대답은 하지 않고 품속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어 재빠른 동작으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챠릉!

순간적으로 옆 탁자에 앉아 있던 네 사내들의 검이 반쯤 뽑혔다가, 묵향의 손에 쥐어져 있는 물건이 무기류가 아닌 것을 알고는 황급히 다시 들어갔다. 원래가 이런 무인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은 의식적으로 천천히 이루어진다. 언제, 어느 순간에 서로 암습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건 뭔가요?”

“여태껏 본좌에게 협조해 준 데 대해 자그마한 성의를 보이는 것이지. 그야말로 작은 성의니까 너무 적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받아.”

옥화무제가 그의 손에서 받아 쥔 종이는 전표(錢票), 그것도 상당히 신용도가 높은 대륙전장(大陸錢場)에서 발행한 무려 금화 5백 냥짜리 전표였다.

금화와 은화의 비율은 20대 1이니 이것은 은화 1만 냥이었고, 일가족의 1년 생활비가 은화 다섯 냥 정도라면 2천 가구의 1년 생활비였다. 이때는 일가족이 보통 아홉 명 정도의 대가족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무려 1만 8천 명의 1년 생활비였다. 물론 풍족하게 쓸 수는 없이 그저 대충 먹고 입는 데 들어가는 돈이었지만 말이다.

“자그마한 성의는 아닌 것 같은데요? 하지만 마교의 교주라면 좀 더 근사한 것을 준비했으리라 기대했는데…….”

그녀가 과장되게 아쉬운 표정을 짓자, 묵향은 씁쓸히 웃더니 딱딱하게 말했다.

“과욕은 화(禍)를 부르지.”

“나중에 재앙을 받더라도 욕심은 내 보고 싶은데요?”

옥화무제는 일부러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도대체가 140여 세에 이른 할머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자태였다.

“후회하지 않을까?”

“절대로 후회는 하지 않아요.”

“좋아. 말안장에 매여 있으니까 가져가라구. 딴 건 건드리지 말고 말이야.”

“본녀는 도둑질을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주니까 받는 거지요.”

“좋을 대로. 그건 그렇고 장인걸은 어디에 있지?”

묵향의 질문에 옥화무제는 일부러 방글방글 웃으며 시선을 돌려 창밖의 화산을 바라보며 딴전을 피웠다.

“본좌의 힘으로 찾으라는 건가?”

“영인이의 청혼을 거절한 이유는 정보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요?”

“할 말 없게 만드는군. 그럼 다음에 보자구.”

묵향이 일어서자 옥화무제도 따라 일어서며 그의 뒤를 쫓았다.

“왜 쫓아오는 거지? 더 이상 볼일은 없을 텐데?”

옥화무제는 생글거리며 답했다.

“선물을 받지 못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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